요 20:19–31 두려움 속의 평강, 의심 속의 믿음
부활하신 날 저녁, 드디어 예수님은 두려움 때문에 숨어 있던 핵심 제자들(열두 제자)에게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부활하신 사실을 믿게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소망을 준 사건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성령 수여와 함께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신다. 부활 신앙이 선교 신앙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나중에 합류한 도마는 직접 상처를 만져 보지 않고서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여드레가 지나 제자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신다. 그제야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이 신앙과 사명을 공유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제자들의 증언을 신뢰하고,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의 초점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데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열 제자 그리고 도마가 차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제자가 누구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 목적과 증언의 대상도 예수님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는 일로 보냄을 받는다.
1.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마리아가 깊은 슬픔을 단숨에 걷어 낸 부활의 기쁨을 전했음에도, 믿음 없는 제자들의 모습이 소개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스스로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예수를 죽인 종교 지도자들은 추종자들까지 색출하려 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의 인사를 건네신다(요 20:19, 21).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선물이다(요 14:27; 16:33).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기고 주신 선물이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화의 선물을 예수님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마리아가 전해 준 부활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부활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했다(요 20:20). 이러한 기쁨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언하신 대로(요 16:22) 성취된 것이다.
요한복음은 반복해서 구약의 성취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요 18:8; 10:28 참조).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의 권위와 연결시킨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신다(요 20:21).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파송받으셨듯(요 10:36), 제자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 파송된다(요 17:18 참조). 이러한 유비는 제자들의 세상에서의 선교 활동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원동력이었다(요 4:34).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오셨다. 이를 위해 진리를 드러내셨고(요 18:37),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요 1:29; 막 10:45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요 17:4). 이제 예수님은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시며 세상에 파송하신 것이다.
세상에 파송된 예수님 제자들의 주요 사역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요 20:23). 이 죄 용서 사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죄 용서와 관계된 교회의 모든 사역을 포괄한다고 보면 되겠다. 즉, 죄 용서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진리를 증언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죄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끊임없이 성장하여 날마다 죄를 멀리하며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2. 도마 이야기 (요 20:24–29)
도마의 헬라식 이름은 ‘디두모’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인데,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 있다.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요 20:24).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요 20:25).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도마는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아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말한다.
이런 도마의 강한 불신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는 이해되지만, 다른 제자들의 증언에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도마는 나사로의 부활 현장에도 있었다(요 11:16). 그리고 예수님의 고별 설교 현장에도 있었다(요 14:5). 이런 그의 모습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와 비교된다. 그 제자는 빈 무덤에서 비록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보지 못했지만, 부활을 믿었다(요 20:8).
한편 이런 도마의 불신은 당시 요한복음의 수신자들의 상황과 흡사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만 있을 따름이다. 그 회중 중에, 혹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 중에 도마와 같은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따라서 도마 이야기는 요한복음 수신자들에게 아주 적절한 교훈이 될 수 있었다.
요 20:26–29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도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드레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다(요 20:26). 1세기 당시에는 당일부터 날짜를 세었기 때문에 여드레 후는 일주일 후를 의미한다. 이는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주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것을 강조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주의 날(주일)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요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계 1:10). 개역개정은 “문들이 닫혔는데”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을 직역하면 “문들이 잠겨 있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묶여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평강”을 선포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자신의 손을 보이시며, 몸을 만져 보라고 하신다(요 20:27). 이 부분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만난다. 요 20:25에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불신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마의 불신을 다 아시고 말씀을 건네신 것이다.
또한 도마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여 주신다. 친절하게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을 본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요 20:28). 이러한 도마의 고백은 두 가지를 함의한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마침내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 것이다. 자신의 의문을 알고 계시며 부활하신 몸을 직접 보여 주시는 예수님께 도마는 “주님”과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요 20:28).
둘째, 예수님의 왕적 신분을 드러낸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1세기 말 도미티안 황제는 제국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우리의 주(主)와 신(神)”(dominus et deus noster)으로 부르도록 했다. 도마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로마 황제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라고 하신다(요 20:29). 즉,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복되다는 말이다. “복되다(마카리오스)”는 요한복음에 두 번 등장한다. 세족식 후 겸손한 섬김을 강조하시면서 이를 행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고(요 13:17),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증언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본 단락은 도마의 불신의 모습과 예수님의 긍정적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먼저 도마의 영적인 무지와 예수님의 전지하신 모습이 비교된다. 예수님은 도마가 의심을 고백하는 순간에 함께 계시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아시고 도마에게 다가오셨다(요 20:27). 그리고 도마의 믿지 않는 완고한 모습과 예수님의 자상함이 대조된다. 보고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 주셨다. 그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만질 기회를 주셨다. 이는 그에게 믿음의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믿는 도마의 모습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된다. 도마는 마침내 믿었지만, 예수님은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도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신다. 보고 믿은 도마도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보고만 믿는다면 영생(구원)을 얻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제시하시면서 영생을 얻는 사람들의 지평을 넓히신다. 믿음과 영생의 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복되다고 하신다.
3.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요 20:30–31)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정확하게 밝히는 대목이다.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표적을 기록한 책이다(요 20:30). 다만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 기록 목적에 맞게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기독론적 목적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독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둘째, 구원론적 목적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믿게 하려 함이요”로 번역된 문장은 헬라어 구문상 두 가지 의미를 취할 수 있는데, 가정법 과거형으로 해석하면 “단회적인 믿음”으로 회심의 믿음을 갖게 하는 목적이 있음을 의미하고, 가정법 현재형은 “지속적 믿음”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믿음을 지키게 하는 데 기록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요한은 기본적으로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비롯하여, 신자들을 위해 1차적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속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책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요한복음은 그것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기록되었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회심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믿음이 굳건한 자에게는 지속적으로 굳건하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런 면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불문하고,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울고 있었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한 제자들도 유대인들이 여전히 두려워 문을 잠근 채 지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심으로 기쁨과 평강을 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교리적으로만 믿을 뿐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거나, 과거의 일로 여겨 현재적 의미를 모른다면,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상 앞에서 눈물과 두려움으로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믿음 때문에 나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음에도 문을 잠근 채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안”의 인사를 건네신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부활의 평안이었다. 부활만이 참된 평안을 준다. 부활이 확인되자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한다. 참 평화의 시작은 부활이 분명하다. 부활이 새 창조의 첫날을 열었기에, 부활로 인해 하나님 없는 인류의 사망과 두려움이 빛과 생명이 가득한 샬롬으로 변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을 붙들거나 선포해 주신 평강 안에 머물기보다는 부활의 역사성과 의미를 증언하도록 보내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성취하셨듯, 이제 제자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세상에 보내 생명의 나라의 소식과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이미 주신 승리와 안식과 샬롬을 누리고 전하고 입증하며 사는 축복을 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부활을 전하라고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셨다. 나는 이 부활을 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첫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예수께서(창 2:7; 요 1:1–3), 이제 “성령”을 불어넣어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다(롬 8:11; 고전 15:45). 첫 창조된 아담에게 만물을 생육하고 다스릴 왕적 대리인의 사명을 주셨다면(창 1:27–28), 이제 새 창조된 제자들에게도 이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위로부터 난) 백성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성령과 예수님의 말씀과 성도들의 부활의 삶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태어날 수 없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말도 들었을 텐데도(요 20:20),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동료들의 풍성한 간증도, 성경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약속도, 눈앞에서 벌어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일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다. 도마는 한동안 동료들과 함께하지 않을 만큼 낙심하고 두려워했지만, 동료들에게 다시 찾아갈 만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도마처럼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확신하고 있던 것이 어긋나는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예수님은 일주일 만에 잠긴 문을 통과하여 제자들에게 찾아와 또다시 평강을 빌어 주신다. 특별히 도마에게 찾아가 그의 바람대로 못 자국 난 손을 보고, 창에 뚫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도록 허락하신다. 의심을 책망하시기보다 믿음을 촉구하신다. 부활의 주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의 곁에 늘 계셨다. 도마의 불신을 알고 계셨다. 동시에 도마의 고민하는 마음도 알고 계셨다. 그의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을 품어 주신다. 그래서 도마의 형편과 수준을 따라 찾아와 일깨워 주신 것이다.
-냉소적인 의심은 완고함을 낳는다. 하지만 믿음을 위한 의심은 참다운 이해와 더 깊고 오묘한 믿음으로 가는 디딤돌이다. 꼭 필요한 조건이지 않을까? 포기하지 말고, 아는 척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서야 하리라.
-놀랍게도 의심하던 도마의 입술을 통해 처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고백되었다.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은 하나님이신(요 1: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과 표적과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사신 후, 드디어 자기 백성에게서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 놀라운 고백을 들으시고도 칭찬보다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고 가벼운 질책을 하신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도 말씀은 들었지만 예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분의 말씀과 표적을 기록으로 남겨서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영생을 얻는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으나 여전히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참 평강을 축복하시는 예수님, 의심하는 도마의 마음을 헤아리셔서 그의 충격과 혼란, 고통을 더 보듬으셔서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도 함께하신다.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세상이 주는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누리겠습니다.
*주님, 의심하는 도마에게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심을 보며, 의심을 부정하기보다 정직하게 주님 앞에 내려놓고 참 믿음을 소망하는 겸손함으로 살아 내겠습니다. 은혜와 힘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