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갈릴리 바닷가에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 [요 21:1-14]
 – 2026년 04월 07일
– 2026년 04월 07일 –
요 21:1-14 갈릴리 바닷가에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나타내신다. 부활 신앙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계심으로써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있다. 비록 제자들이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써 보고 알게 되었다.
 
 
 
1. 예수님 없는 제자들의 곤란한 상황(1~3절)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와도 같다.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성령을 주심,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21장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영광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있은 후의 일이다. 공간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디베랴 호수로 장소가 바뀐다(1절).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이다. 앞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지금 디베랴 호수에 있다. 다른 복음서를 통해 그 이유를 유추하면,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명령 때문이었다(마 26:32; 28:7; 막 14:28; 16:7).
 
본문에는 일곱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2절). 앞부분에 등장하는 세 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분명하게 이름이 나온다. 이들은 요한복음에서 각각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들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누구보다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직접 목격하였다(20:1~10).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다(20:19~23).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여, 직접 예수님의 몸을 만져 본 제자다(20:24~29).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한 인물이다(1:45~49).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한 베드로가 갑자기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다(3절). 그들의 시도는 헛수고였다. 밤새 그물질을 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이러한 헛수고는 누가복음 5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눅 5:1~11). 그때도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눅 5:3).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따르기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이 부활하신 후에 또 일어난 것이다. 오랜만에 나선 고기잡이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난 허무한 아침을 맞은 것이다.
 
 
 
2.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심(4~8절)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4절). 1절과 14절에 “나타나다”라는 말이 실제 일어났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 후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둠 가운데(밤새) 고생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5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절)”고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고,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당시 그분이 예수님인 줄 몰랐다. 그러나 엄청난 결과를 얻고 나서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다시 얻는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15:5).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했을 때 풍성한 결과를 얻는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풍성한 포도주를 경험했다(2:1~12).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을 믿고 돌아갔을 때, 왕의 신하는 아들이 고침 받는 기적을 경험했다(4:46~54).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고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68)?”
 
 
 
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심(9~14절)
밤새 고기 잡느라 수고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고기와 빵을 준비하시며,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신다. ‘숯불(안뜰라키아, 9절)’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두 번 등장한다. 이 구절 외에 다른 용례는 앞서 대제사장의 집 앞에서 베드로가 쬐던 ‘숯불’이다(18:18). 배신의 장소가 연상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배신도 감싸 안으시면서 베드로에게 음식을 공급하신다. 요한의 의도된 기록이다. 숯불 앞에서 부인했던 베드로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회복해 주시려는 주님의 의도와 배려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명하신다. 예수님의 말에 베드로가 신속하게 반응한다. 즉시 배로 뛰어 올라가서 걸쳐진 그물을 끌고 육지로 나온다. 이 장면 또한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 막 1:17; 눅 5:10)”를 연상하게 되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혼을 다 아버지께 인도하신 것처럼, 아들이 주실 영혼을 베드로 역시 사랑의 그물로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다(6:39; 10:28; 12:32; 18:9).
 
또한 요한복음 전체에서 ‘물고기’와 ‘떡’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는 곳은 본문과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6장이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신 자상하신,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이 예표하는 그분의 살과 피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본문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암시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잘 차려진 밥상을 뛰어넘어, 자신의 살과 피를 바쳐서까지 제자들에게 영생을 주기 원하신다. 예수님이 준비해 주신 음식은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요한은 11절에서 잡은 물고기 수가 153마리라고 끝까지 정확히 기록한다. 이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본문은 그 숫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면 무방하다. 본문은 제자들이 꾸며 낸 허구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또한 향후 제자들이 온전한(찢어지지 않은 그물) 상태로 감당하게 될 선교적 사명과 분명 관련이 있어 보인다. 결국 ‘153’이라는 특별한 숫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친히 발을 씻겨 주셨던 주님이 이제는 조반을 차려 주신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나타나다(파네로오)”라는 동사를 통해 인클루지오 구조로 마무리한다. 이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14절에서는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세 번째’라 분명히 밝힌다. 다시 말하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20:19~23), 도마에게 한 번 더 나타나셨고(20:24~29), 이제 디베랴 호수에서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다(21:1~14).
 
 
 
나는?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예수님에게서 “내가 너희를 보낸다”는 소명을 받았음에도, 사람을 낚는 대신에 물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다. 부활은 믿었으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몰랐기 때문이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 약속의 성취이며, 새 언약 시대의 도래요, 새 이스라엘의 성취를 가져온 사건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스라엘의 지역적·민족적 경계를 넘어 온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충분히 알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만약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 부활이 가져오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명에도 둔감한 성도나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부활을 고백하지만 전혀 부활을 살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겠는가.
 
-제자들은 고기잡이 전문가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장 고기 잡기 좋은 때(밤)를 헛수고하게 하시고, 말씀 한마디로 가장 고기 잡기 취약한 시간대에 오히려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다. 이는 지금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할 때이고, 예수님께 순종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유능하고 조건이 잘 갖춰져도 주님이 기대하신 열매를 전혀 맺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요 15:5). 오늘 우리의 실패나 곤궁함이 나와 주님을 더 잘 아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친히 떡과 물고기로 조반을 준비하시고, 밤새 고기잡이로 지친 제자들을 먹이신다. 민망함과 죄송스러움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정하게 말을 건네 주신다. 번번이 할 말 없게 만드는 이 사랑에 진심 어린 충성과 변화를 위한 안간힘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의 어부가 되었다. 그들의 소득 없는 고기잡이는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고기잡이가 아님을 보여 준다. 때로 실패는 나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주님의 음성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갈릴리로 돌아갔으나, 고기잡이로 돌아가 버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늘 먼저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이 다시 확인되는 의미 있는 본문이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분의 백성을 먼저 찾아오신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갈릴리 바닷가의 일곱 제자들도 음성이나 모습만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 주신 후에야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았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할까?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나타내셔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예수님이신 줄 알아본 것은 애제자였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향해 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베드로였다. 예수님을 향한 반응은 이처럼 다양하다. 어떤 반응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전해 주는 사람이 있고, 그 예수님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예수님 없는 수고가 헛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동시에 풍성한 수확도 주신다. 밤새 헛탕친 제자들에게 작은 배와 그물로 버거우리만치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신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 장차 맺게 될 열매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부활의 여정에서 예수님을 위면하거나 부인하여 민망하여 고개를 숙이며 아무말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리셨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 아닌가?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수한 이들을 보듬는 것은 결국 먼저 용서의 경험이 있는 우리여야 한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을까?
 

 

 

*주님, 부활의 주님 없는 헛수고를 그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겠습니다.
*주님, 따뜻한 밥상 차려주는 교회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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