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1-20 큰 기쁨의 좋은 소식 _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누가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인구 조사 명령과 세상의 구주가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난 장면을 대조한다(1~7절).주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한다. 구주의 표적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는 것이며(8~14절),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다(15~20절).
1.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1~7절)
누가는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조망한다. 1장은 유대의 왕인 헤롯의 때를 언급하며 시작했고(1:5), 2장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세금 징수 목적으로 인구 조사 칙령을 내렸다는 것과(1절), 당시 시리아 지역의 총독인 구레뇨가 유대에 집행하는 것을 서술한다.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 조사에 임한다(3절).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향했다(4절).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5절).
로마 황제의 칙령에 요셉과 마리아는 복종할 수 밖에 없었지만,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 다윗의 도시인 베들레헴에 간 것은 태어날 아기 예수가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미가 5:1~4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빈 객실이 없었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러야 했고 결국 약속된 메시아는 외양간의 여물통에 누어야 했다. 만삭의 어린 여성이 먼 길을 와서 외양간의 여물통에 첫 아기를 낳는 장면은 고되기만한 당시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모습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1:32)과 어울리지 않는다. 신의 아들로 자처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한 젊은 부부의 첫아들로 구유(여물통)에 누워 있다. 하지만 장차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시골 외양간 초라하기 그지 없는 곳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왕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미 5:2).
2. 구주의 탄생과 천사들의 찬송(8~14절)
본 단락은 주의 천사(가브리엘)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근처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돌보고 있었다(8절).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추었다(9절). 목자들은 천사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고,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븜의 좋은 소식(10절)”을 전하러 왔기에 두려워 말라고 한다. “좋은 소식”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 “그리스도 주”가 태어난 것이다(11절).
구약에서 “구주(47절_소테르)”라는 단어는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는 구원자를 일컬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삿 3:9, 15; 12:3; 느 9:27). 구주는 “그리스도 주(크리스토스 퀴리오스)”다. “주(퀴리오스)”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칭호로, 로마제국에서는 ‘카이사르’로 불리웠다. 구약에서는 백성을 돕거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사용된 용어였다(삼상 10:19; 사 45:15, 21). 천사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12절)”가 메시아라는 표적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구주, 주,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 초라한 곳에서 옷에 싸여 있는 아가의 모습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주의 천사와 함께 수많은 하늘 군대(스트라티아)가 도열하여 우렁차게 하나님을 찬양한다(13절). 하늘 군대는 아기 예수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질 평화를 노래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한다(13절). “평화”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릐 통치로 주어지는 치유와 회복(눅 4:18~19; 사 52:7)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시는 사람들이다. 한편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장소로는 흔히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 인식되는 “성전”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초라한 광야의 목자들에게 나타났다.
1세기 당시 온 세상에 미칠 기쁜 소식은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등극이었다. 로마는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불리는 새로운 황제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서 당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진정한 메시아 되신 예수님의 탄생이 시골 마을의 외양간 구석일 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온 세상에 미칠 진정한 기쁨, 사람들의 평화는 시골의 외양간에서 태어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었다.
참고로 누가복음에서는 복음(유앙겔리온)의 명사형은 사용되지 않는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유앙겔리조마이)”라는 동사형이 10회 사용된다. 이런 형식은 이사야 선지자가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한 방식이었다. 이사야는 겸손하고 고난받는 종을 통해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고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궁핍하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기 위해 예수님은 더 비천하게 낮아지셨다. 구주 예수님은 낮은 곳에 임해서 고난의 길을 걸었고, 결국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낮아지셨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 누구든지 그를 영접(맞아들이는)자에게 하늘의 평화가 임한다.
3.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한 목자들(15~20절).
하늘 찬양대는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향한다(15절). 주의 천사가 알려준 것을 확인하러 가자고 한것이다. 그들은 천사의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었다. 메시아 탄생 소식에 대해 마리아처럼(1:39) 목자들도 신속하게 반응한다(16절). 베들레헴으로 달려간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목격하고 천사가 말한 표적을 확인한다.
목자들은 천사가 아기에 대해 말한 내용을 전한다(17절). 다윗의 아들과 구주를 통해 온 세상에 미칠 기쁜 소식을 맨 먼저 증언한 주체들은 목자들이었다. 당시 목자들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아기를 둘러싼 사람들은 목자들의 증언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18절). 19절의 “간직하다(쉰테레오)”와 “고민하다(쉼발로)”는 매우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마리아는 주의 천사에게 들은 메세지와 목자들의 증언을 깊이 생각한다. 일터로 돌아온 목자들은 표적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한다(20절).
하나님의 임재로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 적합한 곳은 세상의 중심인 예루살렘의 성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으로 신앙의 중심이 옮겨진다. 하루도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목자들이 일하는 곳에 하늘의 군악대가 등장했고, 목자들은 일터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린다. 낮은 자들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은 낮은 자들의 소망이며, 하나님은 이들의 찬송을 기뻐하신다.
나는?
-세상의 주로 추앙받던 황제 가이사의 명령에 임산부 마리아는 베들레헴을 향해 매우 위험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실상 가이사는 참 역사의 주이신 예수 탄생의 배경에 불과했다. 다윗의 후손 왕이 예언대로 다윗이 고향에서 태어나도록 만들어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잠시뿐인 세상 권력에 줄을 대고 그들의 들러리가 되려고 하지 말자. 비록 변방에 살더라도 역사의 주인이신 주 예수의 백성으로 당당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의 아들”을 자처하던 로마 황제 가이사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임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 호적을 명령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그 기간 동안 온 새상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다윗 왕의 고향 베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래서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셨다. 세월은 세상의 권력자를 바꾸고 나라는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쇠하지 않고 우리가 충성할 왕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다. 그러니 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그 세상의 홀로 참 주인이신 분에게 변처앟는 충성을 다하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겠는가?
-천사는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린다. 이는 숱한 생명의 탄생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 즉 복음이다. 이 아이는 소망 없는 인류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자요, 역사의 주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왕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세상의 구주 탄생 소식을 처음 받고 전할 사람을 통치자들이 아닌 목자들로 정하셨다. 그 주가 난 곳은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구유였다. 그분은 세상이 동경하는 힘과 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으로 차별과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통치자가 아니다. 도리어 목자들처럼 이 땅에서 천시받던 이들을 찾아가 그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통치하며 “사랑의 통치”를 구현하실 분이다. 목자들은 두려웠지만, 지체없이 순종하여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또 아이의 부모에게 천사에게 들은 바를 전해주었다. 그들은 비록 멸시 받는 일을 하는 자였지만, “단순한 순종”을 통해 맨 먼저 온 세상의 주님을 뵙고, 경배하고, 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로마의 구주 가이사의 평화는 강력한 군대의 칼 아래 숨죽인 평화지만, 참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하늘의 군대와 함께 찬양하며 기쁨으로 맞이할 평화다. 로마의 평화는 굴종이 만든 평화지만 예수의 평화는 사랑이 만든 순종의 평화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권세자를 낮추시고 주의 기뻐하시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역전의 역사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힘과 권력을 얻을 때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가 이뤄지는 것을 더 기뻐하고 바라는가?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 세상 나라의 힘에 의한 공포의 평화가 아닌 얘수 그리스도의 기쁨의 평화가 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목자들을 통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신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누구의 입을 통해 전해지든지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 영광의 찬송 드리게 될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