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이웃 사랑) 주님을 섬기는 저마다의 방식…(하나님 사랑) [눅 10:25-42]
 – 2025년 03월 11일
– 2025년 03월 11일 –
눅 10:25-42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이웃 사랑) 주님을 섬기는 저마다의 방식…(하나님 사랑)
    
본 단락은 율법 교사와 예수님의 대화(25~37절),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38~42절)로 구성된다. 영생의 길에 관해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웃 사랑(곤궁에 처한 사람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을 가르치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는 하나님 사랑(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을 가르치신다.
    
    
    
1. 강도 만난 자의 이웃(25~37절)
영생을 얻는 길을 묻기 위해 찾아온 율법 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다. 율법 교사는 영생, 곧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됐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와 같이 답을 주지 않고 율법사의 견해를 밝히도록 하신다. 이에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의 요약으로 이해한다(27절). 이 내용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8에 근거한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선언하신다(28절). 이 말씀은 레위기 18:5의 내용인데, 많은 성도가 오해할 수 있는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키면 살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약속의 땅에서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주어진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을 바꾸어 비유로 된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의 이웃이 돼야 함을 촉구하신다. 이렇게 하신 것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접근하는 율법 교사의 오만과 위선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율법사는 자신을 의롭다고 하기 위해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다(29절). 이에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로 대답하신다(30~35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죽을 지경에 이른 그를 버려두고 떠난다. 때마침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여리고의 집으로 가던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지만 그를 피해 지나가 버렸다. 한 레위인도 현장을 보았지만 피해 지나가 버린다. 유대인 중의 참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현장을 지나던 중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가까이 가서 피해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 주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여관 주인에게 데나리온 두 개를 주고 보호를 부탁한다. 나머지 비용은 돌아갈 때 갚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비유를 끝내고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물으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절)” 율법 교사는 차마 “사마리아”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긍휼을 베푼 자”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37절)고 명령하신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거룩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나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된다. 예수님이 모본으로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선행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예가 아니라 좋은 이웃의 예다. “너도 좋은 이웃이 돼라!” 영생을 얻은 사람은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 이웃이 된다.
    
    
    
2. 좋은 것을 택한 마리아(38~42절)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갔다(38절).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환대했다. 자매간인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39절).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40절). 그런데 동생은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 언니 혼자 섬겨야 한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옳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예수님도 당연히 동의한 줄로 생각하여 마리아에게 자기의 일을 돕도록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불러 친근한 마음으로 조언한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절).”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지 말고 한 가지만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다. 반면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42절). 예수님은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장 좋은 것, 필수적인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듣는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좋은 편”의 “편(메리스)”은 유산과 유업을 뜻한다. 마리아는 영원한 유업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 자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예수님과 그의 복음 앞에서는 상대화되고 만다. 환대는 예수께서 줄곧 강조하셨고 계속해서 강조하실 필수 사항이다. 그렇지만 어떤 섬김도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될 수 없다. 구원은 봉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앞 단락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보았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의 선한 이웃으로 환대의 모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어떤 선행도 유일한 한 가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율법사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10:25~26).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계명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길은 없다.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시므로 언제나 예수께 시선을 집중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 예수께 집중하는 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다(시 73:28).”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분주함과 불안감 속에서 주의 일을 하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 집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고 대부분은 성경 선생의 가르침을 공적으로 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여성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말아야 하고 가장 좋은 유업을 빼앗기지 말아야 함을 선언하신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에서 누구도 제외되거나 소외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영생의 길을 묻는다. 율법 전문가인 그는 이미 자신만의 대답에 확신하고 있었기에 예수께서 무슨 대답을 하셔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율법)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시험하는 그가 율법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일 리 없다. 하나님이자 동료 유대인인 예수님을 시험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는 이중성이라니….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앎(지식)은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 율법사는 알고 있을 뿐인데 살고 있다고 착각하였다. 삶이 되지 않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율법사는 유대인으로 한정했다. 그에게 이웃의 정의를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 이야기 속에서 놀랍게도 율법이 말하는 이웃을 외면한 사람들은 율법 전문가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였다. 율법적인 정결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곤경을 외면한 비유 속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주의에 파묻혀 율법의 참 정신인 사랑을 잃고, 하나님이자 이웃인 예수님을 죽인 이 시대 유대교의 자화상이었다. 강도 만나 길바닥에 쓰러진 유대인은 당시 유대교의 자화상이었다. 율법주의는 아무도 살릴 수 없다.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말씀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이웃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참 이웃은 신분이나 혈통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이웃의 범위를 제한할 수도 없다.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을 결정한다.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만이 그의 이웃이다. 자비를 받은 자들이 내 사랑을 받고 나를 이웃이라고 인정할 때, 나의 이웃 하나를 얻는 것이다. 율법(말씀)의 정신을 따라 자비 베풀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여정이 지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한 마르다의 헌신은 귀하다. 그것은 율법이 말한 이웃 사랑이며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예수께서 전하시는 복음의 수용이요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는 행위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여 먹고 마시게 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빌라고 하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그분의 메시지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 삶에 왕으로 모시는 것만큼 그분을 향한 사랑이 없다.
    
-마르다가 분주하게 예수께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 이 또한 마리아식의 예수님 경배 법이다. 이런 모습은 제자가 선생에게 갖추어야 할 마땅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분 메시지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음식 만드는 일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해 불평한다. 예수님을 위한 좋은 마음이 이웃인 마리아를 향한 서운한 마음과 공존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각각이 아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좋은 음식을 준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는 마리아의 주님 사랑도 존중해주어야 마땅하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이웃 사랑은 마리아를 배려해 주는 것이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자신의 섬김 방식만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섬김의 모습을 존중하도록 요구하신다.
    
    
    
*주님, 우리 공동체의 이웃을 향해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사랑으로 구현하겠습니다. 종교적인 교회이기보다 교회의 이웃에게 친근한 교회 되기를 추구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섬기는 방식만을 고수하는 오류를 늘 점검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고 섣불리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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