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14-26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이 사건을 통해 무리와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선포하신다. 사탄의 나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 제압당한다. 이제 사람들은 사탄의 나라든지 하나님 나라든지 양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본문은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확장을 메시아의 전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쫓아낸 행위는 용사인 메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메시아의 승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입증한다. 메시아의 전쟁은 사탄의 세력에 속박된 사람들을 해방하고 모으는 목적으로 전개된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을 군사와 목축의 언어로 설명하신다. 사탄의 무장을 해제시켜 그의 소유를 빼앗는 그림은 양 무리를 모으는 그림과 같다. “모으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은 종말에 이스라엘을 모으고 통일시키는 것으로 실현된다. 모으는 일은 목자의 사명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양 무리를 모으는 것을 구원의 예로 소개했다(겔 34:13, 21). 이처럼 예수님이 사탄의 진영을 공격해서 속박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해방하는 일은 양 무리를 모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다.
1.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14~16절)
예수님께서 말을 못 하게 만든 귀신을 쫓아내 사람을 치유하자 무리가 놀란다(14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의 출처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평가했다(15절). 이런 발언의 의도는 예수님을 사탄의 중개자로 설정하여 악한 자의 누명을 씌워 제거하기 위함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나타내라고 요구한다(16절).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늘의 승인을 받은 행위를 하셨는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한편,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으므로(4:1~13) 이들은 사탄과 귀신들의 세력에 속했음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되었다. 반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하나님이 택하고 인정하신 아들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으므로 더 이상의 표적은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승인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귀신을 쫓아내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는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2.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20절).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17절). 이 표현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대적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악함을 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상식적인 논리로 반대하는 자들의 논리를 무너뜨리신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 즉 내전에 휩싸인 나라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집안싸움도 가정과 가문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만일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사탄의 세계에 내전이 일어난 것과 다름없다(18절). 귀신들은 사탄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하수인들인데, 사탄이 자기 부하들을 쫓아내 스스로 몰락의 길을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18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너희 아들들”, 곧 어떤 유대인들도 귀신을 쫓아냈다(19절)고 말씀하시며 만일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귀신을 쫓아낸 유대인들도 사탄의 힘을 사용했다는 논리가 된다. 황당한 것은 예수님의 행위를 비판하는 자들은 귀신을 쫓아낸 동료 유대인들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유대인 축귀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 셈이고 예수님을 비판하는 자들의 논리가 잘못됐음을 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또 만일 예수님이 사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증거다(20절).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표현이다(출 8:19; 31:18; 신 9:10; 시 8:3). 이 용어는 출애굽 과정에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출애굽기의 용례를 따라 해석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속박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는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해방과 자유를 선물로 주기 시작한 것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을 뜻한다.
이미 10장에서 칠십 인의 제자들의 사역을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사건으로 해석하셨다(10:18). 본문은 그 예수님의 강력한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셨지만, 사탄(바알세불)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행사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분이고 순종해야 하는 분이다.
3. 예수님과 사탄의 전쟁(21~26절)
본 단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을 예수님과 사탄의 충돌로 묘사한다. 21~23절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을 군사적 언어로 설명하신다. 강한 자가 완전무장을 한 상태로 자기 집을 지켜야 집의 소유가 안전하다(21절).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집을 지키는 자를 굴복시키면 무장도 빼앗기고 재물도 전리품이 되고 만다(22절). 전리품은 승리한 사령관의 소유가 된다.
예수님이 공격하는 대상은 강한 자인 사탄이다. 사탄이 지키고 있는 집의 소유물은 사탄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사람들을 해방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해방된 자들의 구원자와 해방자다. 사탄보다 강하지 않고서는 인간을 해방할 수 없고 신적인 존재인 사탄보다 강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초월적 존재,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사야 49:24~25에서는 좋은 장수로서 다른 군인들과 싸워 그들의 속박 가운데 있는 자들을 해방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종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종은 전쟁을 벌여 속박 가운데 있는 자들을 해방하는 빛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 용사로서 사탄보다 강한 힘으로 사탄의 집을 공격하셨다. 이렇게 사탄의 세력과 싸우는 전쟁터에서 중립 지대는 없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양 무리를 관리하는 목축의 언어로 묘사하신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3절).”
예수님은 양 무리를 모으지만, 사탄은 양 무리를 흩어버린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양 무리를 모으는 구원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로 하나님 나라가 왔고 구원의 시대가 열렸다. 예수님 편에 서는 자들은 종말의 회복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그 구원에 참여하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은 사탄의 속박에서 다른 사람들을 해방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 사탄의 흩어버리는 피해를 보게 된다.
24~26절은 예수님이 사탄의 세력인 귀신을 몰아낸 후 자유를 얻은 인간이 선택해야 할 길을 알린다. 예수님은 23절의 의미와 연결하여 더 강한 자의 편에 굳게 서지 않을 때 일어날 비극을 경고하신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쫓겨나 물이 없는 곳을 찾다가 그런 곳을 발견하지 못해 쫓겨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24절). 그런데 돌아갈 때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일곱 영(8:2)”은 완전히 귀신의 힘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또 집은 사람을 가리키는 비유다. 모두 여덟 귀신이 한 사람에게 들어오자 한 귀신이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상태가 악화하고 만다(26절).
예수님의 이와 같은 경고는 한 개인을 넘어 도시와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여러 도시에서 귀신을 쫓아내셨고, 중립 지대 혹은 청정 지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사탄이 중립 지역(청정 지역)을 장악해 버리고 만다. 이런 점에서 영적인 세계에는 사실상 중립 지대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사탄과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일시적으로 안전지대에 있다고 긴장의 끈을 놓으면 낭패를 당할 정도로 전투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사람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강력한 공격으로 가능하므로 예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은 전투에 임하듯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기대는 자이며 따라서 귀신과 한통속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 이를 반박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의 신적 기원을 증명할 “표적”을 추가로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믿지 않기로 작정하는 자들을 설득할 논리도 없고 증거도 없다. 맹목적 불신의 창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은 실상과 정반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실에 접근하는 내 마음의 눈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안 믿기로 작정하면 온전히 받아들일 만한 말씀은 하나도 없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보는 이들은 사실 관계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논리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면 스스로 자기 세력을 약화하고 자기 나라를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자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습격한 사건이며, 더 강한 자가 더 악한 자를 결박하여 꼼짝 못 하게 하고서 벌인 일이다. 예수님은 사탄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때가 되고서야 이루어질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진 자들은 공평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행하신 일을 통해 이미 증명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비난하는 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오해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향한 배도고, 반역이며, 적극적인 반대다. 왜냐하면 지금이라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이야말로 이전보다 더 완악한 사탄의 하수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충성하지 않는 자는 본의 아니게 사탄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찬성하지 않는 자는 사실상 불순종의 자식들이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 있을 곳은 없다는 사실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단호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축귀 사역은 하나 나라가 이미 사탄의 나라를 이기고,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서 말한 가장 큰 약속이며 그 약속은 하나님의 위임 통치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탄인 바알세불로 보는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갈릴 것이다. 중간 지대는 없다. 양자택일만 있다.
-예수님은 귀신이 떠난 후 영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도 영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방심하면 더 나쁜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말씀과 기도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은혜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구원의 삶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귀신이 잠시 물러갔으나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심각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단순히 전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숙과 양육을 통해 지속적인 돌봄과 성장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증거를 듣고 보고 누리고 있으나 이를 거부하는 완악한 세상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는 삶을 꿋꿋이 붙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은혜를 경험하고 안주하지 않고 더욱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