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지키지 않는…. [눅 11:37-54]
 – 2025년 03월 15일
– 2025년 03월 15일 –
눅 11:37-54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지키지 않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문제(42~44절)와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46~47, 52절)를 각각 세 가지 화로 지적하신다.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앞 단락에 나온 등불의 비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들의 눈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파악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과 악으로 채워지고 말았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은 구약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에는 유출 병과 관련하여 손을 씻도록 규정했다(레 15:1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기를 겪으면서 제의적 정결을 일상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손 씻기와 같은 정결 예식을 기준으로 유대인들 사이를 구분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했다. 말하자면 부정과 정결의 원리를 따라 사회를 유지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 씻기와 같은 정결 관습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 필수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손 씻기의 정결 예법은 위생의 문제보다는 신앙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1.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37~41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을 때 한 바리새인이 점심 식사에 초대한다(37절). 그는 예수님께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위해 앉은 모습을 보고 놀랐다(38절). 초대자는 손님이 식사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언짢게 생각한다. 정결 예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손님과 집 안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만찬을 망치는 요인이다.
    
특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예수님이 기본적인 예법도 준수하지 않는 모습에 “놀랐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생각과 반응에 대해 “너희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르며 바리새인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신다(39절).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함이 가득하다. 바리새인들은 그릇을 씻는 것과 같은 제의적 정결을 핵심 가치로 여겼으나 본질적인 가치와 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도 그 마음은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져 있다. “악한 것들”은 이 악한 세대에 속하고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을 떠올리는 표현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막는 요인이다(29, 34절).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라고 말씀하시며 실제 모습을 정결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치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어리석다고 지적하신다. 차라리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정결 예식을 지키기보다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내면의 더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신다. 남몰래 숨겨둔 소유를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될 수 있고(41절)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다.
    
정결한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궁핍한 자들과 갇힌 자들을 회복하는 것이다(4:18~19). 구제는 탐욕과 악독과 반대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운 깨끗한 삶이다.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신앙은 이웃을 위한 긍휼로 나타나야 한다.
    
    
    
2. 바리새인들의 세 가지 화(42~44절)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아래와 같은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신다(42~44절). 첫째,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42절).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이웃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모든 채소에 십일조를 매겨도 탐욕을 채우는 행위를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 사랑의 표현도, 이웃을 위한 공의도 아니다(미 6:8). 십일조의 규례도 행하고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십일조의 규례보다 더 본질적이고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43절). 바리새인들은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즐겼다. 더 많은 인기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종교 시설인 회당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들락거렸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에도 사람들의 시선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신앙을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무덤 위를 밟는 사람은 무정한 무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탐욕과 악독으로 부정해졌다. 겉은 품격 있게 단장했지만 속은 죽은 자들의 뼈가 보관된 무덤과 같았다. 더구나 이 무덤에는 표시가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무덤을 밟고서도 무덤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속이 부정결한 줄 모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오염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집단으로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3. 율법 전문가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42~54절)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던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그런 비판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5절). 이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지적이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과 교사들인 율법 전문가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건방진 태도가 자신들을 모욕한 것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사회의 근간인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뒤흔들고 이런 기준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을 폄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율법 교사의 항의를 받은 예수님은 율법 전문가들에게 임할 화를 세 가지로 선언하신다(46~52절). 첫째, 자기도 지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면서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짐을 지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46절). 그들은 정결과 부정의 규례를 세밀하게 설정함으로 백성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엄청난 짐을 지웠다.
    
둘째, 율법 전문가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47절). 율법 전문가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이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율법 전문가들은 이 조상들의 증인이 되어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긴다(48절). 하나님은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49절).” 이처럼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구원 역사를 박해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배척하고 제거한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종들을 거부한 것이다. 모든 선지자가 흘린 피의 책임을 이 세대가 지게 될 것이다(50절).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대한 책임이 이 세대에 돌아갈 것이다(51절).
    
셋째, 율법 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가로막는다(52절).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근거로 수많은 규례를 만들고 강요하지만 실제로는 비본질을 본질로, 본질을 비본질로 바꿔버렸다. 열심히 정결 규례를 준수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명확하고 필수적으로 가르치기보다 모호하고 본질이 아닌 것을 구체화하고 목숨처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강화할수록 그들의 기득권은 강화되고 전문가의 지위는 높아졌다. 그러나 그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다. 하나님에 관해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만하고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다. 진리의 열쇠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겪는 고충에 둔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심판에 가깝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관심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53~54절에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항의한다(53절). 이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꼬투리 잡기 위함이었다(54절). 그들은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나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식사 초대한다. 예수가 자신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환대했다. 하지만 그가 손 씻지 않고 잡수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조상들의 유전으로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나를 판단해야지 나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모셔놓고도 예수님을 아는데 관심이 없고 그분을 통해 나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천국의 식탁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정결은 겉이 아니라 속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속이 정결한 이는 “자선을 베푼다”.  속에서부터 나오는 사랑, 자비, 긍휼이 “자선을 베푸는 삶을 빛나게 한다. 지금 겉으로는 식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이 겉으로는 선대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여전하다면 그 섬김이 진실한 것일까?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꾸민 겉보다는 속에 품은 동기와 의도를 보신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겉으로 드러난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참된 경건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와 동기를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드리는 일이 손을 씻는 일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탐욕과 악독함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겉은 깨끗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충실하게 붙들었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렸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는 남다른 열심을 보였으나 정작 그 율법의 참 정신과 의도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버린 것이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했지만, 겸손하게 이웃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치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도 모르게 부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앞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물론이고 공동체까지 부정하게 했다. -그들의 연구와 가르침들은 백성들의 삶에 깊게 관여 되어 엄청난 종교적 짐을 지웠지만, 그런 백성의 고충을 전혀 돕지 않는다(46절). 자신들이 만든 무거운 종교적인 짐을 지며 발버둥 치는 그들에게 “손가락”으로 조차 맞들어 주는 도움도 주지 않는다.  *지킬 것을 강요하고 종용하며, 강제하나, 잘 지키도록 돕거나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결례와 같은 규례들을 세밀하게 규정하여 일상의 삶을 숨 막히게 만들었지만 이것을 지키려는 고충을 이해하고 돕지 않는다. 전형적인 공감 마음이 없는 이들이다. 공감없는 지식은 사람의 영혼을 날카롭게 벨 뿐이다.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을 듣던 율법사는 자신들도 염두에 둔 말씀임을 알고 발끈한다. 자기 위선을 돌아볼 계기로 삼지 않고 껍데기뿐인 기득권과 권위를 지키려고 반발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위선까지 지적을 받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더욱 완악해졌다. 이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지적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율법도 몰랐고 자신도 모른 사람이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혹은 사람을 통해 나를 지적할 때 모욕으로 받지 않고 진심으로 받고 있는가? 나를 정당화하는 데만 여념이 없지는 않은가?
 
-율법 교사들은 스스로는 전혀 지키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었다. 율법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기쁨과 자유로움은 없고 죄책감과 패배감에 젖어 살게 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배우는 자들과 자신들을 차별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칠 수 있었을 뿐인데 그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알았다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왜곡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 나라와 왕을 거절했고, 자신에게 배우는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극진히 섬기지만, 정작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이 율법사와 다를 바가 있을까?
 
-바리새인, 율법교사….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나 라며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들처럼 구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이제는 내가 바리새인 일수도, 율법교사 일수도 있겠다는 것을 부정을 못하겠다. 겉과 속이 다름, 문자에 담긴 해석에 함몰하여 의미를 놓쳐 버리는 완고한 어리석음,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함께 살아가는 삶….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나는 이렇게 하고 있어.. 저들과 달라 라고 소리치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따라가지 못하겠고, 삶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한참 뒤처져 있다. 겉이 아닌 속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들과 마찬가지로 속이는 것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이전에 행한 죄에 대하여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허울 좋은 해석을 빌미로 “정당화, 합리화’하는 것에 급급하는 기성 교회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알아가는 것 보다 사랑하는 삶이 더 중요한데, 머리로는 고개를 끄덕이나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지식을 쌓는데 더 시간을 들이고, 사랑하며 사는 삶의 현장을 돌아보는데 미적거린다. 그래서 내가 바리새인, 율법교사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 못하겠다….    
 
*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선명하게 “화”입을 삶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으니, 그 길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본질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본질을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함으로 살아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나는 바리새인, 율법교사와 다르다!” 라고 소리치고 싶다…
 
 
  
*주님, 말씀을 잘 안다 하면서 정작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명분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말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욱 겸손히 저를 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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