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1-12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 두려워해야 할 분, 두려워해야 할 날
제자들이 위기에 직면할 때 그들의 “깨어 있음”이라는 주제 안에서 몇 가지를 제시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과 관련된 예수님의 행위를 조사하는 수준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선제적으로 공격한다. 이러한 운명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겪게 된다. 그래서 ‘누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핍박을 겪게 될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주신 것을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에서 받는 핍박을 종말에 직면하게 될 위기와 연결하신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1~3절)
1절은 “서로 밟힐 만큼” 수많은 사람(무리)들이 예수께 몰려왔음을 보고한다. 이렇게 찾아온 무리에게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그들도 듣도록 기회를 열어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하는 동안 늘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은 그 무리가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누룩”을 “위선(휘포크리시스)”의 비유어로 사용하신다.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침투력을 가진 누룩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게 급속하게 침투해서 공동체를 부패시킨다. 누룩이 침투된 여부가 반드시 겉으로는 드러날 수밖에 없듯이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태도도 드러나고 알려질 수밖에 없다(2절). 4~11절이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핍박을 소재로 삼는 것을 고려하면, 1~3절의 누룩은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8~11절에서 예수님은 핍박 중에 제자들이 인자를 신임할 것을 강조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말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곳에서 말한 모든 것이 밝은 데서 들리고 어두운 데서 귓속말로 나눈 대화도 지붕 위에서 모두가 알아듣도록 퍼질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복음인 줄 알면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진리로 믿고 있다면 반대와 위협에도 믿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 믿고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 위선은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제자의 핵심적인 특징은 진실함이다. 진실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두려움을 가질 때 실현된다. 거짓으로 한순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진실을 공개하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이다.
-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4~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표현하신다.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를 의미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공유하며, 하나님 아버지도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님은 친구인 제자들에게 몸만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4절). 몸만 죽이는 자들은 죽음 이후의 더 무서운 행위는 할 수 없다. 제자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분, 곧 하나님이시다(5절). 지옥은 사림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던져질 최후의 장소다. 5절은 “곧 죽인 후에…. 그를 두려워하라…. 그를 두려워하라”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포버쎄테)”로 시작하고 맺는다. 이는 제자들이 핍박받는 상황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라는 의미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신다. 제자들을 핍박할 사람들보다 당연히 하나님이 훨씬 강하시다. 사람의 위협이 두려워 항복하게 되면 더 무서운 분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4~5절에서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6~7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기 위하여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법에 따라 작은 참새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귀한 제자들을 기억하고 참으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머리카락의 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급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생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알고 개입하신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제자의 여정에 개입하고 섭리로 반응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는 하나님의 시선이 언제나 자신에게 머물고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비극적인 현실에서 돌봄의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8~12절)
하나님의 돌보심을 강조하신 예수님은 이제 인자이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치신다. 8~10절에서는 지상에서의 행위가 하늘 법정에서 평가받게 될 것을 언급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인자이신 예수님도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실 것이다(8절).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될 것이다(9절). 하늘 법정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변호하는 역할을 맡아 지상에서 고난 중에 신앙 고백한 자를 변호하시고 고백하지 않은 자를 외면하신다.
이 재판은 종말에 열리고 집행된다. 종말에는 현재 지상에서 살아온 삶과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고난이 가중되고 부인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겠지만 종말의 하늘 법정에서 내려지는 결과는 역전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종말의 시각에서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핍박과 같이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놓일 때일수록 더욱 시선을 미래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종말의 관점에서 현재의 고난을 견딜 것을 이미 5절에서 언급하셨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죽음으로 핍박을 견딘 스데반이 하늘 법정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 모습을 묘사할 것이다(행 7:55~56). 이처럼 제자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현재 이곳에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자를 한 번이라도 부인하는 자에게 기회는 없는 것인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이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도 제자들을 굳게 세우는 사명을 수행한다(22:54~62).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핍박이 오기 전에는 신앙의 참된 여부가 드러나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핍박과 위협이 닥칠 때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자는 잘못된 신앙관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배교와 다름없어서 구원의 길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용서받지 못한다.
성령을 언급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령의 관계를 이어가신다(11~12절). 예수님은 다가오는 핍박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고하신다. 제자들에게 핍박을 주는 장소와 주체인 회당과 위정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유대와 이방의 환경을 포괄한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뿐 아니라 앞으로 그를 따르게 될 제자들은 적대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때 어떻게 대답할지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 필요한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6~7절의 약속이 실현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에 부닥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런 어려움에 부닥친 제자들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보호하시고 대처하게 도와주신다.
나는?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불러 주신다. 그들의 운명과 같이 하겠다는 의미다.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면 환난이나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 따라오겠지만,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몸을 죽이는 자들이 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분이라고 하신다. 목숨을 지키려다 영생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 고난이나 상실은 죽음만큼 두려운 일이겠지만,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에게는 친구이신 주님이 계시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변절하려는 이들에게 주님은 두려운 분이지만, 참새 다섯 마리의 운명에도 관심이 있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만큼 세심하게 살피시는 친구 예수님이 참새보다 더 귀한 우리를 위하시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주님이 우리들을 지켜주실 것이니 그 전능자의 그늘에서 안식할 수 있다.
-주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드러내지 않으실 뿐 모든 진상이 낱낱이 드러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는 그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니 바리새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채 외식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차라리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주께 돌아올 가망이 없다. 그는 하나님보다 먼저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왜 외식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봐, 내 권력과 지위를 잃어버릴까 봐, 평판이 실추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 육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이 아니다. 나를 영원히 없애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가장 안전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가장 위태로운 것이다.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것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인자를 부인하여 얻은 안전은 진정한 안전이 아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나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그 성령께서 재판정에서 할 말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성령을 모독하는 자, 그리하여 스스로 자기 안전을 장담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는 권력을 누릴지라도, 영원한 생명에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삶을 선택하려는가?
*주님, 저를 친구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두려운 일이 기다리지만, 친구가 되신 주님이 계신 담대하게 직면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