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언젠가보다 중요한 지금, 여기에서 작은 일에 충성![눅 19:11-27]
 – 2025년 04월 05일
– 2025년 04월 05일 –
눅 19:11-27 언젠가보다 중요한 지금, 여기에서 작은 일에 충성!
 
예루살렘 입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줄로 생각했다. “므나 비유”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비유다. 또,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살아갈 사람들에게도 당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완성 사이에 사는 성도들에게 왕(예수님)의 귀환을 신실하게 준비할 것을 가르치신다.
 
제자들과 무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분이 왕권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임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기를 소망했다. 과거 다윗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곳을 왕의 도시로 만들었다(삼상 5장). 헤롯 대왕도 예루살렘을 확보함으로 자신의 통치권을 주장했다. 예수님께서 17:20~21에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과 무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을 뿐,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과 말씀을 통해 확장되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실 것이다(22:30).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기대한 정치적인 나라 또는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나라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가 땅 끝을 향해 확장되는 이야기를 기록하며, 이 나라는 완성의 때를 남겨두고 있다.
 
 
 
1. 므나를 맡기고 멀리 떠나는 주인(11~14절)
제자들과 무리는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므나 비유를 전하기 때문에(11절), 므나 비유는 자연스럽게 삭개오 이야기(19:1~10)와 연결된다. 한편 이 비유를 전하시는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으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하나님 나라가 곧 임할 것으로 생각했다(11절).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려고 멀리 떠나면서 은화 열 므나를 열 명의 종에게 균등하게 맡기고 돌아올 때까지 사업을 하도록 지시했다(12~13절). 왕위를 받으러 로마에 가는 것은 청중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 분봉왕과 같은 통치자는 로마 황제로부터 권한을 얻어야 했다. 헤롯 왕가의 헤롯 대왕, 헤롯 아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는 모두 통치권을 얻을 목적으로 로마에 갔다.
 
한 므나는 당시 100일치 임금의 가치였다. 달란트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귀인은 큰돈을 남기는 것보다는 종들이 “신실하게” 주인의 지시를 따르는지 시험 하려는 목적으로 한 므나를 주었다. 같은 금액을 맡겼으므로 성실히 장사한 정도는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주인은 당연히 큰돈을 맡길 것이다. 그런데 귀인을 미워한 시민들이 몰래 사자를 보내 그가 왕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다(14절). 이 비유는 당시 헤롯 아켈라우스가 로마에 간 이야기와 비슷했다. 그가 아버지 헤롯 대왕의 사망(주전 4년) 이후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만나러 갔을 때 그를 미워한 유대인들은 그의 통치를 반대했다. 그렇다면 비유에서 귀인이 왕위 받는 것을 반대하는 내용이 들어간 것은 매우 의도적이다.
 
이는 예수의 왕 되심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비유 속에서 귀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는 악한 성품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므로 예수님은 귀인이 먼 나라로 왕위를 받으러 가서 돌아온다는 것을 이야기로 활용하신 것이다. 귀인이 먼 나라로 간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왕권을 얻고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9:51; 행 1:11). 왕국을 받아서 다시 오는 것은 재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유는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신실하게 재림을 준비할 것을 강조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의 생애와 연결해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반대했고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들도 유대 지도자들의 뜻에 동조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의 왕권을 원하지 않는다.
 
 
 
2. 돌아와서 종들의 신실함을 평가하는 주인(15~27절)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인은 왕위를 받아 돌아왔다(15절). 주인은 은화를 받은 종들이 장사에 열심을 보였는지 알아보려고 그들을 불렀다. 주인의 관심은 성실히 장사를 했는지 여부에 있다. 비유에는 세 명의 종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세 명은 주인에 대한 신실함의 정도를 보여주는 표본과 같다.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16절). 주인은 그를 착한 종으로 부르고 지극히 작은 일에 신실했다고 칭찬한다(17절). 주인은 자신의 나라에 속한 열 도시(폴리스)를 다스리는 권세를 맡기는 것으로 종의 수고를 보상한다. 두 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다(18절). 주인은 종에게 다섯 도시를 맡긴다(19절). 한 므나의 가치에 비하면 열 도시와 다섯 도시를 통치하는 권위를 얻는 것은 엄청난 보상이다. 이것은 주인의 관심이 돈이나 이윤이 아니라 주인의 지시에 대한 신실한 태도에 있음을 입증한다. 주인이 큰 것을 맡길 만한 자세를 평가하는 데는 한 므나를 맡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세 번째 종은 한 므나를 보관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다(20절). 종은 주인을 “주(퀴리오스)”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주인에게 충성하거나 주인의 뜻에 순종하지도 않았다. 종은 이윤을 남기지 않은 원인을 주인의 성품 탓으로 돌린다. 그는 주인이 엄한 사람이어서 무서웠고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어서 장사를 하지 않았다고 변명한다(21절). 종의 평가에 따르면 주인은 착취를 일삼는 사람이다. 주인은 그를 “악한 종”으로 평가한다(22절). 그리고 종이 말한 내용으로 종을 심판한다. 주인은 종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말하고 종이 주인을 그렇게 평가한다면 주인이 돌아와 원금과 이자를 은행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돈을 은행에 맡겨야 했다(23절). 주인은 옆에 선 자들에게 악한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맡은 종에게 주도록 지시한다(24절). 그러자 지시를 받은 자들은 첫 번째 종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다고 말한다(25절). 주인은 있는 자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는 이치를 말한다(26절).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사명을 맡은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두 부류로 구분된다. 예수님이 맡기신 작은 일에 신실한 사람과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때문에 신실함의 여부를 시험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맡기신 작은 사명에 신실한 사람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과 같다. 반면 신실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수님을 위해 희생할 마음을 품지 않는다. 예수님을 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불평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평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명목상 신자일 뿐 아니라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러 가지 핑계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신실하게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나마 있던 특권마저 빼앗긴다.
 
그리고 주인은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원수들”을 끌고 와서 죽이도록 명령한다(27절). 은유적으로 이들은 두 부류의 신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류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는다. 반대하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고,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내려진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신자들이 자신의 뜻에 신실하게 반응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과도한 일이 아니라 작은 일을 맡기신다. 신자들에게는 한 므나와 같이 작은 일을 맡게될 기회가 여러 차례 찾아온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과 예수님의 뜻에 대한 신실함은 작은 일로 충분히 평가된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신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신자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 나라는 충성하는 자에게 임한다. 제자들과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이방인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당장에”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적 이스라엘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맡은 사명에 충성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주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따르는 자들은 나의 나라만 만들 뿐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서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자가 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심판과 함께 임한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오해한 무리의 환대뿐 아니라 고난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끝이 아니며 주님께서는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짧고 덧없는 승리에 영합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의한 패배를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궁극의 승리를 위해 오늘도 주를 위한 영광스러운 패배인 십자가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오해한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을 싫어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원수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임하는 날은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제자들이 생각한 대로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깨우쳐주시기 원한 것은 “시기보다 중요한 것이 그 나라에 합당”한 지다. 제자들은 그날이 오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지만 예수님은 그날 구원에 합당한 백성이 누구인지에 더 주목하신 것이다. 그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면 언제 그 나라가 임하든지 상관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한 대로 심판하는 나라다. 비유 속에서 종들에게 한 므나씩 맡기고 떠난 귀인은 돌아와서는 종들이 행한 대로 갚는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긴다. 귀인은 종들이 행한 대로 갚는다. 그는 관대했고 공정했다. 원칙에 충실했다. 그가 본 것은 사업 수완이 아니라 충성이었다.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 것을 맡겨 주었다. 하지만 주인을 두지 않은 데서 취하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에게는 그가 생각한 대로 엄하게 심판하신다. 주인을 엄하게 여겼으면서도 그 돈을 은행에도 맡기지 않은 것은 주인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불충을 반영한다. 그는 주인을 오해했을 뿐 아니라 알고 있는 것 만큼도 살지 않았다.
 
-비유 속 귀인이 왕 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은 예수님이 왕 되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다. 하지만 그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심판주로 오신다. 그러니 세상 속 짧은 죄악의 승리에 도취되거나 영합하지 말고 영원한 승리를 위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합당한 삶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거세게 미워한다. 배척하고 조롱한다. 이런 풍조 속에서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당부하신 명령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제자 되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전하는 삶을 우직하게 살아내면서 제자 삼고 제자 삼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제자를 세웠느냐의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약속을 얼마나 신뢰하여 선하게(우직하게, 변함없이)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냈느냐를 보시는 것이다.
 
*요한에게 보여주신 재림의 환상 속에서도 주님은 분명하게 다시 돌아오신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의 근거를 이렇게 말씀 하신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주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살아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었다.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에게서 보이는 문제는 먼저 주인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주인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종은 그저 수건에 싸 두었을 뿐이었다. 내가 주님께 받은 복음을 “수건으로 싸 놓는” 모습으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또 그 종의 문제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한 것”에 있다. 이것의 원인은 자기 생각, 자기지식이었다. 자기가 보기에 주인은 그랬다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해까지 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혹시 어떨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내 자신을 사랑하면 자기 생각, 자기 지식에 함몰 된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아는 것 보다 자기 주관대로 바라볼 뿐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반드시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종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결정을 따라, 자기 행동을 합리화 하며 주인 앞에 섰다. 하지만 종에게 명령한 주인은 자신의 명령대로 종들이 행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선하고 충성(신실)되게” 행한 종들에게 칭찬과 보상은 당연한 것이었고, 자신의 권세를 위임할 그릇인지도 함께 판단하였다.
 
*주인이 떠나면서 부탁한 지극히 작은 부탁이었지만, 이를 태산처럼 무겁게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행한 종들은 주인의 나라에서 더 큰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충분한 그릇인 것을 검증할 수 있었다. “한 므나” 만으로도 검증은 충분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극히 작은 일에 “선하고 충성되이” 행하면 주님의 나라에서 더 큰 권세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작은 일에도 철저히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선하고 충성되이 감당했기에, 큰 권세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주님은 작은 일을 통해 검증하신다.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작은 일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선하고 신실하게 충성하면 더 큰 영광의 권세를 감당케 하신다.
 
*적어도 낯부끄러운 주님의 제자의 삶이 되지 않기를 결심하면서도, 맡겨 주신 작은 일에 선하게 충성하여 나도 주님의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주님이 돌아올 때까지… 선하고 충성(신실)되이… 세상의 미움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수건에 싸 두지 않고)… 오늘도 그리 살다가…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려야지…
 
 
*”2025년 4월 3일 오전 11시 22분”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헌법의 기본 원리를 따라 당연한 심판을 악한 지도자에게 내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들에게 한 므나씩을 맡겨주신 것과 다를 바없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도록 이 땅의 악한 지도자와 하나님의 말씀를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던 이들을 심판하셨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과 교회들에게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드러나도록 충성하며 살아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열매를 삶으로 드러내며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성실하고 충성되이 다시 살아내는 걸음을 시작해야 한다.
 
긴 겨울이 끝나지 않을듯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란한 봄을 다시 주셨다. 벚꽃이 만개되기 시작한 봄에 대한의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우리 교회들은 계엄의 밤에 군인들을 몸으로 막아내고, 이후 광장에서 목터져라 외친 그 민주시민들 덕분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순전하게 다시 감당하며 나갈 기회를 덤으로 얻었다. 다음세대 우리의 자녀들이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지키며 살아내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삶을 살라고 맡기신 한 므나를 우리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성실하고 충성되이 감당하며 그 변화와 성숙의 열매를 맺혀야 할 것이다.
 
다시 봄을, 다시 한 므나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막힌 아침이다. 더구나 2025년 4월 5일 오늘은 공교롭게도 식목일이다. 오늘 맡겨주신 한 므나로 하나님 나라 나무를 한 그루 심는다….
 
 
 
*주님, 영원하신 나의 왕 되심을 찬양합니다. 제게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겠습니다. 어떤 시도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단단하게 세우다가 다시 오실 주님을 뵙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맡겨주신 한 므나를 가지고 열심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며 살겠습니다.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남기도록 충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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