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1:5-19 선명한 종말의 시대일수록 진리로 살아내고, 참고 견뎌야
21:5~36은 성전의 운명에 대한 경고와 질문(5~7절)과 예수님의 종말 강화(8~36절)로 성전 파괴의 때와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을 담고 있다. 본문은 성전의 운명(5~7절), 예루살렘과 시대의 끝을 아리는 징조들(8~11절), 제자들의 운명(12~19절)을 다룬다.
주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의 징조들에 대해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성전이 파괴되고 여러 징조가 나타남으로 종말이 찾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가운데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은혜를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주전 1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주후 27년까지 46년 동안 공사하여 완성한 성전 있었다. 그 견고함과 위대함,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님께서 헌금에 대해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이 그 성전을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들로 꾸며 놓았다고 말하자(5절),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본문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사람들과 제자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미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쓰라린 역사에도 솔로몬의 성전이 처참하게 무너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가 아니라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것이어서 그 충격은 실로 컸었다. 그런데 다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니 얼마나 섬뜩했을까? 그래서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이 일의 징조에 관해 물어본다(7절). 종말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낼까?
1. 성전의 운명에 대한 경고와 질문(5~7절)
5~7절은 종말 강화(8~36절)가 주어진 배경이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고 감탄하자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보고 있는 “이것들(타우타)”이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고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고하신다(6절). 심판의 경고를 들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 즉 “때와 징조”에 관심을 둔다.
헤롯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는 솔로몬이 건설한 첫 성전의 파괴를 상기시킨다. 예수님의 6절 말씀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를 경고한 대표적인 본문인 예레미야 7장의 언어와 유사하다. 실제로 요세푸스는 헤롯 성전과 솔로몬 성전이 각각 로마 군대와 바벨론 왕에 의해 “같은 날” 불탄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두 성전의 파괴를 연결했다(유대전쟁사). 예수님은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진 사건(렘 7장)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어조로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옛 백성의 죄가 반복되고, 성전에 대한 심판도 재현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21:1~4에서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교하고 나서 5절에 ‘헌물’로 장식된 성전의 모습을 비극적인 의도에서 서술한다. 즉 ‘누가’는 1~4절에서 부자들이 제공한 헌금과 5절의 ‘헌물’을 성전의 운명과 연결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첫 성전의 운명(렘 7장)을 따를 것이다. 두 사건은 운명의 원인을 공유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비판할 때 그들이 부를 축적하고 과부의 집을 삼키는 문제를 지적했다. 성전의 운명이 과부에 대한 사람들(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와 직결되는 점은 역시 예레미야 7장과 연결된다. 제사장들과 국가 지도자들은 율법을 거슬러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렘 7:6), 그런 행위가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시온을 처소로 선택하셨다는 약속(시 132:13~14)에 근거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피해를 보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성전은 제사장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데도 종교 지도자들은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사용했다(렘 7:10~11). 하지만 그들의 확신과 달리 언약의 요구에 따른 윤리적 실천이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출 20장; 신 5장). 예레미야 7장뿐 아니라 구약의 여러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공의의 실현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백성이 드리는 제물은 헛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기다린다(렘 7:23). 약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시온에 우뚝 선 건물을 안전의 기반으로 삼는 강한 자들을 성전 파괴로 심판하실 것이다(시 68:5).
예수님의 관점에서 제사장들은 성전을 기도하고 공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종교-사회-경제적 관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예수님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성전의 파멸을 예고하신다. 순례자들과 예배자들이 인공 건축물에 의해 경외심과 감동을 선사 받는 것을 재앙의 전조로 이해하신다. 과부와같이 가난한 자들을 외면한 채, 단지 백성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헌물’로 장식한 화려한 성전과 이를 도구로 이용하는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렘 7:4). 이웃을 위해 긍휼을 실천하기보다 세속주의에 물들어 번영을 추구하는 모임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2. 예루살렘과 시대의 끝을 알리는 징조들(8~11절)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또는 메시아들)을 조심하도록 경고하며(8절), 이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사건들(9~10절)과 자연과 우주의 재앙(11절)을 잘못 해석하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라고 하신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 거짓 선지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고 때가 이르렀다고 선포한다. 거짓 메시아 또는 거짓 선지자는 종말의 때가 이르렀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할 것이다. 제자들은 거짓 메시아,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이 하나님의 계획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별해야만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에 이어서 정치적 혼란을 거론하신다(9절). 제자들은 전쟁과 소요의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하지만 끝이 곧바로 이르지는 않을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전쟁의 영역을 온 세상으로 확장하신다. 이어 예수님은 전형적인 묵시적 언어인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을 언급하신다(11절). 전통적으로 기근은 전염병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은 1세기뿐 아니라 이후의 역사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대표한다. 즉, 이런 비극의 종류는 단지 1세기에만 제한되지 않고 누가복음을 접하는 성도들은 이미 경험하고 전해 들은 사건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b절은 땅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하늘에서는 큰 징조들이 있을 것을 예고한다. 예수님의 이런 우주적 징조들을 역사의 종말, 인자가 다시 올 때 나타날 현상으로 제시하신다.
성전이 무너질 때와 징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당부하신 것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새번역_8절)” 많은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거다. 예수님 외에 자칭, 타칭 그리스도임을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리라는 것이다.
“미혹”이라는 말은 “오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대해 오해하였다(막 12:24)고 말씀하실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자신의 오해한 마음과 맞는 말을 하는 이들을 쉽게 따른다. 주님은 “미혹” 받아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은 말만 무성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임하실 것(행 1:11)”이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상 주후 1세기를 전후한 시기는 가장 많은 메시아가 등장한 시기다. 예수님 이후 무수한 메시아 운동이 일어났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종말은 말씀을 말씀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순수하게 따르는 것이, 미혹 받고 오해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이다.
오늘날 세상이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심화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듣고 싶은 것을 말하는 사람”을 따르는 자기 우상의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살라고 미혹하는 시대가 되었다.
3. 제자들의 운명(12~19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을 경고하신다. 12~15절에서는 체포되고 재판받게 될 상황을 예고하신다. 16~19절에서는 가족과 친척과 사람들에 의해 미움을 받거나 죽게 될 운명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상당 부분은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12~15절이 외부 집권 세력에 의한 핍박이라면, 16절은 가족과 친척과 벗에 의한 반대를 보여준다. 17절은 제자들이 당할 일반적인 미움을 예고한다.
본 단락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뿐 아니라 성전 파괴 이후부터 인자의 재림 때까지의 이방인들의 시간을 포괄한다. 먼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즉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한다는 이유로 기득권 세력에 의해 어려움에 부닥칠 것이다(12절). 그러나 핍박은 증언의 기회가 된다. 제자들은 핍박 가운데서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 마음속에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14절).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이다(15절). 이어서 예수님은 가족과 친척과 벗에 의한 핍박을 예고하신다. 혈육에 의해 제자 중 일부가 죽음에 던져지게 되는 것은 비극이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반대는 어떤 박해보다 제자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미리 대비시키신다. 17절은 신앙 때문에 생기는 일반적인 세상의 미움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런 박해와 반대와 미움에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신다(18절). 죽음에 처하는데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영적인 안전”을 의미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18:30) 어떤 핍박이라도 그들을 궁극적으로 해할 수 없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의존하는 제자는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제자들이 종말의 시간을 보내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새번역_13절)…. 나는 너희의 모든 적대자가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새번역_15절)….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기(새번역_17~18절)” 때문이다. “증언의 기회”는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이런 종말의 징조와 현상들 속에서 제자들을 향한 박해는 하나님 나라 복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실로 진리임을 증언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또, 이 진리를 제자들이 “증언할 기회”가 되기도 하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박해(온갖 어려움들)를 만나면 오히려 “내가 믿는 복음이 참되구나”를 확인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온갖 박해자들 앞에 서서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언할 “구변과 지혜”를 주시기에(14~15절) 더더욱 그렇다. 종말의 징조는 내가 믿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한다. 담대하게 믿음으로 당당히 살아야 할 이유다!
하지만 박해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쟁의 시기들을 지날 때의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냉대와 오해에 직면해야 하고, 세상의 집단 따돌림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내해야 할 것이 있다. 보호의 은총이 늘 머물겠지만, 세상이 주는 미움의 고통은 그대로 직면해야 한다. 믿음의 마음은 지켜 주시겠지만, 육신 감내해야 할 세상의 미움은 여전하다. 그래서 당부하신다. ”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④얻어라.” / ④다른 고대 사본에는 ‘얻을 것이다.'(새번역_19절)”
“참고 견디라”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내야 할 제자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도록 보호하시겠지만, 살아내야 할 세상에서 받는 미움을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질 것이다. 그 미움을 오롯이 직면하며 견뎌야 한다. 견디되, 그저 꼭꼭 숨어서 견디지 말고 어디서든 “복음의 사람으로 증언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하며 살아내라고 하신다. 이 말씀으로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지는 아침이다.
나는?
-심판의 때,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성전의 화려한 외양이 아니다. 성전을 찾는 이들의 마음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 버린 성전을 감출 수 없다. 그런 성전은 자칭 메시아라고 떠드는 자들의 미혹을 당당하게 이겨낼 수 없다. 나리와 소요가 던지는 두려움에 맞설 수 없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에 마음을 의지하면 안 된다.
-예루살렘 성전의 겉은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강도의 소굴, 부패의 온상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화려한 성전 건물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주님은 회칠한 무덤 같은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감춰진 실상을 보고 멸망을 선포하신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내면의 진실한 모습으로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보이려고 살아서는 곤란하다.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살면 주님이 봐주신다. 규모와 형식에 집착하다가 본질과 정체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화려한 외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함이 진득하게 드러나는 삶이어야 하겠다.
-성전 멸망의 시기와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전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신다. 성전 멸망 전에 메시아를 자처하는 거짓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멸망에 대한 근거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믿음의 대상마저 흔들어 놓을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뜻이다. 또 곳곳에서 난리와 소요의 소문이 들리더라도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아직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시대마다 반복될 것이다. 그런 난리를 보면서 세상의 끝이 왔다고 호들갑 떨지 말라. 오히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전 멸망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주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당할 것이다. 세상 통치자와 권력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심지어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다. 외면하고 미워할 뿐만 아니라 죽음에 넘겨주기까지 할 것이다. 이것 역시 결정적인 징조는 아니다. 성전 멸망 직전만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 전까지 언제 어디서나 이런 반대와 핍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없다. 주님은 인내하는 성도들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난을 복음의 증거로 삼게 하시고 모든 대적이 대항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다. 수세에 몰린 영적 곤경과 고난 속에서도 궁색한 변명과 변증이 아니라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주님께서 개입하여 주신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내도록 이끌어 주신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성도들을 향한 핍박의 강도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믿음의 연단과 시험은 더욱 혹독해질 것이다.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이때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인내다. 오래 참음이다. 끝까지 신앙을 붙드는 힘이다. 그러면 “영혼을 얻을 것이다.” 즉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영생을 누릴 것이다. 육신의 머리털은 다치기도 하고 목숨은 잃기도 하겠지만, 그의 영혼은 온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미혹 받지 않고, 징조와 현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나라 복음이 진리임을 확인하는 증거로 삼고, 증언의 기회로 삼아 세상이 퍼붓는 미움 속에서 참고 견디며 살아내라!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이유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세상이 주는 고난, 핍박에 지칠 수 있어도 믿음은 오히려 이것을 진리의 증거로 삼아 “참고 견디며” 진리 안에 살아내는 오늘이기를 다짐한다.
*진리로 살아내되…. 참고 견디자….
*주님, 재림의 때가 가까울수록 핍박은 노골화되고 환난은 선명해지겠지만, 더욱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살아내고, 참고 견디다가 주님을 맞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