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유다의 배신과 유월절 새로운 만찬 [눅 22:1-23]
 – 2025년 04월 13일
– 2025년 04월 13일 –
눅 22:1-23 유다의 배신과 유월절 새로운 만찬
    
유월절이 다가오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 고심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가 찾아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한다. 한편,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 식사를 나눌 장소를 준비시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신다. 가장 엄숙하고 애정 어린 시간에 자신의 몸과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담은 새 유월절 예식을 제정하신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이 예식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이 의미 있는 자리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함께 있었다.
    
유월절은 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장막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3대 절기다. 유월절은 하루(니산  14일), 무교절은 한 주간(니산 15~21일) 동안 지키는 절기로서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대 최대의 절기다. 이 절기들은 유대의 농경 문화, 농업 주기와도 관련이 있는데, 유월절과 무교절은 봄에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레 23:1~14)에 지켰다. 또한 유월절에는 애굽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념했고 무교절(누룩 없는 빵의 절기) 에는 탈출 전날 밤에 누룩 없는 빵(전병)을 먹은 것을 기념했다(출 12장; 레 23:4~8). 유월절과 무교절은 원래 따로 지켰으나 포로기 이후 합쳐져 유월절 또는 무교절이라고 불렀다. 이런 의미로 유월절은 무교절의 첫날이었다. 원래는 가정에서 유월절을 보냈으나 점차 성전을 중심으로 절기를 진행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가정의 요소와 성전의 요소가 융합되었으며, 양은 성전에서 잡았고, 식사는 가정에서나 여러 형태의 모음으로 가졌다.
    
    
    
1. 예수님을 팔기로 거래하는 유다(1~6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1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2절). 이미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 차례 충돌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계획하고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의 예루살렘은 평소 인구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몰려왔기에 예수님을 은밀하게 잡아 죽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사탄이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인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다(3절).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사탄과 하나님의 우주적 충돌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을 넘긴 자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열두 제자 가운데 있었다. 사탄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제자에게 들어가 그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기회를 얻었다. 한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최고의 자리에 앉은 유대 지도자들이 사탄의 목적에 충실히 동조한다.
    
‘누가’는 유다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스승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4~6절).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줄 방안을 논의한다(4절). 그들은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동의했다(5절). ‘누가’는 “기뻐하다(카이로), 또는 기쁨(카라)”을 하나님의 구원 행위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정반대의 목적이 실현되는 것으로 기뻐한다. 유다는 이 기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거래에 합류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다.
    
마가와 마태와 마찬가지로 누가는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팔기로 약속하는 사실을 언급한다(5절; 마 26:15; 막 14:11). 이는 유다의 관심이 돈에 있었음을 암시한다(요 12:6; 13:29). “돈”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의 적극적 의지를 이끌어낸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돈을 택하며 돈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예수를 위해 따르다가 기회가 오면 돈을 위해 그를 팔아버린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엇보다 돈을 사랑해 예수를 따르고 예수 가까이 있는 자는 잠재적인 사탄의 세력이다.
    
    
    
2. 유월절 만찬을 위한 준비(7~13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다(7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하셨다(8절). 유대인들은 유월절인 니산월 14일에 성전에서 힘없고 1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리고(출 12:5), 예루살렘의 가정에 돌아와 유월절 만찬을 가졌다. 즉 해가 지고 나서 니산월 15일에 온 가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순간을 기념하면서 식사를 나누었다(출 12:6~20). 신명기의 말씀을 따라 유대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기념하게 되는데(신 16:5~8), 그러나 운집한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제단에서 양을 드린 후 예루살렘 도성에 따로 식사 공간을 마련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길 원하시는지 예수님께 묻는다(9절).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야 한다(10절). 그리고 그 집의 주인에게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눌 방(객실, 카탈뤼마)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 집주인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아나가이온)을 보여줄 것이다(12절). 두 제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사람을 만나 유월절 식사를 준비했다(13절).
    
    
    
3.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식사(14~20절)와 배신자에 대한 경고(21~23절)
유월절 식사는 준비됐고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다(14절). 예수님은 이 유월절 식사를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셨다(15절).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 성취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6절).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과거 애굽에서 경험한 해방과 연결하시는 것이다. 유월절의 완성을 가리키는 완전한 해방과 자유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완성된 유월절 만찬을 가지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고 지금까지 교회가 의례로 지키는 식사가 유월절 식사인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첫째, 주의 만찬은 유월절의 해방을 기억하게 한다. 교회는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것처럼, 속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오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유월절 식사가 혼자 먹는 식사가 아니라 가족의 식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앉아 만찬을 가졌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도 공동체의 식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신자들을 태어나게 할 뿐 아니라 교회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셋째, 주의 만찬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재림)의 식사를 소망하는 식사다(고전 11:26). 그러므로 교회는 주의 만찬을 통해 “기억하고(19절), 기대해야(16, 18절)” 한다. 성도들은 “이미” 실현됐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희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환희를 소망해야 한다.
    
예수님은 잔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한 후에 잔을 나누도록 지시하신다(17절). “너희끼리 나누라(17절)”는 제자들이 현재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공유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8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 식사가 완성되는 것과 같은 시간을 말한다.
    
예수님은 빵을 들고 감사한 후에 빵을 뜯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예수님께서 빵을 잡고 감사하고 뜯어 나눠주시는 모습은 오병이어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빵을 내 몸이라고 하셨다. 이는 빵이 상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예수님의 몸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빵을 나누면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저녁을 먹은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신 제자들을 위해 부어지는 잔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이라고 하신다(20절). 제자들을 위해 부어지는 잔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창 9:6; 겔 18:10; 사 59:7). 예수님의 죽음은 새 언약을 제정하고,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다. 이사야 53:12에서 “그는 그의 목숨을 죽음에 부었고 범죄자들로 여김 받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졌다”라는 예언을 통해 ‘너희를 위해’ 피를 붓는 표현은 고난의 종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드리는 것을 의미함을 확인시켜 준다.
    
“새 언약”은 예레미야 31:31의 언어인데, 새 언약을 통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렘 31:33~34)”라는 약속이 성취된다. 희생제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맞는다.
    
빵과 잔을 나누는 모습에서 두 가지 목적이 드러난다. 첫째, 빵과 잔을 나누는 목적은 “기억”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유월절을 반복하고 유월절 식사를 반복함으로써 과거의 출애굽 해방 사건을 기억했다. 노예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해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런 점에서 빵과 잔을 나누는 것은 과거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다. 성도들도 주의 만찬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해방된 사실을 기억하고 완성될 나라에서 만찬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너희를 위해(19, 20절)”는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한 대리적 희생임을 의미한다.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 죽었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목적은 아버지와 자녀, 왕과 백성과 같은 관계를 하나님과 맺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할 목적으로 새 언약의 피를 부어주셨다.
    
21~23절은 배반자에 대한 예고 장면이다. 예수님은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21절)’라고 예고 하신다. 참담한 것은 유월절 식사는 가장 친밀한 사람, 가장 신뢰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자리다.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 배반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가장 친밀한 관계의 사람에 의해 팔리는 비극을 뜻한다. 그런데 이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22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인자를 파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며 탄식하신다. 그가 유다였다.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고 결국 사탄의 뜻에 동조하다가(22:3)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행 1:18).
    
예수님의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라며 서로 묻는다(23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며, 서로 신뢰 관계를 유지한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이었다.
    
    
    
나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살해 음모는 집요했다. 백성들의 반응을 고려하여 여러 방책을 궁리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예수를 제거하고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시기와 방법(유월절에 살해함)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고 자신들의 악의가 노출되었음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할 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지하고 싶었던 것은 제사장의 지위와 그것이 주는 특권이었을 뿐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백성들과의 원만한 관계, 그것을 통해 로마의 인정을 받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과 영화를 유지해 준다고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대로 살았다.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불의한 종교 권력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데 일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였다. 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그의 눈과 마음을 어둡게 했고 악한 영의 역사를 허용하였다. 그는 하나님 아들의 말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상의하지 않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자들과 상의했다. 그가 바란 것은 돈이었을 뿐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의 영광도 아니었다. 매일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도 믿고 따르던 주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유월절을 앞에 두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죽일 일을 도모하지만,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서 자기 준비하셨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준비하신 것처럼, 유월절 만찬 자리를 준비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종교 지도자들의 간교한 계략이나 유다의 배신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이 손수 주도하시고 이루신 일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죽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 무명의 사람(집주인) 의 순전한 순종과 아낌없는 헌신을 통해 유월절 만찬이 준비된다. 불의와 탐욕에 빠져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는 유다(6절)와 달리 언제든지 주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고난받기 전”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아버지께서 작정하신 “때(십자가)”가 이르렀고 이것이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이 될 것을 아셨다. 유월절 어린양인 자기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새 출애굽) 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고, 제자들이 이 유월절 만찬에서 그것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그 친밀한 교제와 연합의 만찬에서 뼈아픈 배반을 예고하신다. 그의 배반은 성경에 예언된 내용이었지만(시 41:9),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탐욕을 쫓은 “유다의 선택과 결정”이었다. 그래서 불의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는 그를 향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이 만찬은 출애굽의 역사를 기념할 뿐 아니라, 새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게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누리게 될 영원한 메시아 잔치를 소망하게 한다. 오늘의 이 만찬은 약속의 성취를 확정하고 그 완성을 선취하는 일인 것이다. 성만찬에 깃든 연합과 감사, 교제와 헌신은 그 나라를 맛보며 누리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출애굽한 후 언약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통해 새 출애굽과 새 언약을 이루시고 새 이스라엘(교회)을 이 땅에 세우신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예수와 성령으로 연합하여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주님을 대신하여 가시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출 19:6).
    
    
*묵상하면서 “죽이려고 궁리하는 가룟 유다와 그들”과 “스스로 죽으시려고 준비하시는 주님”이 선명하게 대비가 된다. 주님은 죽이려고 궁리한 그들에 의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을 준비” 끝에 죽음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스스로 죽음으로 죽이려는 죽음을 이기신 것이다. 유월절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순종”이다. 출애굽 할 때에도 모세의 명령에 따라 순종한 이들이 죽음에서 구원받았다.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말씀대로” 준비하였다. 순종의 걸음 끝에 예비된 만찬 장소로 그들을 인도한 것이다. “순종”하는 두 제자의 모습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행하는 모습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얼마나 무모한 명령인가? 그 북적거리는 유월절 기간의 예루살렘에서, 적어도 12명이 들어가 식사할 수 있는 넓은 장소를 구하는 것은 몇 배의 비용을 지불한다 해도 쉽게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제자는 자신들의 상식적인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한다.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분명히 ‘종’일 것이다. 그 종을 따라 들어가 그 집 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그 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은 자리를 깔아 놓은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니, 너희는 거기에다 준비를 하여라(새번역_11~12절).”라는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출애굽 당시 백성들이 장자의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였다.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 “장자”가 살았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곧이곧대로 순종하였다. 제자들뿐인가? 집주인도 제자들의 요청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는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락방을 내주는 행동을 하였다. 결국 주님이 스스로 준비하신 유월절 식사였다. 이 준비는 단지 식사, 만찬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자신의 죽으심을 기념하게 될 준비였다. 즉,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 양처럼 되기 위한 준비였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이 일을 오랫동안 준비하셨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묵묵히 준비하셔서 베풀어주신 은혜이다. 주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유월절 준비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 죽일 궁리 끝에 당하신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셔서 제물 되어 주신 죽음으로 나를 살려주셨다. 그 은혜로 오늘을 산다. 그 은혜로 영원을 살 것이다.
    
*”죽일 궁리”에 마음을 모으고 힘과 재물을 거래하는 세상이 아닌, 나를 위해 스스로 죽으심으로 생명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어라! 죽일 궁리에 힘 쏟지 말고, 순종하여 “말씀하신 대로” 살아가는 삶이어라!
    
    
    
*주님, 가장 친밀한 이들과 함께하는 식사의 자리에서 배반을 예고하시는 그 마음이 애처롭습니다.
*주님, 주님이 준비하여 차리신 새로운 유월절 예식인 성찬을 늘 지키며 주님의 구원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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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29-38 그날을 준비하는 제자의 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인자의 재림을 예고하시며 “징조”에 대하여 설명하셨고, 본문은 “때”와 관련된 교훈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구체적인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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