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부인하는 베드로, 그를 바라보시는 주님 [눅 22:54-71]
 – 2025년 04월 16일
– 2025년 04월 16일 –
눅 22:54-71 부인하는 베드로, 그를 바라보시는 주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54, 63~65절), 산헤드린 공회(66~71절)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신다.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서 군인들의 모욕을 받는 장면 사이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하고 닭이 우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54~62절). 대제사장의 뜰에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빛을 본 순간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61~62절).
    
    
    
1.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54~62절)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간다(54절).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가 대제사장의 뜰까지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피우고 한 여종이 불빛에 비친 베드로를 보면서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라고 말한다(55~56절). 베드로는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57절).”라고 부인한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그에게 속했다”라고 말하자(58절), 베드로는 “이 사람아(남자여)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약 한 시간 정도 흐른 후 또 다른 사람이 장담하면서 베드로를 가리켜 그가 갈릴리 사람이고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증언한다(59절). 그는 예수님을 부정하는 말을 들으면서 갈릴리 억양이나 말투로 출신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게 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지만(33절),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다.
    
유대 전통에서 증인의 요건은 두세 사람이다(신 19:15). 대제사장의 뜰에서 여자와 남자(이 사람아), 어떤 사람 등 세 증인(여자는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앞에서 베드로는 완벽히 주를 부인했다. 그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곧 닭이 울었다(60절).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61절). 베드로를 향해 돌이킨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주쳤다. 예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 베드로도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그의 말을 기억하고 통곡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빛을 본 순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겪은 경험과 들은 말씀이 떠오른 것이다. 예수님의 눈빛은 베드로에게 두 가지의 변화를 일으켰다. 첫째, 베드로의 실존을 정확히 드러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돌이켜 형제들을 굳게 할 것과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죽기까지 충성하겠다고 맹세했었다(33절). 이 모든 과정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그 속에 있던 철부지 베드로의 모습이 가감 없이 비친다.
    
둘째, 주님의 눈빛은 긍휼의 시선이다. 눈빛을 마주한 베드로는 통곡했다. 통곡은 회개다. 베드로의 비통한 슬픔은 회개를 의미하며, 회개는 변혁으로 이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12:9)”라는 경고에 따르면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완벽하게 부인한 베드로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의 연약함을 알고 부르셨고,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하셨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명을 맡기셨다(31~32절). 회개한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유대 당국자들 앞에 서게 될 때 투옥과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을 보인다(행 4~5장).
    
    
    
2. 심문과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63~71절)
63~65절은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렸다(63절).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선지자라면 때린 자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놀린다(64절). 이 외에도 여러 말로 욕을 쏟아부으며 모독한다(65절). 예수님은 군인들의 모욕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반응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53: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었다.
    
61~71절은 산헤드린 공회에 소환되고 재판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고 나서 날이 밝아 오자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앞에 소환된다(66절). 공회의 첫 번째 질문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묻는다(67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체를 밝혀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므로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한다(67~68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라고 대답하신다. 이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70절)”고 되묻는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말하고 있다”라고 모호하게 반응하신다. 적대적인 질문자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그들의 판단에 맡기신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단정 지어 버린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리스도 왕’이라고 주장한 이유로 예수를 고발했다(23:2).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질문한 것이 의도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는 혁명을 시도하는 행위였다. 이 정도의 주장만으로도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할 요건이 된다. 이런 이유로 공회는 더 이상 증거를 수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에서 보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받는 종으로서 낮아져 모욕당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은 세상 권력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이다. 참으로 의지할 대상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과신하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어디든지 주와 함께 가겠다고 장담하더니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며 거리를 두었고, 결국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는 강한 예수를 원했을 뿐 능욕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예수를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하던 예수는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참믿음은 저 십자가의 예수를 믿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다. 말씀을 무시하고 기도를 멀리할 때 우리도 언제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 주님과 나의 영적인 거리는 얼마나 될까?
    
-예수님은 군사들에게 심한 희롱과 능욕을 당하신다. 채찍보다 더 고통스러웠겠지만, “대속의 길”이기에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셨다. 베드로는 부인했지만, 공회의 심문에서 자신이 하나님 우편에 앉을 ‘인자(단 7:13)’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셨다. 인간적인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서는 귀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꾸짖어 못 하게 하시더니, 수난이 기다리는 자리에서는 시인하고 계신다.
    
-특히 하나님께 통치권과 심판의 권세를 받을 ‘인자(21:27)’임을 강조하심으로써 지금은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심문을 받고 계시지만 그때에는(이제 후로는) 심문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심판받게 될 것임을 완곡히 말씀하신다. 거짓과 불의가 진리와 정의를 짓밟고 어둠의 권세가 모든 것을 잡은 듯 보이지만,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신원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한편,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예수님은 자신을 외면하여 부인하던 베드로를 보셨다. 하지만 정죄가 아닌 용서, 경멸이 아닌 긍휼의 시선이었다. 그를 위한 오랜 기도(32절)와 그를 향한 자비로운 시선, 그리고 변함없는 말씀이 베드로를 회개와 회복으로 이끈 것이다. 혹시 실수와 실패, 회의와 불신, 낙담과 절망의 자리에 있는가? 혹독한 비난과 가혹한 자책에서 눈을 돌려 자비로우신 주님을 바라보자.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주님은 자신을 향한 무수한 무고의 외침들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셨지만, 사랑하는 제자의 낯익은 음성에 마음을 고정하고 그가 부인하는 말들에 스스로 고통 받을 제자가 안쓰럽기만 하신 것이다. 닭이 첫 번째로 울고 나서도 깨닫지 못한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는 말을 아직 하고 있을 때  울린 두 번째 닭 울음 소리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머리가 하얗게 새어지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베드로를 주님께서는 돌이켜 바라보셨다.
 
*주님은 눈빛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나는 그렇게 상상이 되었다. 31-32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새번역) 주님은 정죄와 판단, 경멸의 눈빛이 아니라 이미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대로 자비와 긍휼의 눈빛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돌아올 일만 남았다. 형제들을 굳세게 붙잡아 다오….”
 
*실수와 실패, 회의와 불신, 낙담과 절망이 삶을 엄습할 때 주님은 누구에게라도 이 눈빛으로 바라 보신다. 스스로 자신을 향한 혹독한 비난과 가혹한 자책에서 시선을 돌려 언제나 자비로우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곧 진정한 회복의 시작일 것이다. 주님의 말(말씀)은… 누구에게라도 자비로우신 눈빛의 언어이다. 그 눈빛이 나의 시선과 마주될 때, 통곡하며 달려 나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한다. 나에게도 주님과 같은 자비의 눈빛이 있기를 고대해 본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점점 더 강하게 부인했다. 마태는 베드로의 부인하는 말을 “맹세, 저주”까지 하며 내뱉었다고 기록했다. 닭이 울자마자 주님은 눈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닭소리와 동시에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닭의 울음 소리를 듣기 전까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두려움에 몰려서 자신이 내뱉는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하는 말을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것이었다. 주님의 가르침은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다.”(새번역_마 10:33)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 가르침으로 결말을 내지 않으셨다. 어떤 상황과 여건에 직면 할 때 때로 “두려움으로 연약하여 져서 부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진정한 결말을 베드로에게 허락하셨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기를(눅 22:32)” 기도하신 대로, 조반을 친히 먹여 주시면서 다시 “나를 따르라”(요 21:15-19)고 불러 주신다. 언제든지 다시 주님의 말씀을 받든다면 회복될 수 있다.
 
*나도 베드로처럼 상황과 여건에 몰려 연약한 입술로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 두려움에 내 몰려 그렇게 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주님도 이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고난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 아무리 큰소리로 장담하여도 그것이 진실인지, 허세인지 금방 판가름 난다. 인간은 이리 약한 존재이다. 주님의 말씀을 직면하는 순간… 유구무언… 그저 통곡만 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일까? 주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에 가장 먼저 한달음으로 달려갔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이 직접 챙겨 주시는 아침을 먹으면서 주님께서 물어보시기 전까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직면한 자신의 한없는 연약함 앞에 고개를 들 수도, 입을 열어 먼저 말할 수도 없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만 무성하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주님의 눈빛의 말 앞에 어떤 말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나도 베드로처럼 주님의 자비로운 눈빛의 말을 직면했기에 이제 나의 말을 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말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하고 싶은 말을 무성하게 내뱉는 것보다 주님의 말을.. 주님처럼 “말씀의 눈빛”으로 말하는 삶으로 살아가리라… 수백 마디의 말을 무수하게 내뱉는 것보다, 주님처럼 자비로운 눈빛의 언어를 통달하고 싶다.
 
 
*심문을 받으시는 주님을 묘사하며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모욕(희롱, 조롱)”이다. 그들은 이미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했기에 “모욕”의 말을 점점 더 가중하여 내뱉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더욱 더 하나님을 조롱한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다.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인생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조롱하고 모욕하는 말을 주저없이 내뱉는다. 자신이 내뱉은 말로 자신이 심판 받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다. 나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말들이 난무하지 않기를 늘 조심해야 겠다.
 
    
    
*주님, 끝까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며 부인하는 베드로가 남 같지 않습니다. 섣불리 자만하지 않는 겸손함의 삶을 추구하겠습니다.
*주님, 모든 수난과 능욕을 담담히 받으며 십자가의 대속의 길로 나아가시는 걸음에 주저함이 없음을 봅니다. 저의 믿음의 걸음도 주저함이 없는 걸음이기를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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