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거룩한 공동체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고전 5:1-13]
 – 2026년 06월 08일
– 2026년 06월 08일 –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룬다. 충격적인 근친상간과 간음의 문제다.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도 교회안에서 오히려 범죄한 자는 자랑까지하는 형편이고, 공동체 지체들은 침묵하고 있다. 세상의 힘의 논리에 굴복하여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는 자랑까지 한다. 자신의 범죄를 오히려 자랑하는 자의 교만함과 이에 대하여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참담하다.(1-2절)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1. 낮아진 거룩의 지표(1-2절)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들이나, 이를 묵인하는 공동체나 모두 ‘거룩’을 상실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지역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로마법은 시민권자라도 근친상간이나 간음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렇기에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교회 밖 세상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이 범죄가 교회안에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음행의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공동체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있고, 공동체는 이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고, 더구나 만약 간음을 행한 당사자들이 교회 안에 유력한 자들이었다면 암묵적 침묵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결국 분쟁이나 음행이나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공동동체가 되어 버렸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으니 낮아질 대로 낮아진 거룩함이 민망할 따름이다. 오늘날 교회가 다를까? 세상이 더 많은 우려와 걱정어린 시선으로 비토 하는 지경이니 할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이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새번역_2절)”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고린도 교회나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한국교회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진개진’이다.



2. 그러나 이제부터라도(3-13절)
통탄하며 음행한 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묵인하고 방관 했을지라도 이제라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판단하라(3-5절). 몸은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 이미 판단한 것처럼 너희도 나의 영과 함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보냄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먼저 범죄한 이의 육신은 이렇게 판단 당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다(5절). 이것은 공동체가 그의 음행의 행동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하고 죄를 죄로 여기게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라는 의미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2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적 방만함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다. 교인 하나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교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또, 음행이 교회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6-8절). 음행은 고린도 지역의 오랜 문화였다. 물론 로마법에 의해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범죄였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음행의 문화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능적인 사회였기에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범죄들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이런 음행과 같은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구원 얻기 이전의 평범함 속에 깊이 깃들어져 있는 ‘문화’라는 포장지에 잘 포장된 “거룩”을 무너뜨리는 “묵은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안에 깃들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 묵은 누룩이 조용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하나님 나라가”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이라는 예를 들어 음행을 자랑하는 자들의 언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이런 죄에 대해 묵인하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덩어리(반죽)이 되었기에, 이런 죄의 묵은 누룩들은 깨끗히 치워야 한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새번역_7절)”

묵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으로 비유하며 이것은 치우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묵은)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새번역_8절).”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다(9-13절). 이에 대하여 이전에 썼던 편지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먼저 교정한다.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명령(2, 5, 13절)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여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10절),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성찬, 애찬)는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지 음행하는 자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탐욕, 우상 숭배, 중상모략, 술 취함, 약탈도 이에 속한다. 즉,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의미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을(함께 먹지도 말라) 포함하여 죄와 벗한 이들에게 단호한 죄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그런 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를 통해 범죄한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음행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거다. 세상의 음행자는 세상 법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되, 공동체 안의 음행자는 엄격하게 처리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의 음행,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추측하건대 과부가 된 계모)를 취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용납한 것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것이다. 거룩과 성결함의 요구를 무시하는 오만함은 영적 우월감이 아니라 타락의 증거일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거대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음행한 자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사탄의 영역에서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통해 그가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동체는 음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랑하였다. 한 사람의 음행은 아주 작은 일로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도는 세상 바깥의 음행한 자들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법에 맡길 뿐이지만, 공동체 안에 음행자들과는 시귀지 말고 쫓아내 공동체의 거룩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참… 고개를 들 수 없는 묵상 본문이다. 이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매우 관대하거나 오히려 실제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덮고 덮음으로 “음행”이 교회안에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안의 성추행과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마음에 “탁”허니 걸린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낮아질대로 낮아진 거룩의 지표를 끌어 올려야 하리라. “악의와 악독”의 묵은 누룩과 같은 죄의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내 마음과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성실과 진실”함으로 거룩에의 걸음을 다져 나가리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공동체 안의 음행자들을 포함한 여러 반교회적인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구별하리라. 그래야 범죄한 그도 살고, 나도 살며, 교회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픔을 주저하지 않으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에 깊이 함몰되어 죄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은혜의 심판아래 서도록 지금 감내해야 할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내야 한다! 내가 살고 그가 살아나기 위해 “죄”의 악의와 악독함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단호히 행해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왜 음행한 당사자들을 묵인했을까? 그것은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향력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혈통이든… 막강했을 것이다.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향력 보다 더 막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게 구너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장 중요핟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음행의 문제 이면에는 세상 이치와 하나님 나라 이치의 충돌이 담겨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나의 삶이 여전히 세상 이치따라 움직인다면, 나조차도 음행을 구별하여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 탐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세상 이치라는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전히 중상모략하며, 여전히 술 취하며, 여전히 폭력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으면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 이치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세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악의와 악독’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옛적 관습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난미 나라의 새로운 법이 나를 주장하도록 늘 구별하고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 이런 면에서 부끄럽다… 참 많이 부끄럽다… 주님.. 한 몸된 교회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실과 진실”함의 한 걸음을 떼도록 도우소서….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 기도제목

*주님, 이제부터라도 거룩과 성결을 지키는 공동체이기를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공동체가 신실한 권징으로 거룩을 회복하여 세상의 빛됨을 회복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룬다. 충격적인 근친상간과 간음의 문제다. 매우 심각한 문제임에도 교회안에서 오히려 범죄한 자는 자랑까지하는 형편이고, 공동체 지체들은 침묵하고 있다. 세상의 힘의 논리에 굴복하여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는 자랑까지 한다. 자신의 범죄를 오히려 자랑하는 자의 교만함과 이에 대하여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이 참담하다.(1-2절)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1. 낮아진 거룩의 지표(1-2절)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충격적이게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음행을 행한 당사자들이나, 이를 묵인하는 공동체나 모두 ‘거룩’을 상실했다.

고린도지역은 항구 도시였다. 이에 걸맞게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지역이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로마법은 시민권자라도 근친상간이나 간음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렇기에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교회 밖 세상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이 범죄가 교회안에 일어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음행의 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공동체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일을 드러내고 있고, 공동체는 이에 대하여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 싸우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상황이고, 더구나 만약 간음을 행한 당사자들이 교회 안에 유력한 자들이었다면 암묵적 침묵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결국 분쟁이나 음행이나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공동동체가 되어 버렸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으니 낮아질 대로 낮아진 거룩함이 민망할 따름이다. 오늘날 교회가 다를까? 세상이 더 많은 우려와 걱정어린 시선으로 비토 하는 지경이니 할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이런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새번역_2절)”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고린도 교회나 통탄해 하지 않고, 범죄한 자를 제거하지도 않는 한국교회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진개진’이다.



2. 그러나 이제부터라도(3-13절)
통탄하며 음행한 자에 대하여 지금까지 묵인하고 방관 했을지라도 이제라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판단하라(3-5절). 몸은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 이미 판단한 것처럼 너희도 나의 영과 함께 ‘주 예수의 이름으로’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보냄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먼저 범죄한 이의 육신은 이렇게 판단 당할지라도 그의 영혼이 구원얻게 하기 위해서다(5절). 이것은 공동체가 그의 음행의 행동에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게하고 죄를 죄로 여기게 하여 그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라는 의미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2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영적 방만함을 보여주었다는 의미다. 교인 하나를 잃는 것이 두려워 교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또, 음행이 교회안에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6-8절). 음행은 고린도 지역의 오랜 문화였다. 물론 로마법에 의해 근친상간이나 간음은 가혹하게 다루어지는 범죄였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음행의 문화는 그 지역사회의 문화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관능적인 사회였기에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범죄들이 쉽게 일어날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한다. 이런 음행과 같은 “묵은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 구원 얻기 이전의 평범함 속에 깊이 깃들어져 있는 ‘문화’라는 포장지에 잘 포장된 “거룩”을 무너뜨리는 “묵은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안에 깃들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 묵은 누룩이 조용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하나님 나라가”가 세상 나라”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룩”이라는 예를 들어 음행을 자랑하는 자들의 언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이런 죄에 대해 묵인하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물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는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덩어리(반죽)이 되었기에, 이런 죄의 묵은 누룩들은 깨끗히 치워야 한다. “여러분은 새 반죽이 되기 위해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누룩이 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새번역_7절)”

묵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으로 비유하며 이것은 치우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묵은)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악독이라는 누룩을 넣은 빵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아 누룩 없이 빚은 빵으로 지킵시다(새번역_8절).”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가르친다(9-13절). 이에 대하여 이전에 썼던 편지를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오해를 먼저 교정한다.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명령(2, 5, 13절)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단절하여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10절), 교회 안의 음행하는 자들과 함께 먹지도 말라(성찬, 애찬)는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지 음행하는 자만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탐욕, 우상 숭배, 중상모략, 술 취함, 약탈도 이에 속한다. 즉, 음행한 자를 쫓아내라는 의미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성찬을(함께 먹지도 말라) 포함하여 죄와 벗한 이들에게 단호한 죄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보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그런 죄의 영향력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를 통해 범죄한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음행자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음행 문화에 동조하지 않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라는 거다. 세상의 음행자는 세상 법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되, 공동체 안의 음행자는 엄격하게 처리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임으로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 안의 음행, 용납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추측하건대 과부가 된 계모)를 취하는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이 일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벌어졌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용납한 것이었다. 이같은 교회의 모습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 도덕적 해이로 이어진 것이다. 거룩과 성결함의 요구를 무시하는 오만함은 영적 우월감이 아니라 타락의 증거일뿐이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거대함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음행한 자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사탄의 영역에서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받도록 명령한다. 이는 그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징계를 통해 그가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동체는 음행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도리어 자랑하였다. 한 사람의 음행은 아주 작은 일로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성도는 세상 바깥의 음행한 자들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 법에 맡길 뿐이지만, 공동체 안에 음행자들과는 시귀지 말고 쫓아내 공동체의 거룩과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


-참… 고개를 들 수 없는 묵상 본문이다. 이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매우 관대하거나 오히려 실제적인 계산방식에 따라 덮고 덮음으로 “음행”이 교회안에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안의 성추행과 성폭력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본문은 마음에 “탁”허니 걸린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낮아질대로 낮아진 거룩의 지표를 끌어 올려야 하리라. “악의와 악독”의 묵은 누룩과 같은 죄의 오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내 마음과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성실과 진실”함으로 거룩에의 걸음을 다져 나가리라.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교회 공동체 안의 음행자들을 포함한 여러 반교회적인 죄에 대하여 단호하게 구별하리라. 그래야 범죄한 그도 살고, 나도 살며, 교회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영혼을 살리기 위한 아픔을 주저하지 않으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죄에 깊이 함몰되어 죄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은혜의 심판아래 서도록 지금 감내해야 할 아픔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내야 한다! 내가 살고 그가 살아나기 위해 “죄”의 악의와 악독함이 공동체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단호히 행해야 하리라.


*고린도 교회는 왜 음행한 당사자들을 묵인했을까? 그것은 세상에서도 영향력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향력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혈통이든… 막강했을 것이다. 결국 묵인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영향력이 “하나님의 지혜”의 영향력 보다 더 막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바르게 구너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를 가장 중요핟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음행의 문제 이면에는 세상 이치와 하나님 나라 이치의 충돌이 담겨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나의 삶이 여전히 세상 이치따라 움직인다면, 나조차도 음행을 구별하여 절제하지 못할 수 있다. 탐욕을 부릴 수도 있으며, 세상 이치라는 우상을 숭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여전히 중상모략하며, 여전히 술 취하며, 여전히 폭력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되었으면 하나님 나라 법으로 살아야지… 여전히 세상 이치로 살기를 고집한다면,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하나님 나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세상과 다른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주 작은 말과 행동에서부터 세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악의와 악독’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기는 문화에 익숙했던 옛적 관습으로 살지 않아야 한다. 하난미 나라의 새로운 법이 나를 주장하도록 늘 구별하고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 이런 면에서 부끄럽다… 참 많이 부끄럽다… 주님.. 한 몸된 교회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하나님 나라 복음에 “성실과 진실”함의 한 걸음을 떼도록 도우소서….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