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성도간의 다툼에 대하여 [고전 6:1-11]
 – 2026년 06월 09일
– 2026년 06월 09일 –
고린도 교회의 세 번째 문제로 성도 간에 세상 법정에서 소송하며 다투는 것을 다룬다. 교회 안의 문제를 세상 불의한 자들에게 고발하여 결과적으로 세상이 교회를 경멸하게 하는 문제다. 외형적으로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교회 공동체의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더구나 근친상간이나 간음에는 침묵하면서 바울이 보기에 “작은 일”에는 세상 법정에 고발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한탄이 깊다. 짐작하건데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한 자의 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어 침묵했지만,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진행한듯 하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여전히 따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문제였던 “분쟁”과 두 번째 문제인 “음행”, 그리고 세 번쨰 문제인 “다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상 지혜, 세상 힘의 논리, 세상 이치”가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거룩함의 논리가 있어야 할 곳, 세상 법적 이치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이치에 맞게 살아내야 할 곳인 교회 공동체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나 여전히 세상 나라에 휘둘리는 교회,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가나가는 곳이 교회이여야 한다. 바울은 이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세상 이치에 휘둘리지만 점점 더 하나님 나라 이치에 따라 조정 되어 갈 교회를 바라본다.

세 번째 문제 다툼, 어떻게 해결할까?



1.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2-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쳤음을 상기 시킨다.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다. 혹은 들었던 말씀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면서 “이런 작은 일”에서 조차 세상 법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강력한 질책이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해결 한다고 여기며 시도한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새번역_2-3절)”

바울은 이미 성도란 예수로 인해 새 언약의 백성된 자들이며(고전 1:2), 주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계 22:5)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즉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2절)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렇게 심판하는데….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4절)”



2. 왜 당해주고, 왜 속아주지 못하는가?!(5-8절)
이어지며 한탄하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안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다툼을 해결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로 분당하여 분쟁하기 정신이 없었기에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할 만한 성숙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컸던 탓이다.

한편 바울이 “차라리” 당해주고 속아주라고 강권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교회안의 다틈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순간, “실패다!”라고 단언한다(7절). 또한 “불의”를 행한다고 외친다(8절)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7-8절)” 무엇에 대한 실패이고 무엇에 대한 불의일까? 단지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이고, 이런 송사 속에 깃든 속이고 빼앗는 것이 불의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라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경우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사랑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은사가 있다한들, 지혜롭다고 스스로 여긴들, 이런 다툼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은사나 지혜가 무슨 소용이며, 이런 다툼 속에 깃든 성도들을 속여 빼앗기 위한 그 ‘불의’한 마음에 전혀 영향력을 끼지치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능력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해주고, 속아주어 지체를 세워주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러셨고, 바울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로 이렇게 순종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받고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삶이라면 왜 당해주지 못하고, 속아주지 못하는가?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도 그리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세상으로 끌고가는 다툼에 동조하지 말라(9-11절)
“불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9절). 단지 교회 안의 다툼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이들만 지칭하지 않는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여성 노릇,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중상모략, 약탈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9-10절).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은혜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11절). 그러므로 이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이미 구원 받았으니 어찌 살든 상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불의한 삶은 반드시 심판 당한다.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는 이런 삶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씻겨졌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세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거다. 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형제된 지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세상 삶의 방식”에 동조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삶의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은 사랑하기 위해 이익을 손해 보아야 하고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깊은 삶을 맛보게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겅혐하게 한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속아주는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순종일 뿐이다. 다툼을 만들지도 말고 다툼에 동조하지도 말고 다툼이 일어나도 당해주고 속아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달리” 드러난다. 그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나는?
-성도들 간의 이해관계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 받으려는 태도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성도는 종말에 주님과 함께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며 심지어 악한 천사마저도 심판할 존재인데 불신자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불의한 자에게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장차 세상을 판단할(마 19:28) 성도들이 형제 간의 사소한 분쟁 하나 조정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제소한 것을 책망한다(1~3절).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정의롭지 못한 세속 법정(불의한 자들)에 맡겨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주의할 것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세상 법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어리석은 자기 모순에 대한 질책임을 놓치면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은사와 지도자를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실상은 지체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줄 지햬 있는 자 하나 없는 ‘어린아이’ 교회였다. 바울은 사랑을 포기하고 형제에게 소송하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보고 속는 것이 낫다고 한다.

-성도들은 남다른 지혜와 은사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형제 간의 작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서로를 고발했다(4~6절). 음행(5장)에 안일하게 대처하던 그들이 소소한 이해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벙정 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기에 형제를 법정에 세워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 자기중심성,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다 아는 듯, 다 자란 듯 우쭐대지만, ‘십자가의 영성’이 아닌 ‘세속적 욕망’에 이끌린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형제 간의 다툼에 승리란 없다. 설령 승소하고 손실을 만회하더라도 세상 가운데 교회의 허물만 드러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주님꼐 아픔을 드리는 부끄러운 패배일 뿐이다(7~8절). 그러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복음의 영광을 외면하면서꺼지 내가 꼭 지키고 붙잡아야 할 명분이 과연 있을까?

-세상 법정에 고소당한 불의한 형제는 세상 법정이 판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은혜와 은사를 맛보았더라도 영적인 자긍심만 가득한 채 실제로는 음란,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을 일삼고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지식과 은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게 요구되는 삶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가 맺는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 이틀 부끄럽고 부끄러운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삶이다. 바울이 펼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것이다. 내가 당해주고 속아주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 나라 삶이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다.


-분쟁하는 교회는 성도간 다틈이 일어나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경쟁하여 마음이 분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의 말도 권위있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추종하는 이의 말만 따를 뿐이다. 그러니 “영적인 어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 오늘날도 “영적 어른”의 부재를 심심치 않게 느낀다.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영적 어른의 역할이 분명 갈급한데…. 서로 분쟁하느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방식보다 더 통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세상 방식을 옳고 그름,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칙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서슴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들도 너희 형제다”는 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의 지표인 것을 안다면…. 사랑을 말로만 하는 울리는 꽹과리같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오는 “당해 주고 속아 주는” 사랑이 그립다. 나도 그 사랑으로 성장했고, 나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성장할 것이다.

-이런 저런 묵상이 오늘도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으로! 살아내리라.

+ 기도제목

*주님, 끊임없는 교회 안의 갈등 속에 내재된 ‘복음과 사랑의 부재’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이 아님을 알기에 착찹합니다. 십자가의 도에 순종하며 미련스럽게 주님처럼 사랑하겠습니다. 용납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세 번째 문제로 성도 간에 세상 법정에서 소송하며 다투는 것을 다룬다. 교회 안의 문제를 세상 불의한 자들에게 고발하여 결과적으로 세상이 교회를 경멸하게 하는 문제다. 외형적으로 이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교회 공동체의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더구나 근친상간이나 간음에는 침묵하면서 바울이 보기에 “작은 일”에는 세상 법정에 고발까지 했다는 것에 대해 한탄이 깊다. 짐작하건데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한 자의 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어 침묵했지만, 이런 일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진행한듯 하다. 세상 가치와 힘의 논리를 여전히 따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문제였던 “분쟁”과 두 번째 문제인 “음행”, 그리고 세 번쨰 문제인 “다툼”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상 지혜, 세상 힘의 논리, 세상 이치”가 교회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 세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거룩함의 논리가 있어야 할 곳, 세상 법적 이치에 맡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이치에 맞게 살아내야 할 곳인 교회 공동체가 철저히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나 여전히 세상 나라에 휘둘리는 교회,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가나가는 곳이 교회이여야 한다. 바울은 이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은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세상 이치에 휘둘리지만 점점 더 하나님 나라 이치에 따라 조정 되어 갈 교회를 바라본다.

세 번째 문제 다툼, 어떻게 해결할까?



1.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2-4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가르쳤음을 상기 시킨다. “너희가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이전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게 한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보는 것이다. 혹은 들었던 말씀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면서 “이런 작은 일”에서 조차 세상 법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강력한 질책이다. 지금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게 해결 한다고 여기며 시도한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겠거늘, 여러분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겠습니까?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한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새번역_2-3절)”

바울은 이미 성도란 예수로 인해 새 언약의 백성된 자들이며(고전 1:2), 주님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이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계 22:5)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즉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의미(2절)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고린도 성도들이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라고 절절히 호소한다.

심지어 천사들도 이렇게 심판하는데….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4절)”



2. 왜 당해주고, 왜 속아주지 못하는가?!(5-8절)
이어지며 한탄하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을 해결해 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안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경악한다. 여기에서 다툼을 해결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서로 분당하여 분쟁하기 정신이 없었기에 모든 성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할 만한 성숙된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컸던 탓이다.

한편 바울이 “차라리” 당해주고 속아주라고 강권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교회안의 다틈을 세상 법정에 의뢰하는 순간, “실패다!”라고 단언한다(7절). 또한 “불의”를 행한다고 외친다(8절)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그런데 도리어 여러분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고 있으며, 그것도 신도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새번역_7-8절)” 무엇에 대한 실패이고 무엇에 대한 불의일까? 단지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실패이고, 이런 송사 속에 깃든 속이고 빼앗는 것이 불의일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라도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경우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사랑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은사가 있다한들, 지혜롭다고 스스로 여긴들, 이런 다툼 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은사나 지혜가 무슨 소용이며, 이런 다툼 속에 깃든 성도들을 속여 빼앗기 위한 그 ‘불의’한 마음에 전혀 영향력을 끼지치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능력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당해주고, 속아주어 지체를 세워주는 것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러셨고, 바울도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각오로 이렇게 순종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받고 바울을 본받아 사는 삶이라면 왜 당해주지 못하고, 속아주지 못하는가? 예수님도 그러셨고, 바울도 그리 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세상으로 끌고가는 다툼에 동조하지 말라(9-11절)
“불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9절). 단지 교회 안의 다툼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이들만 지칭하지 않는다. 음행, 우상 숭배, 간음, 여성 노릇,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중상모략, 약탈하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9-10절).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은혜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11절). 그러므로 이런 불의한 일에 동조하지 말라고 강권한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의 영향으로 ‘이미 구원 받았으니 어찌 살든 상관 없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불의한 삶은 반드시 심판 당한다.

성도들이 구원 받기 이전에는 이런 삶 속에 있었으나 이제는 “씻겨졌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세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거다. 혹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형제된 지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세상 삶의 방식”에 동조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삶의 방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 삶의 방식은 사랑하기 위해 이익을 손해 보아야 하고 알면서도 속아주어야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깊은 삶을 맛보게 한다. 결국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겅혐하게 한다.

알면서도 당해주고 속아주는 사랑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 그저 아주 작은 순종일 뿐이다. 다툼을 만들지도 말고 다툼에 동조하지도 말고 다툼이 일어나도 당해주고 속아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달리” 드러난다. 그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나는?
-성도들 간의 이해관계를 세상 법정에서 해결 받으려는 태도는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이다. 성도는 종말에 주님과 함께 불신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며 심지어 악한 천사마저도 심판할 존재인데 불신자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불의한 자에게 맡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장차 세상을 판단할(마 19:28) 성도들이 형제 간의 사소한 분쟁 하나 조정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에 제소한 것을 책망한다(1~3절). 더욱이 형제를 상대로 한 재판을 정의롭지 못한 세속 법정(불의한 자들)에 맡겨 해결하려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다. 주의할 것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세상 법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어리석은 자기 모순에 대한 질책임을 놓치면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은사와 지도자를 자랑하며 우쭐거렸지만, 실상은 지체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줄 지햬 있는 자 하나 없는 ‘어린아이’ 교회였다. 바울은 사랑을 포기하고 형제에게 소송하기보다는 차라리 손해보고 속는 것이 낫다고 한다.

-성도들은 남다른 지혜와 은사가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형제 간의 작은 갈등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서로를 고발했다(4~6절). 음행(5장)에 안일하게 대처하던 그들이 소소한 이해관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벙정 소송까지 끌고 간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기에 형제를 법정에 세워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한 자기중심성,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다 아는 듯, 다 자란 듯 우쭐대지만, ‘십자가의 영성’이 아닌 ‘세속적 욕망’에 이끌린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형제 간의 다툼에 승리란 없다. 설령 승소하고 손실을 만회하더라도 세상 가운데 교회의 허물만 드러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주님꼐 아픔을 드리는 부끄러운 패배일 뿐이다(7~8절). 그러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복음의 영광을 외면하면서꺼지 내가 꼭 지키고 붙잡아야 할 명분이 과연 있을까?

-세상 법정에 고소당한 불의한 형제는 세상 법정이 판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은혜와 은사를 맛보았더라도 영적인 자긍심만 가득한 채 실제로는 음란, 간음, 남색, 도적질, 토색을 일삼고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 즉 십자가의 은혜와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아무리 자랑할 만한 지식과 은사를 지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에게 요구되는 삶을 거부한다면 그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도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모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기 보다는 우리가 맺는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 이틀 부끄럽고 부끄러운 본문을 계속 묵상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삶이다. 바울이 펼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5-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는 사랑은 당해주고 속아주는 것이다. 내가 당해주고 속아주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인정해 주신다. 이것이 의로운 하나님 나라 삶이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이다.


-분쟁하는 교회는 성도간 다틈이 일어나도 자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로 경쟁하여 마음이 분열 되어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어느 누구의 말도 권위있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추종하는 이의 말만 따를 뿐이다. 그러니 “영적인 어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아… 오늘날도 “영적 어른”의 부재를 심심치 않게 느낀다.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영적 어른의 역할이 분명 갈급한데…. 서로 분쟁하느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방식보다 더 통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세상 방식을 옳고 그름,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법칙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서슴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들도 너희 형제다”는 것이 도무지 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며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든지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의 지표인 것을 안다면…. 사랑을 말로만 하는 울리는 꽹과리같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오는 “당해 주고 속아 주는” 사랑이 그립다. 나도 그 사랑으로 성장했고, 나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야 할 성도들이 성장할 것이다.

-이런 저런 묵상이 오늘도 그때 그때 순간 순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주관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도 말씀으로! 사랑으로! 살아내리라.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