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암논은 죽었다. 이제 다윗의 뒤를 이를 계승자는 현실적으로 압살롬이다. 이 때문인지 요압은 그에 대한 다윗의 화난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고 그리워하는 것을 알게 된다(삼하 13:39). 요압은 그술 땅에 망명중인 압살롬을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들일 것인지 계획을 세운다.
*요압은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일까? 요압은 누구보다 다윗의 심정을 잘 파악하는 신하였다.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망명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다. 압살롬에 대한 원망과 미련의 감정이 수시로 교차했을 것이다. 이미 장남 암논은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다음 왕위 계승자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아직은 나이가 어렸을 것이다.
요압은 다윗의 고민을 너무도 잘 파악했다. 정말 지혜롭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서 다윗과 압살롬이 결국 화해할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차기 정권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압이 이렇게 궁리한 이유는 무엇보다 압살롬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압살롬이 암몬을 죽인 이유는 다윗왕이 처리하지 못한 근친상간에 따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암논에 대한 동정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압살롬에게 더 마음을 준 듯하다. 여기에 만에 하나 압살롬이 그술 땅에 머물고 있을 때 다윗이 죽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겉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압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고심 끝에 드고아에서 “뛰어난 기지와 좋은 구변을 가진 슬기롭다고(2절)” 인정받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철저하게 해야 할 말을 준비시켜 거짓 비유를 말하게 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 시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목적도, 이것을 이루는 과정도 정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드고아에서 온 여인의 구변은 다윗을 설득 시킨다(4-17절). 여인은 암논의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데 익숙한데, 심지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며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유혹을 잘 분별해야 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윗은 그 여인의 언변이 요압에게서 철저히 준비된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 앞에서 솔직하게 그렇다고 털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이 솔직한 고백이 다윗이 압살롬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용기있게 말할 줄 아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윗이 요압이 사주한 것을 알아챘음을 안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다. 여인은 고민하지 않고 요압이 사주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요압은 매우 치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쩌면 교활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없는 이야기도 꾸며낼 정도로 이야기꾼이다. 모사꾼이다. 결정적으로 자신은 감추고 설득력있게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여인을 전면에 세워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 했다.
요압에게는 압살롬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확인할 우선사안이 아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 의해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회개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하고 복권 시키려 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결정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안정과 미래 담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다윗을 존경해서가 아니다. 그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양 진영에서 신임을 받아 미래를 대비하려는 것 뿐이다.
나는?
-주위에 이런 인물들이 꽤 많다. 상황이야 상관없이 자신의 입장과 명분만을 챙기려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정의, 도덕, 사실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명분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직과 진실함이 아닌 위선과 사기의 방법으로 이를 이루려고 행동하기도 한다. 요압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가장 잘 들어맞는다.
-요압은 압살롬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다윗이 그를 용서하고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위를 물려 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능하기 짝이 없고 외모가 수려한 왕자가 이방 땅에 머무는 것의 위험성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유사시 자칫 이방 민족과 손이라도 잡는 날에는 이스라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 다윗의 진노가 점차 누그러지는 것도 확인했다. 이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왕이 공의로운 판단보다 국가적인 실리를 챙기도록 일을 꾸민다. 하지만 아무리 지혜로운 계책으로 이 일을 진행하였어도 다윗은 훗날 이 일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지고 관리하여도 정의로운 가치라는 대의를 저버리면 실패한다. 결국 자신이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
*한편 다윗은 압살롬이 망명한 지 3년이 넘어가자 큰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런데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압살롬이 걱정되기 시작했다(13:39). 자신도 숱한 망명의 경험이 있었기에 압살롬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불러올 수는 없었다. 명분이 있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불법을 행한 다윗도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준 사람이 바로 요압인 것이다.
*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백성들의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해 주지만 자기 문제에 있어서는 이처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 남의 문제를 잘 해결하듯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남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칭 “내로남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갖다 대는 기준으로 자신에게도 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에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내로남불의 삶이어서는 안 된다. 남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남에게 대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댈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불의에 단호하듯 나의 불의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자신을 변호하듯 상대도 변호해 주어야 한다.
*주님, 요압의 지혜를 보며 감탄이 나오지만 이내 탄식으로 변합니다. 이기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순간의 감탄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결국 탄식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제 자식 일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은 왕이라도 그렇다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부족하기만 한 인생 늘 붙잡아 주십시오.
매일성경 묵상
요압이라는 인물… [삼하 14:1-20]
– 2022년 10월 10일
– 2022년 10월 10일 –
장자 암논은 죽었다. 이제 다윗의 뒤를 이를 계승자는 현실적으로 압살롬이다. 이 때문인지 요압은 그에 대한 다윗의 화난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고 그리워하는 것을 알게 된다(삼하 13:39). 요압은 그술 땅에 망명중인 압살롬을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불러 들일 것인지 계획을 세운다.*요압은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일까? 요압은 누구보다 다윗의 심정을 잘 파악하는 신하였다.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망명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다. 압살롬에 대한 원망과 미련의 감정이 수시로 교차했을 것이다. 이미 장남 암논은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다음 왕위 계승자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아직은 나이가 어렸을 것이다.요압은 다윗의 고민을 너무도 잘 파악했다. 정말 지혜롭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서 다윗과 압살롬이 결국 화해할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차기 정권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압이 이렇게 궁리한 이유는 무엇보다 압살롬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상당했기 때문이다.압살롬이 암몬을 죽인 이유는 다윗왕이 처리하지 못한 근친상간에 따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암논에 대한 동정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압살롬에게 더 마음을 준 듯하다. 여기에 만에 하나 압살롬이 그술 땅에 머물고 있을 때 다윗이 죽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겉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질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요압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고심 끝에 드고아에서 “뛰어난 기지와 좋은 구변을 가진 슬기롭다고(2절)” 인정받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철저하게 해야 할 말을 준비시켜 거짓 비유를 말하게 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 시킨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목적도, 이것을 이루는 과정도 정당해야 한다.그럼에도 결국 드고아에서 온 여인의 구변은 다윗을 설득 시킨다(4-17절). 여인은 암논의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데 익숙한데, 심지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며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유혹을 잘 분별해야 함을 깨닫는다.하지만 다윗은 그 여인의 언변이 요압에게서 철저히 준비된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 앞에서 솔직하게 그렇다고 털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이 솔직한 고백이 다윗이 압살롬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용기있게 말할 줄 아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한편으로는 다윗이 요압이 사주한 것을 알아챘음을 안 드고아의 여인은 자신이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섰을 수도 있다. 여인은 고민하지 않고 요압이 사주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요압은 매우 치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쩌면 교활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없는 이야기도 꾸며낼 정도로 이야기꾼이다. 모사꾼이다. 결정적으로 자신은 감추고 설득력있게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여인을 전면에 세워서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 했다.요압에게는 압살롬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확인할 우선사안이 아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 의해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회개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하고 복권 시키려 한 것이다. 그의 이런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결정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자신의 정치적인 안정과 미래 담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다윗을 존경해서가 아니다. 그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양 진영에서 신임을 받아 미래를 대비하려는 것 뿐이다.나는?-주위에 이런 인물들이 꽤 많다. 상황이야 상관없이 자신의 입장과 명분만을 챙기려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정의, 도덕, 사실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명분이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직과 진실함이 아닌 위선과 사기의 방법으로 이를 이루려고 행동하기도 한다. 요압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가장 잘 들어맞는다.-요압은 압살롬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다윗이 그를 용서하고 왕궁으로 불러들여 왕위를 물려 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능하기 짝이 없고 외모가 수려한 왕자가 이방 땅에 머무는 것의 위험성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유사시 자칫 이방 민족과 손이라도 잡는 날에는 이스라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기에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마침 다윗의 진노가 점차 누그러지는 것도 확인했다. 이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왕이 공의로운 판단보다 국가적인 실리를 챙기도록 일을 꾸민다. 하지만 아무리 지혜로운 계책으로 이 일을 진행하였어도 다윗은 훗날 이 일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지고 관리하여도 정의로운 가치라는 대의를 저버리면 실패한다. 결국 자신이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한편 다윗은 압살롬이 망명한 지 3년이 넘어가자 큰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는 듯 하다. 그런데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압살롬이 걱정되기 시작했다(13:39). 자신도 숱한 망명의 경험이 있었기에 압살롬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뜻 불러올 수는 없었다. 명분이 있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불법을 행한 다윗도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준 사람이 바로 요압인 것이다.*요압은 드고아의 여인을 통해 백성들의 문제는 명쾌하게 해결해 주지만 자기 문제에 있어서는 이처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 남의 문제를 잘 해결하듯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남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칭 “내로남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갖다 대는 기준으로 자신에게도 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에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하나님 나라 백성은 내로남불의 삶이어서는 안 된다. 남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남에게 대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댈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불의에 단호하듯 나의 불의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자신을 변호하듯 상대도 변호해 주어야 한다.
+ 기도제목
* 주님, 요압의 지혜를 보며 감탄이 나오지만 이내 탄식으로 변합니다. 이기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순간의 감탄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결국 탄식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 주님, 제 자식 일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은 왕이라도 그렇다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부족하기만 한 인생 늘 붙잡아 주십시오.
* 주님, 제 자식 일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은 왕이라도 그렇다는 것을 봅니다. 이런 부족하기만 한 인생 늘 붙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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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1일
요셉의 진정한 용서와 하나님의 섭리
[창 50:15-26 ]
요셉의 지위는 애굽의 총리이자, 야곱으로부터 장자의 권리까지 부여 받았다. 이때 야곱의 부재가 가져올 변화는 상당했을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애굽에 들어온 지 무려 17년이 넘었어도 약 39년전 도단 들에서의 사건의 영향력이 다시 소환될 정도였다. 본문은 지난 17년 동안 요셉이 자신들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것은 야곱의 영향력이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요셉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였고, 그것도 17년전에 이미 용서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형들의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있었을 불안함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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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0일
죽음의 자리에서 약속을 바라보다
[창 49:29-50:14]
야곱이 열 두 아들에 대한 예언을 마치고 마지막 유언을 한다. 자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다. 이에 요셉은 애굽에서의 장례를 마치고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야곱을 안치한다. 야곱은 스스로가 바로에게 밝힌 대로 ‘험악한 세월의 나그네 길’을 무사히 마친다.
1. 야곱의 유언(49:29-32절)
자신의 죽음을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장례를 선조와 함께 묻는 것으로 표현한다. 매장지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땅값 400세겔을 주고 밭과 함께 사서 가족 매장지를 삼은 가나안 땅 헤브론 마므레 막벨라 굴이다(창 23장, 49:32, 50:13).
이렇게 유언한 이유는 그 굴에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본문에서 두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듯 ‘합법적으로 값을 치르고 산 매장지’이다. 이에 대한 의도는 분명하다.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이루면 그때 너희들도 오거라”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서 남겨야 할 마지막 유언은 “하나님의 품 안에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너라”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산 소망이 아니겠는가!
2. 야곱의 장례(50:1-14)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절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서, 울며 입을 맞추고….(새번역_50:1)” 또한 9절이다. “거기에다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을 호위하며 올라가니, 그 굉장한 상여 행렬이 볼 만하였다(새번역_9절).”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해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46:4).”
하나님께서 함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행렬…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그의 아들들은 똑똑히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렬은 다시 400년 후에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민족인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 오는 행렬이 된다.
“떼”로 번역된 9절의 장례행렬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진”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동일하다(출 14:9). 또한, 장례 행렬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도 해안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지나는 왕의 대로를 따라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헤브론으로 진행하였는데, 400여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로와 비슷하다.
이모로 저모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었다. 이 행렬을 기억하여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는 야곱의 시신은 절대 애굽의 안전과 번영 때문에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들의 시선을 약속의 땅에 고정시켜 살라는 최후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의 품,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실 영원한 도성이 우리의 안식처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이 세상의 풍요와 안락, 번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약속하신대로 우리게 주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야곱이 죽는다. 이렇게 곡절 많은 인생이 또 있을까? 그런 야곱이 죽었다. 죽기 전에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 번 더 남기며 죽는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본향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영원히 기억되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약속)을 더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 중에도 아버지 야곱이 남긴 유언을 묵묵히 수행한다. 바로의 허락을 받아 큰 장례 행렬이 막벨라 굴까지 미친다. 야곱의 장례는 야곱이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또한 요셉의 이러한 순종은 약속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자신도 이어받겠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요셉도 울고 형들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이 울음 속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았을 것이다. 사철 초지가 펼쳐지는 애굽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의 고센이 아니어도 우리가 돌아올 곳은 아버지 야곱이 묻힌 이곳임을 새기고 또 새기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주심을 일상에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민족을 이루기까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야곱의 가족들이겠지만,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다시 상기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인도하시는 의지를 확인했으리라. 나의 삶도 역시 일상에서 소소하게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보며 영원한 소망이 책 속에 갇힌 무미건조한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야곱의 삶은 자신이 표현한 대로 순탄치 않고 험악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147년을 살면서 130년이 그랬다. 그러나 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은 달랐다. 마치 하나님의 위로와 같았다. 바로의 지극한 애굽 이주 환대… 이후 17년동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 그리고 죽음 이후도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최상의 장례 절차와 기간… 그리고 남긴 유언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되어 장례를 치루는 형제들… 정말 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길의 막바지에 주시는 안정과 평안의 마무리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 평안과 안정의 애굽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가족들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다. 야곱은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올 때 약속하여 주신 동행의 약속은 단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민족을 이루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기에… “내가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 꼭 뒤따라 오너라”는 의지를 몸소 보여 주기를 원했다.
-나는 어떨까?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약간의 평안과 번영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살아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지금 누리는 이 세상에서의 가치를 기꺼이 내려놓을 만큼 살아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아들들에게 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야곱의 죽음은 참 복된 죽음이었구나 실감한다.
-무엇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는 유언처럼, “애들아 나 먼저 주님 품에 있을 테니 너희들도 꼭 와야 한다!”라며 산 소망을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버지의 믿음의 걸음이 훗날 마지막 유언에 권위를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야겠다!
*아. 야곱의 죽음이 참 도전이 된다.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그가 부럽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그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 이별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시간이었다는 것이 부럽고 부럽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올 때 이랬으면 참 좋겠다… 웃으면서 “나 먼저 주님께 가 있을테니… 뒤따라 오거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멋진 마무리를 소망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겠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리라.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 보았기에 야곱은 이렇게 유언 할 수 있었고, 장례 기간 동안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굳이 가나안까지 왕복하는 장지 선택을 요셉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죽음의 현장이 약속을 확인하는 소망의 자리가 되었다. 나의 죽음의 현장도 그리 되기를 소망한다.
1. 야곱의 유언(49:29-32절)
자신의 죽음을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장례를 선조와 함께 묻는 것으로 표현한다. 매장지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땅값 400세겔을 주고 밭과 함께 사서 가족 매장지를 삼은 가나안 땅 헤브론 마므레 막벨라 굴이다(창 23장, 49:32, 50:13).
이렇게 유언한 이유는 그 굴에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본문에서 두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듯 ‘합법적으로 값을 치르고 산 매장지’이다. 이에 대한 의도는 분명하다.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이루면 그때 너희들도 오거라”는 의미다. 우리가 살아서 남겨야 할 마지막 유언은 “하나님의 품 안에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너라”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산 소망이 아니겠는가!
2. 야곱의 장례(50:1-14)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절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서, 울며 입을 맞추고….(새번역_50:1)” 또한 9절이다. “거기에다 병거와 기병까지 요셉을 호위하며 올라가니, 그 굉장한 상여 행렬이 볼 만하였다(새번역_9절).”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친히 야곱에게 해주신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46:4).”
하나님께서 함께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행렬…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그의 아들들은 똑똑히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 행렬은 다시 400년 후에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민족인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올라 오는 행렬이 된다.
“떼”로 번역된 9절의 장례행렬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진”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동일하다(출 14:9). 또한, 장례 행렬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도 해안길이 아닌 사해 동편을 지나는 왕의 대로를 따라 요단강 동편에서 강을 건너 헤브론으로 진행하였는데, 400여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경로와 비슷하다.
이모로 저모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이었다. 이 행렬을 기억하여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경유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곳은 가나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향하는 야곱의 시신은 절대 애굽의 안전과 번영 때문에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들의 시선을 약속의 땅에 고정시켜 살라는 최후의 가르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의 품,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루실 영원한 도성이 우리의 안식처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이 세상의 풍요와 안락, 번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순례의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약속하신대로 우리게 주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야곱이 죽는다. 이렇게 곡절 많은 인생이 또 있을까? 그런 야곱이 죽었다. 죽기 전에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 번 더 남기며 죽는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본향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영원히 기억되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스스로 쟁취한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약속)을 더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셉은 아버지를 여윈 슬픔 중에도 아버지 야곱이 남긴 유언을 묵묵히 수행한다. 바로의 허락을 받아 큰 장례 행렬이 막벨라 굴까지 미친다. 야곱의 장례는 야곱이 남긴 마지막 설교였다. 또한 요셉의 이러한 순종은 약속을 향한 아버지의 믿음을 자신도 이어받겠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요셉도 울고 형들도 울고 온 가족이 울었다. 이 울음 속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담았을 것이다. 사철 초지가 펼쳐지는 애굽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의 고센이 아니어도 우리가 돌아올 곳은 아버지 야곱이 묻힌 이곳임을 새기고 또 새기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주심을 일상에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민족을 이루기까지 까마득하게 느껴질 야곱의 가족들이겠지만, 야곱의 죽음과 장례를 통해 다시 상기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인도하시는 의지를 확인했으리라. 나의 삶도 역시 일상에서 소소하게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보며 영원한 소망이 책 속에 갇힌 무미건조한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야곱의 삶은 자신이 표현한 대로 순탄치 않고 험악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147년을 살면서 130년이 그랬다. 그러나 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은 달랐다. 마치 하나님의 위로와 같았다. 바로의 지극한 애굽 이주 환대… 이후 17년동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즐거움… 그리고 죽음 이후도 자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최상의 장례 절차와 기간… 그리고 남긴 유언대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되어 장례를 치루는 형제들… 정말 복받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나그네 길의 막바지에 주시는 안정과 평안의 마무리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 평안과 안정의 애굽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가족들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본다. 야곱은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올 때 약속하여 주신 동행의 약속은 단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민족을 이루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기에… “내가 먼저 가 있을테니, 너희들 꼭 뒤따라 오너라”는 의지를 몸소 보여 주기를 원했다.
-나는 어떨까?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완전히 이루어질 그 나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누리는 약간의 평안과 번영이 내 마음을 흔들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살아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지금 누리는 이 세상에서의 가치를 기꺼이 내려놓을 만큼 살아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아들들에게 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야곱의 죽음은 참 복된 죽음이었구나 실감한다.
-무엇보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는 유언처럼, “애들아 나 먼저 주님 품에 있을 테니 너희들도 꼭 와야 한다!”라며 산 소망을 실감나게 전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버지의 믿음의 걸음이 훗날 마지막 유언에 권위를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야겠다!
*아. 야곱의 죽음이 참 도전이 된다.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들려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그가 부럽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그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 이별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시간이었다는 것이 부럽고 부럽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올 때 이랬으면 참 좋겠다… 웃으면서 “나 먼저 주님께 가 있을테니… 뒤따라 오거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멋진 마무리를 소망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겠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리라.
*죽음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 보았기에 야곱은 이렇게 유언 할 수 있었고, 장례 기간 동안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굳이 가나안까지 왕복하는 장지 선택을 요셉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죽음의 현장이 약속을 확인하는 소망의 자리가 되었다. 나의 죽음의 현장도 그리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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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9일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축복
[창 49:16~28]
야곱이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이어간다. 전체적인 내용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루어질 일들이다. 열 두명의 아들들이 각기 다양한 삶을 살게 된다. 아들들 모두가 평안과 번영과 축복의 삶을 보장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살지만 각양 각색의 삶을 펼쳐간다는 것이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아들들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유다와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그 자리에서 직접 듣는 아들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유언을 시작하면서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49:1)”이라고 했고,이야기하는 도중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라고 고백하며 이어갔다. 그리고선 마지막 베냐민에게 예언한 후에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새번역_아들 하나 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고 했다(28절).
어떤 시각으로 보면 야곱도 이런 이야기를 내뱉는 자신과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필요함을 탄식하며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야곱은 자기 시각대로 아들들의 지난 삶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이들이 “후일에” 어떻게 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후일에 당할 일”이라고 시작하고 아들마다 각기 다른 삶을 이야기 하되 이들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의 지형 특색에 맞게 말한다. 야곱이 각 지파별로 분배 받게 될 땅, 그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매칭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유언’처럼 들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을 들려 주셨을까? 사실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면, 우리의 생각에 이런 내용을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아버지라면 생의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각각 다양한 삶을 살게 될 아들들의 “후일”의 삶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는 것이다.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베냐민에게 연이어 선포한 축복은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샛길의 독사가 말굽을 물어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 것처럼 지파들 사이에서 심판자 처럼 살 것이고, 어떤 이는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학대를 딛고 무성한 샘곁 가지처럼 풍성한 축복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이는 물어 뜯는 이리처럼 살 것이다.
다양한 삶이 아들들의 훗날에 펼쳐 질 것이고, 이 삶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서 이런 모습이 펼쳐 진다고?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이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요셉과 극적으로 화해하고 극심한 가뭄을 피해 애굽에 잠시 내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 살게 될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이렇게 충분히 좌절감을 가질 수 있는 예언을 왜 했을까! 그 목적을 살필 수 있는 두 군데의 구절이 있다.
1.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_18절).”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참 이어가던 이야기를 멈추고 간절히 기도처럼 내뱉은 말이다. 아. 여기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아들들의 “훗날에” 나타날 삶이 이토록 파란만장하다면, 이들을 도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각각 아들들에게 해준 말보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게 들려준 말일 수도 있다. 열 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모두가 “주의 구원”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알았다. 이들을 기다리는 삶은 레드카펫이 깔린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행동이 드러나며, 개중에는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개중에는 철저히 약자가 되어 억압 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실패와 성공, 패배와 승리들로 후손들의 훗날이 점철될 것이다. 그 어떠한 일들이 다양하게 후손들의 삶에 일어나더라도 변치 않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주의 구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래야 한다.
결국 이들을 기다리는 가나안 땅의 삶은 완성된 구원의 평안한 삶이 아니라, 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간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연약하기에 그저 기도밖에 붙잡을 것이 없는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때로 자신들의 힘 때문에 교만하여져 오만하게 행하여 파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훗날”이라는 거다.
그러니 아들들 모두는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다. 야곱이 쭉 이어서 아들들의 훗날의 삶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주의 구원”을 바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선포 되든지, 이것을 운명으로 결정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전능자로 말미암나니(24-25절)
요셉 또한 축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수들이 잔인하게 활을 쏘며 달려들어도, 사수들이 적개심을 품고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도(새번역_23절)” 이라고 시작했다. 그의 삶도 평탄치 않을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원수들이 죽이려고 작정하여 잔인하게 달려 들 정도로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목자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를 도울 것이라고 축복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잔인하게, 적개심을 품고 과녁을 삼아 활을 쏘며 달려드는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야곱이 섬기는 ‘전능하신 분’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고,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너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위로 하늘에서 내리는 복과, 아래로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복과, 젖가슴에서 흐르는 복과, 태에서 잉태되는 복을 베푸실 것이다(새번역_24-25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기 속에서도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기의 상황에서 “주의 구원”을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은 그들도 또한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실 것”을 바라 라는 의미이다. 요셉을 봐라 그가 증거이지 않는가! 라는 의미일 것이다.
3. 단, 갓, 아셀, 요셉(16~26절)
단 지파(16~18절)는 계속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원수들에게 위협적이지만, 뱀이 홀로 살듯이 요단강 동편 최북단에 정착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이 연약한 단 지파의 생존을 위해 기도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갓과 아셀, 납달리에 대한 야곱의 축복(19~21절)은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를 것이고, 비옥한 갈릴리 해안에 자리 잡은 아셀은 왕의 수라상을 제공할 것이며, 납달리는 암사슴처럼 빠르고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장차 큰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22~26절)은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지와 같은 것으로 축복한다. 평생 복을 추구하던 야곱은 이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임한 복이 요셉의 머리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야곱은 요셉을 보호하실 하나님을 ‘전능자’, ‘목자’, ‘반석’이라고 부른다. 요셉과 자손들은 참으로 대단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주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한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유다와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은 당장 야곱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예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다와 요셉도 자신들에게 들려지는 축복의 소리의 기쁨보다 형제들에게 선포되는 말들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각각 다른 다양한 삶들이 펼쳐 질 것은 분명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 하든지 “주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과 “함께 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으면 안 된다.
-나에게 주어진 말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운 지경이라도 “주의 구원”을 잊지 않고 바라면, 어떤 구원의 역사보다 더 강력한 은혜의 각인이 나의 삶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형제들의 훗날의 면면을 이렇게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해된다. 이렇게 들려진 말이 너희 후손들의 족쇄가 아니라, 보험이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닥치더라도 분명한 보험카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주의 구원”을 바라고 또 바라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야곱의 유언은 18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들의 훗날이 얼마나 당황 스럽겠는가? 자식들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자신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러니 야곱은 분명히 더 간절하게 이 고백을 내 뱉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 역시 아들들에게 이런 마음이다. “주님, 아들들의 앞길에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들들이 훗날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장 우선인 인생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아들들의 인생은 곧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형성될 것이 분명하다. 고로 나의 삶이 언제나 “주의 구원”을 겸손히 바라며, 주의 도우심을 감사히 누리는 삶을 아들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말과 행동이 주님을 부르는 동일한 모습이 언제나 노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모습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이 훨씬 많이 비춰 질 테니…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 다시 결심하고 결심해 본다.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의 말과 행동이 함께 가는 삶 이기를….
*요셉에게 들려준 축복의 말보다 더 마음이 가는 것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될 아들들의 후손들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바라나이다”라고 고백했던 할아버지 야곱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마음 일 것이다. 그 야곱의 마음이 오늘 내 마음에 꽂혔다!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의 능력의 범주가 아니다. 더더구나 후손의 삶도 나의 권한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한, 주권이기에 구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절감하는 아침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실 것이기에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도우심”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지 이미 요셉을 통해 보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도 볼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지 말아라!
*야곱의 생의 마지막, 애절한 외침이 귓가에 쟁쟁한 아침이다. 더 많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분량대로 받는 축복이 참 복이다. 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 감당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축복은 타자를 위한 축복도 된다.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받은 들 하나님을 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축복이 없다. 하나님이 전능자로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면 분명 축복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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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8일
야곱의 아들들에게 하는 마지막 유언
[창 49:1-15]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그들의 미래를 예언한다. 야곱은 이 예언 “모여 들으라”고 반복하여 말한다(1-2절). 생각해 보면 야곱은 애굽으로 이주한 마지막 노년 17년을 온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다 인생을 마무리하는 축복을 누린다. 마지막을 이렇게 살고 마무리하니 나머지 130여년의 인생을 얼마든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미래를 예언한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의 예언은 “결정된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 선고’가 아니다. 아들들의 삶을 기반으로 ‘중간 결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여 미래를 변화 시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장 불편한 것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추어 낼 때다. 좋은 일이었다면 ‘영광’을 누리지만, 범죄의 기억을 들추어 내는 것은 ‘수치’이다. 그런데 야곱은 아들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각각 출생 순서로 이 과거의 일을 들추어 낸다. 형제들끼리는 서로 불문율처럼 감추었던 그 “죄”를 들추어 낸다. 자신들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날 때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그 시간이 없으면 오히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오만해 져서 뻔뻔스러운 교만이 그 삶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혹은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자학하거나 파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죄는 결코 선한 영향력을 낳지 않는다.
1. 르우벤(3-4절)
야곱에게 르우벤은 힘과 정력의 첫 열매였다. 이로 인해 그 영예가 드높고, 힘이 드셌다(새번역_3절). 하지만 르우벤은 이 힘과 영예를 스스로 더럽혔다. 꺽었다. “거친 파도와 같은 그의 힘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죄를 범하므로” 으뜸 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4절)”고 예언한다.
르우벤은 통제 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힘과 능력이 있었을 지라도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했다(창 35:22). 이것은 아버지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중대한 범죄였다. 연약한 아버지의 권위를 짖뭉겨서 자신의 힘을 과시한 죄였다. 이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를 잃게 된다.
이 부분은 이미 요셉을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모습과 요셉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역시 야곱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이 후 그의 후손에게서 어떤 예언자, 사사, 제사장, 혹은 왕이 나오지 못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위는 없다. 출생한 순서가 첫째여서 당연하게 장자의 권리와 권위를 성취할 수 없다. 특히나 르우벤의 경우를 통해 그렇게라도 주어진 권위를 “정욕”을 위해 남용할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억하시고 거두어 가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첫째 르우벤에게 하는 말이지만, 모든 형제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었다.
2. 시므온과 레위(5~7절)
이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미래를 예언한다. 역시 그들의 과거의 삶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를 강간한 세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례”를 도용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징표를 행하는 틈을 타 살육한 것이다.
이것은 맹렬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결과였다. 분노의 노예가 되어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소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살육이 아버지 야곱의 뜻과 상관 없이 자신들의 “분노대로” 행하였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버린 분노와 폭력은 그 댓가를 받을 것이다. 세겜에서 의기투합했던(단짝 형제_새번역_5절) 시므온과 레위는 이제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 때 레위의 후손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 지도자를 처형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역 내에 더부살이 하는 방식으로 땅을 할당 받는다(수 9장). 이후 남북으로 이스라엘 분리될 때 북 이스라엘로 흡수되어 흩어지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유언에 시므온 지파는 아예 거론 되지 않는다. 레위 자손은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대신 48개 도성을 받는다. 하지만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의 주동자를 주도적으로 처단한 공로로 성소의 직무를 맡는 지파가 된다.
분노의 노예가 된 댓가는 참혹했다.
3. 유다(8~12절)
요셉의 시험으로 야곱 가족의 시험 때, 자기 희생을 자처한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될 것이다. 사자처럼 용맹하여 원수를 이기고,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다. 장자의 축복은 요셉이 받았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룰 메시아가 유다 지파를 통해 나게 하신다.
유다의 후손 다윗 왕이 이를 성취 하였고,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 부분에서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아니라, 야곱이 외면한 레아와의 후손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어 가신 것이다. 전통, 관습은 허락하셨으나 이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시고 야곱이 생각한 후손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후손을 통해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4. 스불론, 잇사갈(13~15절)
스불론(13절)에 대한 ‘축복’은 그의 정착 지역과 관련된다. 스불론은 단과 아셀과 함께 해양적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세 지파 중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스불론은 13절의 언급처럼 지중해를 점령했다거나 시돈(페니키아를 가리키는 상징어)을 차지하지 못한다. 스불론 지파는 본래 베들레헴 주변의 당을 분배받았지만 후에 시도 가까이에 있는 북쪽 바닷가로 옮겨 정착한 정황을 보여주는 말이 된다(수 19:10~15). 본문은 스불론 지파에 대한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스불론 지파가 차지하게 될 땅에 대한 약속과 찬양이다.
잇사갈(14~15절)은 본래 산악 내륙지역에 거주하였으나(삿 10:11), 이후 서쪽 평지로 옮겨간 것으로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주는 패착이 되고 만다.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가나안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귀처럼 쉬기를 좋아하고 땅을 보고 땅을 차지하려 하나 결국 압제를 받아 남을 섬기는 신세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야곱의 예언은 아들들이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행위가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행위가 어찌 돼었든 현재의 상태(17년동안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 야곱의 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야곱이 아들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행하였던 행동들을 기억하여 말한 것이다. 그 당시 아들들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을 지라도 생을 마감하면서 그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소환한다. 이 일들은 아들들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장자 르우벤은 병든 아버지를 대놓고 무시하고 빌하를 범하므로 스스로 장자권을 세우려 했다. 하나님께서 이어받게 하실 것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여겼다. 그 오만한 강함이 결국 후손들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오늘의 힘을 대놓고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다. 받은 은혜, 누리는 힘이 크고 강할 수록 더욱 이 은혜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행하여야 한다. 힘은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할례’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결’의 예식을 통해,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그 형식을 발판 삼아 분노를 폭발시켰다는 것은 역시 시므온과 레위에게 살아오면서 늘 악몽에 시달리게 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기막힌 폭력의 댓가를 후손들이 감당해야 한다. 의기투합했던 단짝 형제가 갈라지게 될 것이고 시므온은 장차 소멸된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반전을 이룬다. 비록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새번역_7절)”는 예언대로 가나안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만 받았지만, 성소의 직무를 맡게 된다.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아… 그렇다면 야곱의 이 예언은 “운명을 결정짓는 예언”이 아니다.
-지금껏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현재의 판단인 것이다. 야곱은 곧 죽는다. 하지만 아들들은 더 살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이들을 예언하지만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올무가 되었다고 확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까? 특히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살아갈 아들들의 인생을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운명을 결정 짓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무겁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비록 그 죄진 삶의 댓가로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으나 더 이상 그 죄에 얽매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훈계”하시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유언”을 통해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라고 계기를 주시는 것이다.
-이 기회를 르우벤과 시므온의 후손은 깨닫지 못해 잡지 못했고, 레위의 후손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힘을 집중함으로 잡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다. 모세는 레위 후손이지만 출애굽을 이끌었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 때 세겜에서 폭발했던 그 분노의 폭발이 하나님을 위해 발산되었다. 가나안 땅 진입 직전 모압에서의 바알브올 사건 때도 마찬가지 였다. 이런 레위 자손에게 하나님의 성소의 직무와 율법을 가르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비록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으로 흩어졌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기회였다. 자신들이 애써 외면하고 덮어 왔던 과거의 죄에 직면하고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것이었다. 그래야 이들의 후손이 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 수치러운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때 후손들도 산다.
-르우벤처럼 주어진 힘을 정욕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산다. 시므온과 레위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도리어 분노의 대상이 된다. 맹렬한 분노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미래를 망친다.
-유다는 자기 희생을 통해 흠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상쇄 받는다. 차마 입에 꺼내기도 부끄러운 며느리와의 동침을 통해 후손이 이어가지만, 야곱은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희생을 자처하는 모습을 주목하여 그런 마음을 가진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형제들은 이런 자기 희생의 유다를 찬송할 것이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을 둘이나 잃고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을 통해 혹독한 아픔을 거친 그는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희생을 마다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각각의 사건을 거치며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와 달랐다. 야곱은 그 회개와 성숙을 본 것이다. 그 변화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나오게 할 것이다. 궁극적인 메시아가 그의 후손을 통해 올 것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
-스불론은 바다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며, 잇사갈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처럼 잇사갈 지파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지 못하여 오히려 왕성해진 가나안 사람들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된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축복은 없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야곱의 예언이 보여준다. 계시록에서도 언급하는 것 처럼,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받는 심판의 기준은 “행실”이다(계 20:12, 13). 오늘 내게 주어진 힘(은사)를 남용하지 않고, 분노를 다스리며,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련다.
*오늘을 살아낸 흔적이 과거가 되고, 그 과거의 열매가 오늘이 되어 미래를 열어 간다는 것을 잊지 안아야 한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선한 행실로 다져서 구원의 삶이 더욱 완전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행실은 지워질 수 없고, 이 행실이 나와 후손들의 미래로 가는 표지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미 해답은 나와있다!
*더욱 말씀을 따라,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러내는 하루이어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의 예언은 “결정된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 선고’가 아니다. 아들들의 삶을 기반으로 ‘중간 결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여 미래를 변화 시키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장 불편한 것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추어 낼 때다. 좋은 일이었다면 ‘영광’을 누리지만, 범죄의 기억을 들추어 내는 것은 ‘수치’이다. 그런데 야곱은 아들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각각 출생 순서로 이 과거의 일을 들추어 낸다. 형제들끼리는 서로 불문율처럼 감추었던 그 “죄”를 들추어 낸다. 자신들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드러날 때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그 시간이 없으면 오히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오만해 져서 뻔뻔스러운 교만이 그 삶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혹은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스스로 자학하거나 파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죄는 결코 선한 영향력을 낳지 않는다.
1. 르우벤(3-4절)
야곱에게 르우벤은 힘과 정력의 첫 열매였다. 이로 인해 그 영예가 드높고, 힘이 드셌다(새번역_3절). 하지만 르우벤은 이 힘과 영예를 스스로 더럽혔다. 꺽었다. “거친 파도와 같은 그의 힘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죄를 범하므로” 으뜸 되지 못할 것이다(새번역_4절)”고 예언한다.
르우벤은 통제 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힘과 능력이 있었을 지라도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했다(창 35:22). 이것은 아버지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중대한 범죄였다. 연약한 아버지의 권위를 짖뭉겨서 자신의 힘을 과시한 죄였다. 이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를 잃게 된다.
이 부분은 이미 요셉을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모습과 요셉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역시 야곱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이 후 그의 후손에게서 어떤 예언자, 사사, 제사장, 혹은 왕이 나오지 못한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위는 없다. 출생한 순서가 첫째여서 당연하게 장자의 권리와 권위를 성취할 수 없다. 특히나 르우벤의 경우를 통해 그렇게라도 주어진 권위를 “정욕”을 위해 남용할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억하시고 거두어 가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첫째 르우벤에게 하는 말이지만, 모든 형제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었다.
2. 시므온과 레위(5~7절)
이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미래를 예언한다. 역시 그들의 과거의 삶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를 강간한 세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할례”를 도용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징표를 행하는 틈을 타 살육한 것이다.
이것은 맹렬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 결과였다. 분노의 노예가 되어 세겜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소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살육이 아버지 야곱의 뜻과 상관 없이 자신들의 “분노대로” 행하였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버린 분노와 폭력은 그 댓가를 받을 것이다. 세겜에서 의기투합했던(단짝 형제_새번역_5절) 시므온과 레위는 이제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 때 레위의 후손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 지도자를 처형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역 내에 더부살이 하는 방식으로 땅을 할당 받는다(수 9장). 이후 남북으로 이스라엘 분리될 때 북 이스라엘로 흡수되어 흩어지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유언에 시므온 지파는 아예 거론 되지 않는다. 레위 자손은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대신 48개 도성을 받는다. 하지만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의 주동자를 주도적으로 처단한 공로로 성소의 직무를 맡는 지파가 된다.
분노의 노예가 된 댓가는 참혹했다.
3. 유다(8~12절)
요셉의 시험으로 야곱 가족의 시험 때, 자기 희생을 자처한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될 것이다. 사자처럼 용맹하여 원수를 이기고,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다. 장자의 축복은 요셉이 받았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룰 메시아가 유다 지파를 통해 나게 하신다.
유다의 후손 다윗 왕이 이를 성취 하였고,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 부분에서 역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아니라, 야곱이 외면한 레아와의 후손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루어 가신 것이다. 전통, 관습은 허락하셨으나 이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오직 스스로 결정하시고 야곱이 생각한 후손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후손을 통해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4. 스불론, 잇사갈(13~15절)
스불론(13절)에 대한 ‘축복’은 그의 정착 지역과 관련된다. 스불론은 단과 아셀과 함께 해양적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세 지파 중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스불론은 13절의 언급처럼 지중해를 점령했다거나 시돈(페니키아를 가리키는 상징어)을 차지하지 못한다. 스불론 지파는 본래 베들레헴 주변의 당을 분배받았지만 후에 시도 가까이에 있는 북쪽 바닷가로 옮겨 정착한 정황을 보여주는 말이 된다(수 19:10~15). 본문은 스불론 지파에 대한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스불론 지파가 차지하게 될 땅에 대한 약속과 찬양이다.
잇사갈(14~15절)은 본래 산악 내륙지역에 거주하였으나(삿 10:11), 이후 서쪽 평지로 옮겨간 것으로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주는 패착이 되고 만다.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가나안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귀처럼 쉬기를 좋아하고 땅을 보고 땅을 차지하려 하나 결국 압제를 받아 남을 섬기는 신세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야곱의 예언은 아들들이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행위가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행위가 어찌 돼었든 현재의 상태(17년동안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 야곱의 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야곱이 아들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행하였던 행동들을 기억하여 말한 것이다. 그 당시 아들들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을 지라도 생을 마감하면서 그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소환한다. 이 일들은 아들들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장자 르우벤은 병든 아버지를 대놓고 무시하고 빌하를 범하므로 스스로 장자권을 세우려 했다. 하나님께서 이어받게 하실 것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여겼다. 그 오만한 강함이 결국 후손들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오늘의 힘을 대놓고 휘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다. 받은 은혜, 누리는 힘이 크고 강할 수록 더욱 이 은혜와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행하여야 한다. 힘은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할례’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결’의 예식을 통해, 특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그 형식을 발판 삼아 분노를 폭발시켰다는 것은 역시 시므온과 레위에게 살아오면서 늘 악몽에 시달리게 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기막힌 폭력의 댓가를 후손들이 감당해야 한다. 의기투합했던 단짝 형제가 갈라지게 될 것이고 시므온은 장차 소멸된다.
-하지만 레위 지파는 반전을 이룬다. 비록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새번역_7절)”는 예언대로 가나안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만 받았지만, 성소의 직무를 맡게 된다.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아… 그렇다면 야곱의 이 예언은 “운명을 결정짓는 예언”이 아니다.
-지금껏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현재의 판단인 것이다. 야곱은 곧 죽는다. 하지만 아들들은 더 살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이들을 예언하지만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의 삶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야곱이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올무가 되었다고 확정하며 이런 말을 했을까? 특히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했을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살아갈 아들들의 인생을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운명을 결정 짓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무겁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비록 그 죄진 삶의 댓가로 받게 될 미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으나 더 이상 그 죄에 얽매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훈계”하시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유언”을 통해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아라고 계기를 주시는 것이다.
-이 기회를 르우벤과 시므온의 후손은 깨닫지 못해 잡지 못했고, 레위의 후손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힘을 집중함으로 잡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다. 모세는 레위 후손이지만 출애굽을 이끌었고,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사건 때 세겜에서 폭발했던 그 분노의 폭발이 하나님을 위해 발산되었다. 가나안 땅 진입 직전 모압에서의 바알브올 사건 때도 마찬가지 였다. 이런 레위 자손에게 하나님의 성소의 직무와 율법을 가르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비록 땅을 분배 받지 못하고 48개 도성으로 흩어졌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기회였다. 자신들이 애써 외면하고 덮어 왔던 과거의 죄에 직면하고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것이었다. 그래야 이들의 후손이 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 수치러운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때 후손들도 산다.
-르우벤처럼 주어진 힘을 정욕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산다. 시므온과 레위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도리어 분노의 대상이 된다. 맹렬한 분노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 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면 미래를 망친다.
-유다는 자기 희생을 통해 흠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상쇄 받는다. 차마 입에 꺼내기도 부끄러운 며느리와의 동침을 통해 후손이 이어가지만, 야곱은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희생을 자처하는 모습을 주목하여 그런 마음을 가진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형제들은 이런 자기 희생의 유다를 찬송할 것이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을 둘이나 잃고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을 통해 혹독한 아픔을 거친 그는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희생을 마다 하지 않을 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각각의 사건을 거치며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은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와 달랐다. 야곱은 그 회개와 성숙을 본 것이다. 그 변화된 자기희생의 마음이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나오게 할 것이다. 궁극적인 메시아가 그의 후손을 통해 올 것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
-스불론은 바다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며, 잇사갈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처럼 잇사갈 지파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지 못하여 오히려 왕성해진 가나안 사람들의 압제 아래 놓이게 된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축복은 없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야곱의 예언이 보여준다. 계시록에서도 언급하는 것 처럼,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받는 심판의 기준은 “행실”이다(계 20:12, 13). 오늘 내게 주어진 힘(은사)를 남용하지 않고, 분노를 다스리며,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련다.
*오늘을 살아낸 흔적이 과거가 되고, 그 과거의 열매가 오늘이 되어 미래를 열어 간다는 것을 잊지 안아야 한다.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내는 선한 행실로 다져서 구원의 삶이 더욱 완전해 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나의 삶의 행실은 지워질 수 없고, 이 행실이 나와 후손들의 미래로 가는 표지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미 해답은 나와있다!
*더욱 말씀을 따라,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러내는 하루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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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7일
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요셉에게….
[창 48:8-22]
야곱이 양자 삼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는 혈통이 참 중요하다. 또 출생 순서도 중요하다. 이것이 인간사화의 질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질서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인정은 해 주셨으나 얼마든지 이를 뒤바꾸셨다. 가인이 아니라 셋의 후손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으셨고,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다. 야곱의 장도 르우벤이 받지 못했다. 또 유다의 계보도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창녀’라 여긴 며느리에게서 낳은 아들을 통해 이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관행과 관습을 인정해 주시지만 얽매이지 않으신다. 어떻게 이 관습을 뛰어 넘으시는가?
“미리 정하심으로” 뛰어 넘으셨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적응하신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원리’는 더더욱 아니다. 철저하게 나기 전부터 정하신대로 이끄셨다. 야곱이 장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의 속임수나 탐욕이 아니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결정이셨다. 만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에서와 야곱에게 어릴 적부터 잘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라면 이를 어릴 때부터 잘 훈계하고 양육하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본문도 역시 혈통이나 관습과 관련하여 중요한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요셉은 애굽 여인과 결혼했다. 그것도 애굽의 신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딸이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요셉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애굽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을 야곱이 양자 삼았다.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이다(새번역_5절).” 애굽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 된 것이다. 혈통으로는 애굽의 피가 섞였지만 야곱은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 혈통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오늘 본문은 양자 삼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공식적으로 아들 삼는 입적 절차다.
1.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8, 11, 15-16, 20, 21절)
요셉과 야곱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요셉은 지금껏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이미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바로까지도 이를 인정했다. 요셉의 철두철미한 믿음의 고백은 애굽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일 지라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9절)”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확고한 고백을 하며 살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섞인 애굽의 피는 전통적인 관습과 혈통 인식에 따라 ‘자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면?…’ 이라는 관습에 따른 불안감이 왜 없었겠나? 이 불안감을 야곱은 일거에 해결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들로 입양을 한 것이다. 그리고서 축복을 해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요셉은 태어난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와 차자의 축복을 받게 하려 했다(12-13절). 야곱이 나이가 많이 들어 눈이 어두어 졌기 때문에 혹시 축복하는 손의 위치를 다르게 할까 싶어 야곱의 기준으로 두 아들을 그 앞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팔을 엇바꿔 축복한다(14-16절). 이에 요셉은 “못마땅히 여겨(새번역_17절)” 혈통으로 장자인 므낫세에게 얹은 야곱의 손의 위치를 바꾸려 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새번역_18절).”
하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새번역_19절).”라며 에브라임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므낫세는 한 큰 족속이 될 것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선포한다.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새번역_20절)”
요셉이나 야곱이나 혈통, 관습의 굴레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을 때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에서 혈통과 관습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야곱이 “눈이 어두워” 자신이 입양한 아들들의 장자과 차자의 순서를 헷갈린 것이 아니다. 야곱은 분명히 말한다. “나도 안다!” 이것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이다. 늙어 눈이 어두워져서 한 실수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출생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먼저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분명한 모습이다. 하지만 순서의 차이가 곧 배제나 누락, 혹은 추방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야곱은 더욱 힘있게 이렇게 축복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이 너는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바란다”라고 축복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이들은 장자와 차자의 순서는 뒤바꼈을 뿐, 둘 다 “축복의 기준”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의 질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둘 다 후손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 앞으로 받을 복을 회자하고 선언할 때 똑같이 예로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당연한 것들이 있다…. 혈통의 순서, 학연, 지연….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뿐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인습의 당연한 것은 없다!”
2.하나님이… 요셉에게…(21-22절)
입양한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후 야곱은 요셉을 축복한다. 마치 유언과도 같다! 아니 유언이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 세겜을 더 준다. 세겜은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새번역_21-22절).”
개역개정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번역이 눈에 띈다. “…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이라는 부분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으로 요셉이 꿈꾸었던 꿈 대로 이어질 것을 선언한 것이다.
또, “…세겜 땅을 더 준다.”고 유언한다. 결국 이 유언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이 세겜 지역을 분배 받음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요셉은 애굽에서 죽는데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 라고 당연하게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최고 유산을 선언한 셈이다.
그것은 “장차 들어갈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을 땅, 그곳에 있는 나의 땅, 후손들의 땅… 이 믿음을 심겨 준 것이다. 부동산이 유산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 유산이다.
나는?
-야곱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다. 젊었을 때 그는 눈이 어두운 이삭을 속여 자기 욕심을 채울 만큼 영혼의 눈이 어두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요셉의 장자 므낫세가 아니라 차자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더 가까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의 눈은 어두워져 갔지만, 영적인 눈은 더 밝아진 야곱이었다.
-눈이 어두운 이삭은 야곱에게 속아서 작은 아들에게 장자의 복을 빌어주었으나, 야곱은 눈이 어두웠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육신의 눈은 어두워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밝아지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오른손을 둘째인 에브라임 위에 왼손은 첫째인 므낫세 위에 얹는다. 요셉이 “그리 마옵소서”하고 만류하지만, 야곱은 다 알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처럼, 에브라임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세상의 질서를 역전시키면서 자기 주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관습, 혈통, 제도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당연하게 인정되고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인간 사회 너무나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든지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 안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앞에 뒤바껴야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면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연연하면 안된다. 믿음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주권)에 당연하게 반응하는 순종인 것이다.
-요셉에게 당연한 것은 므낫세가 장자, 에브라임은 차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뜻)은 에브라임이 장자, 므낫세가 차자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둘에게 베푸시는 축복은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이 된다.
-인간에게 당연한 순서보다 하나님의 결정이 우선이며, 하나님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베푸시는 복은 차이가 없으시다.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 같아라……”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요셉에게 이르기까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권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가 그대로 순종되고 존중되는 삶이 곧 그의 백성의 삶이다.
-야곱은 그렇게 요셉의 두 자녀를 축복한다. 특별히 요셉에게 ‘세겜 땅’을 준다. 하지만 당장 그 땅을 차지할 수 없고 나중에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조상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현실이 될 것이다. 그들은 땅을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선물 받은 것이다. 믿음이 아니면 전혀 기쁘지 않은 복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당연히 내가 교회 다녀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교회 다니면 다 구원 받는거야 라는 당연구원의 심리가 팽배한 요즘, 구원은 교회를 다님으로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내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받아 누리고 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은 자격이 있는 당연한 자는 없다. 그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이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 없다. 이 주권 앞에 순종하는 걸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교회를 살릴 것이다. 공동체를 일으킬 것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
-부동산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 아니다.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 지금 요셉은 애굽에 있고, 그는 애굽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 땅을 물려준다. 자신이 형들에게 버림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그 곳을 물려 받는다.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돌아갈 네 땅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애굽 총리가 너의 자리가 아니라 세겜 땅이 너의 자리임을 상기 시킨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길까? 야곱을 통해 확고하게 결심하게 된 것은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처소”를 바라보게 하는 유산을 남겨야 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뿌리박는 삶이 아니라 주님 예비한 곳을 바라보게 하여 기꺼이 “나그네 길”을 살게 하겠다!
-날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15~16절). 야곱은 자신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47:9)을 보냈다. 형을 피해 집을 떠난 때부터 속고 속이는 삶이 이어졌다.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려는 노력으로 가족을 속이고, 그를 이용하려는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의 몸에서 난 아들들도 그를 속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주셨고 모든 위기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처럼 지난 삶에서 나를 돌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야곱은 믿음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 므낫세는 큰 족속을 이룰 것이지만 그의 아우 에브라임은 여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로 두 아들을 축복하였다.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야곱은 작은 자를, 그리고 어린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두 아들에게 축복한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자와 강한 자를 높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낮은 자와 약한 자를 향한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장차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본다. 야곱은 과거 자신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세겜 땅을 요셉에게 물려준다.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으며 요셉은 아버지에게 받은 세겜 땅에 매장된다(수 24:32).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져야 하리라.
“미리 정하심으로” 뛰어 넘으셨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적응하신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원리’는 더더욱 아니다. 철저하게 나기 전부터 정하신대로 이끄셨다. 야곱이 장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의 속임수나 탐욕이 아니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결정이셨다. 만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결정을 에서와 야곱에게 어릴 적부터 잘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이라면 이를 어릴 때부터 잘 훈계하고 양육하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본문도 역시 혈통이나 관습과 관련하여 중요한 주제가 함축되어 있다. 요셉은 애굽 여인과 결혼했다. 그것도 애굽의 신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딸이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요셉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애굽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을 야곱이 양자 삼았다. “내가 너를 보려고 여기 이집트로 오기 전에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낳은 두 아이는, 내가 낳은 아들로 삼고 싶다. 르우벤과 시므온이 나의 아들이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나의 아들이다(새번역_5절).” 애굽의 아들이 아니라 야곱의 아들 된 것이다. 혈통으로는 애굽의 피가 섞였지만 야곱은 자신의 아들로 삼는다. 혈통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오늘 본문은 양자 삼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공식적으로 아들 삼는 입적 절차다.
1.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8, 11, 15-16, 20, 21절)
요셉과 야곱이 동일하게 고백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요셉은 지금껏 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이미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바로까지도 이를 인정했다. 요셉의 철두철미한 믿음의 고백은 애굽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일 지라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9절)”이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확고한 고백을 하며 살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섞인 애굽의 피는 전통적인 관습과 혈통 인식에 따라 ‘자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면?…’ 이라는 관습에 따른 불안감이 왜 없었겠나? 이 불안감을 야곱은 일거에 해결한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들로 입양을 한 것이다. 그리고서 축복을 해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요셉은 태어난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와 차자의 축복을 받게 하려 했다(12-13절). 야곱이 나이가 많이 들어 눈이 어두어 졌기 때문에 혹시 축복하는 손의 위치를 다르게 할까 싶어 야곱의 기준으로 두 아들을 그 앞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팔을 엇바꿔 축복한다(14-16절). 이에 요셉은 “못마땅히 여겨(새번역_17절)” 혈통으로 장자인 므낫세에게 얹은 야곱의 손의 위치를 바꾸려 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새번역_18절).”
하지만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가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되겠지만, 그 아우가 형보다 더 크게 되고, 아우의 자손에게서 여러 겨레가 갈라져 나올 것이다(새번역_19절).”라며 에브라임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므낫세는 한 큰 족속이 될 것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선포한다. “그 날,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희의 이름으로 축복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다(새번역_20절)”
요셉이나 야곱이나 혈통, 관습의 굴레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을 때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삶에서 혈통과 관습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야곱이 “눈이 어두워” 자신이 입양한 아들들의 장자과 차자의 순서를 헷갈린 것이 아니다. 야곱은 분명히 말한다. “나도 안다!” 이것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이다. 늙어 눈이 어두워져서 한 실수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출생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먼저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분명한 모습이다. 하지만 순서의 차이가 곧 배제나 누락, 혹은 추방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야곱은 더욱 힘있게 이렇게 축복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이 너는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와 같게 하시기를 바란다”라고 축복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이들은 장자와 차자의 순서는 뒤바꼈을 뿐, 둘 다 “축복의 기준”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의 질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둘 다 후손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 앞으로 받을 복을 회자하고 선언할 때 똑같이 예로 들 정도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의 모델이 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당연한 것들이 있다…. 혈통의 순서, 학연, 지연….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뿐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인습의 당연한 것은 없다!”
2.하나님이… 요셉에게…(21-22절)
입양한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후 야곱은 요셉을 축복한다. 마치 유언과도 같다! 아니 유언이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 세겜을 더 준다. 세겜은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새번역_21-22절).”
개역개정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는 번역이 눈에 띈다. “… 그리고 네 형제들 위에 군림할 너에게는….”이라는 부분이다. 아버지 야곱의 입으로 요셉이 꿈꾸었던 꿈 대로 이어질 것을 선언한 것이다.
또, “…세겜 땅을 더 준다.”고 유언한다. 결국 이 유언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이 세겜 지역을 분배 받음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요셉은 애굽에서 죽는데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 라고 당연하게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최고 유산을 선언한 셈이다.
그것은 “장차 들어갈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을 땅, 그곳에 있는 나의 땅, 후손들의 땅… 이 믿음을 심겨 준 것이다. 부동산이 유산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믿음이 유산이다.
나는?
-야곱은 늙어서 눈이 어두웠다. 젊었을 때 그는 눈이 어두운 이삭을 속여 자기 욕심을 채울 만큼 영혼의 눈이 어두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요셉의 장자 므낫세가 아니라 차자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더 가까운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신의 눈은 어두워져 갔지만, 영적인 눈은 더 밝아진 야곱이었다.
-눈이 어두운 이삭은 야곱에게 속아서 작은 아들에게 장자의 복을 빌어주었으나, 야곱은 눈이 어두웠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육신의 눈은 어두워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밝아지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오른손을 둘째인 에브라임 위에 왼손은 첫째인 므낫세 위에 얹는다. 요셉이 “그리 마옵소서”하고 만류하지만, 야곱은 다 알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신 것처럼, 에브라임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세상의 질서를 역전시키면서 자기 주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관습, 혈통, 제도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당연하게 인정되고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인간 사회 너무나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든지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 안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 앞에 뒤바껴야 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면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연연하면 안된다. 믿음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주권)에 당연하게 반응하는 순종인 것이다.
-요셉에게 당연한 것은 므낫세가 장자, 에브라임은 차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뜻)은 에브라임이 장자, 므낫세가 차자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둘에게 베푸시는 축복은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이 된다.
-인간에게 당연한 순서보다 하나님의 결정이 우선이며, 하나님은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베푸시는 복은 차이가 없으시다. “에브라임과 같고 므낫세 같아라……”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고 요셉에게 이르기까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출생 순서에 따라 장자권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가 그대로 순종되고 존중되는 삶이 곧 그의 백성의 삶이다.
-야곱은 그렇게 요셉의 두 자녀를 축복한다. 특별히 요셉에게 ‘세겜 땅’을 준다. 하지만 당장 그 땅을 차지할 수 없고 나중에 400년 후에 하나님께서 조상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현실이 될 것이다. 그들은 땅을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선물 받은 것이다. 믿음이 아니면 전혀 기쁘지 않은 복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당연히 내가 교회 다녀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교회 다니면 다 구원 받는거야 라는 당연구원의 심리가 팽배한 요즘, 구원은 교회를 다님으로 당연히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 내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받아 누리고 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은 자격이 있는 당연한 자는 없다. 그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이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하나님 나라에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 밖에 없다. 이 주권 앞에 순종하는 걸음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교회를 살릴 것이다. 공동체를 일으킬 것이다. 순종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역사할 것이다.
-부동산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 아니다.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 지금 요셉은 애굽에 있고, 그는 애굽에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 땅을 물려준다. 자신이 형들에게 버림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그 곳을 물려 받는다. 애굽이 정착지가 아니라 돌아갈 네 땅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애굽 총리가 너의 자리가 아니라 세겜 땅이 너의 자리임을 상기 시킨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길까? 야곱을 통해 확고하게 결심하게 된 것은 “주님이 친히 예비하신 처소”를 바라보게 하는 유산을 남겨야 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뿌리박는 삶이 아니라 주님 예비한 곳을 바라보게 하여 기꺼이 “나그네 길”을 살게 하겠다!
-날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15~16절). 야곱은 자신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47:9)을 보냈다. 형을 피해 집을 떠난 때부터 속고 속이는 삶이 이어졌다.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려는 노력으로 가족을 속이고, 그를 이용하려는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고, 그의 몸에서 난 아들들도 그를 속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길러주셨고 모든 위기와 환난에서 건져주셨다. 이처럼 지난 삶에서 나를 돌보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야곱은 믿음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다. 므낫세는 큰 족속을 이룰 것이지만 그의 아우 에브라임은 여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로 두 아들을 축복하였다.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야곱은 작은 자를, 그리고 어린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두 아들에게 축복한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자와 강한 자를 높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낮은 자와 약한 자를 향한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장차 그의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본다. 야곱은 과거 자신이 애굽의 노예로 팔렸던 도단 들이 있는 세겜 땅을 요셉에게 물려준다.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으며 요셉은 아버지에게 받은 세겜 땅에 매장된다(수 24:32).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확신이 분명해져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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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6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야곱의 마지막
[창 47:27-48:7]
이스라엘 자손이 고센 땅에 정착한 지 17년이 지났다. 흉악한 기근도 잘 넘겼고 재산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하였다. 그의 나이 147세가 되었다(47:27-28).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요셉을 불러 가나안 땅에 매장해 줄 것을 약속하게 하고 맹세까지 하게 한다(47:29-31). 이후 병든 야곱을 찾아온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48:1-7). 죽음 직전의 야곱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
1.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이다.(47:27-31)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은 고센 땅이었다. 이곳에 정착한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요셉을 불러 약속하고 맹세하게 한다. “….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새번역_29-30절).
고센 땅이 자신의 매장지, 즉 영원히 안식할 땅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이 누울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거다. 이곳에서 재산도 불어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27절)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아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땅으로 자신을 보내 달라는 거다.
한편으로 애굽으로 내려올 때 “함께 내려가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고센 땅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27절, 46:3). 하지만 “함께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46:4). 야곱은 고센 땅에서의 17년의 시간 동안 이것을 잊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는 것을 직감한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이 고센 땅에 영원히 눕지 않고 조상들 곁에 눕게 해줄 것을 약속받고 맹세하게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며 노년의 삶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을 통해 굳건히 지켜주신 약속들이 자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바라며 요셉에게 자신의 “출애굽”을 약속하게 한다. 이렇게 야곱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대한 확고한 시선을 깨달은 요셉도 훗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분명하게 유언한다. 출애굽할 때 나의 뼈를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묻어다오…..
약속따라 사는 인생은 죽음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도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사모한다.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한다. “….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새번역_31절).”
“고센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실 땅이다.”
2. 잊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다(48:3-4)
이 결연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드러난다. 애굽으로 들어온 이후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 왔음을 보여 준다. 늘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새번역_3-4절).”
삶을 마무리 하면서 야곱은 이를 회상한다. ‘수많은 자손들과 이들이 살아가도록 주실 영원한 소유될 가나안 땅”… 이 약속을 애굽 고센 땅에서 굳게 붙잡고 살아왔다. 잠시 가나안을 떠나 자리잡은 이곳은 “생육하고 번성하여(47:17) 민족을 이루어 나가는 민족태동의 요람은 될 수 있지만, 영원한 터전, 기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고백한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지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아 사는 삶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축복의 땅 이기는 하나 나그네 땅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고센 땅을 정착지로 삼고 살지 않는다. 나는 이 땅을 정착지로 여기며 이 땅에 중심을 두고 모든 것을 쏟으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록 이 땅에서 축복을 누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지만 영원한 거처는 되지 않음을 깨닫고 살고 있을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세상 나라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의지가 약속의 말씀에서 나오는가?
3.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다(48:5-7)
야곱은 자신을 찾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간증하고서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의미는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야곱의 유언을 통해 장자에게 주어지는 두배의 재산 상속이 두 아들이 양자가 되어 요셉에게 자연스레 주어진다.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렵혀서 자격을 상실하였고(49:3-4) 그 뒤를 잇는 레위와 시므온은 세겜에서의 범죄로 인해 승계 자격이 박탈 되었다(49:5-6). 요셉의 경우 혹독한 기근에서 온 가족을 살린 것 만으로도 이미 형들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단순히 장자의 권리가 주어진 것에 이 선언의 의미가 멈추면 안 된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의 진정한 실현, 화룡점정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열 한 곡식단과 열 한 별이 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은 단지 애굽 총리로서 받은 엎드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셉이 형제들의 장자로서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통로가 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며 요셉이 형제들에게 받을 따돌림의 원인을 제공하여 하나님의 뜻에 실패했고, 형제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나 보자며 악독함으로 죽이려하여 실패 하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꾼 꿈을 끝까지 살려 내셔서 기어이 요셉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인간은 실패하나, 하나님은 성공하셨다. 요셉이 꿈을 꾼지 약 40여년(노예 13년, 7년 풍년과 7년 기근중 2년이 지나 시작된 애굽 이주 후 17년… 어림잡아 이 정도 되지 않을까?)만에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은 일생의 시간이 가꾸는 시간이며,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반드시 열매를 맺히며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읽고 듣고 생각하며 나의 약속으로 붙잡고 성실하게 믿음의 걸음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주신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살련다.
나는?
-하나님은 고센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삼아주셨다. 그곳에서 자기 백성이 안전하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아담에게 주신 복,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자손의 번성을 안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조건으로 자기 백성의 임시 둥지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겠지만, 나그네로 살고 있는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은 계속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신다. 야곱에 요셉에게 요구한 인애와 성실함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애 동안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주신 것을 전 생애를 통해 경험했다.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나를 신실하게 붙드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고센 땅이 아무리 좋아도 그 땅은 ‘우거(寓居, 임시로 다른 곳에 머물러 살다)’하는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고센 땅을 정착민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 야곱은 유언을 통해 이를 고백한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 즉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400년 후에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아들이 되게 하겠다고 한다. 즉,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의미다. 이는 요셉이 꿈에서 본 대로 얻은 영광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편애로 이루려했지만 실패했고, 사람들은 그 꿈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을 살리셔서 기어이 이루신 것이다.
-야곱이 삶을 마무리하며 되짚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땅에 대한 약속을 따라 인생을 정리하기를 원했다. 나도 역시 그래야 겠다. 나의 삶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따라 진행하고 정리하여야지..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을 다시 되짚는다.
-또 야곱이 되짚은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꿈의 완성”이었다. 요셉이 꾼 꿈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그의 두 아들을 입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양식을 구하러 온 자리에서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린 것은 진정한 엎드림이 아니였다. “호구지책”의 엎드림이었다.
-가족안에서 진정한 엎드림은 아버지 야곱이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 삼고 재산을 분배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요셉에게 장자에게 주어지는 권리처럼 두 배의 재산이 상속되게 한 것이 진정한 엎드림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대로 끝까지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실감한다. 나의 시각과 마음으로 이만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계획하신 대까지 완전하게 마무리하신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심으로 확실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고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안에 있음을 믿고 누리며 살아가다 보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다.
-고센땅에서 재산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하기도 하듯,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취하고 누리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약속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주님으로 완성 되고 완전하게 실현 될 것이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상황을 지나더라도 결국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을 바라본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이에 따른 혼란으로 인한 개인, 교회, 나라와 민족, 온 세계 열방의 상황이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주권(능력)이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것 이기에….
*나에게 이 사실이 조급하지 않는 “믿음의 여유”안에서 이 상황을 견디게 하실 줄 믿는다. 조급함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도록, 선하신 인도하심을 외면하지 않도록 날 선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게 맡기신 모든 사역이 나의 계획과 뜻에 따른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걸음”에 나의 걸음을 맞추어야 함을 절절히 깨닫는다. 결국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갈 이스라엘처럼,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끄심을 신뢰하기에.
1.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이다.(47:27-31)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은 고센 땅이었다. 이곳에 정착한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요셉을 불러 약속하고 맹세하게 한다. “….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새번역_29-30절).
고센 땅이 자신의 매장지, 즉 영원히 안식할 땅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이 누울 땅은 가나안 땅이라는 거다. 이곳에서 재산도 불어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27절)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아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할 땅으로 자신을 보내 달라는 거다.
한편으로 애굽으로 내려올 때 “함께 내려가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고센 땅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27절, 46:3). 하지만 “함께 데리고 나오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46:4). 야곱은 고센 땅에서의 17년의 시간 동안 이것을 잊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는 것을 직감한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이 고센 땅에 영원히 눕지 않고 조상들 곁에 눕게 해줄 것을 약속받고 맹세하게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하며 노년의 삶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을 통해 굳건히 지켜주신 약속들이 자신에게도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바라며 요셉에게 자신의 “출애굽”을 약속하게 한다. 이렇게 야곱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대한 확고한 시선을 깨달은 요셉도 훗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분명하게 유언한다. 출애굽할 때 나의 뼈를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묻어다오…..
약속따라 사는 인생은 죽음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도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사모한다.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한다. “….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새번역_31절).”
“고센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실 땅이다.”
2. 잊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다(48:3-4)
이 결연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드러난다. 애굽으로 들어온 이후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 왔음을 보여 준다. 늘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던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새번역_3-4절).”
삶을 마무리 하면서 야곱은 이를 회상한다. ‘수많은 자손들과 이들이 살아가도록 주실 영원한 소유될 가나안 땅”… 이 약속을 애굽 고센 땅에서 굳게 붙잡고 살아왔다. 잠시 가나안을 떠나 자리잡은 이곳은 “생육하고 번성하여(47:17) 민족을 이루어 나가는 민족태동의 요람은 될 수 있지만, 영원한 터전, 기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고백한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지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아 사는 삶은 중심을 잃지 않는다. 축복의 땅 이기는 하나 나그네 땅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고센 땅을 정착지로 삼고 살지 않는다. 나는 이 땅을 정착지로 여기며 이 땅에 중심을 두고 모든 것을 쏟으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록 이 땅에서 축복을 누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지만 영원한 거처는 되지 않음을 깨닫고 살고 있을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세상 나라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의지가 약속의 말씀에서 나오는가?
3.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다(48:5-7)
야곱은 자신을 찾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에게 담담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간증하고서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는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의미는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야곱의 유언을 통해 장자에게 주어지는 두배의 재산 상속이 두 아들이 양자가 되어 요셉에게 자연스레 주어진다.
장자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더렵혀서 자격을 상실하였고(49:3-4) 그 뒤를 잇는 레위와 시므온은 세겜에서의 범죄로 인해 승계 자격이 박탈 되었다(49:5-6). 요셉의 경우 혹독한 기근에서 온 가족을 살린 것 만으로도 이미 형들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단순히 장자의 권리가 주어진 것에 이 선언의 의미가 멈추면 안 된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의 진정한 실현, 화룡점정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열 한 곡식단과 열 한 별이 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은 단지 애굽 총리로서 받은 엎드림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셉이 형제들의 장자로서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통로가 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며 요셉이 형제들에게 받을 따돌림의 원인을 제공하여 하나님의 뜻에 실패했고, 형제들은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나 보자며 악독함으로 죽이려하여 실패 하였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꾼 꿈을 끝까지 살려 내셔서 기어이 요셉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인간은 실패하나, 하나님은 성공하셨다. 요셉이 꿈을 꾼지 약 40여년(노예 13년, 7년 풍년과 7년 기근중 2년이 지나 시작된 애굽 이주 후 17년… 어림잡아 이 정도 되지 않을까?)만에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은 일생의 시간이 가꾸는 시간이며,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반드시 열매를 맺히며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읽고 듣고 생각하며 나의 약속으로 붙잡고 성실하게 믿음의 걸음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어주신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살련다.
나는?
-하나님은 고센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삼아주셨다. 그곳에서 자기 백성이 안전하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아담에게 주신 복,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자손의 번성을 안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조건으로 자기 백성의 임시 둥지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겠지만, 나그네로 살고 있는 애굽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은 계속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신다. 야곱에 요셉에게 요구한 인애와 성실함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애 동안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 주신 것을 전 생애를 통해 경험했다.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나를 신실하게 붙드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고센 땅이 아무리 좋아도 그 땅은 ‘우거(寓居, 임시로 다른 곳에 머물러 살다)’하는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고센 땅을 정착민이 아니라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 야곱은 유언을 통해 이를 고백한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 즉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400년 후에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아들이 되게 하겠다고 한다. 즉, 요셉에게 두 지파의 분깃을 주어 그에게 장자권을 주겠다는 의미다. 이는 요셉이 꿈에서 본 대로 얻은 영광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편애로 이루려했지만 실패했고, 사람들은 그 꿈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꿈을 살리셔서 기어이 이루신 것이다.
-야곱이 삶을 마무리하며 되짚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땅에 대한 약속을 따라 인생을 정리하기를 원했다. 나도 역시 그래야 겠다. 나의 삶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따라 진행하고 정리하여야지..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을 다시 되짚는다.
-또 야곱이 되짚은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꿈의 완성”이었다. 요셉이 꾼 꿈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그의 두 아들을 입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양식을 구하러 온 자리에서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린 것은 진정한 엎드림이 아니였다. “호구지책”의 엎드림이었다.
-가족안에서 진정한 엎드림은 아버지 야곱이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 삼고 재산을 분배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요셉에게 장자에게 주어지는 권리처럼 두 배의 재산이 상속되게 한 것이 진정한 엎드림의 완성이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대로 끝까지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실감한다. 나의 시각과 마음으로 이만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계획하신 대까지 완전하게 마무리하신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심으로 확실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믿고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안에 있음을 믿고 누리며 살아가다 보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다.
-고센땅에서 재산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하기도 하듯, 지금 누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취하고 누리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약속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주님으로 완성 되고 완전하게 실현 될 것이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상황을 지나더라도 결국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이기 때문에 충분히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을 바라본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소식과, 이에 따른 혼란으로 인한 개인, 교회, 나라와 민족, 온 세계 열방의 상황이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리라. 결국 하나님의 주권(능력)이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것 이기에….
*나에게 이 사실이 조급하지 않는 “믿음의 여유”안에서 이 상황을 견디게 하실 줄 믿는다. 조급함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도록, 선하신 인도하심을 외면하지 않도록 날 선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게 맡기신 모든 사역이 나의 계획과 뜻에 따른 성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걸음”에 나의 걸음을 맞추어야 함을 절절히 깨닫는다. 결국 고센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갈 이스라엘처럼,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끄심을 신뢰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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