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 [창 33:1-20]
 – 2026년 05월 01일
– 2026년 05월 01일 –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라헬은 오래도록 임신하지 못한다. 아들을 무려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야곱과 언쟁한다.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에서 사랑하는 모습 이후 처음 등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싸움이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자신도 자식을 낳게 하라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시작된다. 라헬은 자신이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자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게 된다. 마침내 라헬도 요셉을 낳음으로 두 자매의 출산 경쟁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열두 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1. 라헬의 여종 빌하의 출산(1~8절)29장에서 아들을 넷이나 낳은 레아와 대조적으로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는 열지 않으셔서(29:31)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다. 라헬은 아들을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를 질투한다.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실상 행복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남편에게 아들을 낳게 하라고 요구한다.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이런 라헬에게 야곱은 아이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냐며 반박한다. 야곱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실을 알고 리브가를 위해 무려 20년을 기도했었다. 그런데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불임의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이때 라헬이 생각한 방법은 예전에 사라가 한 것처럼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 대신 아들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무릎에 둔다’라는 뜻은 그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여 자신이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헬은 양자를 얻어서라도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라헬은 이 결심을 곧바로 결행한다. 4절에서 라헬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었고 야곱은 그녀에게 들어갔다. 그 결과 빌하는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서 변호해 주셨다는 의미로 ‘단’이라고 짓고, 둘째 아들은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면서 ‘납달리’로 짓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라헬이 모든 면에서 언니를 이기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예전에 형의 장자권을 갖고 싶어 에서와 갈등하던 야곱의 모습과 닮았다. 그로 인해 가정에 갈등이 불거지고, 결국 집에서 도망 나오게 된 것처럼, 야곱의 가정에서 그런 불안이 재현되고 있다.

2. 레아의 여종 실바의 출산(9~13절)9절도 레아가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레아는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보았다. 둘 다 불임의 상태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알게 된 레아는 라헬이 했던 방법과 동일하게 자신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어, 실바를 통해서도 ‘복되다’, ‘행운이다’라는 의미의 아들 ‘갓’과 ‘행복’이라는 의미의 아들 ‘아셀’을 얻게 된다. 레아는 실바를 통해 얻은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신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라헬뿐 아니라 레아 또한 동생과 경쟁하는 모습은 레아 또한 완전한 평안의 상태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두 자매의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을 많아지게 하셨다.

3. 레아의 출산(14~21절)이 단락은 레아와 라헬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여종들을 통해 대리적으로 경쟁했다면 이제는 레아와 라헬이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발단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추수하러 들로 나갔다가 우연히 합환채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합환채는 당시에 성욕을 자극하며 임신을 돕는 역할을 하는 식물로 알려져 있었다. 르우벤은 출산이 멈춘 어머니를 위해 챙겨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헬은 레아를 찾아와 자신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레아는 겉으로 정중하게 보이지만, 단호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레아는 남편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합환채까지 가져가려는 라헬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라헬은 화를 내는 레아에게 야곱과 동침할 기회를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보는 남편보다 임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합환채가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레아는 라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합환채보다 남편과 함께하는 기회가 더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밤 야곱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한편, 레아는 합환채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합환채를 양보한 레아에게 아들 잇사갈과 스불론, 딸 디나를 주시고, 합환채를 가져간 라헬에게는 아무 자식도 주지 않으신다. 태를 여닫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모든 꾀를 무용지물로 만드셨다.

4. 라헬의 출산(22~24절)남편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했던 라헬이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즉,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소리를 들으셨고, 마침내 아들을 주셨다. ‘부르짖었다’라는 단어 뒤에 ‘하나님이 기억하셨다’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은 라헬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은 라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감사하며, 여호와께 아들을 더 달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요셉’으로 짓는다. 이제 라헬은 자식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야곱의 결혼생활은 라반의 속임수로 시작하여 레아에 대한 박대와 라헬의 질투와 갈등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로 야기된 불행을 불행으로 두지 않으시고 많은 자녀(12명)를 주시는 계기로 삼으신다. 인간은 악하게 행동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다. 나는?-레아와 라헬은 경쟁하듯 아이를 낳고 남편 쟁탈전을 벌인다. 레아는 아들이 있고 남편의 사랑은 없었으며,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었다. 둘은 빌하와 실바라는 여종들을 동원하고 합환채(최음제)까지 사용하여 자식 낳기 경쟁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야곱에게 약속하신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는 라헬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레아의 합환채를 넘겨받아 그 힘으로 자식을 낳아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 사이에 레아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얻는다. 자식을 낳는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야곱의 말을 라헬은 새겨듣지 않았다. -평생 자기 힘과 지혜로만 원하던 것을 얻어 내던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만이 자식을 주실 수 있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라헬마저도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태를 여셨다. 요셉을 주셔서 아이 못 낳은 수치를 라헬에게서 거두신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다. 이유는 라반의 사기행각과 관련 있다. 라반에 대한 분풀이 대상이 레아였다. 레아의 처지가 기구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잘 아셨다.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와 관련하여 야곱에게 그 원인을 둔다. 하나님께서는 결혼까지 한 이상 레아에 대한 책임을 라반에게 묻지 않으셨다. 야곱의 행동을 기억하셨다. *한편,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음에도(사랑받지 못함_29:31) 육체적인 관계는 맺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늘어날수록 레아가 붙인 아들들의 이름은 야곱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 훗날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부인은 레아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한 라헬은 이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들레헴 근처 길에 장사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아에 대한 야곱의 마음이 미움에서 사랑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본문은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주”를 보여준다. 한 남자 야곱의 사랑을 구하고 찾는 레아와 자신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는 라헬이 자신들의 몸종까지 아내로 주어 자녀 출산에 여념이 없다. 마치 부부간의 사랑 확인이 출산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긋난 출산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고 계신다. 야곱의 어긋난 라헬만을 향한 사랑과 이런 야곱에게 지아비의 사랑을 기다리는 레아의 마음과 출산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는 지파들의 출발은 성스럽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의 출발이 아니라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다투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순탄하고 평이하기보다 왜곡된 가정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환경과 조건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인도하심이 더욱 발휘되고 드러날 것이다. *출산 경주의 결승선은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에 임신과 출산이 달려 있음을 레아든 라헬이든 깨달은 것이었다.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추구했던 레아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깨달았고, 합환채가 임신시켜 줄 것이라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던 라헬도 임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임을 깨달아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화하였다. 길고 긴 출산 경주의 결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한 것이다. 레아든 라헬이든 하나님을 깨달았다. *한편, 하란에서 자란 하란의 딸들이 이제 하나님의 딸들이 되는데 이리 오래 걸렸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출산 경주의 결과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레아는 하나님께 사랑받음을 깨달았고, 레아의 거듭된 출산에서 시기와 질투로 몸종을 통해서라도, 합환채를 사용하여서라도 자녀들을 원했던 라헬은 임신은 인간적이고 우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철저히 깨닫고 결국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한다. 하나님은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도 후손에 대한 약속을 철저히 이루고 계셨고, 야곱의 부인들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역사하셨다.

-역시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 기도제목

* 주님, 생명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 주님, 야곱의 가정이 북적북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북적거림이 아니라 불안정한 부부관계로 인해 어지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후손들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33:1-20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 
 
마하나임의 환상과 얍복 강변의 씨름에서 연거푸 하나님의 사자들과 하나님(의 사자)을 만난 야곱은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하나님은 그의 곁에 계셨다. 야곱은 “눈을 들어” 멀리서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맞이하기 위해 가족들을 분리했다. 야곱은 모든 돌발 상황을 대비해 모든 대열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 놓은 상태였다. 
 
한편 이렇게 두려워 하는 야곱과 달리 에서는 야곱을 매우 반가워하였고, 야곱이 주려는 예물도 거절하였지만, 야곱이 강권하여 예물을 주며 은혜를 구한다. 하지만 세일로 같이 가자는 에서의 제안을 거절하고 숙곳에 정착한다.
 
 
 
1. 야곱과 에서의 만남, 화해(1~11절)
야곱이 드디어 에서를 만났다. 하늘 군대를 보고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만남의 자리로 나간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나… 얼마나 감격스러운 만남인가!
 
20년의 시간은 에서의 마음을 충분히 누그러뜨렸을까? 아니다 시간이 누그려뜨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살다보면 시간이 지나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예상치 못한 화해가 자연스레 마음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화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야곱이 밧단하람으로 떠나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 나름대로 험한 인생을 살았다. 이 사이 에서의 살기 넘치는 마음을 어루만지셨을 것이다. 물론 먼저 받은 그 많은 선물들에 마음이 녹았을 수 있겠지만, 잠시 신부감을 구하러 간 줄 알았던 동생 야곱이 오랜 시간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도 감감했으니 처음 살의에 찬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고 나중에는 연민도 느꼈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허벅지 뼈(고관절, 엉덩이 뼈)가 다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지팡에 의지하여 힘겸게 나아와 일곱 번 절하는 동생이 안쓰러웠을 수 있다. 물론 내 생각이다
 
하지만 에서가 야곱의 가족들이 귀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400명을 이끌고 마중 나오고 야곱을 만날때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한참을 울고서야 식구들을 물어보고 가장 나중에야 야곱의 선물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에서는 이미 야곱을 용서했고 그리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만남 이후 군사 몇을 남겨두고 가겠다고 한 것을 보면 평생 들판에서 자라 세일산 근방을 훤히 꿰뚫고 있는 그가 야곱과 그의 귀향단을 보호하려 달려 왔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니 야곱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질 없는 생각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렇게 연약한 나의 부질없는 근심 걱정 속에서도 약속하신대로  일하셨음이 증명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다. 야곱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다. 야곱은 마하나임과 얍복강가를 거치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동행하여 주신 다는 것을 실제한 것 같다.
 
 
 
2. 야곱과 에서의 이별(12~17절)
에서와 야곱은 평화롭게 이별한다. 에서는 함께 더나자고 야곱에게 권하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친절하게 말한다(12절). 하지만 야곱은 일단, 하란으로부터 라반의 추격을 피해 강행군했었고 이후 쉼 없이 이동했으므로 먼저 떠나라고 간청하고, 자신은 가축 떼와 가족들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세일까지 인도한 후 에서에게 가겠다고 한다(13~14절). 물론 거짓말이다. 이에 에서는 자기 수하 일부를 남겨 돕겠다고 하지만, 야곱은 이 또한 사양한다.
 
야곱의 에서의 호의에 대한 거절은 아직 그가 에서를 위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에서와의 깨어졌던 관계는 회복하되, 장래의 교류나 영향권에는 머물지 않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세일 산이 아닌 가나안 땅에 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에서는 이날 ‘그의 길을 따라’ 세일로 돌아간다. ‘그 길을 따라’라는 표현은 화해 이전이나 이후나 두 형제의 삶이 서로 다른 방향임을 암시한다. 이들은 아브라함과 롯처럼(13:5~13) 이후에도 떨어져 살게 된다(36:6~7).
 
야곱의 서사에서 두 형제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23년 후(120세), 이삭의 장례를 치를 때다(35:29). 에서가 남부로 떠난 뒤, 야곱은 얍복강을 다시 건너 북서쪽 인근 숙곳으로 이동한다(17절). 요단 계곡의 비옥한 저지대인 이곳은 가축 방목과 이동과 생존에 유리했다. 야곱은 긴 여정 후의 재정비를 위해 그곳에 집과 가축 우릿간(‘초막들’, 쑥코트)을 지었다. 이에 그 땅을 숙곳(쑥고트)이라 불렀다.
 
 
 
3.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한 야곱(18~20절)
이후 야곱은 요단을 건너지만, 벧엘이나 헤브론으로 가기보다는 숙곳에서 서쪽 약 32km에 위치한 세겜에 정착한다. 18절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안전히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렀다’는 말로 귀환 여정이 끝났음을 밝힌다. 공식적인 귀환의 종착지는 벧엘이다(35:9). 세겜 도착 자체는 두 의의가 있다.
 
첫째, 야곱이 아브라함의 언약 계승자임을 확증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세겜에 와서 첫 제단을 쌓고 땅의 약속을 받았듯이(12:6~7), 약 180년 후 그의 손자 야곱이 하란에서 세겜으로 와서, 첫 제단을 쌓고 밭을 산다. 특히 아몰 가문에게서 100크시타에 매입한 땅은 정착 의지와 함께 가나안의 첫 소유지임을 알린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처럼 훗날 요셉의 유골 매장지가 되며(수 24:32)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둘째, 벧엘에서의 간구가 응답되었음을 뜻한다. 야곱은 여호와가 자신을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다(28:21). 따라서 그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른 것은(20절) 이 약속을 기억하고 드린 감격적인 신앙고백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벧엘로 올라가서 서원(28:22)을 이행할 일이 남았다.
 
 
 
나는?
-야곱의 주도면밀한 에서를 맞을 준비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끄심 앞에 여지없이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야곱이 했던 근심과 이에 따른 대책이 무색할만치 에서와의 재회는 감격적이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야곱은 이전과 달리 맨 뒤가 아닌 맨 앞으로 나가 형 에서를 맞이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마음이 누그러진 에서도 동생 야곱을 껴안고 화해한다.
 
-지팡이를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야곱을 본 에서는 어떤 존재였던가? 살기등등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야곱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맞이하고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 품이 넓은 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마음뿐 아니라 이미 야곱을 향한 에서의 마음도 준비시키신 것이다.
 
-야곱은 20년전의 에서만 생각하고 만남을 대비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20년동안 에서를 어루만져 주셨다. 야곱이 간과한 것은 지난 20년 동안 자신과 늘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었다. 이 능력은 단지 밧단아람에서 살다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는데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에서의 마음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풀어 놓으셨다. 
 
-때때로 나만 근심하고 걱정했던 일 때문에 얼마나 무안했던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이렇게 나만 홀로 무안한 경우를 꽤 만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상황, 시간, 공간에서 언약하신 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해야지…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 그토록 두려웠던 형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성품 중 으뜸은 용서다. 불신실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용서하신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을 용서하는 에서의 모습에서 용서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오늘 만나는 불편한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최고의 영성이고 제자도다. 나의 얼굴을 통해 누가 드러나는가?
 
-동행하자는 에서의 제안을 거짓말을 지어가며 거절한다. 세일로 가겠다고 해놓고는 반대 방향인 숙곳으로 향한다. 아직도 에서가 못 미덥고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에서보다 더 변해야 하는 사람은 야곱이다. 그가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벧엘의 서원을 이행하기에는 아직도 그가 버려야 할 미련이 남아 있다.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준다. 서로 화해하고 용서했지만, 각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지혜로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야곱의 연약함이 밉지 않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찜찜하게 걸리는 것은 가족들을 나눌 때 첫 번째 그룹을 여종들과 그의 자녀들, 두 번째 그룹을 레아와 그녀의 아들들, 마지막으로 라헬과 그녀의 아들로 구분한 것은 분명 사려깊지 못한 결정이다.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단지 꿈 이야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야곱의 집안에서 이런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에서와의 20년만의 재회를 잘 마무리하고 숙곳(초막들, 움막들)에 집과 움막들을 짓고 세겜 성문 앞에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아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지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서원한 벧엘까지 아직 이르지 않았으나 그곳에 귀향하기 전 야곱은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에서 야곱(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 아니 이미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야곱은 실감하지 못했으나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셨다.
 
-야곱과 에서의 변화가 선명하게 보인다. 어찌 우연이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각자의 삶에서 은밀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더라도 그 너머에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주님, 야곱이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사람들이 제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보게 하겠습니다. *주님, 치밀한 인간적인 몸부림이 무색할만큼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는 예상조차 하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비하심이 저에게도 늘 있음을 알기에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