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권리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이들을 향한 경고를 이어간다.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며 사도의 권리를 내려놓은 복음전도의 길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길은 모두가 달려야 할 경주라고 강조했다. 이 경주장의 경주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응원하고 지켜 본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전했다. 바울은 경기장에서 달음박질하는 경주자에 빗대어 믿음이 달음박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준다. 오늘도 달려야할 믿음의 경주… 나는 어떻게 달려야 할까?
1. 왜? 누구와 달음박질하는가?(9:24-27절)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중에 상 받는 사람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이처럼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라고 권면한다(24절). 상을 받기 위한 달리기는 믿음이라는 경주장 안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하는 달리기다. 그들이 바라는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 위해 경기장에 있는 경주자들이 “모든 것에 절제”한다. 그냥 되는 것이 없다는 거다. 온 힘을 내어 수고하고 애쓰지만, 그 과정에 절제가 함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은 모든 경주자들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온 힘을 쏟는 목적은 다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념하는 운동 경기가 2년마다 열렸다. 원래는 작은 지방의 축제였는데, 가이사랴 경기장과 로마황제 숭배 제의와 결합하여 굉장히 큰 행사가 되었다. 이 운동경기가 바울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9:24-27의 배경이 된다. 또한, 운동 경기가 진행 되는 동안 유력 인사들의 신전 만찬들이 있었는데, 8장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사건의 배경이다.
똑같은 인생이라는 경주장에 들어선 모두는 “썩어질 승리자의 관”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힘껏 달려야 한다. 그래서 이 달리기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알량한 지식을 방패 삼고 즐기면 결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 단지 먹는 문제에서 멈추지 않고 이방 우상 신전에서 연결되어 범할 수 있는 음행도 절제 하지 않으면 썩어질 승리자의 관은 받을 수 있을 지 몰라도 “썩지 않을 것”은 받지 못한다. 승리자의 관을 쫓아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을 달리는 달리기가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절제하며 힘껏 절제하며 달리는 인생의 경주여야 한다. 승리의 면류관이 아닐 지라도 썩어질 승리를 위해 절제하지 않는 달리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리는 이 경주의 상대는 누구일까? 두말 할 나위 없이 “썩어질 승리자의 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이 경주는 다른 이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와의 투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6-27절)”
2. 그렇다면 어떻게 달음질 해야 하나?(10:1-12절)
“썩지 않을 것”을 얻는 인생의 달음질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이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달음질은 안내 표지판을 잘 보고 기억하며 달려야 할 것을 당부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고도, 도리어 스스로 버림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될 수 있음”을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들의 실패는 “본”이 된다. 이들의 모습을 잘 기억하면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썩어질 승리자의 관”이 아닌 “썩지 않을 것”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 아래 있었다. “…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새번역_1-4절)”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고린도 성도들이 알아야 할 본보기이다(5-6절). ‘그들처럼 악을 즐겨하면(6절)’, ‘그들처럼 우상 숭배하면’, 특히 우상 앞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노는 것처럼(지금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여 즐기는 것이, 7절), 또 그들처럼 우상 앞에서 음행하다 뱀에게 멸망당한 것처럼(8-9절) 달음질 해서야 되겠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짚는다. “그들과 같이(8, 9, 10절)” 음행하지 말고,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자. 이런 일을 이미 우리에게 본보기로 주셨으니 “그들처럼” 되지 않게 “깨우쳐” 주신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1절).”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_12절)” 조금 안다고, 나는 괜찮다고, 나는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이 정도쯤은 넘어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며 자기 권리를 주장하여 이방신전의 만찬에 참여하여 음행하는 이들에게, 아니라고,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고, 그들도 호언 장담했는데 음행, 시험, 원망에 빠져 죽어갔다고 경고한다.
믿음이라는 인생의 달음질은 결코 호언장담할 것이 못 된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실패의 기록인 구약 39권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본보기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믿음이라는 경주를 본보기 안내 표지판을 신뢰하고 잘 따라 달리면 “썩지 아니할 것”을 받는 결승점을 통과한다.
3. 반드시 만나는 “시련”이라는 장애물(12-13절)
그런데 인생이라는 경주장의 믿음이라는 경주는 그냥 달리기하는 경기가 아니다. 장애물 경기다. 그것도 “시험”이라는 예상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불현듯 나타나는 “돌발 장애물” 경주다. 그냥 달리는 것도 버겁다. 음행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고, 원망(불평)하지 않으며 묵묵히 달리는 경주도 어렵다. 그런데 “시험” 이라는 “돌발 장애물” 경주라니…
이것이 반드시 찾아온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의 경주를 출발하면서 미리 “시험”이라는 것이 닥칠거야 라고 알려 주었으니 “돌발 장애물 경주”는 아니다.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마음가짐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들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이 태산처럼 크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만나기 마련인 “시련”이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대처할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며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어선 안된다(12절).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_12절)” 자만하지 말라는 거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교만함,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나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어!”라는 마음이 오히려 넘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새번역_13절)”
기막히지 않는가!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일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다!’ ‘또, 닥친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벗어날 길을 마련해 주셨기에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신분, 경험, 논리, 지식을 더 의지하면 반드시 넘어진다는 거다. 알량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신의 음행을 합리화하는 무기처럼 되고, 썩어질 세상 권리를 포기 못해 이방 신전에서 펼쳐지는 권력자들의 만찬에 참여하는 즐거움(?), 자랑거리(?)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안에 있으니 시험들지도, 음행에 빠지지도 않을 거라는 ‘호언장담’이 “썩지 않을 것을 향해 달려가는” 달음질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넘어진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믿음이라는 경주를 달리는 나는 내 자신과의 지난한 달음질 경주를 구약이라는 실패의 본보기를 알려주시고 반드시 닥칠 수 밖에 없는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 도와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멋진 믿음의 달음질 레이스를 함께 해야겠다.
나홀로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과 함께 달리는 멋진 믿음의 경주여야 하리라. 오늘도 이 경주에서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썩을 승리자의 관이 아닌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야 하리라. 묵묵히 달려야 하리라. 혹 돌발 장애물이 나타나도, 그것이 오늘이어도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달려가야지.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김’을 위해 부름받은 삶이다(24~25절). 하지만 경쟁 상대는 다름 아닌 ‘어제의 나’이다. 그리고 쳐서 복종시켜야 할 대상(27절)도 바로 ‘옛 자아’이다. 경주의 목표는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구원)이다. 이를 위해 모든 일에 자기 절제와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그러니 이미 다 이룬 듯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영적인 진보와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나를 낮추고 주를 높이는 삶을 유지해야 한다.
-바울은 향방 없이 달리지도 않고 자신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는다(26~27절). 버림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길이요. 자신이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원도 사명도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여정이다. 성령을 힘입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한 성화도 사명도 이룰 수 없다.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 경주가 딱 맞는듯하다. 주위에 이런 믿음의 시험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미쁘신(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리라.
-무엇보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나는 “믿음”이라는 경주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감사하다. 향방없는 달음질이 아니라, 허공을 치는 주먹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어 감사하다. 더구나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을 만나도 의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주시고 감당할 길도 내어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달려서 감사하다.
-이 감사한 경주에 “본보기”로 주신 경계하며, 빠지지 말아야 할 것, 절제하며 “달음질”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 내 평생의 달음질 동안 음행, 우상숭배,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절제하고 또 절제해야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다’ 함께 동일한 은혜를 누렸지만, ‘모두’ 약속의 땅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10장 1~6절). ‘악을 즐겨 행하던(6절)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너고(세례),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맛보았어도(성만찬) 이것이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영적 방심이 방종으로, 영적 자만이 자멸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구원을 다 이룬 듯이 오만함과 안이함으로 위태로운 신앙의 경계에 있던 교인들(강한 자들)을 향한 경고다. 한때 좋았던 믿음에 기대어 오늘을 안일하게 보내는 것은 어리석고 위태로운 일이다. 악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느슨하고 악한 생각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음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6, 11~12절). 바울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와 멸망이 고린도 성도들과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반면교사라고 강조한다. 들은(읽은) 말씀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면서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내게 적용하지 않는 묵상은 무익하다. 묵상이 지적 유희와 만족, 잠깐의 변화 시도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7~11절).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도 이스라엘 중 다수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였고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졌다. 출애굽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잊고, 쳐서 복종시켜야 할(9:27) 죄의 습성이 남아 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룩함과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구원의 안전이 아닌 구원의 목적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할 것이다.
-영적 자만을 경계하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치 않아야 한다(12~13절). 변덕스러운 나를 믿지 말고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시험에서 넘어진 이유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시험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신하고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시험 중에 피할 길을 내시고 감당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빨리 달리는 것(향방없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결승선)으로 달려야겠다. 나를 나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것들, 방향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 음행과 우상숭배와 원망과 불평을 절제하며, 이것 때문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본보기로 주신 것을 기억하여 “제대로” 달려야겠다. “오늘도 달리되 제대로 달리리라”
*”인생이라는 경주장, 믿음이라는 경주,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 ” 요즘 일상인 건강을 위한 달리기가 아니라 “상”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주” 그렇기에 상을 받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매진 해야하는, 해도 그만, 안해도 별일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절제”해야 할 것이 “믿음이라는 경주”다.
*이 경주에서 “썩지 않을 것”을 받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본보기”를 가지고 훈련을 시키시는 코치되신 주님, 감독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린도 교회에만 주신 ‘본보기’가 아니라 오늘날 나와 우리에게도 주신 그 ‘본보기’를 따라 역동적인 달음질로 달려간 “본”을 보여 주신 주님과, 바울을 바라보며 또한 자신을 바라보라며 당당히 외친 그의 외침을 따라 바울의 길을 따라간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 달려갈 수많은 성도들 앞에 이스라엘과 같은 본보기뿐 아니라 더 예수님처럼, 더 바울처럼 함께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게 할 목사를 꿈꾼다. 주님 나를 이렇게 빚어주소서.
*이를 위해 주님처럼, 바울처럼 오늘도 절제하며, 집중하여 달린다.
1. 왜? 누구와 달음박질하는가?(9:24-27절)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중에 상 받는 사람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이처럼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라고 권면한다(24절). 상을 받기 위한 달리기는 믿음이라는 경주장 안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하는 달리기다. 그들이 바라는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 위해 경기장에 있는 경주자들이 “모든 것에 절제”한다. 그냥 되는 것이 없다는 거다. 온 힘을 내어 수고하고 애쓰지만, 그 과정에 절제가 함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은 모든 경주자들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온 힘을 쏟는 목적은 다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념하는 운동 경기가 2년마다 열렸다. 원래는 작은 지방의 축제였는데, 가이사랴 경기장과 로마황제 숭배 제의와 결합하여 굉장히 큰 행사가 되었다. 이 운동경기가 바울이 예를 들어 설명하는 9:24-27의 배경이 된다. 또한, 운동 경기가 진행 되는 동안 유력 인사들의 신전 만찬들이 있었는데, 8장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사건의 배경이다.
똑같은 인생이라는 경주장에 들어선 모두는 “썩어질 승리자의 관”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힘껏 달려야 한다. 그래서 이 달리기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알량한 지식을 방패 삼고 즐기면 결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 단지 먹는 문제에서 멈추지 않고 이방 우상 신전에서 연결되어 범할 수 있는 음행도 절제 하지 않으면 썩어질 승리자의 관은 받을 수 있을 지 몰라도 “썩지 않을 것”은 받지 못한다. 승리자의 관을 쫓아 절제하지 못하는 인생을 달리는 달리기가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위해 절제하며 힘껏 절제하며 달리는 인생의 경주여야 한다. 승리의 면류관이 아닐 지라도 썩어질 승리를 위해 절제하지 않는 달리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리는 이 경주의 상대는 누구일까? 두말 할 나위 없이 “썩어질 승리자의 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이 경주는 다른 이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와의 투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6-27절)”
2. 그렇다면 어떻게 달음질 해야 하나?(10:1-12절)
“썩지 않을 것”을 얻는 인생의 달음질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이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달음질은 안내 표지판을 잘 보고 기억하며 달려야 할 것을 당부한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고도, 도리어 스스로 버림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될 수 있음”을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들의 실패는 “본”이 된다. 이들의 모습을 잘 기억하면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썩어질 승리자의 관”이 아닌 “썩지 않을 것”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보호하심 아래 있었다. “…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새번역_1-4절)”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고린도 성도들이 알아야 할 본보기이다(5-6절). ‘그들처럼 악을 즐겨하면(6절)’, ‘그들처럼 우상 숭배하면’, 특히 우상 앞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노는 것처럼(지금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여 즐기는 것이, 7절), 또 그들처럼 우상 앞에서 음행하다 뱀에게 멸망당한 것처럼(8-9절) 달음질 해서야 되겠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짚는다. “그들과 같이(8, 9, 10절)” 음행하지 말고, 시험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자. 이런 일을 이미 우리에게 본보기로 주셨으니 “그들처럼” 되지 않게 “깨우쳐” 주신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1절).”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_12절)” 조금 안다고, 나는 괜찮다고, 나는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이 정도쯤은 넘어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며 자기 권리를 주장하여 이방신전의 만찬에 참여하여 음행하는 이들에게, 아니라고,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고, 그들도 호언 장담했는데 음행, 시험, 원망에 빠져 죽어갔다고 경고한다.
믿음이라는 인생의 달음질은 결코 호언장담할 것이 못 된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실패의 기록인 구약 39권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본보기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믿음이라는 경주를 본보기 안내 표지판을 신뢰하고 잘 따라 달리면 “썩지 아니할 것”을 받는 결승점을 통과한다.
3. 반드시 만나는 “시련”이라는 장애물(12-13절)
그런데 인생이라는 경주장의 믿음이라는 경주는 그냥 달리기하는 경기가 아니다. 장애물 경기다. 그것도 “시험”이라는 예상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불현듯 나타나는 “돌발 장애물” 경주다. 그냥 달리는 것도 버겁다. 음행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고, 원망(불평)하지 않으며 묵묵히 달리는 경주도 어렵다. 그런데 “시험” 이라는 “돌발 장애물” 경주라니…
이것이 반드시 찾아온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의 경주를 출발하면서 미리 “시험”이라는 것이 닥칠거야 라고 알려 주었으니 “돌발 장애물 경주”는 아니다.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마음가짐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들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으면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이 태산처럼 크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만나기 마련인 “시련”이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대처할까?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며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어선 안된다(12절).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새번역_12절)” 자만하지 말라는 거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교만함,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나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어!”라는 마음이 오히려 넘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새번역_13절)”
기막히지 않는가!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일이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거다!’ ‘또, 닥친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벗어날 길을 마련해 주셨기에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 자신의 신분, 경험, 논리, 지식을 더 의지하면 반드시 넘어진다는 거다. 알량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신의 음행을 합리화하는 무기처럼 되고, 썩어질 세상 권리를 포기 못해 이방 신전에서 펼쳐지는 권력자들의 만찬에 참여하는 즐거움(?), 자랑거리(?)를 포기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안에 있으니 시험들지도, 음행에 빠지지도 않을 거라는 ‘호언장담’이 “썩지 않을 것을 향해 달려가는” 달음질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넘어진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믿음이라는 경주를 달리는 나는 내 자신과의 지난한 달음질 경주를 구약이라는 실패의 본보기를 알려주시고 반드시 닥칠 수 밖에 없는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 도와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과 멋진 믿음의 달음질 레이스를 함께 해야겠다.
나홀로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과 함께 달리는 멋진 믿음의 경주여야 하리라. 오늘도 이 경주에서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썩을 승리자의 관이 아닌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야 하리라. 묵묵히 달려야 하리라. 혹 돌발 장애물이 나타나도, 그것이 오늘이어도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달려가야지.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김’을 위해 부름받은 삶이다(24~25절). 하지만 경쟁 상대는 다름 아닌 ‘어제의 나’이다. 그리고 쳐서 복종시켜야 할 대상(27절)도 바로 ‘옛 자아’이다. 경주의 목표는 썩어질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구원)이다. 이를 위해 모든 일에 자기 절제와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그러니 이미 다 이룬 듯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영적인 진보와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나를 낮추고 주를 높이는 삶을 유지해야 한다.
-바울은 향방 없이 달리지도 않고 자신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는다(26~27절). 버림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길이요. 자신이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원도 사명도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여정이다. 성령을 힘입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한 성화도 사명도 이룰 수 없다.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 경주가 딱 맞는듯하다. 주위에 이런 믿음의 시험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미쁘신(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리라.
-무엇보다 인생이라는 경주장에서 나는 “믿음”이라는 경주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감사하다. 향방없는 달음질이 아니라, 허공을 치는 주먹이 아니라 “썩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어 감사하다. 더구나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을 만나도 의례 감당할 만한 것으로 주시고 감당할 길도 내어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달려서 감사하다.
-이 감사한 경주에 “본보기”로 주신 경계하며, 빠지지 말아야 할 것, 절제하며 “달음질”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 내 평생의 달음질 동안 음행, 우상숭배,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절제하고 또 절제해야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다’ 함께 동일한 은혜를 누렸지만, ‘모두’ 약속의 땅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10장 1~6절). ‘악을 즐겨 행하던(6절)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너고(세례),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맛보았어도(성만찬) 이것이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영적 방심이 방종으로, 영적 자만이 자멸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구원을 다 이룬 듯이 오만함과 안이함으로 위태로운 신앙의 경계에 있던 교인들(강한 자들)을 향한 경고다. 한때 좋았던 믿음에 기대어 오늘을 안일하게 보내는 것은 어리석고 위태로운 일이다. 악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느슨하고 악한 생각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음과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6, 11~12절). 바울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와 멸망이 고린도 성도들과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반면교사라고 강조한다. 들은(읽은) 말씀을 나와 무관하게 여기면서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내게 적용하지 않는 묵상은 무익하다. 묵상이 지적 유희와 만족, 잠깐의 변화 시도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7~11절).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도 이스라엘 중 다수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였고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졌다. 출애굽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을 잊고, 쳐서 복종시켜야 할(9:27) 죄의 습성이 남아 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신앙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룩함과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구원의 안전이 아닌 구원의 목적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할 것이다.
-영적 자만을 경계하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치 않아야 한다(12~13절). 변덕스러운 나를 믿지 말고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시험에서 넘어진 이유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시험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신하고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시험 중에 피할 길을 내시고 감당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리라.
*빨리 달리는 것(향방없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결승선)으로 달려야겠다. 나를 나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것들, 방향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 음행과 우상숭배와 원망과 불평을 절제하며, 이것 때문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본보기로 주신 것을 기억하여 “제대로” 달려야겠다. “오늘도 달리되 제대로 달리리라”
*”인생이라는 경주장, 믿음이라는 경주, 시험이라는 돌발 장애물…. ” 요즘 일상인 건강을 위한 달리기가 아니라 “상”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주” 그렇기에 상을 받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며 매진 해야하는, 해도 그만, 안해도 별일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절제”해야 할 것이 “믿음이라는 경주”다.
*이 경주에서 “썩지 않을 것”을 받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본보기”를 가지고 훈련을 시키시는 코치되신 주님, 감독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고린도 교회에만 주신 ‘본보기’가 아니라 오늘날 나와 우리에게도 주신 그 ‘본보기’를 따라 역동적인 달음질로 달려간 “본”을 보여 주신 주님과, 바울을 바라보며 또한 자신을 바라보라며 당당히 외친 그의 외침을 따라 바울의 길을 따라간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 달려갈 수많은 성도들 앞에 이스라엘과 같은 본보기뿐 아니라 더 예수님처럼, 더 바울처럼 함께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게 할 목사를 꿈꾼다. 주님 나를 이렇게 빚어주소서.
*이를 위해 주님처럼, 바울처럼 오늘도 절제하며, 집중하여 달린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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