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람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고전 3:1-15]
 – 2026년 06월 05일
– 2026년 06월 05일 –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깨달아 지고 이것이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의 현주소를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자’로 바라보고 육신에 속한 자를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들’, 혹은 ‘육의 사람’이라 지칭하고 이들의 특징을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고린도 교인은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성장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이다. 이들은 더 자라야 한다. “사람을 따라” 분쟁하는 것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1. 책망 속의 희망(1-4절, 15절)
바울이 단호하게 분쟁이라는 아픔을 끄집어 낸다. 짚어 주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성령의 은사도 경험했고 여러 지식에도 능했기에 아마도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을터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그것도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직언한다. 왜냐하면 “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과 선호하는 지식, 신분과 삶의 수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파당을 만들어 따로 따로 모이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번역_3-4절)”

주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을 한 자신이나 아볼로를 주님보다 더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주인보다 주인이 보낸 종을 더 따르는 웃지 못한 모습 아니겠는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신 것을 더 따르는 것, 더 마음에 두는 것, 주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따라 모이는 것… 허어… 이것 참…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게 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교회와 성도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면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회안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좌절이나 절망으로 결론이 되면 안된다. 그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변화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품에 품고 성숙케 하실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일깨우고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내는 능력을 ‘성령’께서 베풀어 주실테니 말이다.

또, 복음의 기초에 잘못 세운 건축(일)이라도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구원해주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15절). 이것이 희망이다.



2. 희망이 현실되게 하기(5-15절)
어리기만한 어린아이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일수 없다. 복음이라는 생명이 들어 있는 영혼은 ‘성령’께서 친히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때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하게 “원 포인트” 레슨의 기회가 생긴다. 바울의 편지는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나 가장 해결첵이 필요한 부분에 가감없이 직설적으로 다룬다.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적합한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1)이해(시각)조정(5-9절)
분쟁의 기반이 되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 준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었던 선생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위치를 일깨워 준다.

각각 따르는 지도자들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은 각기 맡아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며 사역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집사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새번역 5-6절)” 지금 우리 각각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자신들은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모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당시 세계도 마찬가지 없다. 자신들이 따르는 선생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육을 따라 행하면 육의 사람일 뿐이다.


2)그럼 어떻께? – 비교가 아니라 맡김을 받은 대로(6-15절)
분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역자들 앞으로 헤쳐모여 하면서 시작되고 강화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누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분이라고 말한다. 농사와 건축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어떻게 감당하냐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 주셨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거다. 농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그저 자신들은 그 농사 현장에서 한 부분을 맡김받아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새번역_5하-6절).”

그래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7-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각각 필요한 일만 맡은 것 뿐이다. “동역”한 것이다. 함께 하나님의 밭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감당한 것이다.

또, 건축하는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각각 건축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지으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짓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안의 각 구성원이 바울이나 아볼로가 닦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각 맡은 대로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이들이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책임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에게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 복음을 잘못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며 살아가며 일어난 문제이기에 마지막 때 심판의 불 앞에 이런 잘못된 삶은 모두 사그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세워 놓은 일’)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④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새번역_12-15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초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기초위에 성도를 세우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면 된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자인 양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과 전적 순종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영적 초보자에 불과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을 일삼으며 인간 사역자들을 경쟁적으로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성도들의 풍족한 지식과 은사(1:5,6)는 그들에게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1~3절).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져 여전히 영적인 일들(5~9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육적’ 상태를 질책한다.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신앙 연수는 높아지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영적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성도의 내적 성숙 없이 수적 성장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 뜻과도 전혀 다른 태도다.

-교인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 주는 일 만큼이나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 교회가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의 이름 아래 파벌을 형성한 것은 사역자의 역할을 오해했기 때문이다(4~5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7절)에 대한 영적 무지가 지도자에 대한 과대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수종자’일 뿐이다. 사역자들의 다양한 역할이나 은사는 비교 대상이나 경쟁의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를 자라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밭(교회)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5~9절).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수고에 따라 대가를 받는 종일 뿐, 성도들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자만하거나, 당장 눈에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는지 시험하실 것이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이 터는 바꾸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과 사역 원리도 변질될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지 않으면,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하더라도 심판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 있다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공동체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목회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경쟁관계로 보아왔으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겠나! 각각 맡겨주신 대로 충성하면 될 일인데…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경쟁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시절이 생각나 참 멋쩍다!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겠는가…성도들 안에 동역보다 경쟁이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관습과 시각에서 오는 왜곡들…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들과 문제들… 아..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 알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도우심이 이리 중요하구나…

-무엇보다…이리 나타난 문제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백성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상태일까? 성령께서 보이시는(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의 안목과 관습으로 보고 행하는 ‘어린아이’의 활보함을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보듬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분주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면 참 좋겠다만…. 아쉽게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이 참 은혜가 된다. 특히 “맡겨 주신대로”의 마음이 분쟁의 현장에서 동역의 현장으로 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자라는 의미다. 결코 “동역”이 어울지리 않는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기꺼이 죄를 씨기시고 함께 동역의 길로 세우셨다. “맡겨 주심으로” 말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돌아보았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도 살펴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 이런 직임을 맡겨 주셨을까…

*주님의 십자가의 견고한 터 위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재료로 성실하게 감당해야지… 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역해야지…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감당해야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지도자… 함께 동역하여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만들어가야지… 그리해야지… 경쟁이 아니라 동역으로…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 주심으로…

+ 기도제목

*주님, 더온누리 공동체가 십자가의 원리로 탄탄하게 세워지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공동체를 이루어가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부름받은 자리에서 충성과 순종으로 합당하게 행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깨달아 지고 이것이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의 현주소를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자’로 바라보고 육신에 속한 자를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들’, 혹은 ‘육의 사람’이라 지칭하고 이들의 특징을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고린도 교인은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성장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이다. 이들은 더 자라야 한다. “사람을 따라” 분쟁하는 것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1. 책망 속의 희망(1-4절, 15절)
바울이 단호하게 분쟁이라는 아픔을 끄집어 낸다. 짚어 주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성령의 은사도 경험했고 여러 지식에도 능했기에 아마도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을터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그것도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직언한다. 왜냐하면 “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과 선호하는 지식, 신분과 삶의 수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파당을 만들어 따로 따로 모이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번역_3-4절)”

주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을 한 자신이나 아볼로를 주님보다 더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주인보다 주인이 보낸 종을 더 따르는 웃지 못한 모습 아니겠는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신 것을 더 따르는 것, 더 마음에 두는 것, 주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따라 모이는 것… 허어… 이것 참…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게 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교회와 성도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면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회안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좌절이나 절망으로 결론이 되면 안된다. 그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변화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품에 품고 성숙케 하실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일깨우고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내는 능력을 ‘성령’께서 베풀어 주실테니 말이다.

또, 복음의 기초에 잘못 세운 건축(일)이라도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구원해주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15절). 이것이 희망이다.



2. 희망이 현실되게 하기(5-15절)
어리기만한 어린아이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일수 없다. 복음이라는 생명이 들어 있는 영혼은 ‘성령’께서 친히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때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하게 “원 포인트” 레슨의 기회가 생긴다. 바울의 편지는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나 가장 해결첵이 필요한 부분에 가감없이 직설적으로 다룬다.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적합한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1)이해(시각)조정(5-9절)
분쟁의 기반이 되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 준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었던 선생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위치를 일깨워 준다.

각각 따르는 지도자들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은 각기 맡아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며 사역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집사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새번역 5-6절)” 지금 우리 각각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자신들은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모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당시 세계도 마찬가지 없다. 자신들이 따르는 선생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육을 따라 행하면 육의 사람일 뿐이다.


2)그럼 어떻께? – 비교가 아니라 맡김을 받은 대로(6-15절)
분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역자들 앞으로 헤쳐모여 하면서 시작되고 강화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누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분이라고 말한다. 농사와 건축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어떻게 감당하냐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 주셨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거다. 농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그저 자신들은 그 농사 현장에서 한 부분을 맡김받아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새번역_5하-6절).”

그래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7-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각각 필요한 일만 맡은 것 뿐이다. “동역”한 것이다. 함께 하나님의 밭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감당한 것이다.

또, 건축하는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각각 건축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지으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짓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안의 각 구성원이 바울이나 아볼로가 닦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각 맡은 대로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이들이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책임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에게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 복음을 잘못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며 살아가며 일어난 문제이기에 마지막 때 심판의 불 앞에 이런 잘못된 삶은 모두 사그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세워 놓은 일’)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④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새번역_12-15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초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기초위에 성도를 세우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면 된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자인 양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과 전적 순종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영적 초보자에 불과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을 일삼으며 인간 사역자들을 경쟁적으로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성도들의 풍족한 지식과 은사(1:5,6)는 그들에게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1~3절).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져 여전히 영적인 일들(5~9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육적’ 상태를 질책한다.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신앙 연수는 높아지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영적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성도의 내적 성숙 없이 수적 성장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 뜻과도 전혀 다른 태도다.

-교인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 주는 일 만큼이나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 교회가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의 이름 아래 파벌을 형성한 것은 사역자의 역할을 오해했기 때문이다(4~5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7절)에 대한 영적 무지가 지도자에 대한 과대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수종자’일 뿐이다. 사역자들의 다양한 역할이나 은사는 비교 대상이나 경쟁의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를 자라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밭(교회)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5~9절).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수고에 따라 대가를 받는 종일 뿐, 성도들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자만하거나, 당장 눈에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는지 시험하실 것이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이 터는 바꾸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과 사역 원리도 변질될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지 않으면,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하더라도 심판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 있다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공동체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목회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경쟁관계로 보아왔으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겠나! 각각 맡겨주신 대로 충성하면 될 일인데…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경쟁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시절이 생각나 참 멋쩍다!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겠는가…성도들 안에 동역보다 경쟁이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관습과 시각에서 오는 왜곡들…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들과 문제들… 아..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 알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도우심이 이리 중요하구나…

-무엇보다…이리 나타난 문제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백성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상태일까? 성령께서 보이시는(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의 안목과 관습으로 보고 행하는 ‘어린아이’의 활보함을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보듬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분주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면 참 좋겠다만…. 아쉽게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이 참 은혜가 된다. 특히 “맡겨 주신대로”의 마음이 분쟁의 현장에서 동역의 현장으로 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자라는 의미다. 결코 “동역”이 어울지리 않는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기꺼이 죄를 씨기시고 함께 동역의 길로 세우셨다. “맡겨 주심으로” 말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돌아보았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도 살펴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 이런 직임을 맡겨 주셨을까…

*주님의 십자가의 견고한 터 위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재료로 성실하게 감당해야지… 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역해야지…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감당해야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지도자… 함께 동역하여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만들어가야지… 그리해야지… 경쟁이 아니라 동역으로…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 주심으로…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