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7:1-20]
– 2026년 08월 28일
– 2026년 08월 28일 –
오늘의 본문은 36장에 앗수르부터 심한 모욕을 다 듣고 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기록한 장입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베 옷을 입으며 성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 기도제목
–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모든 상황을 맡기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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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8일
히스기야의 기도
[이사야 37:1-20]
오늘의 본문은 36장에 앗수르부터 심한 모욕을 다 듣고 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기록한 장입니다.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베 옷을 입으며 성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옷을 찢는 히스기야 (1)
히스기야는 앗수르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듣자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채 성전으로 향합니다. 당시 옷을 찢는 행위는 가장 강력한 신체적 언어였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선언할 때 마음이 찢어졌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특히나 히스기야는 성읍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고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며 의지했었으며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는 막대한 은금을 조공으로 바치면서 앗수르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자였기에 이러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현 상황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되는 것임을 깨닫고 난 뒤 옷을 찢으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히스기야 (14)
8절부터 13절까지는 앗수르에 구스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앗수르는 마음이 급해졌고 빠르게 남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협박편지를 보냅니다. 협박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읽어보고 나서 곧바로 성전에 올라가 그 협박편지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더 알게 되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음성으로만 고백하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오감을 가지고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오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히스기야의 기도(15-20)
15절부터 20절까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세상의 무속신앙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단순하게 “우리를 살려주소서”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우리를 구원 하사 천하 만국이 주님만 참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내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또 선으로 이루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나타내고 높이며 영광 올리는 기도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도의 맥락은 훗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일치함을 보게 될 때 우리의 기도 속에는 천하 만국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나의 기도 내용을 점검하게 되었다. 나의 목적과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침묵 속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며 아뢰는 기도를 통해 억울하고 힘겨운 상황에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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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7일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한다
[이사야 36:1-22]
이사야 36장은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사건을 다룬다. 유다의 많은 성읍이 이미 점령당했고, 예루살렘도 앗수르의 위협 앞에 놓였다. 군사력과 정치적인 상황만 보면 유다는 앗수르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가 예루살렘으로 와서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흔들기 시작한다.
랍사게는 먼저 유다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조롱한다. 애굽을 의지해 보아도 소용없고, 군사력이 있어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 가운데에는 사실도 섞여 있었다. 실제로 유다는 군사적으로 약했고 애굽 역시 온전히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랍사게가 이러한 현실을 이용하여 하나님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분으로 만들려 했다는 데 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행한 종교개혁까지 공격의 도구로 사용한다. 히스기야가 산당과 우상을 제거한 일을 백성의 불행을 가져온 행동처럼 왜곡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했음에도 현실이 더 어려워졌으니,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속인 것이다. 우리도 말씀대로 살았는데 오히려 손해를 보고 상황이 어려워질 때, 같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어도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찾아올 수 있다.
랍사게의 가장 강력한 유혹은 “여호와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면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자기 우물의 물을 마시며 평안히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과 평안을 앗수르 왕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강력한 앗수르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실제적인 시험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문제와 현실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인다. 경제적인 어려움, 관계의 문제, 질병과 실패, 세상의 강한 권세는 우리 앞에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다가온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랍사게는 주변 나라들이 모두 앗수르에게 멸망한 사실을 제시하며 유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만 놓고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한 것은 앗수르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앗수르가 강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고 제한하시며 결국 심판하신다. 세상의 권세는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 내 삶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을 더 신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쉽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즉시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종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불편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결과만으로 순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의 마지막을 선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세상의 말은 즉각적인 안전과 유익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왕을 선택해야 한다. 믿음은 결국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랍사게는 먼저 유다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조롱한다. 애굽을 의지해 보아도 소용없고, 군사력이 있어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 가운데에는 사실도 섞여 있었다. 실제로 유다는 군사적으로 약했고 애굽 역시 온전히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랍사게가 이러한 현실을 이용하여 하나님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분으로 만들려 했다는 데 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행한 종교개혁까지 공격의 도구로 사용한다. 히스기야가 산당과 우상을 제거한 일을 백성의 불행을 가져온 행동처럼 왜곡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했음에도 현실이 더 어려워졌으니,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속인 것이다. 우리도 말씀대로 살았는데 오히려 손해를 보고 상황이 어려워질 때, 같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어도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찾아올 수 있다.
랍사게의 가장 강력한 유혹은 “여호와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면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자기 우물의 물을 마시며 평안히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과 평안을 앗수르 왕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강력한 앗수르를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실제적인 시험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문제와 현실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인다. 경제적인 어려움, 관계의 문제, 질병과 실패, 세상의 강한 권세는 우리 앞에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다가온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을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고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랍사게는 주변 나라들이 모두 앗수르에게 멸망한 사실을 제시하며 유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만 놓고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한 것은 앗수르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앗수르가 강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고 제한하시며 결국 심판하신다. 세상의 권세는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 내 삶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을 더 신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까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쉽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즉시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순종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불편함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결과만으로 순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의 마지막을 선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세상의 말은 즉각적인 안전과 유익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한다. 그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왕을 선택해야 한다. 믿음은 결국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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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6일
광야에 꽃이 피고 거룩한 길이 열리리라
[이사야 35:1-10]
이사야 35장 1~10절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삶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회복과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이다. 이사야 34장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준다면, 35장은 그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준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에 꽃이 피며, 약한 손이 강해지고 떨리는 무릎이 굳세어지며,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게 된다. 또한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길이 없는 광야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마침내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이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으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메마른 땅에도 꽃이 피고 길이 열리며 마침내 구원과 기쁨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은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이 임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1~2절)
1절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말씀한다. 광야는 물이 부족하고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곳이다. 메마른 땅은 씨를 뿌려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광야의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광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사람의 눈에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사람은 “이제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통의 장소였다.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물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절망의 장소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음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야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메마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2절에서는 광야가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한 땅을 다시 아름답고 풍성한 땅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을 먼저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이 환경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달려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은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회복시키신다. (3~7절)
3~4절은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라고 말씀한다. 여기에는 지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에 힘이 빠지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약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강해져야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상처 입은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신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여호수아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5~6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회복을 보여준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힘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말하게 된다.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를 말하게 된다. 눈물로 기도하던 사람이 찬양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던 사람이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6~7절에서는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메마른 영혼에도 은혜의 샘이 흐른다. 기도가 다시 살아난다. 말씀이 다시 살아난다. 예배가 다시 살아난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 혹시 지금 마음이 지쳐 있는가? 혹시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는가?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3. 하나님은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고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신다. (8~10절)
8절은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라고 말씀한다. 광야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신다. 그리고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르신다. 우리의 인생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선택이 맞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한꺼번에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라갔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췄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갔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빠른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당장 결과를 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세요”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9절에서는 그 길에 사나운 짐승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인생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정에 이른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영영한 희락”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은 아니다. 메마름이 마지막이 아니다.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다. 탄식이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길을 내고 계신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꽃을 피우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구원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원한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져야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광야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나는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한 걸음씩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가 먼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이 모두 해결되어야 소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메마른 곳에 물을 내신다.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의 샘을 흐르게 하실 수 있다. 기도가 살아나고 말씀이 살아나며 예배가 회복되고 감사와 찬양이 다시 우리의 입술에 흘러나오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신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이고, 기다려야 하는 길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그 길이 거룩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지금의 광야와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결국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광야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광야에 꽃이 피고,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며, 길 없는 곳에 거룩한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침내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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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5일
하나님의 심판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사야 34:1-17]
오늘의 본문은 온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과 특히 에돔의 철저한 멸망을 선포한 묵시적 심판의 말씀입니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1. 온 열방을 소환하시는 하나님(1-4)
하나님께서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열국의 모든 민족뿐만 아니라 땅과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까지 다 부르십니다. 이 모습은 마치 재판을 받기 위해 나오라는 말과도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소환하시면서 우주적인 심판에 대하여 선언하십니다.
2. 심판당하는 열방과 에돔 (5-15)
보스라는 에돔의 행정중심지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큰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돔에게 보복하시며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것이며 성도와 교회를 괴롭혔던 적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멸하실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3.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내고 분별하자(16)
오늘날 많은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활개 치고 있는데 성도는 왜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까요?
먼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별력이 있어야 당하지 않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하셨고 성령께선 그 말씀을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으로 기준이 반드시 세워져있어야 하며 이 기준을 통하여 세상을 읽어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역시 말씀을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읽으면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읽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구조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로써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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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4일
시온성을 보는 눈
[이사야 33:1-24]
28-35장의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6부분의 마지막 부분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마23장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적이 있는 표현이다. 33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봤을 때, 역사적 관점에서 앗수르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 시온을 회복하시는 내용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앗수르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들이 종말론적인 부분을(4절, 5절, 10절, 14절, 20절, 22절) 많이 언급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자 한다.
1-6절 학대하는 자로부터 주의 백성들의 구원요청
1절 학대하는 자는 당시 앗수르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앗수르를 포함한 이 땅의 권력과 힘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한다.
2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원시 같은 표현이 나온다.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란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의 대상이 여호와 이신데, 이 여호와가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 환란때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 요엘에서 황충같은 군대, 계시록에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이된다.
결국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신다.(5절)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실 것이다.(6절)
7-16절 여호와의 개입과 주의 백성을 보호하심
7-9절은 앞부분의 상황보다 더욱 악화된 상황을 보여준다. 대로가 황폐하고 행인이 끊어지며, 조약이 파기되고,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향목이 울창해야 할 레바논은 마르고, 비옥한 평야인 샤론은 사막과 같이 되고, 바산과 갈멜은 목축이 유명할 만큼 초목이 풍성했는데 황폐해 진다.
10절 이러한 황폐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개입하신다. 10절은 ‘이제’라는 표현을 3번 연달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11-14절까지 육체와 이땅의 불타없어질 것을 의지했던 열방들을 불로 심판할 것을 말씀한다
15절 이 불심판 가운데 6가지의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사람많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높은 곳 시온산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16절 말씀은 엘리야가 몸을 숨긴 그릿 시냇가 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돌보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야는 까마귀의 음식과 시냇가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만나와 반석의 물로 공급하셨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나 광야의 것은 다중단이 되었지만 본문은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17-24절 시온에 계신 우리의 왕
17절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왕을 뵙게 된다.
20절 광야의 장막과 같지 아니한 옮겨지지 아니하는 장막인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21절) 재판장이며 입법자시며 왕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22절)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백성은 병과 죄가 제하여질 것이다.(24절)
전체적인 내용이 계시록의 전개와 유사하다. 4절의 황충은 계시록 9장의 다섯 번째 나팔에서의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 그리고 14절의 불로 심판하시는 내용은 계시록19장의 바벨론의 패망, 20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은 계시록 21장의 새예루살렘 성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수 있다. 세상의 열강들과 나라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을 학대하고, 속이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님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은 심령에 불타지 않는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환란을 통하여 연단받고, 통과하여 정결한 믿음으로 옮겨지지 아니할 영원한 장막을 소망해야 할 것 이다. 그곳에서 공의와 정의가 충만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재판장, 입법자, 왕으로 서실 것이며, 그의 백성들은 아픈 것이나 죄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사33:24, 계21:3, 계22:3)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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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3일
곤비한 땅 큰 바위 그늘
[이사야 32:1-20]
본문의 배경은 히스기야 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잠드는 영’(27:10)을 보내셔서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곧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의미하며, 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섬기는 것을 공식화하였고 정의와 공의는 이미 무너져 있는 상황이었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1. 장차 오실 한 왕의 통치(1-8절)
징치 오실 ‘한 왕’이 소개된다. 그는 ‘공의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1절)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에 큰 바위와 같다고 말한다.(2절) 이는 곧 광폭한 앗수르와 애굽의 압제 속에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회복과 안정감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3-8절에는, 이로 인한 실제적인 변화를 묘사한다. 감긴 눈, 듣지 못하는 귀, 조급한 마음, 어눌한 혀가 모두 회복된다. (3-4절) 이로 인해, 더 이상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난 이에게는 심판을, 존귀한 사람은 존귀하게 인정받는 바른 가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다. (7-8절)
2.하나님의 심판(9-14)
이사야는 나아가 현재 남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안일함과 염려 없는 태도를 책망한다.(9절) 오히려 이사야는 염려가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포도 수확은 없을 것이며 당황과 어려움이 있게될 것을 예언한다. (12절) 이로 인해 그 땅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나며(사5:6) 그들이 살아갔던 모든 삶의 자리는 황폐하게될 것이다.(13-14절)
3.위로부터 내리는 영(15-20)
15절부터는, 다시 회복의 메세지가 주어진다. 이는 곧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주심’을 통해 시작된다. 곧, 인간의 노력, 개입은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영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이로 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자 숲으로 회복될 것이다. (16절) 이는 다시 1절에 나왔던, ‘장차 오실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로 통치하는 때가 시작됨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는 화평과 안전이 있다. 그 공의와 정의 결과는, 어디에든지 편히 씨를 뿌리며, 소와 나귀를 어디로든지 몰게 된다. (30절)
나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 온전한 회복은 언제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오셨고, 회복하셨건만 세상의 광폭한 지배는 멈추지를 않는다. 겉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상세히 모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이 세상의 권력과 왕의 통치가 얼마나 악하고 수많은 이들이 비틀거리고 있는지를 마주한다. 이같은 상황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에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오늘 이 자리에 임했건만 이 답답함과 괴로움은 언제까지일까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15절의 말씀과 같이 ‘위로부터 내리는 그 영’을 생각한다. 폭우가 올 때에 우리를 가려주시는 우산이 되시며, 마른 땅에 냇물이 되신다고 말씀하신다. 최근처럼 더운 이 날에, 큰 바위 그늘이 우리 예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그 주님께서만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구해야함을 꺠닫는다. 동시에, 내가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평안은 점차 사라져야함을 보게 된다.
–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저 꽃길이 아님을 본다. 흔들리는 하루하루의 삶, 우리의 감정의 기복 속에도 이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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