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를 위해 늙은 자신에게 청혼한 것을 곧바로 알아 차렸다(3:10-11). 보아스는 이런 룻의 헤세드(인애)에 감동한다. 이에 자신도 룻에 대한 헤세드(인애)를 계속하겠다며,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날이 밝자 행동에 옮긴다. 보아스는 룻이 타작 마당에 들어 온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돌아가는 그녀의 손에 여섯 번 퍼 담은 추수한 보리 곡식을 들려 보낸다. 룻의 청혼을 잘 받아 들였고, 서둘러 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의지였다. 나오미는 룻의 말을 듣고 보아스의 의중을 알아 차렸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새번역_18절).”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앉았고 마침 지나가던 ‘기업 무를 자’와 장로 열 명을 증인으로 청하여 나오미가 엘레멜렉의 소유지를 팔려고 하는데 그것을 사라고 말한다. 단, 고엘 제도에 따라 엘레멜렉의 아들 기룐의 미망인 룻을 아내로 맞아 들여 그 유산이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했다(3-5절). 그러자 그는 땅은 사려 했지만, “집안간으로서의 책임, 기업 무를 자의 의무”는 지기를 거절했다. 자기가 손해가 날까 해서 였다(6절).
이로써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1.”인간미” 넘치는 보아스(3:14-15절, 17절)
룻의 청혼에 화답하여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보아스는 먼저 룻이 타작마당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돌아가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진 룻의 명예를 지켜 준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녀의 손에 “약속의 증표”로서 룻의 겉옷에 많은 양의 보리를 담아 주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고 보아스가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역시 보아스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다. 한 밤에 자신의 발치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을까 세심하게 배려한다. 혹시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지 않더라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이런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약속의 증표”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추수한 보리 곡식을 담아주는 그의 모습에서도 인간미가 넘친다. 17절은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에서 선명하게 그의 인간미가 드러난다. “여섯 번이나 되어서 준 이 보리는, 어머님께 빈 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그가 손수 담아 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보아스가 여섯 번 되어 담아 준 양도 양이지만, “어머님께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이 더 멋있다.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곡식 때문에 마음이 풍성해 진 것 보다, 보아스의 말에 더 큰 풍성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주님께서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21)”라고 고백 했던 말이 무색하게 보아스의 인간미 넘치는 말과 행동으로 그녀의 텅빈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2.손해보는 일임에도 원칙대로(4:1-6절)
보아스는 인간미만 넘친 것이 아니다.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이행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 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당사자와 만나 은밀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공공장소, 당시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공공의 장소인 성문에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날이 밝자 성문으로 올라가 앉았다. 마침 당사자가 지나갔다. 그를 붙잡고, 급히 마을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함께 앉는다.
처음에 당사자는 기업 무를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재산이 손실 될 것을 알고 보아스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럭한 자”였던 보아스는 철저하게 율법의 방식을 따랐다. 자신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힘에 의해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도 있었지만, 보아스는 자신의 힘을 그런 데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더 충실하게 원칙을 지키려 하고 공공성을 지키려 했다.
*그의 책임 있는 행동에는 말씀의 가르침대로 원칙을 준수했다. 아무리 개인의 필요성과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보아스는 이 가치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번거로울 수 도 있었지만, 꼼꼼하게 지켰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보아스와 같은 우직한 이들이 필요하다.
*명분이 정당할 수록 우선순위와 절차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이루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 명분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원칙을 무시하거나, 공동체의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나는?
-보아스…. 이런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니…. 목사의 삶을 살면서 나에게도 이런 인간미가 풍성 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의 입장이 난처해 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여섯 번 되로 퍼주듯이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빈손으로 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긍휼의 마음이 훈훈하다. 나도 그래야지….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은 결국 손해나는 것임에도 성실하게 지키려는 그의 마음도 대단하다. 기업 무를 자의 우선 순위인 “어떤 이”는 처음에는 늙은 나오미만 봉양하는 것으로 알고 그의 땅을 사려고 했지만, 그의 아들의 미망인 룻을 통해 그의 집안을 잇게 해야 하는 것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손실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포기하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율법의 원칙을 지켜가며 손해 날 일을 정당하게 행하려 한다. 참….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가 되는 일을 하더라도 대충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말씀의 가치를 지켜가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나오미의 믿음의 고백도 쉽게 지나치면 안 된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새번역_18절).” 베들레헴에 돌아 올 때 텅 빈 마음 이었던 그녀가 어느 새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다리는 면모를 보인다. 나오미의 마음은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미 채워졌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인간은 누구나 “텅 빈” 마음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상의 관계, 사건 등을 통해 일하심을 바라보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다리는 가득 찬 기대와 소망, 그리고 믿음의 마음이 채워져 있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이렇게 인도하신다. 언제 채워 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이어야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에서 자신도 놀라는 믿음의 고백을 내뱉는 것이다. 그 고백의 영향력이 더욱 믿음을 다진다. 나오미가 그런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주님, 손해보는 일에도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님, 텅 빈 마음을 이미 채운 믿음이 제게도 있음을 압니다. 믿음의 말을 잃지 않겠습니다.
매일성경 묵상
넘치는 인간미, 손해나는 일에도 원칙을 지키는 보아스 [룻기 3:14-4:6]
– 2022년 05월 06일
– 2022년 05월 06일 –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를 위해 늙은 자신에게 청혼한 것을 곧바로 알아 차렸다(3:10-11). 보아스는 이런 룻의 헤세드(인애)에 감동한다. 이에 자신도 룻에 대한 헤세드(인애)를 계속하겠다며,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날이 밝자 행동에 옮긴다. 보아스는 룻이 타작 마당에 들어 온 것이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돌아가는 그녀의 손에 여섯 번 퍼 담은 추수한 보리 곡식을 들려 보낸다. 룻의 청혼을 잘 받아 들였고, 서둘러 이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의지였다. 나오미는 룻의 말을 듣고 보아스의 의중을 알아 차렸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새번역_18절).”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앉았고 마침 지나가던 ‘기업 무를 자’와 장로 열 명을 증인으로 청하여 나오미가 엘레멜렉의 소유지를 팔려고 하는데 그것을 사라고 말한다. 단, 고엘 제도에 따라 엘레멜렉의 아들 기룐의 미망인 룻을 아내로 맞아 들여 그 유산이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했다(3-5절). 그러자 그는 땅은 사려 했지만, “집안간으로서의 책임, 기업 무를 자의 의무”는 지기를 거절했다. 자기가 손해가 날까 해서 였다(6절). 이로써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이어받게 된다.
1.”인간미” 넘치는 보아스(3:14-15절, 17절)룻의 청혼에 화답하여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보아스는 먼저 룻이 타작마당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돌아가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진 룻의 명예를 지켜 준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녀의 손에 “약속의 증표”로서 룻의 겉옷에 많은 양의 보리를 담아 주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고 보아스가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역시 보아스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다. 한 밤에 자신의 발치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을까 세심하게 배려한다. 혹시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지 않더라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이런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약속의 증표”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추수한 보리 곡식을 담아주는 그의 모습에서도 인간미가 넘친다. 17절은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에서 선명하게 그의 인간미가 드러난다. “여섯 번이나 되어서 준 이 보리는, 어머님께 빈 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그가 손수 담아 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보아스가 여섯 번 되어 담아 준 양도 양이지만, “어머님께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이 더 멋있다.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곡식 때문에 마음이 풍성해 진 것 보다, 보아스의 말에 더 큰 풍성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주님께서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21)”라고 고백 했던 말이 무색하게 보아스의 인간미 넘치는 말과 행동으로 그녀의 텅빈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2.손해보는 일임에도 원칙대로(4:1-6절)보아스는 인간미만 넘친 것이 아니다.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이행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 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당사자와 만나 은밀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공공장소, 당시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공공의 장소인 성문에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날이 밝자 성문으로 올라가 앉았다. 마침 당사자가 지나갔다. 그를 붙잡고, 급히 마을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함께 앉는다. 처음에 당사자는 기업 무를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재산이 손실 될 것을 알고 보아스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럭한 자”였던 보아스는 철저하게 율법의 방식을 따랐다. 자신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힘에 의해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도 있었지만, 보아스는 자신의 힘을 그런 데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더 충실하게 원칙을 지키려 하고 공공성을 지키려 했다. *그의 책임 있는 행동에는 말씀의 가르침대로 원칙을 준수했다. 아무리 개인의 필요성과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보아스는 이 가치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번거로울 수 도 있었지만, 꼼꼼하게 지켰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보아스와 같은 우직한 이들이 필요하다. *명분이 정당할 수록 우선순위와 절차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이루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 명분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원칙을 무시하거나, 공동체의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나는?-보아스…. 이런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니…. 목사의 삶을 살면서 나에게도 이런 인간미가 풍성 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의 입장이 난처해 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여섯 번 되로 퍼주듯이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빈손으로 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긍휼의 마음이 훈훈하다. 나도 그래야지….-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은 결국 손해나는 것임에도 성실하게 지키려는 그의 마음도 대단하다. 기업 무를 자의 우선 순위인 “어떤 이”는 처음에는 늙은 나오미만 봉양하는 것으로 알고 그의 땅을 사려고 했지만, 그의 아들의 미망인 룻을 통해 그의 집안을 잇게 해야 하는 것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손실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포기하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율법의 원칙을 지켜가며 손해 날 일을 정당하게 행하려 한다. 참….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가 되는 일을 하더라도 대충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말씀의 가치를 지켜가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나오미의 믿음의 고백도 쉽게 지나치면 안 된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새번역_18절).” 베들레헴에 돌아 올 때 텅 빈 마음 이었던 그녀가 어느 새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다리는 면모를 보인다. 나오미의 마음은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미 채워졌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인간은 누구나 “텅 빈” 마음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상의 관계, 사건 등을 통해 일하심을 바라보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다리는 가득 찬 기대와 소망, 그리고 믿음의 마음이 채워져 있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이렇게 인도하신다. 언제 채워 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이어야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에서 자신도 놀라는 믿음의 고백을 내뱉는 것이다. 그 고백의 영향력이 더욱 믿음을 다진다. 나오미가 그런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1.”인간미” 넘치는 보아스(3:14-15절, 17절)룻의 청혼에 화답하여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보아스는 먼저 룻이 타작마당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돌아가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현숙한 여인”으로 알려진 룻의 명예를 지켜 준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녀의 손에 “약속의 증표”로서 룻의 겉옷에 많은 양의 보리를 담아 주었다. 나오미는 이것을 보고 보아스가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역시 보아스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다. 한 밤에 자신의 발치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을까 세심하게 배려한다. 혹시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지 않더라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이런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약속의 증표”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추수한 보리 곡식을 담아주는 그의 모습에서도 인간미가 넘친다. 17절은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에서 선명하게 그의 인간미가 드러난다. “여섯 번이나 되어서 준 이 보리는, 어머님께 빈 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바로 그가 손수 담아 준 것입니다(새번역_17절).” 보아스가 여섯 번 되어 담아 준 양도 양이지만, “어머님께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이 더 멋있다.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곡식 때문에 마음이 풍성해 진 것 보다, 보아스의 말에 더 큰 풍성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주님께서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새번역_1:21)”라고 고백 했던 말이 무색하게 보아스의 인간미 넘치는 말과 행동으로 그녀의 텅빈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2.손해보는 일임에도 원칙대로(4:1-6절)보아스는 인간미만 넘친 것이 아니다.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이행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 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당사자와 만나 은밀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공공장소, 당시 유대 사회가 인정하는 공공의 장소인 성문에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날이 밝자 성문으로 올라가 앉았다. 마침 당사자가 지나갔다. 그를 붙잡고, 급히 마을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함께 앉는다. 처음에 당사자는 기업 무를 의무를 이행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재산이 손실 될 것을 알고 보아스에게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문의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럭한 자”였던 보아스는 철저하게 율법의 방식을 따랐다. 자신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힘에 의해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도 있었지만, 보아스는 자신의 힘을 그런 데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더 충실하게 원칙을 지키려 하고 공공성을 지키려 했다. *그의 책임 있는 행동에는 말씀의 가르침대로 원칙을 준수했다. 아무리 개인의 필요성과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보아스는 이 가치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번거로울 수 도 있었지만, 꼼꼼하게 지켰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보아스와 같은 우직한 이들이 필요하다. *명분이 정당할 수록 우선순위와 절차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이루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 명분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원칙을 무시하거나, 공동체의 약속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나는?-보아스…. 이런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니…. 목사의 삶을 살면서 나에게도 이런 인간미가 풍성 했으면 좋겠다. -상대방의 입장이 난처해 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여섯 번 되로 퍼주듯이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빈손으로 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긍휼의 마음이 훈훈하다. 나도 그래야지….-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은 결국 손해나는 것임에도 성실하게 지키려는 그의 마음도 대단하다. 기업 무를 자의 우선 순위인 “어떤 이”는 처음에는 늙은 나오미만 봉양하는 것으로 알고 그의 땅을 사려고 했지만, 그의 아들의 미망인 룻을 통해 그의 집안을 잇게 해야 하는 것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손실 때문에 그 우선 순위를 포기하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율법의 원칙을 지켜가며 손해 날 일을 정당하게 행하려 한다. 참….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가 되는 일을 하더라도 대충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말씀의 가치를 지켜가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나오미의 믿음의 고백도 쉽게 지나치면 안 된다. “얘야, 일이 어떻게 될지 확실해질 때까지, 너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거라. 아마 그 사람은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 일을 마무리 짓는 데, 오늘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새번역_18절).” 베들레헴에 돌아 올 때 텅 빈 마음 이었던 그녀가 어느 새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 하실 일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기다리는 면모를 보인다. 나오미의 마음은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미 채워졌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인간은 누구나 “텅 빈” 마음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상의 관계, 사건 등을 통해 일하심을 바라보며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다리는 가득 찬 기대와 소망, 그리고 믿음의 마음이 채워져 있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이렇게 인도하신다. 언제 채워 졌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이어야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 지금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하나님의 신비한 은혜가 바로 이런 믿음으로 채워진 마음에서 자신도 놀라는 믿음의 고백을 내뱉는 것이다. 그 고백의 영향력이 더욱 믿음을 다진다. 나오미가 그런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기도제목
* 주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 주님, 손해보는 일에도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주님, 텅 빈 마음을 이미 채운 믿음이 제게도 있음을 압니다. 믿음의 말을 잃지 않겠습니다.
* 주님, 손해보는 일에도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주님, 텅 빈 마음을 이미 채운 믿음이 제게도 있음을 압니다. 믿음의 말을 잃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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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5일
사람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고전 3:1-15]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깨달아 지고 이것이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의 현주소를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자’로 바라보고 육신에 속한 자를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들’, 혹은 ‘육의 사람’이라 지칭하고 이들의 특징을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고린도 교인은 아직 믿음이 연약하고 성장중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의 어린아이”이다. 이들은 더 자라야 한다. “사람을 따라” 분쟁하는 것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1. 책망 속의 희망(1-4절, 15절)
바울이 단호하게 분쟁이라는 아픔을 끄집어 낸다. 짚어 주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성령의 은사도 경험했고 여러 지식에도 능했기에 아마도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을터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그것도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직언한다. 왜냐하면 “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과 선호하는 지식, 신분과 삶의 수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파당을 만들어 따로 따로 모이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번역_3-4절)”
주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을 한 자신이나 아볼로를 주님보다 더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주인보다 주인이 보낸 종을 더 따르는 웃지 못한 모습 아니겠는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신 것을 더 따르는 것, 더 마음에 두는 것, 주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따라 모이는 것… 허어… 이것 참…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게 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교회와 성도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면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회안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좌절이나 절망으로 결론이 되면 안된다. 그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변화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품에 품고 성숙케 하실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일깨우고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내는 능력을 ‘성령’께서 베풀어 주실테니 말이다.
또, 복음의 기초에 잘못 세운 건축(일)이라도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구원해주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15절). 이것이 희망이다.
2. 희망이 현실되게 하기(5-15절)
어리기만한 어린아이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일수 없다. 복음이라는 생명이 들어 있는 영혼은 ‘성령’께서 친히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때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하게 “원 포인트” 레슨의 기회가 생긴다. 바울의 편지는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나 가장 해결첵이 필요한 부분에 가감없이 직설적으로 다룬다.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적합한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1)이해(시각)조정(5-9절)
분쟁의 기반이 되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 준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었던 선생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위치를 일깨워 준다.
각각 따르는 지도자들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은 각기 맡아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며 사역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집사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새번역 5-6절)” 지금 우리 각각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자신들은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모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당시 세계도 마찬가지 없다. 자신들이 따르는 선생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육을 따라 행하면 육의 사람일 뿐이다.
2)그럼 어떻께? – 비교가 아니라 맡김을 받은 대로(6-15절)
분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역자들 앞으로 헤쳐모여 하면서 시작되고 강화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누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분이라고 말한다. 농사와 건축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어떻게 감당하냐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 주셨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거다. 농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그저 자신들은 그 농사 현장에서 한 부분을 맡김받아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새번역_5하-6절).”
그래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7-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각각 필요한 일만 맡은 것 뿐이다. “동역”한 것이다. 함께 하나님의 밭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감당한 것이다.
또, 건축하는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각각 건축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지으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짓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안의 각 구성원이 바울이나 아볼로가 닦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각 맡은 대로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이들이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책임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에게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 복음을 잘못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며 살아가며 일어난 문제이기에 마지막 때 심판의 불 앞에 이런 잘못된 삶은 모두 사그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세워 놓은 일’)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④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새번역_12-15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초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기초위에 성도를 세우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면 된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자인 양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과 전적 순종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영적 초보자에 불과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을 일삼으며 인간 사역자들을 경쟁적으로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성도들의 풍족한 지식과 은사(1:5,6)는 그들에게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1~3절).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져 여전히 영적인 일들(5~9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육적’ 상태를 질책한다.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신앙 연수는 높아지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영적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성도의 내적 성숙 없이 수적 성장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 뜻과도 전혀 다른 태도다.
-교인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 주는 일 만큼이나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 교회가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의 이름 아래 파벌을 형성한 것은 사역자의 역할을 오해했기 때문이다(4~5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7절)에 대한 영적 무지가 지도자에 대한 과대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수종자’일 뿐이다. 사역자들의 다양한 역할이나 은사는 비교 대상이나 경쟁의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를 자라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밭(교회)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5~9절).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수고에 따라 대가를 받는 종일 뿐, 성도들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자만하거나, 당장 눈에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는지 시험하실 것이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이 터는 바꾸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과 사역 원리도 변질될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지 않으면,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하더라도 심판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 있다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공동체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목회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경쟁관계로 보아왔으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겠나! 각각 맡겨주신 대로 충성하면 될 일인데…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경쟁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시절이 생각나 참 멋쩍다!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겠는가…성도들 안에 동역보다 경쟁이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관습과 시각에서 오는 왜곡들…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들과 문제들… 아..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 알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도우심이 이리 중요하구나…
-무엇보다…이리 나타난 문제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백성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상태일까? 성령께서 보이시는(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의 안목과 관습으로 보고 행하는 ‘어린아이’의 활보함을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보듬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분주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면 참 좋겠다만…. 아쉽게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이 참 은혜가 된다. 특히 “맡겨 주신대로”의 마음이 분쟁의 현장에서 동역의 현장으로 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자라는 의미다. 결코 “동역”이 어울지리 않는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기꺼이 죄를 씨기시고 함께 동역의 길로 세우셨다. “맡겨 주심으로” 말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돌아보았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도 살펴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 이런 직임을 맡겨 주셨을까…
*주님의 십자가의 견고한 터 위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재료로 성실하게 감당해야지… 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역해야지…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감당해야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지도자… 함께 동역하여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만들어가야지… 그리해야지… 경쟁이 아니라 동역으로…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 주심으로…
1. 책망 속의 희망(1-4절, 15절)
바울이 단호하게 분쟁이라는 아픔을 끄집어 낸다. 짚어 주어야 할 때 머뭇거림 없이 문제를 직접 다룬다. 분쟁의 당사자들은 성령의 은사도 경험했고 여러 지식에도 능했기에 아마도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했을터다. 하지만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그것도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직언한다. 왜냐하면 “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이루어 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과 선호하는 지식, 신분과 삶의 수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파당을 만들어 따로 따로 모이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새번역_3-4절)”
주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일을 한 자신이나 아볼로를 주님보다 더 따르는 것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주인보다 주인이 보낸 종을 더 따르는 웃지 못한 모습 아니겠는가? 주님보다 주님이 주신 것을 더 따르는 것, 더 마음에 두는 것, 주님의 이름보다 사람의 이름을 따라 모이는 것… 허어… 이것 참…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게 한다. 이렇게 당황스러운 교회와 성도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이기에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면 성장할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회안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좌절이나 절망으로 결론이 되면 안된다. 그 미숙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변화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품에 품고 성숙케 하실테니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일깨우고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아내는 능력을 ‘성령’께서 베풀어 주실테니 말이다.
또, 복음의 기초에 잘못 세운 건축(일)이라도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구원해주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거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다(15절). 이것이 희망이다.
2. 희망이 현실되게 하기(5-15절)
어리기만한 어린아이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일수 없다. 복음이라는 생명이 들어 있는 영혼은 ‘성령’께서 친히 성장과 성숙을 도우신다. 때로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하게 “원 포인트” 레슨의 기회가 생긴다. 바울의 편지는 원 포인트 레슨이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나 가장 해결첵이 필요한 부분에 가감없이 직설적으로 다룬다. 가르침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확하게 현 상황을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적합한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1)이해(시각)조정(5-9절)
분쟁의 기반이 되었던 지도자들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 준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통용되고 이해되었던 선생이나 철학자들에 대한 시각과 자세가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위치를 일깨워 준다.
각각 따르는 지도자들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특징은 각기 맡아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며 사역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집사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새번역 5-6절)” 지금 우리 각각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며 자신들은 각각 맡겨주신대로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세상은 자신들의 모임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한다. 당시 세계도 마찬가지 없다. 자신들이 따르는 선생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시도를 끊임없이 행했다. 결국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육을 따라 행하면 육의 사람일 뿐이다.
2)그럼 어떻께? – 비교가 아니라 맡김을 받은 대로(6-15절)
분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역자들 앞으로 헤쳐모여 하면서 시작되고 강화 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누누히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분이라고 말한다. 농사와 건축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어떻게 감당하냐면
바울 자신은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 주셨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거다. 농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그저 자신들은 그 농사 현장에서 한 부분을 맡김받아 감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새번역_5하-6절).”
그래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새번역_7-8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각각 필요한 일만 맡은 것 뿐이다. “동역”한 것이다. 함께 하나님의 밭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감당한 것이다.
또, 건축하는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바울 자신은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각각 건축을 맡은 사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지으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짓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안의 각 구성원이 바울이나 아볼로가 닦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각각 맡은 대로 함께 지어가는 것이기에 “존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문제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와 같은 이들이 잘못 가르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책임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에게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 복음을 잘못 듣고 엉뚱하게 적용하며 살아가며 일어난 문제이기에 마지막 때 심판의 불 앞에 이런 잘못된 삶은 모두 사그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세워 놓은 일’)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④작품(일)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새번역_12-15절)”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초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 기초위에 성도를 세우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 존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면 된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히 받은 것 때문에 스스로 영적인 자인 양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과 전적 순종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영적 초보자에 불과했다. 성령을 의지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는 자들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을 일삼으며 인간 사역자들을 경쟁적으로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다.
-고린도 성도들의 풍족한 지식과 은사(1:5,6)는 그들에게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할 만큼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1~3절). 바울은,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져 여전히 영적인 일들(5~9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육적’ 상태를 질책한다. 교회를 부지런히 드나들고 신앙 연수는 높아지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한 영적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성도의 내적 성숙 없이 수적 성장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이 품으신 뜻과도 전혀 다른 태도다.
-교인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세워 교회를 섬기게 하시지만, 그것은 심고 물 주는 일 만큼이나 부차적인 것이고, 실제 교회가 자라게 하신 것은 하나님 소관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도자의 이름 아래 파벌을 형성한 것은 사역자의 역할을 오해했기 때문이다(4~5절).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7절)에 대한 영적 무지가 지도자에 대한 과대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추앙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수종자’일 뿐이다. 사역자들의 다양한 역할이나 은사는 비교 대상이나 경쟁의 요소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도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를 자라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밭(교회)을 경작하고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의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5~9절).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수고에 따라 대가를 받는 종일 뿐, 성도들의 믿음과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감당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이룬 것처럼 자만하거나, 당장 눈에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낙망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웠는지 시험하실 것이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이 터는 바꾸리 수 없으며,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과 사역 원리도 변질될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세워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뒤엎는 십자가의 원리를 따라 섬기고 베풀고 사랑하지 않으면,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하더라도 심판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 있다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운 공동체로 인정받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목회자들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경쟁관계로 보아왔으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겠나! 각각 맡겨주신 대로 충성하면 될 일인데… 나에게 맡긴 것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고 경쟁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시절이 생각나 참 멋쩍다!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많겠는가…성도들 안에 동역보다 경쟁이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의 관습과 시각에서 오는 왜곡들…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들과 문제들… 아.. 그래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 보여주시는 것, 알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도우심이 이리 중요하구나…
-무엇보다…이리 나타난 문제들의 원인이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안에 구원 받은 백성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상태일까? 성령께서 보이시는(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의 안목과 관습으로 보고 행하는 ‘어린아이’의 활보함을 하나님 나라의 성숙한 백성이 보듬고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문제는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 성령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이해(시각)조정”, “맡겨 주신대로”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분주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으면 참 좋겠다만…. 아쉽게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이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이 참 은혜가 된다. 특히 “맡겨 주신대로”의 마음이 분쟁의 현장에서 동역의 현장으로 가는 중요한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황송하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자라는 의미다. 결코 “동역”이 어울지리 않는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기꺼이 죄를 씨기시고 함께 동역의 길로 세우셨다. “맡겨 주심으로” 말이다.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일까 곰곰히 돌아보았다. 지금 나의 위치가 어떤 위치인지도 살펴 보았다. 눈물이 나왔다…. 아…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자리, 이런 직임을 맡겨 주셨을까…
*주님의 십자가의 견고한 터 위에서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재료로 성실하게 감당해야지… 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역해야지…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라고 맡겨 주신 것이니… 잘 감당해야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지도자… 함께 동역하여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만들어가야지… 그리해야지… 경쟁이 아니라 동역으로…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 주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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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4일
오직 성령으로
[고전 2:1-16]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로운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받은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의 지혜는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한다. 바울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했다(2절). 그의 두려움과 떨림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인간의 설득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5절). 복음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만 계시된다(10절).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분별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이 모르는 십자가의 참 지혜를 깨닫는다(16절).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이다. 왜 그럴까?
1.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1-5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에게 어떻게 전했는지 먼저 밝힌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1절)이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4절)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것만 말했다(2절). 그리고 이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나도록 했다(4-5절).
바울은 헬라철학적 사고에 자연스러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현란한 말솜씨나, 논리적인 연설이 “복음”전도의 도구가 아니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의지하며 감당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5절)
교회는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다양하다는 거다. 그런데 다양한 구성원으로 모인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말과 지혜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어떤 철학자나 학파가 어느 도시에 갔을 때, 그 도시의 여러 선생들이나 학파와 논쟁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즐겨 들으며 자신들의 지적인 욕구를 채웠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에게도 이런 부분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르쳤다. 현란한 수사 언어에 기댄 복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를 통해 드러낸 복음이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가르칠 때는 이런 부분이 상관 없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 차례로 방문하여 가르친 순회 전도자들었다. 아볼로는 당시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는 전도자였다. 말을 현란하게 잘 했다. 베드로는 어떻게 전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사도”였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이들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 문제가 발생되고 말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밀리고 만 것이다. 교회안에서 조차 당시 세계의 말의 현란함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물들고 만 것이다. 분쟁의 근본에 이것이 있었던 것이다.
2. 눈에 보이는 것에 감추인 비밀을 포기하다(6-16절)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다. 즉 귀로만 듣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에 반응이 문제다. 보고 들으며 마음이 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눈에 보이고, 귀가 즐겁고,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그런 것은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소재의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더 나아가 가장 경멸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고상한 철학, 이것은 아름답게 포장하여 말하는 웅변술이나 수사적 기법에 담겨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십자가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그것도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아 매달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경멸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가 십자가에 달린 이야기라니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수도 없고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신비였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은 것이 바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믿은 자들에게는 좀 더 깊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온전한 자들(예수님과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해 주었다. 이 지혜를 바울은 ‘감추인 것’,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거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감추어졌다. 그래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한 사람도 이를 알지 못했다(8절). 자신들이 즐기고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니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알지 못하니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9절).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하나님의 지혜(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보여 주셨다(10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12절).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를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했다(13절).
바울이 애끓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짚어주는 이 부분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더 열광(?)한다. 마음을 찌르고, 아파하게 하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오히려 거부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깊은 탄식과 아픔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거절한다. 교회에서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고, 교회에서만이라도 편안하고 싶다고 말하며 “듣고 싶은 말”, “자기 마음이 감동되는 말”를 찾는다.
나를 온전케 해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 온전케 하기 위해 아파해야 할 시간조차 거절한다. 고통스러워하며 잘라내야 할 죄악을 애써 덮어놓고 그저 귀에 듣기에, 마음에 흡족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만 찾는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됨은 없다. 갈라진 틈이 더욱 벌어질 뿐이고, 깨어진 관계의 어색함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눈에 보이고 마음에 직접 느끼는 세상적인 가치에 보이지 않으나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 알기 원했다. 그래서 바울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도록 지혜의 아름다운 것(화려한 웅변술,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거절과 조롱받음을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자기 능력을 과시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성령께서 친히 능력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응변의 지혜가 아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영에 속한 일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세상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십자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참 대단하다. 바울의 글들을 읽으면 너무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기를 한 두번 한 것이 아니다. 그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치밀한 수사능력과 그가 담고 있는 넘치고도 남을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명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 있었고, 자기 영향력 확대가 아닌 복음의 확산과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그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여 당시 말 좀 하는 철학자들, 선생들 사이에서 “말 참 못한다” 여김을 받아도 꿋꿋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힌 십자가”만 전했다. 지루하리 만치 곧이 곧대로 전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세상 멸시와 조롱보다 말의 지혜로 전하는 것을 두려워 하며 떨었다. 그래서 더욱 성령께서 친히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인간의 설득이나 감화가 아니라, 성령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기초가 되게 한 것이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다. 그렇기에 전도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전도자의 능력이 열매의 많고 적음을 결정하지 않는다. 아! 이 진리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성령을 통해 성화된 지혜(6절)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것(9절)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반면, 헛된 자랑으로 분쟁을 일삼던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이라고 우쭐댔지만, 그들이 얼마나 주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가 남을 비교하며 자랑하는 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깨달을 때 삶이 겸손해지지 않을까?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내가 쮜어 짜낸 ‘이야.. 이런 문장이라니… 이런 것은 내가 읽고 들어도 감동이 된다’ 라는 것에 더 마음을 쏟고 유혹이 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의 반응을 의식하여 뭔가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모습이 귀한 도전이 된다. 그리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포장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담백하게 담담히 드러내는 것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혼을 소생 시키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령께서 능력을 발휘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1년 6개월 동안 전한 말씀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또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을 얼마나 의지했는지 깨닫게 하신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말들이 넘쳐나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있는데,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쳐 나타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얼마나 가르침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의지했을까?
-실제로 바울이 전도여행중에 교회들을 일으켜 세울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들이 함께 따라왔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었다. 또 가르치는 도중에 성령께서 깨우쳐 주심으로 성도가 세워졌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해야 할 매 순간 마다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갈급하고 의지하며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여 주신대로 임한 성령께서 이 모든 과정을 이끄신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며 즐기고 찾는 이 세상의 익숙한 가치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담아내는 하나님 나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어가는 걸음조차도 “오직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던 그의 박학한 지식과 웅변술과 같은 지적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드러나도록” 철저하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시도록, 자신의 이름이나 평판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에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역사하시기에 나의 목회 걸음 걸음이 오직 성령으로 행하기를 사모할 뿐이다.
*고린도의 문제 곧 나의 문제다. 오늘 나에게 보여주신 문제는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명한 처방전이 이미 내게 주셨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온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이다. 왜 그럴까?
1.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1-5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에게 어떻게 전했는지 먼저 밝힌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1절)이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4절)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것만 말했다(2절). 그리고 이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나도록 했다(4-5절).
바울은 헬라철학적 사고에 자연스러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이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현란한 말솜씨나, 논리적인 연설이 “복음”전도의 도구가 아니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의지하며 감당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5절)
교회는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다양하다는 거다. 그런데 다양한 구성원으로 모인 공동체이기에 하나님의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 되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분쟁은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말과 지혜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어떤 철학자나 학파가 어느 도시에 갔을 때, 그 도시의 여러 선생들이나 학파와 논쟁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즐겨 들으며 자신들의 지적인 욕구를 채웠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에게도 이런 부분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르쳤다. 현란한 수사 언어에 기댄 복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를 통해 드러낸 복음이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가르칠 때는 이런 부분이 상관 없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 차례로 방문하여 가르친 순회 전도자들었다. 아볼로는 당시 사람들의 구미에 딱 맞는 전도자였다. 말을 현란하게 잘 했다. 베드로는 어떻게 전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사도”였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이들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 문제가 발생되고 말았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밀리고 만 것이다. 교회안에서 조차 당시 세계의 말의 현란함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물들고 만 것이다. 분쟁의 근본에 이것이 있었던 것이다.
2. 눈에 보이는 것에 감추인 비밀을 포기하다(6-16절)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다. 즉 귀로만 듣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마음에 반응이 문제다. 보고 들으며 마음이 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눈에 보이고, 귀가 즐겁고,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그런 것은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소재의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더 나아가 가장 경멸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고상한 철학, 이것은 아름답게 포장하여 말하는 웅변술이나 수사적 기법에 담겨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하지만 십자가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그것도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아 매달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경멸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가 십자가에 달린 이야기라니 인간적으로 이해가 될 수도 없고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신비였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은 것이 바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믿은 자들에게는 좀 더 깊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온전한 자들(예수님과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해 주었다. 이 지혜를 바울은 ‘감추인 것’,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거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달리신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지혜 곧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감추어졌다. 그래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한 사람도 이를 알지 못했다(8절). 자신들이 즐기고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니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알지 못하니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9절).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하나님의 지혜(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보여 주셨다(10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12절).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지혜’를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했다(13절).
바울이 애끓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짚어주는 이 부분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더 열광(?)한다. 마음을 찌르고, 아파하게 하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오히려 거부한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깊은 탄식과 아픔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거절한다. 교회에서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고, 교회에서만이라도 편안하고 싶다고 말하며 “듣고 싶은 말”, “자기 마음이 감동되는 말”를 찾는다.
나를 온전케 해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 온전케 하기 위해 아파해야 할 시간조차 거절한다. 고통스러워하며 잘라내야 할 죄악을 애써 덮어놓고 그저 귀에 듣기에, 마음에 흡족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만 찾는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됨은 없다. 갈라진 틈이 더욱 벌어질 뿐이고, 깨어진 관계의 어색함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눈에 보이고 마음에 직접 느끼는 세상적인 가치에 보이지 않으나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 알기 원했다. 그래서 바울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도록 지혜의 아름다운 것(화려한 웅변술,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거절과 조롱받음을 두려워하며 떨었지만, 자기 능력을 과시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성령께서 친히 능력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응변의 지혜가 아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영에 속한 일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세상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십자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참 대단하다. 바울의 글들을 읽으면 너무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기를 한 두번 한 것이 아니다. 그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치밀한 수사능력과 그가 담고 있는 넘치고도 남을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명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 있었고, 자기 영향력 확대가 아닌 복음의 확산과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그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여 당시 말 좀 하는 철학자들, 선생들 사이에서 “말 참 못한다” 여김을 받아도 꿋꿋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힌 십자가”만 전했다. 지루하리 만치 곧이 곧대로 전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세상 멸시와 조롱보다 말의 지혜로 전하는 것을 두려워 하며 떨었다. 그래서 더욱 성령께서 친히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도록 맡겼다. 인간의 설득이나 감화가 아니라, 성령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기초가 되게 한 것이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다. 그렇기에 전도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전도자의 능력이 열매의 많고 적음을 결정하지 않는다. 아! 이 진리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성령을 통해 성화된 지혜(6절)는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것(9절)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반면, 헛된 자랑으로 분쟁을 일삼던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영적’이라고 우쭐댔지만, 그들이 얼마나 주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가 남을 비교하며 자랑하는 것들도 모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깨달을 때 삶이 겸손해지지 않을까?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내가 쮜어 짜낸 ‘이야.. 이런 문장이라니… 이런 것은 내가 읽고 들어도 감동이 된다’ 라는 것에 더 마음을 쏟고 유혹이 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성도들의 반응을 의식하여 뭔가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모습이 귀한 도전이 된다. 그리고 용기를 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포장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담백하게 담담히 드러내는 것이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혼을 소생 시키는 말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령께서 능력을 발휘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1년 6개월 동안 전한 말씀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또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을 얼마나 의지했는지 깨닫게 하신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말들이 넘쳐나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있는데, 그 마음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쳐 나타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얼마나 가르침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의지했을까?
-실제로 바울이 전도여행중에 교회들을 일으켜 세울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들이 함께 따라왔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었었다. 또 가르치는 도중에 성령께서 깨우쳐 주심으로 성도가 세워졌음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해야 할 매 순간 마다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갈급하고 의지하며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 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여 주신대로 임한 성령께서 이 모든 과정을 이끄신다.
*하나님 나라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며 즐기고 찾는 이 세상의 익숙한 가치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담아내는 하나님 나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어가는 걸음조차도 “오직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던 그의 박학한 지식과 웅변술과 같은 지적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드러나도록” 철저하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만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시도록, 자신의 이름이나 평판이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눈에 보이는 가치에 감추인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역사하시기에 나의 목회 걸음 걸음이 오직 성령으로 행하기를 사모할 뿐이다.
*고린도의 문제 곧 나의 문제다. 오늘 나에게 보여주신 문제는 ‘눈에 보이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명한 처방전이 이미 내게 주셨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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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3일
오직 주 안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라
[고전 1:18-31 ]
분쟁의 원인은 전달받은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전달자를 따라 자신의 환경과 수준(?)에 따라 헤쳐 모인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낳은 근본적인 것이 있었다. 말씀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복음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해 기준으로만 보려고 한 결과였다. 이런 것은 전달자별로 헤쳐 모인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공동체내의 분열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열, 주님과의 분열, 복음과의 분열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럴수 있다. 복음을 그 자체로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고, 시대정신으로 바라보거나, 대대로 이어온 고상하다고 여기는 지혜로운 철학으로 바라본다거나, 당시 사람들이 따르는 현자들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전해받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익숙한 온갖 것으로 들여다보는 복음은 “각기 달리 보이고, 한없이 엉터리로 보이며,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수준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대로 붙잡을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직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쳐 주신 그대로 그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오직 복음”만 전했다. 이렇게 전한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오늘 나와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18절)
왜 미련하게 보였을까? 먼저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새번역_19절)” 이사야 29″14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은 세상의 지혜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내 보여주신 “오직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새번역_22절)”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즉, 사람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찾지도 않았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세계에서 철저히 저주였고, 어리석은 자, 죄악스러운 자의 최후로 여겨졌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또 무모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드러내셔서 오직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도 그들이 듣기에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그,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람들이 듣고 싶고 찾고 싶으며, 찾는 이 세상의 지혜로 예수님을 드러내시지 않으셨다. 현란한 수사법으로 사람들에게 듣는 즐거움으로 복음을 포장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의 지혜가 일하셨다.’
교회내에서 파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순회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방식, 말의 지혜, 화려하고 설득력있는 말”등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듯한 모습이다. 즉, 내게 익숙하고, 듣기에 편하고, 듣고 있는 마음에 만족함의 따라 “말씀”에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차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 말씀을 포장하여 내어 놓는 포장지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분열”이 온 것이다. 모든 상황에 세상의 원리와 행동양식을 접목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온전하게 하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각각의 상황과 여건, 신분출신, 삶의 양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헤쳐모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상태가 이렇게 되고 보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보는 “오직 복음”이 복음과 함께 이것, 저것이 되기 시작할테고, 오직 복음을 고수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 밖에 없을테다. 시대의 흐름을 맞추지 못하는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테다.
지금 한국교회와 온 열방에서 드러나는 반기독교 정서가 이와 같다. 할수만 있으면 균형잡힌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싶은대로, 말하고 싶은대로 행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피해 유발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세상은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한없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리 미련할 수가 있을까 라는 식의 한탄으로 쳐다볼 것이다.
2.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지혜였다(24절)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새번역_24절).”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아! 기가 막히다! 서신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도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했다. “오직 복음”으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지혜다! 라고 외친다. 자기가 듣고 보고싶은 것만 찾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누가 되었든지, 유대인, 헬라인이나 상관 없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능력”이다!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나?(27-28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강함,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하고 폐하려 하셨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들이 세상의 강한 것,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택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이렇게 하실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29절)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9절)”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면 복음이 자랑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낸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 환경과 여건이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아셨다.
3. 그 능력과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30-31절)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0-31절).”
어리석은 설교를 통해 믿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되신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다!. 이 또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사랑하라”는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 예수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30절)이 되셨다.
바울은 분쟁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고린도교회는 전달자들의 지혜와 성향, 출신과 상황에 따라 헤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방식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 방식에 따른 경쟁과 분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경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와 지식의 추구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라.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구원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분쟁하는 것이 웬 말인가!
분쟁은 사람을 보게한다. 자신이 따르는, 혹은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 보는 것이다. 교회 분쟁이 이와 같지 않은가? 분쟁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르기에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 메시아, 구원자가 죽다니… 그러고도 구원할 수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이 세상은 도저히 자기 지혜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역사를 알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는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아주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삼게 하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능력을 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메시아에게서 출애굽을 능가할 행동을 기대했던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저주를 당한 패배자였고(신 21:23) 걸림돌이었으며,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인에게도 미련하고 무모한 사람에 불과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철저히 절망한 자에게만 그것이 초월자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 끊임없이 네가 사랑받을 힘과 자원이 있고 절대 무시당해서는 안 될 만큼 강한 자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구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들보다는 약하고 미련하고 천대 받던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받던 이들은 곤귀한 자로 창조하셨고, 자기 힘으로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없는 것같이 만드셨다. 그러니 구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약하고 미련하다고 천대하던 자들을 존귀한 자녀로 부르셔서 인간의 모든 자랑을 부끄럽게 하신다(26~29절). ‘조건 없는’ 부르심을 통해 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학벌, 재력, 문벌 등)을 전복하신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약함의 역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성도의 삶이다. 그러니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자격과 자랑도 가당치 않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할 때 공동체 안에 질시와 경쟁은 사라지고 감사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은 우리를 지혜롭고 의롭고 거룩하게 구속하시는 구원이다(30~31절). 내 자랑이 바뀌고 내 주인이 바뀌고 내가 변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하는 구원이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때 이 관계는 더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사람을 보지 말아야지… 내 안에도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따라 분쟁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내가 지혜롭게 보는 세상의 지혜가 분쟁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복음,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교회는 전달자에 집중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익숙하고 바라는 세상의 지혜나 방법이 하나님이 주신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서지 않도록 분별해야 한다.
-이를 분별하고 경계하여야 분쟁이 예방된다. 분쟁은 분별하지 못해 나타나는 열매 인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별하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별은 믿음이다. 나를 믿게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고, 세상의 지혜와 맞서 결코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실제적인 삶이며, 이를 유지해 나가는 인내라는 거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보련다!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세상의 지혜를 바꾸지 않으리라!
나도 그럴수 있다. 복음을 그 자체로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고, 시대정신으로 바라보거나, 대대로 이어온 고상하다고 여기는 지혜로운 철학으로 바라본다거나, 당시 사람들이 따르는 현자들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전해받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익숙한 온갖 것으로 들여다보는 복음은 “각기 달리 보이고, 한없이 엉터리로 보이며, 도무지 말도 되지 않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수준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대로 붙잡을 이유가 하등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오직 복음”만 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쳐 주신 그대로 그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오직 복음”만 전했다. 이렇게 전한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오늘 나와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1.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18절)
왜 미련하게 보였을까? 먼저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새번역_19절)” 이사야 29″14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구원은 세상의 지혜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여” 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러내 보여주신 “오직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린도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게(어리석게)” 보였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새번역_22절)”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즉, 사람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찾지도 않았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 세계에서 철저히 저주였고, 어리석은 자, 죄악스러운 자의 최후로 여겨졌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또 무모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드러내셔서 오직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도 그들이 듣기에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말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그,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새번역_21절).” 사람들이 듣고 싶고 찾고 싶으며, 찾는 이 세상의 지혜로 예수님을 드러내시지 않으셨다. 현란한 수사법으로 사람들에게 듣는 즐거움으로 복음을 포장하지도 않으셨다.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의 지혜가 일하셨다.’
교회내에서 파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순회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방식, 말의 지혜, 화려하고 설득력있는 말”등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듯한 모습이다. 즉, 내게 익숙하고, 듣기에 편하고, 듣고 있는 마음에 만족함의 따라 “말씀”에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점차 말씀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 말씀을 포장하여 내어 놓는 포장지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분열”이 온 것이다. 모든 상황에 세상의 원리와 행동양식을 접목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온전하게 하나 될 수 있는 공동체가 각각의 상황과 여건, 신분출신, 삶의 양식과 이해 수준에 따라 ‘헤쳐모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상태가 이렇게 되고 보면 자신의 이해 수준으로 보는 “오직 복음”이 복음과 함께 이것, 저것이 되기 시작할테고, 오직 복음을 고수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 수 밖에 없을테다. 시대의 흐름을 맞추지 못하는 답답한 것으로 보였을테다.
지금 한국교회와 온 열방에서 드러나는 반기독교 정서가 이와 같다. 할수만 있으면 균형잡힌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이 보고싶은대로, 말하고 싶은대로 행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는 어리석기 짝이 없고, 피해 유발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세상은 교회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어 있다. 한없이 어리석고 어리석은, 이리 미련할 수가 있을까 라는 식의 한탄으로 쳐다볼 것이다.
2.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지혜였다(24절)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새번역_24절).”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아! 기가 막히다! 서신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도,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도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했다. “오직 복음”으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지혜다! 라고 외친다. 자기가 듣고 보고싶은 것만 찾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 누가 되었든지, 유대인, 헬라인이나 상관 없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능력”이다!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나?(27-28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의 지혜, 강함,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하고 폐하려 하셨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들이 세상의 강한 것,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이다. “택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이렇게 하실 수 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29절)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29절)”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복음이 드러나면 복음이 자랑이 아니라 복음을 드러낸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 환경과 여건이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아셨다.
3. 그 능력과 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30-31절)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30-31절).”
어리석은 설교를 통해 믿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되신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다!. 이 또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사랑하라”는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 예수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30절)이 되셨다.
바울은 분쟁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고린도교회는 전달자들의 지혜와 성향, 출신과 상황에 따라 헤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방식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세상 방식에 따른 경쟁과 분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경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와 지식의 추구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라. 가장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구원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분쟁하는 것이 웬 말인가!
분쟁은 사람을 보게한다. 자신이 따르는, 혹은 따르고자 하는 사람만 보는 것이다. 교회 분쟁이 이와 같지 않은가? 분쟁은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르기에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 메시아, 구원자가 죽다니… 그러고도 구원할 수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다.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이 세상은 도저히 자기 지혜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역사를 알 수도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는 알 수 있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아주 미련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삼게 하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능력을 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메시아에게서 출애굽을 능가할 행동을 기대했던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저주를 당한 패배자였고(신 21:23) 걸림돌이었으며,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인에게도 미련하고 무모한 사람에 불과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철저히 절망한 자에게만 그것이 초월자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요 지혜가 된다. 끊임없이 네가 사랑받을 힘과 자원이 있고 절대 무시당해서는 안 될 만큼 강한 자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서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힘으로 충분히 구원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들보다는 약하고 미련하고 천대 받던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받던 이들은 곤귀한 자로 창조하셨고, 자기 힘으로 존재했고 또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없는 것같이 만드셨다. 그러니 구원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약하고 미련하다고 천대하던 자들을 존귀한 자녀로 부르셔서 인간의 모든 자랑을 부끄럽게 하신다(26~29절). ‘조건 없는’ 부르심을 통해 이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학벌, 재력, 문벌 등)을 전복하신다. 강함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약함의 역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성도의 삶이다. 그러니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자격과 자랑도 가당치 않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기억할 때 공동체 안에 질시와 경쟁은 사라지고 감사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은 우리를 지혜롭고 의롭고 거룩하게 구속하시는 구원이다(30~31절). 내 자랑이 바뀌고 내 주인이 바뀌고 내가 변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변하는 구원이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을 때 이 관계는 더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사람을 보지 말아야지… 내 안에도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따라 분쟁하는 열매로 나타난다. 내가 지혜롭게 보는 세상의 지혜가 분쟁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복음,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서 교회는 전달자에 집중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익숙하고 바라는 세상의 지혜나 방법이 하나님이 주신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서지 않도록 분별해야 한다.
-이를 분별하고 경계하여야 분쟁이 예방된다. 분쟁은 분별하지 못해 나타나는 열매 인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별하지 못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별은 믿음이다. 나를 믿게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고, 세상의 지혜와 맞서 결코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실제적인 삶이며, 이를 유지해 나가는 인내라는 거다.
*오늘도 이렇게 살아 보련다! 오직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세상의 지혜를 바꾸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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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2일
십자가의 복음으로 같은 말, 마음, 뜻을!
[고전 1:10-17 ]
하나님께서 은혜로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시는 교회에 문제가 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알려준(11절) “분쟁”이라는 문제였다. 바울이 “분쟁”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보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는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 분쟁의 원인(12절)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베드로)에게, ‘그리스도에게’….”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자기 사람들을 만들지 않았다. 즉,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편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시작하여 일정기간 담당한 후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말씀이 가르쳐지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형국이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 형식의 소규모 모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처음 1년 6개월을 사역한 이후 아볼로가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가르쳤고(행 18:24~19:1), 게바(베드로)도 아내와 함께 고린도를 방문해 말씀을 가르쳤다(9:5).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보다 그들의 사역태도(색깔)나 출신배경” 등에 따라 각각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들이 생겼고, 이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각자가 선호하는 성향이나 선호도 등에 따라 “~에 속한 자(~를 따르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디옥 지역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을, 아볼로를, 게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 이리 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각자가 말씀을 가르칠 때 분명한 특징이나 은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키가 작고 말이 어눌하나 글쓰기에는 능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할 때 여러 능력도 나타났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말을 잘했다”. 수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스러운 수사적 연설을 잘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막힌 설교가였다. 게바는 ‘사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 따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성향대로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인 성향으로 모인 이들이 “경쟁”관계가 되었고 “분열”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출신이 다양했다. 또 특정 가정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모이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해들은 말씀의 은혜가 이들의 복잡한 출신이나 성향을 능히 하나로 묶을 수 있음에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도였다. 안타깝게도 전해듣는 말씀이 아니라 전하는 자에게 더 호감을 갖고 “헤쳐” 모인 것이다.
2. 해결 권면(10, 17절)
13-16절은 17절을 강조하기 위해 설명하였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인 성향이나 출신이나 선호도로 헤쳐 모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특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를 베푼 집례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순회 전도자들은 전달자일 뿐인데, 고린도 교회에 어느 순간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바울의 복음, 아볼로의 복음, 게바의 복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달자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달자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전한 “오직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들었기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누구에게 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세례 받음”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순회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고, 그 복음을 듣고 확신하여 세례를 받았으니, 누가 전한 복음이 중요하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해들은 “복음”이었기에 구원받음과 세례받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달자별로 “헤쳐모여”는 말도 안된다!
바울이 전한 해결 권면은 “전달자 대로 헤쳐 모이지 말고, 복음 앞에 하나로 모이라!”는 거다. 바울은 분쟁의 내용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먼저 던졌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새번역_10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온전히 합하라(뭉쳐라)고 방안을 제시했다. 바울의 말, 아볼로의 마음, 게바 생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 복음의 마음, 복음의 생각으로 똘똘 뭉치라는 것이다.
시대 흐름을 따라 마음에 착~ 감기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현란한 말이나,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듯 마음에 불을 지르는 감동적인 정신(마음)이나, 시대 상황을 선도하는 아이디어(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말, 마음, 생각을 따라 온전하게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복음 되시는 주님 안에 속한 자이다.
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분쟁이다. 교회 바깥과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안의 갈등이었다. 바울은 같은 말과 마음과 뜻을 품으라고 촉구한다. 획일성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뜻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바울, 교회를 양육해준 아볼로,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를 각각 선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 지도자 중심으로 배타적인 장벽을 쳤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그리스도파’를 자처하였지만, 그들 역시 배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을 주목할 때 생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젠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종들이다.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부터 책망한다. 그의 관심은 자기 제자 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 만들기였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초대교회 때나, 오늘날이나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따르고 의지하는 자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교회가 어떤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부각되고 강조될 때, 오늘날의 고린도교회 짝이 날 것은 분명하다.
*교회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4장 21절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다룬 이 문제가 가장 많은 양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전달자를 추종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어야 할 공동체가 분열했고, 더 나아가 분쟁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분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확고한 경계가 생겼고, 이것이 복음진리보다 더 추종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일까?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선호하는 설교자나 자신이 따르는 가치나 성향에 따라 설교를 골라듣고, 이렇게 들은 것이라며 상충되는 견해가 행여나 마찰을 빚게될 때 발생하는 곤란함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는가?
*자기들이 아는 전달자의 전달 능력이 말씀을 가리운 꼴이 되었다. 바울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의 지혜”를 빌리지 않았다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곧이 곧대로 전했다고 고백한다(17절)
*묵상을 하며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달자만 되기를 간절히 구했다. 전달자가 말씀을 가리지 않게 되기를 구하고 또 구했다. 나는 전달자로 “말씀”을 확연하게 전달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전달자가 전해준 말씀만 보면 된다. 그 말씀만 붙잡고 설 때 산다!
*그 말씀은 “오직 복음”이었다.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교묘히 감춰진 철학이나 감동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전달하고 가르치는 성실한 교사이어야 하리라!
*분쟁의 원인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전해 들은 말씀보다 더 크고 강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말씀을 들을 때 나의 기호, 성향, 철학, 사조, 유행하는 분위기 등에 천착해서 받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를 전하는 전달자가 내가 원하는 이런 성향들에 완벽히 들어 맞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달자를 받아 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든 전달자의 외모와 상황, 출신배경 등에 의해 말씀을 가려서 받지 않도록 분별하고 또 분별해야 할 것이다.
*분쟁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성향, 기호… 이런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셨기에, 어떤 전달자를 통해 듣는 진리이든지 그 진리가 나를 움직이도록 섬세한 분별력을 구해야 하겠다. 나의 인간적인 감정이 말씀(진리)를 구별하지 않도록 말이다.
*”분쟁”이라는 단어가 오늘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더온누리교회 안에 이런 문제로 인해 “말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다.
*”말씀”이 보이면 이로 인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나도 이런 교회를 꿈꾸어야겠다.
1. 분쟁의 원인(12절)
‘나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베드로)에게, ‘그리스도에게’….”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자기 사람들을 만들지 않았다. 즉,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편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전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시작하여 일정기간 담당한 후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말씀이 가르쳐지고 세례가 베풀어지는 형국이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 형식의 소규모 모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처음 1년 6개월을 사역한 이후 아볼로가 뒤를 이어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가르쳤고(행 18:24~19:1), 게바(베드로)도 아내와 함께 고린도를 방문해 말씀을 가르쳤다(9:5).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순회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보다 그들의 사역태도(색깔)나 출신배경” 등에 따라 각각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들이 생겼고, 이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각자가 선호하는 성향이나 선호도 등에 따라 “~에 속한 자(~를 따르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디옥 지역에서 얻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을, 아볼로를, 게바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에 따라 이리 된 듯하다. 실제로 당시 순회전도자들은 각자가 말씀을 가르칠 때 분명한 특징이나 은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키가 작고 말이 어눌하나 글쓰기에는 능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할 때 여러 능력도 나타났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말을 잘했다”. 수사적 능력이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스러운 수사적 연설을 잘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막힌 설교가였다. 게바는 ‘사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 따라 자신들이 선호하는 성향대로 모임들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인 성향으로 모인 이들이 “경쟁”관계가 되었고 “분열”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이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출신이 다양했다. 또 특정 가정을 중심으로 소규모로 모이기에 서로를 너무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해들은 말씀의 은혜가 이들의 복잡한 출신이나 성향을 능히 하나로 묶을 수 있음에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말씀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도였다. 안타깝게도 전해듣는 말씀이 아니라 전하는 자에게 더 호감을 갖고 “헤쳐” 모인 것이다.
2. 해결 권면(10, 17절)
13-16절은 17절을 강조하기 위해 설명하였다. 주님은 결코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적인 성향이나 출신이나 선호도로 헤쳐 모이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특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를 베푼 집례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순회 전도자들은 전달자일 뿐인데, 고린도 교회에 어느 순간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바울의 복음, 아볼로의 복음, 게바의 복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달자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전달자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전한 “오직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들었기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누구에게 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해 듣고 변화된 삶이 중요한 것이다. “세례 받음”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_17절).”
순회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고, 그 복음을 듣고 확신하여 세례를 받았으니, 누가 전한 복음이 중요하거나 누구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해들은 “복음”이었기에 구원받음과 세례받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달자별로 “헤쳐모여”는 말도 안된다!
바울이 전한 해결 권면은 “전달자 대로 헤쳐 모이지 말고, 복음 앞에 하나로 모이라!”는 거다. 바울은 분쟁의 내용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먼저 던졌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새번역_10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온전히 합하라(뭉쳐라)고 방안을 제시했다. 바울의 말, 아볼로의 마음, 게바 생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 복음의 마음, 복음의 생각으로 똘똘 뭉치라는 것이다.
시대 흐름을 따라 마음에 착~ 감기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현란한 말이나,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듯 마음에 불을 지르는 감동적인 정신(마음)이나, 시대 상황을 선도하는 아이디어(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말, 마음, 생각을 따라 온전하게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전달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복음 되시는 주님 안에 속한 자이다.
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분쟁이다. 교회 바깥과의 갈등이 아니라 교회 안의 갈등이었다. 바울은 같은 말과 마음과 뜻을 품으라고 촉구한다. 획일성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뜻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한 바울, 교회를 양육해준 아볼로,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를 각각 선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 지도자 중심으로 배타적인 장벽을 쳤다.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그리스도파’를 자처하였지만, 그들 역시 배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을 주목할 때 생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젠 사탄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종들이다.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부터 책망한다. 그의 관심은 자기 제자 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 만들기였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초대교회 때나, 오늘날이나 대동소이하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따르고 의지하는 자도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 교회가 어떤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부각되고 강조될 때, 오늘날의 고린도교회 짝이 날 것은 분명하다.
*교회 분쟁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4장 21절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다룬 이 문제가 가장 많은 양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전달자를 추종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어야 할 공동체가 분열했고, 더 나아가 분쟁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분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호도에 따라 확고한 경계가 생겼고, 이것이 복음진리보다 더 추종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고린도교회의 문제만일까?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선호하는 설교자나 자신이 따르는 가치나 성향에 따라 설교를 골라듣고, 이렇게 들은 것이라며 상충되는 견해가 행여나 마찰을 빚게될 때 발생하는 곤란함을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는가?
*자기들이 아는 전달자의 전달 능력이 말씀을 가리운 꼴이 되었다. 바울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말의 지혜”를 빌리지 않았다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곧이 곧대로 전했다고 고백한다(17절)
*묵상을 하며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달자만 되기를 간절히 구했다. 전달자가 말씀을 가리지 않게 되기를 구하고 또 구했다. 나는 전달자로 “말씀”을 확연하게 전달하라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전달자가 전해준 말씀만 보면 된다. 그 말씀만 붙잡고 설 때 산다!
*그 말씀은 “오직 복음”이었다.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교묘히 감춰진 철학이나 감동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전달하고 가르치는 성실한 교사이어야 하리라!
*분쟁의 원인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전해 들은 말씀보다 더 크고 강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말씀을 들을 때 나의 기호, 성향, 철학, 사조, 유행하는 분위기 등에 천착해서 받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를 전하는 전달자가 내가 원하는 이런 성향들에 완벽히 들어 맞는다면?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달자를 받아 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 경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어떤 전달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든 전달자의 외모와 상황, 출신배경 등에 의해 말씀을 가려서 받지 않도록 분별하고 또 분별해야 할 것이다.
*분쟁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하는 성향, 기호… 이런 것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셨기에, 어떤 전달자를 통해 듣는 진리이든지 그 진리가 나를 움직이도록 섬세한 분별력을 구해야 하겠다. 나의 인간적인 감정이 말씀(진리)를 구별하지 않도록 말이다.
*”분쟁”이라는 단어가 오늘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더온누리교회 안에 이런 문제로 인해 “말씀”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다.
*”말씀”이 보이면 이로 인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주셨던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나도 이런 교회를 꿈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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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1일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바라보는 교회
[고전 1:1-9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때 약 1년 반 정도 머물며 세우고 사역한 교회다. 사도행전과 본문의 내용을 참고하면 바울이 떠난 후 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편지를 보내 가르치려 했으나 오히려 여러 오해와 질문들이 나오게 되었고 다시 바울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요청한다. 이때 또 다른 교회 문제들이 함께 전해졌다.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였고 바울은 이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과 문제에 대한 권면을 글로 써서 보낸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먼저 다루지 않고 자신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심정을 드러낸다.
1. 부르심을 받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의 모임(1-3절)
전형적인 당시 편지 형식에 따라 서신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인 무리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1절),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변화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2절), 이들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2절하)
교회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와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각각의 처소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임이다. 즉 예수님께 부름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되시고 바울과 성도들(우리)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한다. 동일한 주님에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주님 되시기에 예수의 이름을 함께, 동일하게 부른다. 이것이 곧 교회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부름을 듣는 사람이 곧 교회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본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_요 10:3-4).”
주님의 음성을 듣고(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로 우리는 세워졌다. 주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주님의 음성도 듣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2. 받은 은혜가 있는 모임(4-7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인 것을 감사했다(4절). ”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새번역_4절).”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와 성도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들이 분명하게 보이는 교회였다.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워가는 시간 뿐 아니라 떠나온 후에도 교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하는 바울이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언제나 감사의 고백이 마르지 않는 은혜의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떤 것들이었을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새번역_5-7절).
고린도교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풍족하여 진 것인데,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요긴한 은사(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도 풍족하게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온갖 언변(로고스/말), 온갖 지식(그노시스/사고, 판단, 의견등)이 충분히 활용되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사용 가능하도록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나타나는 치유와 같은 은혜의 증거들도 ‘부족함이 없도록’ 함께 나타났다.
복음의 지식이 넘쳐나고, 이에 따른 복음 증언이 여러 은사와 함께 나타나 강력하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듣고 있는 현재도 이렇게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3.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교회(8-9절)
특히 8절은 주님께서 재림때까지 이 교회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교회임을 선언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가 “복음의 증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복음의 능력”이 함께 나타나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주님과 더불어 늘 교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새번역_8절).” 하나님께서 불러주심으로 시작된 이 교제는 그의 신실하심으로 시작하게 하시고 재림의 그때까지 이어지게 하신다. ”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새번역_9절).
교회는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불러 주신 곳이다. 그리고 이를 신실하게 지켜 주신다.
나는?
-자격 없는 박해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가망 없는 죄인 고린도인들은 은혜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를 위한 사역의 근거이며, 하나님의 용서는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고린도 성도들은 풍성한 말과 지식의 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감사의 이유이자 동시에 염려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은사가 재림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게 하는 데 쓰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여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믿음을 따라 살 때 은사는 더욱 퐁성해 지고 그리스도는 더욱 온전히 증거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심판 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다.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가진 많은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변치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완성해줄 수 있다.
-고린도교회, 문제많은 교회다. 하지만 바울은 그 교회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먼저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들을 먼저 바라보고, 그 교회가 감당하는 복음전도와 이에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사)로 인해 감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또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감사가 먼저일까? 비판이 먼저일까?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함으로 인해 성도들조차 먼저 감사하는 교회일까? 비난하는 교회일까?
-문제점들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는 “부르심”과 “부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사람들이 일어나며,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로 인해 주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증언한다. 말 뿐 아니라 능력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은사가 나타나 능력있게 증거 하는 곳이 곧 교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한다(4절).
*교회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각 성도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흔적이 있고, 각 성도마다 간절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각 성도가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되어 증언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능력 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문제점도 있을 수 있으나 교회는 문제를 뛰어넘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상상못할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도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끝까지 견고하게(8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서를 살펴보면서 평소 문제점들을 먼저 보았던 내가 사도 바울의 문제가 있기 전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며 베푸셨던 “은혜”들을 보는 시각을 통해 큰 울림이 된다. 더구나 “끝까지 견고하게”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재림의 날까지 지키시겠다는 주님의 선언을 선포하는 바울을 통해 오늘날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셨다.
*특히 마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는 말씀이 몇 년전 태국에서 들려 주셨던 동일한 음성과 함께 상기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그 시각으로 고린도전서 묵상하는데,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 주셨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게 해주셨다.
*문제가 있으나 은혜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잠시의 문제들이 은혜를 몰아내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만 죄악을 선택하여 은혜를 보지 못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교회를 지킨다.
*더온누리교회도 역시 문제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문제보다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더 많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이미 있다. 문제가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 은혜에 집중하겠다. 또, 앞으로 살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보며 날선 비판보다, 아픈 회개가 먼저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결국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문제점들은 “유비무환”의 요소만 되게 하실 것이다.
*문제점을 보고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 오히려 은혜를 더욱 소망하되 문제들로 인해 일어날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3절).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들이지만, 더 깊고 충만한 인격적 관계로 성숙하기 위해서, 또 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속적인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든지 이 은혜와 평강이 내 영혼과 삶을 지배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흘러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온전치 못해도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목적을 잃은 은사 사용으로 교회가 갈등을 겪어도 그 은사 자체는 그리스도의 증거요, 감사하게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생각할 때 기대와 기도 속에서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을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께 두어야 하리라.
교회가 문제가 발생하였고 바울은 이에 대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과 문제에 대한 권면을 글로 써서 보낸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먼저 다루지 않고 자신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심정을 드러낸다.
1. 부르심을 받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의 모임(1-3절)
전형적인 당시 편지 형식에 따라 서신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모인 무리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1절),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변화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며(2절), 이들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2절하)
교회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와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각각의 처소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임이다. 즉 예수님께 부름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되시고 바울과 성도들(우리)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한다. 동일한 주님에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주님 되시기에 예수의 이름을 함께, 동일하게 부른다. 이것이 곧 교회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부름을 듣는 사람이 곧 교회이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본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언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새번역_요 10:3-4).”
주님의 음성을 듣고(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로 우리는 세워졌다. 주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주님의 음성도 듣는 교회였으면 좋겠다.
2. 받은 은혜가 있는 모임(4-7절)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교회인 것을 감사했다(4절). ”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새번역_4절).”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와 성도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들이 분명하게 보이는 교회였다.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워가는 시간 뿐 아니라 떠나온 후에도 교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들로 인해 “언제나” 감사하는 바울이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언제나 감사의 고백이 마르지 않는 은혜의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떤 것들이었을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에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새번역_5-7절).
고린도교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풍족하여 진 것인데,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요긴한 은사(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도 풍족하게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온갖 언변(로고스/말), 온갖 지식(그노시스/사고, 판단, 의견등)이 충분히 활용되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사용 가능하도록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나타나는 치유와 같은 은혜의 증거들도 ‘부족함이 없도록’ 함께 나타났다.
복음의 지식이 넘쳐나고, 이에 따른 복음 증언이 여러 은사와 함께 나타나 강력하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이 교회의 문제점들을 듣고 있는 현재도 이렇게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3.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교회(8-9절)
특히 8절은 주님께서 재림때까지 이 교회를 끝까지 붙잡아 주시는 교회임을 선언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가 “복음의 증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복음의 능력”이 함께 나타나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이어지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주님과 더불어 늘 교제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새번역_8절).” 하나님께서 불러주심으로 시작된 이 교제는 그의 신실하심으로 시작하게 하시고 재림의 그때까지 이어지게 하신다. ”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새번역_9절).
교회는 이렇게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도록 불러 주신 곳이다. 그리고 이를 신실하게 지켜 주신다.
나는?
-자격 없는 박해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으며, 가망 없는 죄인 고린도인들은 은혜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를 위한 사역의 근거이며, 하나님의 용서는 거룩하고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
-고린도 성도들은 풍성한 말과 지식의 은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감사의 이유이자 동시에 염려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은사가 재림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게 하는 데 쓰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높여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믿음을 따라 살 때 은사는 더욱 퐁성해 지고 그리스도는 더욱 온전히 증거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뿐 아니라, 심판 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이다. 이미 시작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가진 많은 은사가 아니라 오직 변치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완성해줄 수 있다.
-고린도교회, 문제많은 교회다. 하지만 바울은 그 교회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먼저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들을 먼저 바라보고, 그 교회가 감당하는 복음전도와 이에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은사)로 인해 감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또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감사가 먼저일까? 비판이 먼저일까? 교회가 지역사회에 존재함으로 인해 성도들조차 먼저 감사하는 교회일까? 비난하는 교회일까?
-문제점들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교회는 “부르심”과 “부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사람들이 일어나며,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이로 인해 주님의 복음을 능력있게 증언한다. 말 뿐 아니라 능력도 나타난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은사가 나타나 능력있게 증거 하는 곳이 곧 교회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 교회를 바라보며 감사한다(4절).
*교회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각 성도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흔적이 있고, 각 성도마다 간절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각 성도가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되어 증언할 때 하나님의 은사가 능력 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문제점도 있을 수 있으나 교회는 문제를 뛰어넘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상상못할 죄의 모습들이 나타나도 교회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끝까지 견고하게(8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서를 살펴보면서 평소 문제점들을 먼저 보았던 내가 사도 바울의 문제가 있기 전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며 베푸셨던 “은혜”들을 보는 시각을 통해 큰 울림이 된다. 더구나 “끝까지 견고하게”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재림의 날까지 지키시겠다는 주님의 선언을 선포하는 바울을 통해 오늘날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교회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깨닫게 하셨다.
*특히 마 16:18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는 말씀이 몇 년전 태국에서 들려 주셨던 동일한 음성과 함께 상기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그 시각으로 고린도전서 묵상하는데,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 주셨고,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게 해주셨다.
*문제가 있으나 은혜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잠시의 문제들이 은혜를 몰아내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만 죄악을 선택하여 은혜를 보지 못할 뿐이다. 주님의 은혜는 “끝까지 견고하게” 교회를 지킨다.
*더온누리교회도 역시 문제점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문제보다 “은혜”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더 많다! 그러니 문제는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이미 있다. 문제가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 은혜에 집중하겠다. 또, 앞으로 살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보며 날선 비판보다, 아픈 회개가 먼저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결국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에 문제점들은 “유비무환”의 요소만 되게 하실 것이다.
*문제점을 보고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 오히려 은혜를 더욱 소망하되 문제들로 인해 일어날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3절).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들이지만, 더 깊고 충만한 인격적 관계로 성숙하기 위해서, 또 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지속적인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 있든지 이 은혜와 평강이 내 영혼과 삶을 지배하고, 가정과 공동체에 흘러 넘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온전치 못해도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은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목적을 잃은 은사 사용으로 교회가 갈등을 겪어도 그 은사 자체는 그리스도의 증거요, 감사하게 받아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생각할 때 기대와 기도 속에서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조건을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께 두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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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1일
요셉의 진정한 용서와 하나님의 섭리
[창 50:15-26 ]
요셉의 지위는 애굽의 총리이자, 야곱으로부터 장자의 권리까지 부여 받았다. 이때 야곱의 부재가 가져올 변화는 상당했을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애굽에 들어온 지 무려 17년이 넘었어도 약 39년전 도단 들에서의 사건의 영향력이 다시 소환될 정도였다. 본문은 지난 17년 동안 요셉이 자신들의 죄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은 것은 야곱의 영향력이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요셉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였고, 그것도 17년전에 이미 용서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형들의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있었을 불안함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같지 않을까? 이미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지만, 이를 믿지 못해 늘 불안해 하고, 이를 누리지 못해 늘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주님의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요 10:10) 임에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느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올곧이 바라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제한 없는 용서를 이미 베푸셨다.
1. 죽은 아버지를 의지하여 구하는 용서라도….(15-17절)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지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용서를 구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6-17절) 얼마나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먼저 살펴볼 것은 이전 본문들에서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본문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전제한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형들이 또 다른 거짓을 함께 모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만일 이런 고백이 이루어졌다면 49장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유언의 내용에 영향이 없었을까? 이런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본문은 형제들에 의해 야곱의 용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그 즉시 야곱은 요셉과 형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죽기 전에 화해를 했어야 옳다. 그게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아비의 마음은 형제들의 안녕과 화목이 우선 일테니까.
그런데 그런 기록이 없이 형제들의 전언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지 않지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하는 형들의 생각인 것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거짓말을 의지하여 해묵은 지난 날의 죄로 인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용서를 확인받고 마음 속 깊은 불안을 해소하여 평안하기를 구하는 형제들의 연약한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다. 나도 역시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만큼 범죄의 질긴 불안감과 두려움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면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요셉은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형들이 직접 범죄를 요셉에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여 여전히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17년 전 요셉의 시험 앞에 진정한 회개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의 억울한 간첩 누명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했고, 유다는 자기 희생을 자처하며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실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저 두렵워 떨며, 독백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상태로 질기고 질긴 불안의 꼬리가 17년간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장례도 다 마쳤다. 더 이상 이 불안을 끌고 갈 힘도, 감출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와 같은 방패도 사라졌다. 이제는 요셉이 장자권을 물려 받았기에 더더욱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이래서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는 마음을 까발리고 입술을 열기가 이렇게 힘들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감동하시고 고백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실 그 때 담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깊고 큰 은혜인지, 이 은혜로 나의 주님 안에서의 오늘이 존재함이 감사할 따름이다.
2. 진심으로 용서하는 요셉(17하-21절)
형들의 간곡한 말에 요셉의 반응은 “울었더라(17절)… 위로하였더라(21절)”로 함축된다. 형들의 말과 행동, 특히 용서를 구하는 말을 전달하고 곧이어 나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18절)” 라며 엎드리는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새번역_19-21절)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오늘 우리 모두의 생명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행하겠느냐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살았다면 그때의 악조차 하나님의 개입의 은혜가 선함이 되어 오늘의 생명으로 나타난 것이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한 진심을 담아 형들과 그 자녀들을 반드시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책임 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어 역사하셨듯, 나는 하나님의 선함을 따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인간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앙금이 지워지지 않는다. 자꾸만 생각난다. 반복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하는 용서는 이렇게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보증이 된다.
악을 행한 형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미 17년전 가족을 상봉할 때 진심으로 용서한 요셉은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자기 앞에 엎드린 형들 앞에서 그들이 얽매였을 17년의 고통을 이해하며 울었다. 그 마음으로 가족들을 장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며 형들의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다.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용서의 완결을 이끌었다. 그 섭리에 순종하는 요셉의 마음은 이미 형들에 대한 아픔을 지웠다. 이제야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남았던 범죄의 상흔이 지워진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는 죄의 고백과 진정한 용서의 하모니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었다. 도단들에서부터 계산하자면 무려 32년만의 온전한 화해였다. 아니 그전 요셉이 태어나 야곱의 편애로부터 시작하자면 약 50여만에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이렇게 하나됨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실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3. 애굽은 아니다. 가나안이다(22-26절)
요셉은 110세를 살고 죽는다. 창세기 드라마가 완결됐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다. 므낫세 역시 마찬가지다(23절). 죽음의 순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환기 시킨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새번역_24절) 그러고서는 맹세를 시키면서 당부의 말을 남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새번역_25절) 그리고는 세상을 떠난다.
애굽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4대까지 자손을 보았지만 그의 본향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손들이 남겨진 애굽땅을 바라보지 않고, 자손들이 돌아갈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 야곱이 애굽에 살았지만 가나안에 묻혔듯이 요셉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출애굽의 날에 자신의 뼈를 함께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줄 것을 당부한다.
애굽에 살지만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붙잡는 삶을 의미한다. 아무리 애굽이 평안과 안정과 번영의 땅이라도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땅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다. 요셉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굳게 붙잡아야 겠다.
나는?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형제이기를 포기하고 종이 되겠으니 목숨만은 보전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애굽에 들어온 이후 17년간 가슴 졸이면 살았을 형들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용서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가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이 쓰임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며 형들을 안심시킨다. 비로소 형제간에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형제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요셉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형제들을 대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에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다. 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완전히 믿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혹시 죄책감으로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의심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가?
-요셉도 죽는다. 형제들보다 빨리 죽는다.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형제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할 때 자신의 유골을 잊지 말고 가져가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청한다. 야곱의 신앙을 물려받은 것이다. 400년 후에나 될 일을 오늘 확신하고 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고 떠나고 있다.
-요셉은 늙도록 하나님의 복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희생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요셉의 고난은 형제들의 시기심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흉년에서 구원하여 약속하신대로 민족을 이루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과 복종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창세기는 죽음의 이야기로 닫고 있지만, 약속과 희망을 간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으면서 창세기가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족장들은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장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희망을 안고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은 유일한 희망이고, 그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약속과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묵상이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서너 번 정도 묵상한 듯 하다. 그러나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묵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진즉에 이렇게 할 것인데… 단편적으로 남긴 메모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다. 그때의 기억들이 기록하는 내내 소환 되었다. 기록이 이처럼 중요하다. 묵상 기록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 말아야지.
-형제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불안해 하는 모습, 그런데 이미 용서된 죄에 대해 자유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님의 용서가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 졌음에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서 그 용서가 주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하지만 이런 연약함도 결국 때가 되면 완전한 용서의 피날레가 온다는 사실이다.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인간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와 화해의 은혜를 깨닫고 누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실감된다. 이미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또 요셉은 총리로서 애굽의 영화를 모두 누리고, 자녀들도 복을 받아 3대 손 까지 직접 받아 볼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살았으나, 가나안을 잊지 않는 삶을 산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요셉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민족이 모두 이동 될 것이다. 그 때 자신의 뼈도 함께 이동해 달라는 말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믿음이리라. 반드시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다면 감히 공약할 수 없다. 요셉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믿음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믿는 믿음이 본질이다.
*요셉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주관하며 인도하신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결국 용서와 화해의 완전함은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음이 우리의 복음이다. 애굽을 바라보지 안고 가나안을 바라본 그의 일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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