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1-19 열 명의 나병 환자의 치유받음, 그 중 한 명의 감사와 영광의 고백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의 후반부(17:11~19:27)의 첫 장면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중간을 지나 어떤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예수께 치유를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깨끗하게 된다. 그러나단 한 명만 감사를 위해 예수께 돌아왔으며, 그의 정체는 사마리아인이었다.
1. 열 명의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11~14절)
9:51절에서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걸음이 이제야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는 그동안의 사역이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 주변, 특별히 “길”에서 다양하게 하나님 나라 사역이 펼쳐 졌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통과하고 있을 때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는 당시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갈 때 부장한 사마리아 지역을 밟지 않으려고 이용했던 우회로를 가리킨다. 우회로는 두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이 길은 유대인들의 지역인 갈릴리도 아니고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례에 있는 사마리아도 아니다. 이 경계선으 ㅣ길은 두 지역 마을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병환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길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때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은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자들이었다. 갈릴리 마을에도, 사마리아 마을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중간지대에 머물러야 했다. 제의적으로 부정하고 사회에서 격리된 채 살았던 나병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야 했다(레 13:45~46). 그들은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께 긍휼을 구한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 긍휼을 구하는 것은 치유를 간구하는 것과 동일하다(예. 시 51:1~2).
구약에서 나병은 하나님만 고칠 수 있는 불치병인데, 이들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한다. 하나님 외에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어서 사람들은 나병을 천형으로 여겼다. 이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누가는 이런 믿음을 뜻밖의 사람들을 통하여 소개한다(7:1~10, 36~50; 19:1~10; 23:39~43).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지시하신다(14절). 병이 나을 것을 전제로 치유를 검증받는 절차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레위기 13~14장의 규정에 따라 질병의 상태가 사라지면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적어도 두 마리의 비둘기를 예물로 드리고, 정결 예식을 거쳐 정결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다. 당시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마을에 거주하였고 매년 두 차례 예루살렘에서 한 주 동안 직무를 수행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들은 제사장이 있는 마을에 가서 치유를 확인받아야 했다. 확인 후 제사는 성전에서드려야 했지만, 치유를 검증받는 절차는 지역 제사장으로 가능했다. 그렇게 검증을 받고 난 후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레 14:1~32).
예수님은 치유받는 과정보다 제사장들의 검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나병환자들이 공동체로 회복되는 것에 관심을 두셨다. 놀랍게도 나병환자들은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깨끗해졌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와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치유로 나타났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먼 곳에 있던 백부장의 종이 나은 사건과 비슷하다(7:10).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능력을 경험한 백부장의 종과 돌아온 나병환자는 모두 이방인이었다. 한편 15절에서 치유받은 자들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은 그들이 치유를 각자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몸을 뒤덮고 있었던 나병이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충격과 감격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한 명(15~19절)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5절).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결코 치유받을 수 없는 줄 알았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을 통해 긍휼과 능력의 기적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방인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유받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왕하 5:1~19). 시리아의 군대장관이었던 그는 엘라사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함을 받는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했다.
이처럼 본문에서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이 보인 중요한 행동은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다(휘포스트레포)”는 그의 마음과 치유받은 나머지 아홉 명의 태도를 구분한다. 그는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받았고, 제사장에게 가던 발걸음을 돌려 예수께로 향한다. 예수께 돌아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한다(16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예수께 감사하는 행위로 표현된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돌아온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로 보셨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님은 열 명이 깨끗해졌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는지 물으신다(17절).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없느냐고 한탄하신다(18절). “이방인(알로게네스)”으로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한 단어로 비유대인을 가리킨다.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도 충격적이지만, “이방인”은 더 충격적이다. 아홉 명은 몸이 치유된 것을 경험하고 제사장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가족과 친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 예수님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나병까지도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으로 알았으나 충성의 대상으로 믿지는 않았다. 치유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예수님의 정체에 더 이상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아홉 명의 출신이 어딘지 그들 전부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께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능력자로 믿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치유가 아니라 치유를 선사하신 예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라고 선언하셨다. 넓은 의미로 구원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질병의 치유도 구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치유 이상의 의미로 구원을 언급하신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병에서 나음받았기 때문에, 지금 그에게 있는 믿음은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었다. 그는 전인적인 구원을 받았다.
인생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받는 것에 머무르는 신앙에서 예수께 돌아와 감사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통과하실 때의 사건이 기술된다. 그 길은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할 때 사마리아를 우회하기 위한 길이었다. 이 길에서 두 지역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나병 환자 열 명이 주님을 만나서도 가까이하지 못하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은혜를 구한다. 예수님 외에 달리 소망이 없던 이들은 절박하게 호소한다.
-이렇듯 주님은 사회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경계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 스스로 절망스러운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의 호소를 들으시는 참 구원자이시다. 주님은 멀리서도 이런 죄인의 간절함을 보실 수 있고 숨죽인 목소리를 들으실 수 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기들 곁에 다가오는 예수님을 멀리 서서 부르짖는다. 소리를 높여 긍휼을 구한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간절한 부르짖음에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다가와 나병에서 나은 사람에게나 어울릴 듯한 명령, 즉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자,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즉시 순종한다.
-아무리 주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아무리 내 믿음이 작다 해도, 주께 부르짖는다면 그것이 믿음이다. 안 만큼, 들은 만큼 실행한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소심한 믿음의 첫걸음이 더 나은 다음 걸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주님은 적극적인 치유보다 다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다. 병이 나을 것을 전제로 치유를 검증받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치유의 과정보다 제사장들의 검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소외된 이들의 공동체로서의 회복에 더 관심을 보이신다.
-놀랍게도 열 명이 모두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치유를 받았다. 그들은 구체적인 치유 행위가 없었음에도 의심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여 은혜를 경험한다. 믿음이란 말씀하신 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며 구체적인 순종이다. 말씀 따라 내딛는 믿음의 걸음이 경이로움과 충격과 감격의 세계를 만나게 한다.
-하지만 치유받은 열 명 중 단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가던 길 돌아서서 예수께로 와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언급한 것은 나머지는 유대나 갈릴리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나병환자에다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던 사람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다.
-감사는 믿음의 완성과 같다. 하나도 당연한 것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 감사다. 혹시 큰 소리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줄만 알았지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생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의 존재를 깨달은 사마리아인에게 제사장의 검증과 사회족 회복이 중요하지 않았다. 감사와 경배가 최우선이었다. 이런 믿음을 보인 이는 놀랍게도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이다. 주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며 율법 의식에 사로잡혀 새 시대의 구원자를 깨닫지 못하는 아둔함을 질타하신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감사하고, 경배하는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시기에 이른다. 이 사람은 육신의 치유를 넘어 생명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한 이방인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해 주신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처럼 언약의 외인이던 이방인들이 먼저 은혜를 받은 것이다.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간주되던 유대인 대신에 심판의 불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던 사마리아인이 “감사”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하신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표현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 큰 소리로 외쳐 치유함을 받았으나 소리 없이 사라진 아홉 명과 더욱 큰 소리로 감사와 영광을 돌린 한 명의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저는 변함없는 큰 소리로 간구와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겠습니다.
*주님, 치유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만큼 치유의 은혜에 반응하며 더 감격하며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