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사사기 2:11-23]
 – 2026년 09월 05일
– 2026년 09월 05일 –
본문은 사사기의 중심 이야기가 되는 틀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변국에 파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사사를 통한 구원, 그리고 다시 타락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요약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사기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잘 보여 준다.



1.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11~19절)
11~13절은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한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 등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의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바알을 섬긴 일을 가리킨다. 12절은 이런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 자신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호와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0절).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모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들을 섬기며 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호와도 조상의 신으로 섬기고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겨서 더 큰 풍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한 배교였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가나안의 신들은 여호와께 완전히 패했다. 즉, 하나님과 비교하여 가나안의 신들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무능하고 약한 존재들을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이런 모습에 하나님은 격분하셨고, 이런 태도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다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섬긴 것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상호 배타적인 부부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다. 이 언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십계명 제1계명)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삶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값싼 풍요를 더 누려 보겠다고 가나안 신을 섬긴 것이다.

14~15절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노략자들의 손에 넘겨주심을 보여 준다. ‘노략자들’은 가나안 족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주변의 모든 적을 가리킨다. ‘손에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것이라는 데 사용하신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전쟁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5절에서는 여호와의 징계가 얼마나 심한지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광야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보호하시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재앙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28~29장의 저주나 31:16~21의 저주의 말씀들을 성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또한 공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16~19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여 준다.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극심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구원할 사사를 보내 주셨다. ‘사사’는 당시 지파를 다스리던 지도자들로, 지파가 적들로 인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는 재판관이라기보다 영적,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셔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따라갔다. 다른 신을 따라 음행한다는 것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음란할 뿐 아니라 이방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며 풍요를 비는 행위 역시 음란하였다는 뜻이다.

18절은 왜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적의 핍박을 받으며 내는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마음이 약해지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기계적으로 벌을 주고 잘하면 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가 잘못된 길로 치우치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징계하시지만, 징계를 받는 자녀가 너무 힘들어하면 그것마저 가슴이 아파 참지 못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조금 살 만해지고 자신들을 인도하던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타락의 길로 돌이키기를 반복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배교하였으며, 19절이 이를 잘 요약한다.



2. 여호와의 분노(20~23절)
본문은 반복적인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므로,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신다. “하나도”라는 말로 강조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크기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대응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말씀만 지킨다면 다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23절은 이방 민족들을 남겨 두신 이유가 하나님의 시험 때문이라고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마무리한다. 시험은 심판과 다르다.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훈계의 방편이지 결코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와 하나님의 반복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살게 하시려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사기의 서사는 사사의 영웅담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3. 사사기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다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지 않으며 가나안의 우상(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서도 사사들을 보내 긍휼을 베푸신다. 사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버리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의 배신에 진노하시지만,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하심을 사사들을 보내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1) 여전히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며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14절).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의 손’이 재앙을 내리셨다(15절).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대로(출 23:33, 신 7:16, 민 33:55) 흘러갔고, 그 괴로움이 매우 컸다. “보김(통곡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신음 소리는(네아카_슬피 울부짖음) 깊어만 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경고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생활과 광야의 결핍된 생활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탈출하고 그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빠져들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 것을 우려하셨다. 이에 가나안에서의 복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재앙도 경고하셨던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과 재앙”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가나안의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게서(불과 가나안 정착 두 세대 만에) 잊히고 말았다. 광야의 결핍된 환경에서 누렸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의 은혜는 가나안의 풍족함으로 인해 잊혔다. 두려운 것은 우리의 환경도 과거 모든 것이 결핍했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세대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하였던 간절함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서 사라졌다. 굳이 믿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더 넘치는 풍요를 좇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구원의 하나님이 절실했던 세대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 하나님은 잊히고 말았다. 풍요로움을 맛보니 하나님보다 풍요를 더 간절히 좇는다. 이 시대가,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누리며 은혜를 붙잡았던 세대와 완전히 다른 세대가 된 것이다. 며칠 전 핼러윈데이에 거리에 넘쳐나던, 핼러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 완전히 다른 세대로구나……”를 통감하며, 이 말씀 앞에 깊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알고 계셔서 ‘사사’들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나안의 풍요에 빠져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게 하시려고 쫓아내지 않은 대적들의 손에 넘겨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나안의 풍요를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기 백성의 배신에 대하여 심판하시지만,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싶다.


2) 여전히 함께하기를 바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11절).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것이었다(13절).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신하고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리어 배신(버림)당하게 하신다. 우상들을 섬기던 가나안 족속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면서 좇아갔던 우상들은 백성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이 추구했던 풍요를 노략당하게 하시고, 그들이 쫓아내지 않았던 족속들에게 도리어 복수(?)를 당하게 하신다(14절). 이 재앙은 피할 길이 없었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피해 숨어도 노략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제 필요 없다며 우상들에게 달려갔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우상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하여 괴로움이 심해지고 나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진노와 재앙을 겪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배반하는 자기 백성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함께” 하시면서 그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신 것이다.

*사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이다. 여전히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사들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세대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18절).


3) 그러나…… 그러므로
“그러나 사사가 죽으면 백성은 다시 돌아서서, 그들의 조상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고 섬기며,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악한 행위와 완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새번역_1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셨고(20절), “그러므로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쫓아내지 않겠다”(21절)라고 선언하신다. 문장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주위에 남아 있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과 이방 우상들의 확연한 차이를 보고 느끼라는 마음이었다.

*백성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과 광야를 지나며 경험하고 알았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공급받았던 일용할 은혜의 가치를 깨닫기 원하셨다. 아무리 비옥한 땅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경작하며 풍요로움을 일굴 수 있다고 착각했을지라도, 광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필요하며 그 은혜 안에 실제로 거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가나안의 풍요가 언제든지 “노략”당하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깨닫기 바라셨다. 그렇게 깨닫고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22절) 시험하여 보시겠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일상의 “근심거리들”, “고통거리들”은,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 속에서 자기 힘에 대한 과신과 탐욕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임을 깨닫게 하시려고 “남겨 두신” 것임을 깨닫는다. 이 근심, 그 고통이 없다면 그나마 주님께 부르짖는 것마저 망각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될 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근심과 고통과 결핍을 남겨 두셨다.

*결핍이, 고통이, 근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배신은, 쫓아내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남겨진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바알과 아스다롯)을 따라가면서 격화되었다.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다른 신들이 왜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만큼 빠져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알과 아스다롯이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섬겨진 우상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만한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농경 지대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유목하며 양을 치던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2세대가 경험한 광야가 아니었다. 광야는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양식’이 아니고서는 살아 낼 수 없는 땅이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물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광야의 땅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옷깃과 신발도 해어지지 않았던 기적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달랐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며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그야말로 광야의 결핍과 절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줄기는 이어졌고, 뿌리는 씨는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졌다. 이런 풍요가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신들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알과 아스다롯의 신상은 웅장하였으니, 그렇게 여겨질 법도 했다.

*그런 웅장한 우상들이 준다는 풍요와 다산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 세상 신들이 약속한 “풍요로움”은 넘치고 넘쳐 쌓아 둘 수 있는 풍요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원하는 “탐욕”의 마음은, “일용할 양식”의 풍성함에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미덥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매일 아침 내려 주신 만나는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손으로 그보다 더 많은 소출을 수확하여 “저장(축재)”하며 살 수 있었다. 창고가 부족하면 또 짓고 저장하는 “넘치는 풍요”의 유혹은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기막힌 매력에(넘치고 넘치는) 이스라엘은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했다. 날마다 필요한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는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하나님의 공동체가) 골고루 나누어 갖는 풍요임을 간과한 것이다. 가나안의 풍요가 힘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들에게 몰려서 주체하지 못하게 하는 풍요라면, 하나님의 풍요는 모든 백성이 골고루 채워지는 만큼의 풍요였다.

*나무로 깎아 금으로 입힌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는, 썩어 내다 버려도 내 손에서 넘쳐나는 풍요였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풍요로움이 가나안 땅의 우상들이 보장하는(?) 풍요와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즐겁게 누리려 한다. 풍요로움이 주는 넘치는 향락을 추구하고 또 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의 풍요다.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풍요다. 매일 아침 거두러 나가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풍요다. 무엇보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누릴 수 있는 풍요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고 싶고, 내 마음껏 움켜쥐고 싶고, 내 마음껏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풍요”의 추구가 노골적이다. 지도자를 뽑는 최우선의 조건은 “경제”이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저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성공에만 함몰된 세상에서, 실패는 가치를 찾아가고 회복하는 과정이 아닌 것이 된 지 오래다. 실패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다.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와 지금 겪고 있는 각종 이상 기후, 국제 정세의 혼란은, 어쩌면 이런 이기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삶의 참된 가치”를 되찾는 화두를 던지게 한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일 수도 있겠다. 하나님 나라 백성부터, 세상의 풍요로움에 함몰되어 보지 못한 하나님과 이웃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작년과 다른 여름을 해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또한 혼란스러워지는 국제 정세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리되고 완성된 세계는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각종 혼란과 이상 기후 속에서 불안정함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지킨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시는 은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상황이 하나님을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잊게 만드는 것이 된다면 소망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예배당은? 믿음의 교제의 현장은? 기도의 자리는? 찬양의 자리는? 나눔과 섬김의 자리는? 사역과 헌신의 자리는? 하나님을 더욱 찾고 구하며 예배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내고 있는가?

+ 기도제목

*주님, 불안정함을 남겨 두신 주님의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격화되고 있는 이상 기후와 여러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더욱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만족함과 풍요로움을 먼저 회복하려 하지 않겠습니다. 위드 지저스(with JESUS)를 굳건하게 세우겠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늘 추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