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신 목적과 첫 사사 옷니엘 [사사기 3:1-11]
– 2026년 09월 06일
– 2026년 09월 06일 –
사사기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문은 왜 사사기에서도 전쟁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뉜다. 1~6절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배교 사이클을 마무리하는 설명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남겨 두신 이방 민족의 명단과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소개한다. 7~11절은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의 업적을 소개한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사사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와 심판, 부르짖음과 구원이라는 패턴 속에서 옷니엘이 사사로 세움을 받는다. 2장 22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이 시험은 조상들이 지킨 것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되며(1, 4절), 첫 사사 옷니엘의 등장으로 연결된다.
본문의 시험은 ‘유혹, 미혹’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새번역_4절)이라고 선명하게 밝히신 것처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현재의 믿음의 상태와 수준을 보게 하고, 감사와 개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만약 이 시험을 통해 교만해지거나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는 일을 회피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 방법은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분배받고도 아직 쫓아내지 못한 민족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을 핑계로 “쫓아내지 않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게 한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시험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점차 남겨 두신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거하게 하심으로써 시험(test)하신다.
1. 하나님의 시험 목적(1~4절)
이렇게 남겨 두신 가나안 민족들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두고 시험하신다. 먼저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을 남겨 두신 것”(새번역_2절)이라고 밝히시며 “전쟁”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과연 모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순종”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신 것이다(4절).
결과는 참담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쫓아내지 못한’ 그들에게 패배하여 도리어 섬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기는 전쟁을 잊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전쟁” 가운데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쫓아내야 할 민족들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나안) 여러 민족의 딸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고, 또 자기들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새번역_6절). 싸워 물리쳐야 할 상대임을 분명히 알려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도 “……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새번역_7절)라는 기록을 통해, 전쟁도 순종도 모두 참패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한 결과는 참담했다. 고대 전쟁의 ‘국룰’대로 패배한 민족이 승리한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배나 악한 구산 사람)”에게 8년 동안 압제를 받아야 했다(8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불순종이, 인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억지로 섬기는 처지로 이끌고 말았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5~6절)
이렇게 된 것은 “제대로 싸울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전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할 전쟁을 직면할 때, “편리함과 유익함”의 유혹(시험, temptation)에 적당히 타협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족속만 남겨 둔 자기 꾀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는 적당한 편리함과 유익 속에 감춰진 “전쟁 능력 상실(나태하여 준비를 소홀히 함)”이 가져올 “역전”을 가늠하지 못했다. 여기에 “남겨 둔 가나안 족속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영적 타락이 더해져, 하나님조차 우상들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전쟁의 승리를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전략과 지혜로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결국 가나안 정복의 역사적인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빠르게 하나님을 떠나갔다”(새번역_2:17).
3. 옷니엘 사사 이야기(7~11절)
옷니엘 사사 이야기는 사사기 중심 이야기의 첫 번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인물 묘사는 사사의 전형을 보여 준다. 사사기의 사사 소개에는 그의 성격, 인품,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수행한 전쟁에도 구체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옷니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의 손에 파시고, 이스라엘이 적을 섬기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이 임하였음을 묘사하는 문예적인 틀을 보여 주는 기능만 하고 있다. 이후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 틀을 기본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다른 요소들을 더해 구성된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이며, 아버지 그나스는 갈렙의 동생이다. 그를 갈렙과 연결시켜 소개한 것은 갈렙과 옷니엘의 세대가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옷니엘은 갈렙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 세대와 가나안 정착 세대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혈통은 아니지만 갈렙처럼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며, 1장에서 가나안과의 전쟁에 유다가 맨 먼저 올라간 것처럼 유다 지파 소속인 옷니엘이 첫 사사로 등장하고 있다.
7~8절은 사사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완전히 잊고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 자체에 빠져서 그 땅에서 더욱 잘살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월절, 무교절, 만나, 성막”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도록 장치들을 마련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인간은 기억해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경험하고 말씀을 들어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장치와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었고, 그 결과 눈에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긴 것이다. 바알은 신상 형태로 되어 있고 아세라 여신은 나무 기둥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알들과 아세라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신상과 제단이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이스라엘은 그를 8년 동안 섬겼다. 이스라엘이 다시 억압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의 학정을 못 이기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부르짖다(짜아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단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10절의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을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여 준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가 전쟁을 치를 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신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영은 영적 혹은 인격적인 변화를 나타내기보다 탁월한 군사적 힘과 능력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즉 전쟁을 치를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일 뿐, 인격적 변화와는 관계가 없다. 입다나 삼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인물들이었다.
옷니엘의 서사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8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고, 10절에서는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겨주셨으며, 결국 옷니엘의 손이 그를 이겼다. 이런 ‘손 바뀜’을 통해 전쟁의 주권자가 오직 여호와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옷니엘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평안하였는데, 40년은 사사기에서 한 세대를 의미한다. 옷니엘의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이 전쟁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여호와를 섬겼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신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거나 진멸하지 않으시고 그 땅에 남겨 두신다. 그 이유는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기 위함이다(1~4절).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회피한 것’이 정착 실패의 이유였기 때문이다(1~2장).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용사이신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2:10). 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백성의 순종 여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안전과 풍요는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떠나지 않는 시련이나 가시 같은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넓혀 참 믿음과 사랑의 관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순종의 시험’에 실패한다. 그 땅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이방인과 통혼하며 그들이 믿던 신들까지 섬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악을 행한다(5~7절).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그분의 역사를 지우고, 말씀의 권위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는 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샬롬을 잃은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무려 8년 동안 넘기신다(8절). 애굽의 종노릇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을 다시 혹독한 통치자에게 넘기신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자초한 종살이다. 약속의 땅에서 자유 없는 속박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영을 주셔서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신다(9~11절).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는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부르짖자 옷니엘의 손에 구산 리사다임을 넘기신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도구인 구산 리사다임도, 이스라엘을 구원한 옷니엘도 모두 ‘하나님의 손(주권)’ 아래 있음을 옷니엘 서사를 통해 보여 주신다.
-나의 삶에 “세상 가치”를 남겨 두신 이유가 분명하다. 세상 속에서 세상 가치와 전쟁하는 법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살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세상 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전쟁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이다.
-세상 속, 세상 가치의 영향력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가치대로 정복해 나가도록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성도의 삶이 전쟁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전쟁을 모른다면 결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내기 어렵다. 전쟁을 외면하거나 어설픈 세상과의 평화에 속으면 안 된다. 구원받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에 합당하게, 그 나라 백성답게 이 세상 나라 속에서 오롯이 살아내야 한다. 이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새번역)라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험한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먹는 양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고, 우리 삶의 모습을 광야 생활에 빗댄다. 삶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통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고 깨지는 자존감을 꼭 부여잡고 살아내는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세상살이가 광야살이다. 그런데 세상살이는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살이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 세상살이는 먹고살기 위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을 먹고 산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결국 떡을 쟁취하는 세상살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세상살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7절)…… 1928년 시리아의 우가릿(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법률, 경제생활이 담긴 점토판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연대 측정 결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의 시기로 밝혀지면서, 가나안 문명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점토판들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이 생생하게 드러났고,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적대시하셨는지, 그리고 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신 20:16~1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우가릿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가장 번성했던 주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들은 이미 문자 체계가 완성되어 고유 알파벳 30개를 갖추었고, 성별과 단수·복수·쌍수의 구별이 명확하며 문장 어순이 확립되어 있을 정도로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런 우가릿의 종교관은 건기와 우기의 뚜렷한 구분이 하늘의 변화에서 비롯되고, 그 하늘의 변화는 신들 간의 전쟁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 같은 가족신들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제의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문제는 그 제의가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신전 매춘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우가릿” 점토판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가나안의 문화를 이스라엘은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들였고, 자신들의 딸들을 그들에게 주어 통혼하였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빠르게 끼치는 법인데, “그러나 그들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오히려 음란하게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새번역 2:17)라는 기록이 이를 대변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나안의 악함에 밀린 것이다.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이 너무도 쉽게 악의 영향력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전쟁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답게 가나안을 새롭게 세워야 할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늘날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세상 가치에 빠르게 함몰되어 가는 힘없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적당히 세상살이와 타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영적 기개를 “나의 만족과 유익, 편리함”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이 땅의 교회가 세상에 억압받게 된 것은, 사사기의 외침에 무지했거나 세상살이와 적당히 타협하는 것에 맞선 전쟁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고 무거운 아침이 되어 버렸다……
+ 기도제목
*주님, 세상 속에 교회를 남겨 두신 목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말씀대로 살아가 보겠습니다. 영적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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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4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스라엘의 타락
[사사기 21:13-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아내를 얻지 못한 베냐민 사람 2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려고 ‘묘책’을 마련한다. 놀랍게도 그 방법은 실로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씩 붙잡아 가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출애굽 은혜와 광야의 보호하심을 기념하며 지켜야 할 절기에, 기뻐하며 춤추는 여인들을 말이다.
이 절기는 초막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대의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절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즐거이 외치며 춤추는 바로 그때, 실로의 여인들이 베냐민 청년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상식을 벗어난,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납치한 뒤에야 당사자들의 마음과 부모의 승인을 타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피하려고 마련한 극히 비상적인 방법이었기에 전례가 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비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 시대는 몰상식마저 상식이 되는 시대였다.
한편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납치당한 여인들의 아버지들을 달랜다. 지파의 멸족은 막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이렇게 납치해서라도 멸족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공동체 전체의 짐을 몇몇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렇게 멸족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베냐민 지파는 각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고통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놀랍게도 훗날 이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 에훗이 나온다(3:15).
1. 결혼으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나는 책
사사기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옷니엘과 악사의 결혼으로 시작해, 무참한 폭력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으로 끝난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약자들에게 떠넘겨지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 레위인의 첩에서 시작해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과 실로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타락한 사회가 만든 폭력의 희생자였다.
2. 누구를 위한 회복이었나 (13~18절)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13~15절). 그러나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존속’이라는 명분일 뿐, 그들의 진의는 알 길이 없다. 언약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지, 권력을 행사할 영역을 잃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태도는 ‘만용’이 아니라 ‘수용’인 듯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평하기보다, 내 죄가 자초한 결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여인의 수가 아직 부족했지만, 장로들은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그것을 어기면 화를 당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변명한다(16~18절).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희생할 의지가 없었다.
베냐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때늦은 행동들을 보라. 한 지파를 향한 사랑을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강제로 잡아 온 처녀 400명을 베냐민에게 보내고 평화를 선포했다. 그 와중에 고통당한 수많은 여인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베냐민을 지나치게 응징한 데 대한 후회는 있었지만, 야베스 길르앗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무슨 평화 선포인가.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하나도 없다. 회개와 반성은커녕, 수습한다며 하는 일이 또 다른 살육과 진멸, 납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3. 절기를 이용한 납치 계획 (19~24절)
부족한 신부 200명을 구하려는 이스라엘의 묘안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첫 해결책이 실패하자 장로들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계획을 추진한다.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묵인하고 편법을 자행한다. 그들의 영적·도덕적 무감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들의 묘안을 이루려고 여호와의 절기까지 이용한다. 실로의 처녀들이 명절을 지키러 나올 때 납치하도록 사주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은혜를 베풀라”고 말하라고 일러 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로의 처녀들을 대속물로 내준 일은, 레위인이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첩을 내준 일과 무엇이 다른가?
4. 사사기의 결론 (25절)
25절은 사사기의 결론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풀면 이렇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말씀이 없으면 죄는 실수로 바뀌고, 통회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로 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에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행했다. 누구도 남을 판단하거나 응징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깊게 할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 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내놓은 처방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전통과 꾀로 해결하려 하니 자꾸 빈틈이 생겼다. 조금만 고민하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생각과 계획을 다졌다면 금세 알아챘을 텐데, 꽉 막힌 생각과 시선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수렁에 빠졌다. 죄가 반복되고 가중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외면한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소견이 난무하니 악영향이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부대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기리시탄(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상당수가 루터교 성도였지만 나치의 광기를 막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조선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침묵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가?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의 평범성”에 젖어 든다. 악은 몇몇 악인이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눈앞의 악행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저항하지 않을 때, 그것은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거나 깨닫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조차 하지 않으니, 총회에서 결정한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주저 없이 행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악의 평범성”이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꼬인 상황 속에서 내놓은 고육지책은 가장 합리적이고 탁월한 묘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후세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혜안 없는 고통의 결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절기는 초막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대의 처녀들이 춤을 출 수 있었던 절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즐거이 외치며 춤추는 바로 그때, 실로의 여인들이 베냐민 청년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상식을 벗어난,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납치한 뒤에야 당사자들의 마음과 부모의 승인을 타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피하려고 마련한 극히 비상적인 방법이었기에 전례가 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이방 민족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비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 시대는 몰상식마저 상식이 되는 시대였다.
한편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납치당한 여인들의 아버지들을 달랜다. 지파의 멸족은 막아야 하는데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이렇게 납치해서라도 멸족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공동체 전체의 짐을 몇몇 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렇게 멸족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난 베냐민 지파는 각자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고통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 했다. 놀랍게도 훗날 이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 에훗이 나온다(3:15).
1. 결혼으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나는 책
사사기는 부모의 축복 속에 이루어진 옷니엘과 악사의 결혼으로 시작해, 무참한 폭력 속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으로 끝난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한 사회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약자들에게 떠넘겨지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가장 큰 희생을 당한다. 레위인의 첩에서 시작해 야베스 길르앗의 여인들과 실로의 여인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타락한 사회가 만든 폭력의 희생자였다.
2. 누구를 위한 회복이었나 (13~18절)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13~15절). 그러나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존속’이라는 명분일 뿐, 그들의 진의는 알 길이 없다. 언약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인지, 권력을 행사할 영역을 잃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태도는 ‘만용’이 아니라 ‘수용’인 듯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불평하기보다, 내 죄가 자초한 결과로 여기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여인의 수가 아직 부족했지만, 장로들은 자신들의 딸은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그것을 어기면 화를 당할 것이라며 스스로를 변명한다(16~18절).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희생할 의지가 없었다.
베냐민을 향한 이스라엘의 때늦은 행동들을 보라. 한 지파를 향한 사랑을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종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강제로 잡아 온 처녀 400명을 베냐민에게 보내고 평화를 선포했다. 그 와중에 고통당한 수많은 여인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다.
베냐민을 지나치게 응징한 데 대한 후회는 있었지만, 야베스 길르앗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무슨 평화 선포인가.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고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하나도 없다. 회개와 반성은커녕, 수습한다며 하는 일이 또 다른 살육과 진멸, 납치다.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3. 절기를 이용한 납치 계획 (19~24절)
부족한 신부 200명을 구하려는 이스라엘의 묘안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첫 해결책이 실패하자 장로들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계획을 추진한다.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묵인하고 편법을 자행한다. 그들의 영적·도덕적 무감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들의 묘안을 이루려고 여호와의 절기까지 이용한다. 실로의 처녀들이 명절을 지키러 나올 때 납치하도록 사주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은혜를 베풀라”고 말하라고 일러 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로의 처녀들을 대속물로 내준 일은, 레위인이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첩을 내준 일과 무엇이 다른가?
4. 사사기의 결론 (25절)
25절은 사사기의 결론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풀면 이렇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말씀이 없으면 죄는 실수로 바뀌고, 통회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로 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았기에 자기 눈에 옳은 대로만 행했다. 누구도 남을 판단하거나 응징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죄악만 확대 재생산하고 죄질을 깊게 할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 갔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내놓은 처방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전통과 꾀로 해결하려 하니 자꾸 빈틈이 생겼다. 조금만 고민하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생각과 계획을 다졌다면 금세 알아챘을 텐데, 꽉 막힌 생각과 시선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수렁에 빠졌다. 죄가 반복되고 가중되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외면한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소견이 난무하니 악영향이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부대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기리시탄(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상당수가 루터교 성도였지만 나치의 광기를 막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조선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침묵했다.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이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가?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나 “악의 평범성”에 젖어 든다. 악은 몇몇 악인이 저지르는 것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눈앞의 악행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저항하지 않을 때, 그것은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거나 깨닫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조차 하지 않으니, 총회에서 결정한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들을 주저 없이 행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에는 “악의 평범성”이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에게, 꼬인 상황 속에서 내놓은 고육지책은 가장 합리적이고 탁월한 묘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기 그지없고, 후세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혜안 없는 고통의 결정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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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3일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폭력과 악순환
[사사기 21:1-12]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결정한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이미 크게 맹세해 두었다(5절). 그들은 기브아 사람들의 악을 처벌하는 데 무관심했고 총회의 소집을 무시한 자들이라는 이유였다. 또 하나, 그들은 같은 미스바 총회에서 ‘누구도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엄숙히 맹세했었다(1절). 전쟁을 앞두고 분노 속에 쏟아 놓은 이 두 맹세가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분노가 잦아들고 난 뒤에야 이스라엘 총회에 뉘우침이 일어났다(6절). 어쩌면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와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3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원망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들은 림몬 바위에 피해 있는 베냐민 사람 6백 명을 통해 지파를 다시 세워야 했다(6-7절). 훗날 그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다시 형제로 받아들이지만(13절), 문제는 이들 6백 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2절). 기가 막히게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딸은 줄 수 없으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성읍을 전멸시키고 처녀만 남겨 두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의 악순환”만 남을 뿐이다.
*성급하게,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멸절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전쟁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다. 두 번째 패배 후 그들은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자리에서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는 물음을 하나님께 다시 올려 드려 승리의 약속을 받았다(20:26-28). 이번에도 같은 벧엘에서 울고 같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2-4절).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는 원망만 있을 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없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인” 행위는 잘했지만, 정작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패배의 자리에서 잠시 회복되었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승리 후에는 다시 형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만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고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은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의 만행을 응징하는 데 성공하지만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다. 과도한 징벌로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한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것 때문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다(1, 7절). 그들의 과도한 징벌과 경솔한 맹세가 한 지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부주의하고 사려 깊지 못한 약속이나 맹세는 때로 후회의 단초가 되고, 나와 공동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20:26) 벧엘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한다. 원망 섞인 그들의 비통한 항의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화목제에도 여전히 침묵하신다(2~4절). 20장 28절에서 분명히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침묵하신다. 이는 ‘침묵’으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진실한 참회와 순종 없이 종교적 의식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곤경을 모면할 때만 필요한 편의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시고, 이용당하지도 않으신다.
-명령하지도 않은 진멸을 묻지도 않은 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면서도,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비열함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고 다음 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정작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울지 않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했다. 그저 번제라는 형식에 기댄 채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몰락을 막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다가 또 하나의 맹세를 기억해 낸다. 그것은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리라는 맹세였다(5~9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맹세는 글자 그대로 지키는 척하며 피해 갈 길을 찾고, ‘유리한’ 맹세는 서둘러 실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이 찾은 방책은 또 한 번의 잔인한 살상을 예고한다. 전쟁을 앞두고 결의한 두 번의 성급한 맹세는, 소중한 딸을 잃은 입다의 뼈아픈 서원(11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기들의 과오를 더 큰 과오로 해결하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한다. 12,000명의 용사를 보내 젊은 처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살육한다(10~12절). 명분을 위해 동족을 살상하는 이 잔혹한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방식이 아니었다. 철저히 가나안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신념에 함몰된 데서 오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오만이었다.
-이 잔혹한 행동에 앞서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되었다.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서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 살아남은 처녀의 수를 세어 보니 400명뿐이었다. 200명이 여전히 부족했다(14절).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했지만, 죄만 쌓고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열심은 전무하고, 오직 자기 뜻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의 열매였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이 악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길르앗 야베스 성읍에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정의로운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들이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교만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십자가를 담담히 감당하는 것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반복되는 죄악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진정한 문제는 베냐민 지파가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분노가 잦아들고 난 뒤에야 이스라엘 총회에 뉘우침이 일어났다(6절). 어쩌면 베냐민 지파의 무장한 자들만 죽였어야 했고 농부들이나 목동, 부녀와 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가 없어지게 생겼다고 대성통곡한다(2-3절). 이런 이율배반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나? 자신들이 결정하고 결행한 일의 결과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고 원망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먼저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들은 림몬 바위에 피해 있는 베냐민 사람 6백 명을 통해 지파를 다시 세워야 했다(6-7절). 훗날 그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다시 형제로 받아들이지만(13절), 문제는 이들 6백 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하는데 이미 누구도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찾은 방법은 어처구니없게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성읍을 칼날로 쳐서 “모든 남자와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고(11절)” 결혼할 수 있는 처녀 400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2절). 기가 막히게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다. 닥치는 대로 베냐민 지파를 멸절시킨 후 뒤늦게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딸은 줄 수 없으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성읍을 전멸시키고 처녀만 남겨 두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행한 삶에는 결국 “폭력의 악순환”만 남을 뿐이다.
*성급하게, 감정에 치우쳐 결정한 일 때문에 아픔과 상처만 남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묻는 지혜와 느긋함이 있어야 하겠다.
*한편으로 직면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여전히 하나님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드러나 씁쓸하다.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까지 드렸다(4절). 그러나 멸절에 가까운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앞선 전쟁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다. 두 번째 패배 후 그들은 벧엘에서 울고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자리에서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는 물음을 하나님께 다시 올려 드려 승리의 약속을 받았다(20:26-28). 이번에도 같은 벧엘에서 울고 같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2-4절).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라는 원망만 있을 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없다. 전쟁을 마친 후 부르짖고 제단을 쌓는 “종교적인” 행위는 잘했지만, 정작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패배의 자리에서 잠시 회복되었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승리 후에는 다시 형식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묻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기다리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말만 주장하고, 자기들끼리 맹세하고 되새기며, 자기들의 해결책만 찾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또 다른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것도 힘없고 연약한 성읍 하나를 주저 없이 진멸해 버린다(8-11절).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안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줄은 알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쟁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의 만행을 응징하는 데 성공하지만 새로운 위기에 직면한다. 과도한 징벌로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한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것 때문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다(1, 7절). 그들의 과도한 징벌과 경솔한 맹세가 한 지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부주의하고 사려 깊지 못한 약속이나 맹세는 때로 후회의 단초가 되고, 나와 공동체를 곤경에 빠뜨리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20:26) 벧엘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한다. 원망 섞인 그들의 비통한 항의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화목제에도 여전히 침묵하신다(2~4절). 20장 28절에서 분명히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침묵하신다. 이는 ‘침묵’으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진실한 참회와 순종 없이 종교적 의식만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곤경을 모면할 때만 필요한 편의적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시고, 이용당하지도 않으신다.
-명령하지도 않은 진멸을 묻지도 않은 채 자의적으로 단행했으면서도,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비열함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고 다음 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정작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울지 않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했다. 그저 번제라는 형식에 기댄 채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몰락을 막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다가 또 하나의 맹세를 기억해 낸다. 그것은 미스바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리라는 맹세였다(5~9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맹세는 글자 그대로 지키는 척하며 피해 갈 길을 찾고, ‘유리한’ 맹세는 서둘러 실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이 찾은 방책은 또 한 번의 잔인한 살상을 예고한다. 전쟁을 앞두고 결의한 두 번의 성급한 맹세는, 소중한 딸을 잃은 입다의 뼈아픈 서원(11장)과 다를 바 없었다. 자기들의 과오를 더 큰 과오로 해결하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응징(?)한다. 12,000명의 용사를 보내 젊은 처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살육한다(10~12절). 명분을 위해 동족을 살상하는 이 잔혹한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방식이 아니었다. 철저히 가나안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신념에 함몰된 데서 오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오만이었다.
-이 잔혹한 행동에 앞서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되었다.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서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 살아남은 처녀의 수를 세어 보니 400명뿐이었다. 200명이 여전히 부족했다(14절).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했지만, 죄만 쌓고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열심은 전무하고, 오직 자기 뜻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의 열매였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전에 이 악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위를 물었으나(20:12-13), 길르앗 야베스 성읍에게는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정의로운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대항하는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들이 동참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당연히 응징하고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식하며 무도한 백성이라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교만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십자가를 담담히 감당하는 것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것만이 반복되는 죄악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형식은 하나님과 함께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들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막으려고 또 다른 동족을 살해하는 이 무도함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낯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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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2일
베냐민 지파의 패배와 이스라엘의 비극
[사사기 20:29-48]
베냐민 지파는 처음에는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전투를 거치며 긴장은 자신감으로, 자신감은 교만으로 비약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전투에 임하면서 이스라엘 군사들을 어차피 오합지졸로 여기고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날에만 베냐민 사람 25,100명(35절, 46절에는 어림수로 25,000명)이 죽었고,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불살랐다(48절)”. 이스라엘 연합군은 앞선 두 전투에서 4만 명, 세 번째 전투에서 삼십 명가량(31, 39절)을 잃은 끝에 베냐민 지파 용사 25,000명을 죽이고 그들의 성읍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베냐민 지파에게나 이스라엘 연합군에게나 큰 상처를 남긴 전쟁이 되어 버렸다.
*같은 동족끼리의 싸움인데 이스라엘 연합군의 전쟁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냐민을 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35절), 그 심판의 도구였던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운 격이다. 승리했으나 승리를 누리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가장 막내 지파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고, 나머지 지파들도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역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특히나 내전은 더더욱 그렇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의 최대 피해를 자초했다. 자신들 지파 안에서 일어난 악행을 마땅히 책임지고 해결했어야 했다. 악행을 척결하여 정의를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정치화하여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어떤 명분이든, 어떤 정치적 이유이든 죄와 악을 두둔한 대가는 반드시 치를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다. 베냐민은 자신들의 잘남과 능력, 두 번의 승리라는 경험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더욱 키워 버렸다. 그야말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큰코다쳤다”. 나도 이를 잘 기억해야겠다.
*이스라엘 지파들도 잘한 것은 아니다. 레위인의 거짓 증언에 놀아났다. 좀 더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했어야 했다. 분별없이 동족을 서둘러 응징했고, 또한 지나치게 응징했다. 과했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런 치열한 전쟁 끝에 서로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통뿐이었다. 어느 편에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
나는?
-‘가나안화’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패자였다.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인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없게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고의적인 반항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베냐민 지파에게 채찍을 드신다. 가나안 족속을 멸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 물론 심판 중에도 자비를 잃지 않으신다(47절). 앞선 두 사건(미가와 단 지파 이야기 17~18장, 레위인과 기브아 이야기 19~21장)이 교훈하듯이, 하나님은 언약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신을 곁에 두지 않고, 이웃에게 인자와 공의를 행하며, 약자와 나그네에게 관대할 때 비로소 자기 백성이라 인정해 주실 것이다.
-자만이 ‘화’를 불렀다. 두 번의 대승으로 기세등등한 베냐민 자손은 퇴각하는 상대를 보며 승기를 잡은 줄 알고 추격한다. 하지만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고 존립 위기에 처한다(31~36절). 두 번의 승리가 그들에게는 독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유인하는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성 밖으로 나가 추격했고 무모하게 성을 비워 두었다. 이것은 ‘화'(악, 34, 4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악'(12~13절)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같은 단어로 베냐민이 두둔한 ‘악’과 그들에게 닥친 ‘화’를 함께 말한다. 내 안의 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심판의 복병을 피할 안전지대는 없다.
-오만하게 전면전을 펼치다가 성을 이용해 싸우는 베냐민에게 두 차례 패했던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번에는 매복과 유인을 함께 쓰는 양동 작전을 펴서 승리한다. 수적 우세만 믿고 섣불리 공격하던 이전과 달리, 적군의 심리(자만)를 이용하여 적을 끌어내는 전술이다. 교만이 패배를 불러왔다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낮아진 뒤(26절) 얻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28절)는 약속이 승리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시매(35절)’라는 개입이 없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싸움은 치열하고 맹렬했다(34절). 승리는 전술의 결과이기 전에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 그런데 승리한 이스라엘도 패배한 베냐민 자손도 이 전쟁의 의미(심판)를 알지 못한다. 한결같은 순종과 충성이 가나안에서의 승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언약에 충실할 때 언약의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이후다. 하나님 앞에 낮아져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도 않으셨는데 거의 전멸 수준으로 베냐민의 성읍과 가축과 사람을 쳤다(48절). 이처럼 사사 시대는 가장 선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악한 짓이 사라지지 않던 비극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진멸하지 않으신다. 이만 육천칠백 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육백 명,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넉 달 동안 숨은 자들뿐이었다(47절). 그마저도 베냐민 지파 자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수였다. 심판 중에도 살아남았다면, 자기 죄로 인해 당한 곤경을 불평하기보다 살려 주신 주권자의 섭리를 묻고 회개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두 번의 패배를 주신 분도 여호와시고, 베냐민에게 최후의 패배를 안기신 분도 여호와시다. 둘 모두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다. 레위인의 악행, 그의 말에 무분별하게 동조하여 동족을 향해 과도한 응징을 시도한 이스라엘, 자기 지파의 죄악에 눈감고 전투력만 믿었던 베냐민,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다.
*같은 동족끼리의 싸움인데 이스라엘 연합군의 전쟁 방식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냐민을 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35절), 그 심판의 도구였던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운 격이다. 승리했으나 승리를 누리지 못한 전쟁이 되었다. 가장 막내 지파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고, 나머지 지파들도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역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특히나 내전은 더더욱 그렇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의 최대 피해를 자초했다. 자신들 지파 안에서 일어난 악행을 마땅히 책임지고 해결했어야 했다. 악행을 척결하여 정의를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정치화하여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어떤 명분이든, 어떤 정치적 이유이든 죄와 악을 두둔한 대가는 반드시 치를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다. 베냐민은 자신들의 잘남과 능력, 두 번의 승리라는 경험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더욱 키워 버렸다. 그야말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큰코다쳤다”. 나도 이를 잘 기억해야겠다.
*이스라엘 지파들도 잘한 것은 아니다. 레위인의 거짓 증언에 놀아났다. 좀 더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했어야 했다. 분별없이 동족을 서둘러 응징했고, 또한 지나치게 응징했다. 과했다.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런 치열한 전쟁 끝에 서로에게 남은 것은 슬픔과 고통뿐이었다. 어느 편에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
나는?
-‘가나안화’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가 패자였다.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인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없게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고의적인 반항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베냐민 지파에게 채찍을 드신다. 가나안 족속을 멸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 물론 심판 중에도 자비를 잃지 않으신다(47절). 앞선 두 사건(미가와 단 지파 이야기 17~18장, 레위인과 기브아 이야기 19~21장)이 교훈하듯이, 하나님은 언약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신을 곁에 두지 않고, 이웃에게 인자와 공의를 행하며, 약자와 나그네에게 관대할 때 비로소 자기 백성이라 인정해 주실 것이다.
-자만이 ‘화’를 불렀다. 두 번의 대승으로 기세등등한 베냐민 자손은 퇴각하는 상대를 보며 승기를 잡은 줄 알고 추격한다. 하지만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 몰살당하고 존립 위기에 처한다(31~36절). 두 번의 승리가 그들에게는 독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유인하는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성 밖으로 나가 추격했고 무모하게 성을 비워 두었다. 이것은 ‘화'(악, 34, 41절)를 통해 베냐민 지파의 ‘악'(12~13절)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같은 단어로 베냐민이 두둔한 ‘악’과 그들에게 닥친 ‘화’를 함께 말한다. 내 안의 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심판의 복병을 피할 안전지대는 없다.
-오만하게 전면전을 펼치다가 성을 이용해 싸우는 베냐민에게 두 차례 패했던 이스라엘 연합군은, 이번에는 매복과 유인을 함께 쓰는 양동 작전을 펴서 승리한다. 수적 우세만 믿고 섣불리 공격하던 이전과 달리, 적군의 심리(자만)를 이용하여 적을 끌어내는 전술이다. 교만이 패배를 불러왔다면,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낮아진 뒤(26절) 얻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28절)는 약속이 승리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시매(35절)’라는 개입이 없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싸움은 치열하고 맹렬했다(34절). 승리는 전술의 결과이기 전에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 그런데 승리한 이스라엘도 패배한 베냐민 자손도 이 전쟁의 의미(심판)를 알지 못한다. 한결같은 순종과 충성이 가나안에서의 승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언약에 충실할 때 언약의 땅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이후다. 하나님 앞에 낮아져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도 않으셨는데 거의 전멸 수준으로 베냐민의 성읍과 가축과 사람을 쳤다(48절). 이처럼 사사 시대는 가장 선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악한 짓이 사라지지 않던 비극의 시대였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되 진멸하지 않으신다. 이만 육천칠백 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육백 명,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넉 달 동안 숨은 자들뿐이었다(47절). 그마저도 베냐민 지파 자체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수였다. 심판 중에도 살아남았다면, 자기 죄로 인해 당한 곤경을 불평하기보다 살려 주신 주권자의 섭리를 묻고 회개해야 했다.
-이스라엘에게 두 번의 패배를 주신 분도 여호와시고, 베냐민에게 최후의 패배를 안기신 분도 여호와시다. 둘 모두 하나님께 심판을 당했다. 레위인의 악행, 그의 말에 무분별하게 동조하여 동족을 향해 과도한 응징을 시도한 이스라엘, 자기 지파의 죄악에 눈감고 전투력만 믿었던 베냐민,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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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1일
이스라엘 연합군의 참패와 교훈
[사사기 20:8-28]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기브아로 진격한다. 희한한 것은 한 사람도 일방적인 레위인의 주장에 기브아 혹은 베냐민 지파의 말을 들어 보자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패역한 기브아의 불량배를 응징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편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아예 미스바로 모이지 않았다. 기브아의 불량배를 내어 놓으라는 이스라엘 연합의 요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연약한 자신들을 치려고 11지파가 연합한 것을 보고 더욱 굳은 결심으로 항전을 불사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연합은 베냐민 지파와 세 번의 전투로 충돌했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연합이 이만 이천 명을 잃었고, 두 번째는 만 팔천 명이 죽었다. 당황스러웠다. 베냐민 지파는 겨우 이만 육천 명(기브아 거민 칠백 명을 더해도 이만 육천칠백 명, 15절)이었기에 이런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1. 이해할 수 없는 참패 앞에(18, 23절)
40만 명의 이스라엘 11지파 백성들과 2만 6천 7백 명의 베냐민 지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18절)”라고 물었다. 유다가 올라가라는 말씀에 힘껏 나아갔지만 22,000명이 전사한다.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벧엘(27절)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며 다시 여쭙는다(23절)”.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싸워라”고 말씀하셨다.
*기브아의 죄악은 결코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이 범죄의 도시가 되어 버린 곳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두 번의 전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에도 모두 패배한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공명정대한 대의가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는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싸움을 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이 첫 번째 전투에서 참패하고 날이 저물도록 울부짖으며 “이 싸움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 하신 죄악에 대하여 대의를 모으고 행한 전쟁이었기에 참패의 충격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본문이 참패의 원인을 직접 지적해 주지는 않지만, 사사들의 기록들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어떤 전쟁이든 대의나 명분, 전력의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문은 참전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전력을 비슷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기록했다.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잘 싸우는 용사_새번역_17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대열을 갖추었던 그곳으로,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새번역_22절)’, ‘… 죽은 이들은 모두 칼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25절)’. 칼을 잘 쓰는 자들, 스스로 용기를 내어… 등의 표현은,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견을 구하고 참담하게 울부짖었을지라도 결국 전쟁의 과정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을 더 의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쟁의 승패는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했다. 자신들의 전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규모의 차이로 승리를 이끌어 오지 못함을 첫 번째 참패 이후 곧바로 깨달아야 했다. 숫자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일이 기브아의 죄악이나 이를 두둔하는 베냐민 지파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레위인의 당혹스러운 타락 생활이나, 그의 말 한마디에 섣불리 동족을 원수 취급하는 저급한 공동체 의식,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고 있었을 우상숭배와 각종 범죄들,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단 지파의 상상하지 못할 우상숭배의 전횡이나 에브라임의 미가가 보인 참담한 도덕 수준과 우상숭배를 생각해 보라. 과연 미가나 단 지파만 독특하게 그런 일을 벌였을까?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한 정서가 이스라엘 온 지파들에게 만연했기에 오히려 잠잠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레위인의 선동에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며 마치 자신들은 온전히 깨끗하고 기브아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는 척결해야 할 혐오스러운 범죄자들이라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꿰뚫고 계셨다.
*결국 지나친 이기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2. 베냐민 지파의 태도(12-16절)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기브아의 불량배를 내놓으라고 할 때 순순히 협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불의하고 패역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용납하고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11지파가 왜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응징하려는지 그 진위를 들어 보았어야 했다. 이런 소문일수록 재빨리 퍼지는 속성이 있으니, 좀 더 신속하게 움직여서 회개와 반성의 몸짓을 보여 주었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왜 이렇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베냐민 지파는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뼈를 깎는 심정으로 참회하기보다 소수의 범죄자들과 한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다. 다른 지파들이 자기 지파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다.
더구나 싸움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뽑힌 칠백 명 왼손잡이들은, 무릿매로 돌을 던져 머리카락도 빗나가지 않고 맞히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16절)” 이런 자신감 때문에 공멸의 길로 들어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민감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에 민감하였다. 자신의 죄를 자존심의 상처로 포장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결국 심판받는다.
나는?
-섣부른 전쟁을 결의했다. 레위인의 자기 반성 없는 오기 어린 고발과 선동뿐인 발언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은 채 전쟁을 결의한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그토록 몸을 사리던 이스라엘이 약한 동족의 잘못을 응징하는 데는 지나치게 용감하다. 이런 비겁함이 또 있을까.
-레위인의 진술을 들은 이스라엘 총회는 기브아인들의 악행을 처벌하기로 결정한다(8~11절). ‘외세의 침입’에선 소극적으로 방어하던 자들이 ‘형제의 범죄’에서는 의분을 삭이지 못한다. 비극적 결말을 내다보지 못한 지극히 충동적인 판단이다.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황은 지혜로운 왕이 부재한(21:25) 한계와 현실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인도와 뜻보다 앞서는 섣부른 결정과 행동은 또 하나의 기만이자 오만이다.
-한편 기브아 비류들의 악행을 전해 듣고 그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베냐민 지파는 거절한다. 그 대신 그들도 전쟁을 결정한다(12~17절). 힘만 있으면 선악도 정의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들에게는 물매로 돌을 던질 수 있는 7백 명의 왼손잡이 용사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자기 지파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악행자들을 처단하여 공동체 안에 공의를 세우려는 의지를 꺾는다. 베냐민 지파의 독단적인 행태는 원칙도 명분도 없이 지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뭉치고 흩어지기를 거듭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의 이기적인 삶이 가져온 관계의 균열이나 붕괴는 없는지 돌아보라. 불의한 일임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없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유다는 하나님께 전쟁에 대하여 묻는다. 하지만 누가 올라갈지를 물었을 뿐 전쟁을 원하시는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가르쳐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 도움 없이도 객관적 전력상 베냐민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차례나 패하고 만다. 하나님이 지게 만드신 것이다. 베냐민이 심판받기 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심판받아야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베냐민이나 레위인이나 기브아나 이스라엘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400,000명 vs 26,700명…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싸움… 두 번의 결전은 의외로 이스라엘 400,000명의 참패였다. 22,000명, 18,000명 전사… 반면에 베냐민 지파의 피해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를 열어 의사 결정을 하고, 개전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참패 이후 벧엘로 올라가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었고(23절)”, 두 번째 참패 이후에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 울었다(26절).
-새번역은 이 장면을 두 번이나 “주님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두 울음은 같은 울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허락하신 전쟁에서 이어진 참패를 놓고 터져 나온 이 울음이 과연 어떤 울음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울음(23절)은 회개와 참회의 통곡이 아니었다. 황당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다. 그들은 울고 나서 곧바로 “다시 싸워도 됩니까?”를 묻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의 대열로 다시 나아간다(22절). 울음은 있었지만 돌이킴은 없었다. 그들은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약한 베냐민 지파에게 참패당하여 분하고 억울해서 통곡해서는 안 됐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전진한 전쟁이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참패 앞에 분노한 통곡이어서는 안 됐다.
-두 번째 울음(26절)은 달랐다. 이번에는 “온 백성”이 벧엘로 올라가 울고, 그 자리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형제의 죄를 통한히 여기며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눈물이다. 자신들의 오랜 반역을 시인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구하며, 이 사태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억울함의 울음이 참회의 울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대답이 달라진다. 18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은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금식과 제사가 드려진 뒤 28절에서는 처음으로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고 승리를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싸움’을 허락하셨지만 ‘승리’를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승인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전력’이 아니라 ‘관계(26절)’였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임을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때로 고통스러운 실패는 기고만장하던 나를 낮추고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작은 실패를 통해 내 허물을 드러내시고 더 큰 실패를 막아 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두고 통곡해야 했을까? 레위인이 첩을 두었고, 불량배들이 약자를 능욕하며, 그렇게 죽어간(죽인) 시체를 토막 내어 거짓으로 포장하여 이스라엘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자신들의 완악함에 통곡하며 참회했어야 했다.
-레위인이 자신의 체면이나 정의로움(?)을 입증하려고, 거짓으로 정의를 포장하기 위해 총회 앞에서 거짓 증언을 서슴지 않는 “자기 소견에 지나치게 치우친”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했어야 했다.
-이스라엘 지파의 연합군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인 양 칼을 빼기 전에,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의 모습을 자기 자신들에게 대입해 보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치우치며 범죄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통회했어야 했다.
이스라엘 연합은 베냐민 지파와 세 번의 전투로 충돌했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연합이 이만 이천 명을 잃었고, 두 번째는 만 팔천 명이 죽었다. 당황스러웠다. 베냐민 지파는 겨우 이만 육천 명(기브아 거민 칠백 명을 더해도 이만 육천칠백 명, 15절)이었기에 이런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통곡이 그치지 않았다.
1. 이해할 수 없는 참패 앞에(18, 23절)
40만 명의 이스라엘 11지파 백성들과 2만 6천 7백 명의 베냐민 지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18절)”라고 물었다. 유다가 올라가라는 말씀에 힘껏 나아갔지만 22,000명이 전사한다.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벧엘(27절)로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며 다시 여쭙는다(23절)”.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싸워라”고 말씀하셨다.
*기브아의 죄악은 결코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이 범죄의 도시가 되어 버린 곳을 하나님이 심판하셔야 했다. 그런데 두 번의 전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음에도 모두 패배한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공명정대한 대의가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 지파는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싸움을 한 것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이 첫 번째 전투에서 참패하고 날이 저물도록 울부짖으며 “이 싸움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멸하라 하신 죄악에 대하여 대의를 모으고 행한 전쟁이었기에 참패의 충격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본문이 참패의 원인을 직접 지적해 주지는 않지만, 사사들의 기록들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어떤 전쟁이든 대의나 명분, 전력의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문은 참전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전력을 비슷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기록했다.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잘 싸우는 용사_새번역_17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대열을 갖추었던 그곳으로,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새번역_22절)’, ‘… 죽은 이들은 모두 칼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25절)’. 칼을 잘 쓰는 자들, 스스로 용기를 내어… 등의 표현은,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견을 구하고 참담하게 울부짖었을지라도 결국 전쟁의 과정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의 힘을 더 의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쟁의 승패는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야 했다. 자신들의 전력이 아무리 크더라도 규모의 차이로 승리를 이끌어 오지 못함을 첫 번째 참패 이후 곧바로 깨달아야 했다. 숫자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전쟁이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일이 기브아의 죄악이나 이를 두둔하는 베냐민 지파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레위인의 당혹스러운 타락 생활이나, 그의 말 한마디에 섣불리 동족을 원수 취급하는 저급한 공동체 의식,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고 있었을 우상숭배와 각종 범죄들,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단 지파의 상상하지 못할 우상숭배의 전횡이나 에브라임의 미가가 보인 참담한 도덕 수준과 우상숭배를 생각해 보라. 과연 미가나 단 지파만 독특하게 그런 일을 벌였을까?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한 정서가 이스라엘 온 지파들에게 만연했기에 오히려 잠잠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레위인의 선동에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없었다”며 마치 자신들은 온전히 깨끗하고 기브아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는 척결해야 할 혐오스러운 범죄자들이라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꿰뚫고 계셨다.
*결국 지나친 이기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2. 베냐민 지파의 태도(12-16절)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기브아의 불량배를 내놓으라고 할 때 순순히 협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불의하고 패역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용납하고 편을 들어 주고 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11지파가 왜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응징하려는지 그 진위를 들어 보았어야 했다. 이런 소문일수록 재빨리 퍼지는 속성이 있으니, 좀 더 신속하게 움직여서 회개와 반성의 몸짓을 보여 주었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왜 이렇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베냐민 지파는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뼈를 깎는 심정으로 참회하기보다 소수의 범죄자들과 한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삐뚤어진 마음이 문제였다. 다른 지파들이 자기 지파의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다.
더구나 싸움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 모든 사람 가운데서 뽑힌 칠백 명 왼손잡이들은, 무릿매로 돌을 던져 머리카락도 빗나가지 않고 맞히는 사람들이었다.(새번역_16절)” 이런 자신감 때문에 공멸의 길로 들어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민감한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에 민감하였다. 자신의 죄를 자존심의 상처로 포장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결국 심판받는다.
나는?
-섣부른 전쟁을 결의했다. 레위인의 자기 반성 없는 오기 어린 고발과 선동뿐인 발언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은 채 전쟁을 결의한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는 그토록 몸을 사리던 이스라엘이 약한 동족의 잘못을 응징하는 데는 지나치게 용감하다. 이런 비겁함이 또 있을까.
-레위인의 진술을 들은 이스라엘 총회는 기브아인들의 악행을 처벌하기로 결정한다(8~11절). ‘외세의 침입’에선 소극적으로 방어하던 자들이 ‘형제의 범죄’에서는 의분을 삭이지 못한다. 비극적 결말을 내다보지 못한 지극히 충동적인 판단이다.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이스라엘의 상황은 지혜로운 왕이 부재한(21:25) 한계와 현실을 보여 준다. 주님의 인도와 뜻보다 앞서는 섣부른 결정과 행동은 또 하나의 기만이자 오만이다.
-한편 기브아 비류들의 악행을 전해 듣고 그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베냐민 지파는 거절한다. 그 대신 그들도 전쟁을 결정한다(12~17절). 힘만 있으면 선악도 정의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들에게는 물매로 돌을 던질 수 있는 7백 명의 왼손잡이 용사들이 있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자기 지파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악행자들을 처단하여 공동체 안에 공의를 세우려는 의지를 꺾는다. 베냐민 지파의 독단적인 행태는 원칙도 명분도 없이 지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뭉치고 흩어지기를 거듭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의 이기적인 삶이 가져온 관계의 균열이나 붕괴는 없는지 돌아보라. 불의한 일임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없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유다는 하나님께 전쟁에 대하여 묻는다. 하지만 누가 올라갈지를 물었을 뿐 전쟁을 원하시는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가르쳐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 도움 없이도 객관적 전력상 베냐민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차례나 패하고 만다. 하나님이 지게 만드신 것이다. 베냐민이 심판받기 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심판받아야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베냐민이나 레위인이나 기브아나 이스라엘이나 오십보백보 아닌가!
-400,000명 vs 26,700명…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싸움… 두 번의 결전은 의외로 이스라엘 400,000명의 참패였다. 22,000명, 18,000명 전사… 반면에 베냐민 지파의 피해 상황은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를 열어 의사 결정을 하고, 개전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번째 참패 이후 벧엘로 올라가 “날이 저물도록 목놓아 울었고(23절)”, 두 번째 참패 이후에도 다시 벧엘로 올라가 울었다(26절).
-새번역은 이 장면을 두 번이나 “주님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두 울음은 같은 울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라 허락하신 전쟁에서 이어진 참패를 놓고 터져 나온 이 울음이 과연 어떤 울음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울음(23절)은 회개와 참회의 통곡이 아니었다. 황당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터져 나온 울음이었다. 그들은 울고 나서 곧바로 “다시 싸워도 됩니까?”를 묻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의 대열로 다시 나아간다(22절). 울음은 있었지만 돌이킴은 없었다. 그들은 보기에 보잘 것 없이 약한 베냐민 지파에게 참패당하여 분하고 억울해서 통곡해서는 안 됐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전진한 전쟁이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참패 앞에 분노한 통곡이어서는 안 됐다.
-두 번째 울음(26절)은 달랐다. 이번에는 “온 백성”이 벧엘로 올라가 울고, 그 자리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형제의 죄를 통한히 여기며 동시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눈물이다. 자신들의 오랜 반역을 시인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구하며, 이 사태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억울함의 울음이 참회의 울음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대답이 달라진다. 18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은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그러나 금식과 제사가 드려진 뒤 28절에서는 처음으로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고 승리를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싸움’을 허락하셨지만 ‘승리’를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승인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전력’이 아니라 ‘관계(26절)’였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임을 본문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때로 고통스러운 실패는 기고만장하던 나를 낮추고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작은 실패를 통해 내 허물을 드러내시고 더 큰 실패를 막아 주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두고 통곡해야 했을까? 레위인이 첩을 두었고, 불량배들이 약자를 능욕하며, 그렇게 죽어간(죽인) 시체를 토막 내어 거짓으로 포장하여 이스라엘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는 자신들의 완악함에 통곡하며 참회했어야 했다.
-레위인이 자신의 체면이나 정의로움(?)을 입증하려고, 거짓으로 정의를 포장하기 위해 총회 앞에서 거짓 증언을 서슴지 않는 “자기 소견에 지나치게 치우친”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했어야 했다.
-이스라엘 지파의 연합군이 마치 정의의 심판자인 양 칼을 빼기 전에,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의 모습을 자기 자신들에게 대입해 보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치우치며 범죄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통회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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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0일
레위인의 왜곡된 증언과 이스라엘의 분열
[사사기 20:1-7]
레위인 첩의 토막 난 시신을 받아 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격분하여 미스바에 모였다. 그리고 레위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고 한다. 이에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고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으며,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와 함께 들려온 기브아의 소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육백 명만 남는 멸절 직전의 참극에 이른다(20:47). 이렇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1. 참으로 오랜만에 모였다!(1~2절)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 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총회로 모였다. 성경은 그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1절). 가나안 땅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까지 나아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다.
모인 수는 칼을 빼는 보병만 자그마치 40만 명이었다(2절).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미처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저마다 싸워 왔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죽였다(12:1-6).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의 트집을 부드럽게 받아 주어 그나마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8:1-3).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는 저마다 한달음에 미스바로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19:30)”라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면서,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당혹스럽기도 하다.
2. 그런데 그 레위인이…(3~7절)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낸” 일(19:25)을 꽁꽁 감춘다. 또 불량배들은 본래 레위인과 “관계하려” 하였는데(19:22),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고 말을 바꾼다(5절).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아무런 돌이킴이 없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증언이었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그의 행동은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린다. 본문은 가해자를 “불량배들”(19:22)이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이를 “기브아 사람들”(5절)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3절). 레위인은 당사자가 빠진 자리에서 그들의 해명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술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증언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갚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결국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직접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능욕을 당하게 했고,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19:28) 토막 내어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저지른 것인 양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분노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제히’ 미스바로 모인다(1~2절). 무려 40만 명이 모인다. 사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레위인이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충격적이고 기괴하였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던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웃에게로 시야를 넓히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기브아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사하고 방안을 숙의하며 잘못을 가려 징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없이 희생양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참혹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일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기도와 대안” 없는 날 선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기보다, 근본 원인을 묻고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3절). 이해당사자인 그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듯하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먼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고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야 했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의를 외면하고 공동체의 연합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13절). 이런 베냐민 지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앞세워 진실을 왜곡한다면 공의와 정의는 세워질 수 없고, 공동체도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하면 불편하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늘 모든 일에 그릇됨 없이 공평하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레위인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4~6절). 그의 설명은 대체로 사건의 전말에 부합하지만, 곳곳에 자기중심적인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 첩을 무책임하게 내어 준 일은 숨기고 자신이 받은 피해만 강조한다. 죽은 첩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과장한다. 마땅히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일인지는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또한 훼손된 시신을 보내 분노를 일으키고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도 회피한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악한 자기중심성부터 회개해야 했다. 죄악을 고발하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도 살펴야 했다.
-레위인은 의견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7절). 그러나 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으라는 꼴이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진상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다르고, 대책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결의하고(8~11절), 하나님께는 누가 먼저 올라갈지만 물었다(18절). 자기 소견만 난무하는 사회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미스바 결집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할지라도 사안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동족 간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분에 차 있을 때는 누구도 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심 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당한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정말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19:22)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외쳐 대던 그 소리를 기브아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겪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기브아 사람들은 철저히 범죄의 현장을 외면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사 시대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철저히 파괴된 시대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19:25). 첩이 당한 능욕은 자기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의 결과였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떠한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받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5:15-17), 율법을 거스른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자기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17:6; 21:25) 사사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을 뿐,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서 철저히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멸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사 시대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 저마다 judge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내세우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체한 듯하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토막 난 시신의 일부와 함께 들려온 기브아의 소식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미스바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잘못은 쏙 빼고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만 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격동하게 되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육백 명만 남는 멸절 직전의 참극에 이른다(20:47). 이렇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한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다.
1. 참으로 오랜만에 모였다!(1~2절)
레위인의 첩의 조각난 시신을 받아 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총회로 모였다. 성경은 그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고 증언한다(1절). 가나안 땅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까지 나아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이다.
모인 수는 칼을 빼는 보병만 자그마치 40만 명이었다(2절).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미처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과 저마다 싸워 왔지만, 이렇게 “일제히” 모인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밖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화합보다 분열이 더 많았다. 특히 사사 입다 때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독선에 분개한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을 죽였다(12:1-6). 기드온 때에는 에브라임의 트집을 부드럽게 받아 주어 그나마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다(8:1-3).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일에는 저마다 한달음에 미스바로 모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19:30)”라며 이 일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는 마음으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가 하나가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면서, 자기 동족을 응징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다. 당혹스럽기도 하다.
2. 그런데 그 레위인이…(3~7절)
이렇게 한달음에 모인 백성들이 레위인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레위인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기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런데 이 레위인의 증언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레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낸” 일(19:25)을 꽁꽁 감춘다. 또 불량배들은 본래 레위인과 “관계하려” 하였는데(19:22),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다고 말을 바꾼다(5절). 기브아 불량배들이 벌인 짓도 충격이지만, 이를 이스라엘에 고발하면서 시신을 토막 내어 보낸 엽기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아무런 돌이킴이 없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증언이었다. 선동하기 위해 저지른 그의 행동은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말의 돌이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베냐민 지파 전체의 책임으로 부풀린다. 본문은 가해자를 “불량배들”(19:22)이라고 하는데, 레위인은 이를 “기브아 사람들”(5절)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 무엇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채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3절). 레위인은 당사자가 빠진 자리에서 그들의 해명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술한다. 베냐민 지파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증언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갚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여 과장하고, 자신이 했던 행동은 증언에서 쏙 빼는 비열함이 그에게서 보인다. “그 날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몰려와서, 나를 해치려고, 내가 묵고 있던 집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나 대신에 내 첩을 폭행하여, 그가 죽었습니다. 내가 나의 첩의 주검을 토막 내어 이스라엘이 유산으로 받은 모든 지역으로 보낸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새번역_5-6절)”
*이기적인 비열함이 결국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비극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합당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르짖는 레위인의 가식에 화가 난다. 자신이 직접 첩을 “붙들어 끌어내어” 능욕을 당하게 했고,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그녀를 차갑게 나귀에 싣고 돌아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19:28) 토막 내어 이스라엘에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듯이 말한다.
*자신의 비열한 행동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한 짓은 마치 베냐민 지파 전체가 저지른 것인 양 매도하는 그의 언어가 큰 화를 앞당겼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이렇다면 그 시대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베냐민 지파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고만 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둘러 이스라엘 지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그의 위선적인 언행에 분노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제히’ 미스바로 모인다(1~2절). 무려 40만 명이 모인다. 사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레위인이 메시지를 전달한 방식은 충격적이고 기괴하였다. 무엇보다 이처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는 여호와 앞에 서지 않던 자들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강한 자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웃에게로 시야를 넓히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기브아 사건’은 온 이스라엘을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건을 조사하고 방안을 숙의하며 잘못을 가려 징벌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없이 희생양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참혹한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담한 일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기도와 대안” 없는 날 선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기보다, 근본 원인을 묻고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는다(3절). 이해당사자인 그들은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는 듯하다. 비겁하기 짝이 없다. 먼저 나서서 진상을 조사하고 잘못한 자들을 처벌해야 했지만,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의를 외면하고 공동체의 연합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이 불량배들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13절). 이런 베냐민 지파의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사적인 관계나 이익을 앞세워 진실을 왜곡한다면 공의와 정의는 세워질 수 없고, 공동체도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실하면 불편하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늘 모든 일에 그릇됨 없이 공평하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레위인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며 억울함을 토로한다(4~6절). 그의 설명은 대체로 사건의 전말에 부합하지만, 곳곳에 자기중심적인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다. 첩을 무책임하게 내어 준 일은 숨기고 자신이 받은 피해만 강조한다. 죽은 첩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소행을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문제로 과장한다. 마땅히 응징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이 전쟁으로까지 비화할 일인지는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또한 훼손된 시신을 보내 분노를 일으키고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판단도 회피한다. 정의로운 판단을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살피고 악한 자기중심성부터 회개해야 했다. 죄악을 고발하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도 살펴야 했다.
-레위인은 의견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7절). 그러나 그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동의하기 어렵다. 속된 말로, 자기가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믿으라는 꼴이다. 사태가 심각할수록 진상을 신중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입장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다르고, 대책도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0만 명이 모인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전쟁을 결의하고(8~11절), 하나님께는 누가 먼저 올라갈지만 물었다(18절). 자기 소견만 난무하는 사회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미스바 결집이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할지라도 사안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동족 간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공분에 차 있을 때는 누구도 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사심 없이 공동체의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모두가 공범이다. 그날 밤 레위인의 첩이 밤새 능욕당한 일을 기브아 주민들은 정말 몰랐을까?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19:22)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외쳐 대던 그 소리를 기브아 주민들이 과연 몰랐을까?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이전부터 겪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기브아 사람들은 철저히 범죄의 현장을 외면했다. 자기만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사사 시대는 이렇게 공동체성이 철저히 파괴된 시대였다.
-레위인은 자신이 욕볼까 두려워 힘없는 첩을 붙잡아 불량배들에게 끌어내 주었다(19:25). 첩이 당한 능욕은 자기 안전을 위해 저지른 비겁한 짓의 결과였다. 진정한 주범은 레위인이다.
-또 이스라엘 지파들은 어떠한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을 받는 지파에게는 무관심하더니(5:15-17), 율법을 거스른 불량배들의 죄는 심판하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마치 자기는 의인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들은 의인이고 그들은 악인이라는 지극히 위험한 이분법적 시각으로 모여든다.
-자기 의견만이 정도와 진리가 되던(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17:6; 21:25) 사사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조차 형식적인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기브아 불량배들의 범죄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었을 뿐, 자신들의 연약함을 돌아보게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서 철저히 멀어져 있었다.
-오늘날 자신의 입장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판단자(judge)가 되어 힘을 모아 동족을 멸하는 결정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사 시대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없는 뉴스까지 만들어 저마다 judge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더 이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참담하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모습일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연대하여 내세우는 것들이 진리의 말씀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난 분열과 폭력이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둔갑시켜 휘두른다. 아, 사사기 묵상이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체한 듯하다.
-레위인의 비열함이 이 시대 지도자들의 비열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비열함에 휘둘리는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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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09일
기브아의 비극과 노인과 레위인의 잔혹함
[사사기 19:22-30]
17-19장은 왕이 없던 무정부 상태에서 일어난 비극적 일화를 연이어 소개한다. 17-18장이 제사장의 사유화, 곧 생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제사장의 영적 탈선을 고발했다면, 19장은 레위인 제사장의 도덕적 탈선과 잔혹함을 고발한다. 레위인의 도덕적 탈선은 19장 초반부에서 다루었고, 본문은 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던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친다. 입에 담기조차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인이 이방인의 성읍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 수준뿐 아니라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는 흔히 무엇에도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멋대로 사는 자들, 곧 무가치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하신 ‘동성 간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이다. 이들의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의 ‘그 성읍의 불량배들’은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된 ‘사람’은 ‘이쉬’의 복수형인 ‘안셰’인데, 이 단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뜻하는 ‘에노쉬’와 같은 어근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은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방탕한 무리인지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멋대로’ 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들)가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 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를 먼저 점잖게 타이른다(23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인다. 레위인 대신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는 것이다.
레위인은 한술 더 뜬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25절), 첩을 강제로 불량배들에게 넘겨 버린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하다가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멈춘다.
노인과 레위인은 모두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 했고, 레위인은 실제로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당시 세계관에 따라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고 치더라도, 자기가 살겠다고 첩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낸 레위인의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레위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아온 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와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마저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 왜곡된 ‘환대법’에는 생명 존중도, 여성의 인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예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3. 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지만, 분노는 더욱 끓어오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낸 가련한 여인은, 강제로 “붙잡혀 끌려나간” 그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에야 풀려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 앞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는 동안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했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 준 첩에 대한 걱정을 찾아볼 수 없다. 첩을 내어 주고 확보한 안전 속에서 그가 편히 자는 동안, 그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이르러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고 증언한다(26절).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던 레위인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보고도 너무나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한다(28절). 그리고 그녀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로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로 끝날 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70인역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개역개정도 이 해석을 따라 ‘시체’로 번역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이 겪은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 둔다.
더구나 29절에서 “거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하자크)는 25절에서 첩을 “붙잡아”로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밤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쳐진 채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편에게 붙들려 그의 손에 능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원문을 따라 읽으면, 레위인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해 탈진한 그녀를 죽이고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에 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지난밤 당한 불명예를 복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레위인이 원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에 대한 복수였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인을 요구한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에 불과했다. 레위인은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폭행’을 당한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그곳은 소돔과 다를 바 없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12절), 그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23-24절). 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을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마저 그 성읍의 가치관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았다. 기브아 사건이 보여 주는 실태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노인의 시각과 태도도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비류들의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딸과 아내가 이 노인에게는 남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희생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나 양상만 다를 뿐, 불량배나 노인 모두 강자의 횡포와 갑질을 정당화하는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인은 강제로 자신의 첩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기브아의 비류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폭행했고, 그녀는 간신히 집까지 이르렀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지방에 손을 걸친 채 쓰러진다.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인다.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25-28절). 비겁하고 비정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 그가 속한 땅이 정결해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도리어 이 참극의 방관자이자 주범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이다.
-레위인은 첩의 몸을 쪼개(삼상 11:7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린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이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몰두해 행동하는 레위인의 비열한 모습이 충격적이다. 그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니 비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양만 다를 뿐 무수한 예가 이미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자기 본능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땅이 아니라,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찾아온 이가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었기에 이 잔악한 일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기브아를 찾은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일이었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악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과 레위인, 불량배들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악했다. 레위인의 첩이 비극적으로 죽은 책임은 불량배들에게만 있지 않다. 노인과 레위인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할 때 그 책임을 불량배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노인은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마저 서슴없이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다.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몸을 열두 덩이로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도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가련한 여인의 몸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 철저히 짓밟히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과 명분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악인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친절한 노인의 환대로 즐거운 저녁을 보내던 레위인 일행에게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친다. 입에 담기조차 충격적인 사건이 펼쳐진다. 레위인이 이방인의 성읍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안전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따뜻한 환대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했다. 환대하는 동족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충격적인 고통을 당했다.
레위인에게 극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그에게서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도덕적 수준이 드러난다. 그의 민낯이 드러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 수준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도덕적 수준뿐 아니라 그의 심성도 여지없이 까발려진다. 그의 마음이 이토록 차갑다니. 냉대한 기브아 주민들이나 몹쓸 짓을 저지른 기브아의 불량배들과 다를 바 없는 레위인의 도덕 수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오늘날 나와 같은 목회자들 가운데 이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그 성읍의 불량배들(22절)
‘불량배’는 흔히 무엇에도 속박되기 싫어하여 제멋대로 사는 자들, 곧 무가치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모습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왕 되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는 이처럼 속절없이 타락한다. 기브아의 타락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로 심판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심판밖에 남은 것이 없지 않은가?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환대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하신 ‘동성 간의 성관계'(레 18:22; 20:13), 그리고 잔인한 집단 성폭력이다. 이들의 죄악상을 설명이라도 하듯, 히브리어 원문의 ‘그 성읍의 불량배들’은 ‘그 성읍의 사람들, 곧 벨리알의 아들들인 사람들’로 직역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 반복된 ‘사람’은 ‘이쉬’의 복수형인 ‘안셰’인데, 이 단어를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을 뜻하는 ‘에노쉬’와 같은 어근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은 이 불량배들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방탕한 무리인지를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다.
모세는 ‘제멋대로’ 살며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들에게 돌리게 하는 이런 ‘불량배'(벨리알의 아들들)가 일어나거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신 13:13-16).
2. 노인과 레위인(23-29절)
기브아 성문 광장에서 레위인 일행을 맞아들인 노인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나마 말씀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치자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는 레위인을 ‘상관’하겠다며 거칠게 위협하는 무리를 먼저 점잖게 타이른다(23절).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덧붙인다. 레위인 대신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줄 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24절)는 것이다.
레위인은 한술 더 뜬다. 노인의 제안에도 불량배들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25절), 첩을 강제로 불량배들에게 넘겨 버린다. 불량배들은 밤새도록 몹쓸 짓을 하다가 새벽 미명이 되어서야 악행을 멈춘다.
노인과 레위인은 모두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딸과 첩을 소유물처럼 거래하듯 넘기려 했고, 레위인은 실제로 강제로 넘겼다. “붙잡아…끌어내매”(25절). 노인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당시 세계관에 따라 자기 집에 든 손님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고 치더라도, 자기가 살겠다고 첩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낸 레위인의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의지해야 할 아버지, 의지해야 할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그 시대 여인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기막힌 일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시대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 통치를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레위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해박하게 알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아온 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과 무력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의 무력함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와 안위를 위해 첩을 방패막이로 내세운 비열함이었다. 노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마저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 왜곡된 ‘환대법’에는 생명 존중도, 여성의 인권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명예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극악한 이기심을 보게 되는 사건이다.
3. 악몽의 밤이 지나고… 더 큰 악몽이 시작되다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본문을 읽어 내려가지만, 분노는 더욱 끓어오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밤을 보낸 가련한 여인은, 강제로 “붙잡혀 끌려나간” 그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에야 풀려났다. 완전히 탈진한 몸을 겨우 끌고 노인의 집 앞까지 왔지만, 감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음은 치욕스러워 레위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첩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하는 동안 레위인은 ‘편히’ 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려 했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강제로 내어 준 첩에 대한 걱정을 찾아볼 수 없다. 첩을 내어 주고 확보한 안전 속에서 그가 편히 자는 동안, 그의 첩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마음이 먹먹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밤새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 겨우 집 앞에 이르러 날이 밝기까지 엎드러져 있었다고 증언한다(26절).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던 레위인은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보고도 너무나 차갑게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했고, 아무 대답이 없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한다(28절). 그리고 그녀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다(29절).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의 시체’로 번역된 부분에 ‘시체’라는 단어가 없다. 원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로 끝날 뿐,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70인역이 ‘그녀가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덧붙였고, 개역개정도 이 해석을 따라 ‘시체’로 번역한 것이다. 충격적이다. 사사기 저자는 레위인의 첩이 겪은 악몽이 날이 밝으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비극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을 감추지 않는다. 그녀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그대로 열어 둔다.
더구나 29절에서 “거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하자크)는 25절에서 첩을 “붙잡아”로 번역된 단어와 똑같다. 이 가련한 여인은 지난밤 남편에게 강제로 붙들려 내팽개쳐진 채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했고, 날이 밝아 가장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남편에게 붙들려 그의 손에 능욕의 대상이 되고 만다.
원문을 따라 읽으면, 레위인이 밤새 몹쓸 짓을 당해 탈진한 그녀를 죽이고 열두 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에 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지난밤 당한 불명예를 복수하려 한다. 겉으로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을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레위인이 원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뿐 아니라 베냐민 지파 전체에 대한 복수였다.
가련한 여인은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즐거움도 잠시, 성읍의 불량배들이 들이닥쳐 레위인을 요구한다(22절). 그들에게 레위인 일행은 섬겨야 할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울 ‘대상’에 불과했다. 레위인은 ‘환대’를 기대한 곳에서 ‘폭행’을 당한다. 이방 성읍을 피해 이스라엘 지경으로 왔는데, 그곳은 소돔과 다를 바 없었다. 부정한 가나안 백성의 삶을 답습하는, 이방인보다 더 악한 이스라엘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지만(12절), 그에 걸맞은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량배들의 요구에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한다(23-24절). 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지만, 악을 악으로 막으려는 어리석은 타협에 불과하다. 또한 이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노인마저 그 성읍의 가치관에 얼마나 물들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법을 집행할 체제가 무너지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21:25). 말씀의 부재가 ‘가치의 혼돈’과 ‘윤리의 실종’을 낳았다. 기브아 사건이 보여 주는 실태를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불의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노인의 시각과 태도도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비류들의 악행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남자들이 보호해야 할 딸과 아내가 이 노인에게는 남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희생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정도의 차이나 양상만 다를 뿐, 불량배나 노인 모두 강자의 횡포와 갑질을 정당화하는 가나안 문화에 젖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레위인은 강제로 자신의 첩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 버린다. 기브아의 비류들은 밤새 레위인의 첩을 폭행했고, 그녀는 간신히 집까지 이르렀지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문지방에 손을 걸친 채 쓰러진다.
-밤새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인은 새벽에야 악한 무리에게서 놓인다. 첩을 비류들에게 넘겨주고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레위인은 첩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간다(25-28절). 비겁하고 비정하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구별된 레위인을 통해 그가 속한 땅이 정결해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는 도리어 이 참극의 방관자이자 주범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말은 언약을 배반하고 망령된 행위도 서슴지 않은 가증한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경종일 것이다.
-레위인은 첩의 몸을 쪼개(삼상 11:7 참조)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이 잔혹한 사건을 알린다(29-30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신앙의 타락(17-18장)에 이어 윤리의 추락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이 총체적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의 가련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철저히 자기 이익에 몰두해 행동하는 레위인의 비열한 모습이 충격적이다. 그는 냉혈한이었다. 그러니 비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약자 중의 약자를 사지로 내모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양만 다를 뿐 무수한 예가 이미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자기 본능을 채우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도 이미 넘치고 넘친다. 이런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사명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일이 기브아에서 벌어졌다. 가나안 땅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땅이 아니라, 이미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찾아온 이가 천사가 아니라 레위인 일행이었기에 이 잔악한 일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전대미문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기브아를 찾은 레위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일이었겠지만,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도 그랬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악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기브아는 이미 소돔이었고, 고모라였다.
-노인과 레위인, 불량배들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악했다. 레위인의 첩이 비극적으로 죽은 책임은 불량배들에게만 있지 않다. 노인과 레위인에게도 분명히 책임이 있다. 기브아의 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할 때 그 책임을 불량배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노인은 겉으로는 환대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롯이 두 딸을 내어 주겠다고 흥정한 것처럼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체면을 위해 딸의 안전마저 서슴없이 내버리는 악함이 있었다. 레위인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첩을 “붙잡아… 끌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넘겼다. 불량배들은 동성 간의 관계를 요구하다가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밤새 능욕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얼마나 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레위인이 기브아에서 일어난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인의 몸을 열두 덩이로 훼손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공의를 촉구하는 행동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도 아니다. 자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 손에 죽었을지도 모를 가련한 여인의 몸을 훼손한 극악한 행동일 뿐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보다 더 악한 이가 바로 레위인이다!
-이 참담한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권이 철저히 짓밟히고, 자신의 이익과 체면과 명분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며 그것을 합리화하는 사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악인인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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