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입다의 등장과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사사기 11:1-11]
 – 2026년 09월 24일
– 2026년 09월 24일 –
10:18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 선봉으로 설 자를 찾는 장면에 이어, 갑자기 입다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여덟 번째 사사인 입다를 ‘큰 용사’, ‘기생이 낳은 아들’,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 등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그는 큰 용사로 불렸지만 기생의 아들이어서, 기업을 잇지 못하게 하려는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아서, 시간이 흘러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올 때(10:18) 길르앗 사람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강성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입다를 세우는 데 모두 동의할 정도였다. “큰 용사(힘의 용사)”라는 소개는 천사가 기드온을 부를 때 쓴 표현과 같다(6:12). 그가 누가 봐도 탁월한 용사였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1. 입다라는 인물
당시 사회적 관습의 시선으로 볼 때 입다의 약점은 ‘기생의 아들'(1절)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기에 상속 자격을 운운하며 쫓겨났다. 또 하나는 ‘잡류(건달류)’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이다(3절). 형제들에게 쫓겨나 정착한 “돕” 땅에 거주하면서 “힘”으로 살았을 것이다. 자연스레 “비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그가 “힘”, “주먹”, “칼”로 살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용사”로서의 자질이 단단히 잘못 쓰이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길르앗의 장로들이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게 된 원인은 “힘의 용사”로서 입다가 가진 명성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리더를 세우지 않는다. 족벌, 학벌, 혈연, 지연 등 인간적인 조건으로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곧 리더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은 사라지고, 입다의 이복형제들처럼 인간적인 조건으로 편을 가른다.

*입다는 하나님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과 공동체에게 버림받았다는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르앗 장로들은 처음에 입다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이끌 “장관”이 되어 달라고 제의한다(6절). 하지만 입다는 자신이 길르앗의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일을 언급하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환난을 당하니 찾아왔느냐”며 거절한다(7절). 이에 장로들은 자신들과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 요청한다(8절). 그러자 입다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를 길르앗의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라고 확인한다(9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입다 사이에 맺은 약속의 증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한다(10절). 이렇게 거래는 끝났다. 입다는 길르앗의 머리와 장관이 되었다(11절).

*그에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은 지긋지긋한 18년의 압제를 끊는 하나님의 전쟁이기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전쟁이었다. 적어도 길르앗 장로들과의 협상 초반에는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면 길르앗의 지도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장로들의 말에 요청을 수락한다. “수치스럽게 쫓겨난” 자신이 이 일로 “명예롭게” 귀향하기를 마음에 품은 듯하다.

암몬과의 전쟁에 맞서기 위해 미스바에 도착한 입다는 가장 먼저 “(돕에서 장로들과 나눈) 모든 말을 주님께 아뢰었다(새번역_11절 하).” 협상의 과정과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공증했다는 것이다. 추방당하고 이방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그를 이처럼 치밀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암몬 족속과의 전쟁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12절부터 펼쳐지는 전면전에 앞서 암몬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고증을 앞세운 외교전의 모습을 보면, 입다가 결코 힘만 앞세우는 장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암몬의 침략이 얼마나 명분 없는 억지인지를 치밀하게, 조목조목 전달한다.



2. 그런데…
입다나 길르앗 장로들이나,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참 희한하다. 암몬의 18년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우상까지 제거하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매달렸는데, 정작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그토록 부르짖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 전쟁을 이끌 적임자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머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안중에도 없던 인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가 “큰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 이력과 집안 내력, 심지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한 일도 상관없었다. 출중한 “큰 용사”로서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회의 탁자에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더니… 이게 웬… 허허허



나는?
-입다는 ‘버림받은’ 사생자, 추방자, 유랑자였다. ‘큰 용사’로 불리기에는 그의 태생과 신분이 매우 비천했다. 기생의 아들이기에 유산도 받지 못하고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 시대적 요청(10:18)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을 버린 자들의 ‘구원자’로 준비된다(1~3절). 마치 오늘날의 사회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기독교를 향한 세상의 태생적인 혐오 앞에서, 교회가 비난과 비방의 대상이 아닌 ‘대안’이 되도록 준비시키시고 이끄신다. 우리 더온누리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몬의 침략에 속수무책이던 장로들은 돕 땅의 입다를 찾아가 ‘장관직(비상임 통솔자)’을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입다가 그들이 찾아온 동기를 의심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이번에는 길르앗의 ‘머리(상임 통치자)’로 추대하겠다며 한 걸음 더 다가간다(4~8절). 정치적 약자인 입다를 충분히 이용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 처분하려던 장로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사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자 비정한 이 세상의 민낯이 아니겠나! 자기 유익을 따라 속보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값을 매기는 세상 풍조를 담대하게 거슬러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어야 하겠다.

-한편, 동족에게서 ‘버림’받은 입다가 동족에게 ‘부름’을 받는 모습에는 묘한 통쾌함이 있다. 아버지의 기업을 잇기에도 ‘부적격자’였던 그가 곤경에 빠진 동족을 구원할 ‘적임자’로 인정받은 것 자체가 역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세상에서 받는 거절과 소외가 내가 걷는 인생길의 결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이 있음을 알고 믿는다면, 남모를 상처와 상실도 또 다른 보복을 낳는 ‘가시(9:15)’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향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다의 협상력이 대단하다.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용당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의 심각한 상황을 출세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승리 이후의 지위를 법적으로, 신적으로 재가받는 데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야망만 보일 뿐, 동족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하나님을 향한 한 줌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협상에는 능했으나 야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입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에 대한 열정보다 마음의 동기를 먼저 살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하겠다.

-입다의 등장 에피소드에 담긴 당시 사회상이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생소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공정하지 않다. 출생 이력, 혈연, 지연의 고리가 견고하다. 특히 입다가 본처 소생의 형제들에게 추방당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입다에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달들”이었지만…

-사사 시대이기에 그러려니 하면 곤란하다. 이와 비슷한 불공정한 모습이 현대에도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태도와 가치, 익숙한 관습에 직면할 때 쉽게 예전의 방식대로 선택하고 결정해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먼저 묻고 확인해야 할 것이다.

-입다 아버지의 문란한 삶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입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이복형제들은 옛 가치, 세상의 가치대로 출신을 따지고 자신들의 유익을 먼저 따졌다.

-한편, 입다를 찾아온 장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힘을 겨루며 계산하는 모습은, 모양과 내용이 달랐을 뿐 입다의 이복형제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입다와 장로들의 협의 속에 하나님은 아예 없고, 오직 자신들의 입장만 반복될 뿐이다.

*피택선거를 앞두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게 본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깨우친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찾아 다니는 조건은 오로지 “힘”이었다. 그 힘이 어떤 힘이든 상관 없었다. 비류들의 힘이라도 암몬 자손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 ‘힘’있는 일꾼이 아니라,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뢰하는 일꾼을 분별하는 영적 감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투표라는 제도는 개인이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성령께서 분별하고 깨우쳐 주시는 은햬를 따라 행사하면 겉으로 보이는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일꾼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본이 되어야 할 교단 선거에서조차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추잡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입다를 찾은 길르앗 장로들과 같은 수준의 지도자들이 세워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세우는 지도자여야 하리라.

*길르앗의 장로들만 이런 모습인가? 아니다. 사사로 세움받는 입다 또한 그의 저급한 사명의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다는 장로들이 자기와 맺은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확증하려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겨 주시면”이라는 그의 고백이 왜 이리 낯설까? 그의 걸어온 삶의 흔적이 이런 고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더 비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입다의 모습에서 나도 역시 ‘주님의 뜻, 사명, 비전’ 등등의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여 결국 나의 욕심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채워가려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목사라는 이미지를 십분활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이 땅의 거짓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지 혼란스러운 사회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내 자신조차 혹하는 종교적 언어에 무조건적으로 종속하지 않고, 길고된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며 나아가리라.

*지금 한국 사회가 몇몇 언론과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 여기에 야합하는 정치인들의 콜레버가 한창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극심한 혼란이다. 실망과 분노가 판을 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실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더욱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그저 혼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무성한 말들이 오히려 더 혼탁을 부를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언어가 절제되는 지혜로운 시기여야 할 것이다.

*안식년 선교지 방문 마지막 일정으로 일본에 들어와 있다. 임장백 선교사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주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섬세한 손길을 만끽 중이다. 어제는 후쿠오카에서 “노조미가 오카 그리스도 교회(직역하면 소망의 언덕 교회)”를 섬기시는 김민구 선교사님 사역지를 방문하고 교제했다. 교토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며, 좀 더 치밀하게 동선을 구성했었더라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김민구(김수경) 선교사님을 처음뵙고 교제하며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는 감사가 넘쳤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선교사님들의 성실함이 나의 달려갈 목회 여정에도 큰 빛이 되었다. 여정과 비용에 큰 부담이 되었고 몸은 피곤하지만 참으로 후쿠오카를 방문한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내 자신에게 칭찬해주었다.

*8만이 넘는 우상의 나라, 겉으로 보이게 친절하나, 철저히 메뉴얼로 움직이기에 일말의 유연성도 허락하지 않는 일종의 차가움이 공존하는 나라…어제 하루를 보내며 이런 저런 체감이 확연하게 드는 시간들이었다. 확실히 선교지는 “가보면 안다”

*한편으로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일본의 교통비였다. 교토에서 후쿠오카 왕복 신칸센 운임은 상식을 초월했다. 웬만한 거리의 항공료를 뛰어넘었다. 말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선교사님과 대화중에 그렇게 오래도록 일본에서 사역했으나 현재 주거지 근처에만 주로 계셨다는 이유가 교통비 때문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제 하루 톡톡히 실감됐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고분분투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참으로 도전되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통체계와 비용이 참 감사했다. 철도, 대중교통은 절대로 민영화 하면 안되는 것을 실감했다.

+ 기도제목

*주님, 무엇보다,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가 후진적인 공동체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수준 높은 공동체임을 증명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개인의 야망에 빠지지 않고 좀 더 큰 시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