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사사 돌라와 야일 그리고 입다의 등장 배경 [사사기 10:1-18]
 – 2026년 09월 23일
– 2026년 09월 23일 –
아비멜렉 사후에 ‘돌라(잇사갈 지파)’가 사사로 세워져 에브라임 산간지방 사밀에서 23년 동안 활동했다. ‘야일(길르앗 사람/므낫세 지파)’은 22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고, 길르앗에 ‘하봇야일(야일의 촌락들)’을 형성하며 살았다.

그리고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기 전, 그의 출현 배경을 먼저 설명한다. 극심한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에서 시작된 암몬 족속의 억압이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까지 확대된다. 무려 18년 동안의 압제였다. “그때에야(새번역_10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며,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백성에게 신물이 나셨음을 드러내신다. “지금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부르짖고 구원해 달라고 하라(13-14절)”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장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며 “그러나 오늘만은 우리를 구출하여 주십시오(새번역_15절)”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주님만 섬기겠노라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새번역_16절).

하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변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누가 먼저 암몬과 싸우겠는가? 그 사람이 길르앗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17-18절).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으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계획으로 암몬을 물리치려 한다. 이처럼 변화는 참 어려운 것이다.



1. 점점 더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1-5절)
돌라와 야일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무난하게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역은 그렇게 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로서 과연 합당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먼저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분명한 업적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음에도 ‘에브라임 지파의 산지 사밀’에서 거주하다 그곳에 묻힌다(1-2절). 각기 지파별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분명히 있는데, 그는 왜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서, 그것도 산지에서 살았을까?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분배받은 땅을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하다.

반면 ‘야일’은 사사로서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아들 30명을 두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마리를 탔으며, 30개의 성읍(하봇야일_야일의 마을들)을 가졌다고 기록한다. 마치 기드온처럼 많은 부인을 두고, 왕이 누릴 법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암시한다. 특히 사사들 중에서 성읍을 소유하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돌라는 분배받은 기업을 떠나 살았고, 야일은 하나님의 땅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고 축재하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사”였다. 혹자는 이들의 사사로서의 업적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는 그들의 삶을 축약하면서 사사로서의 업적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더 초점을 두었을 수도 있겠다.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 특출한 업적이 없다.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장 성실하게 지켜져야 할 “가나안 땅” 분배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인이시며 어느 곳이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따라 살겠노라 선언하였던 가나안 땅 정복 전쟁 초입의 “세겜 언약”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맞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지위(직분)에 걸맞은 스스로의 기준을 따라 삶의 열매를 남겼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맺힌 열매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산다!



1. 사사 ‘입다’의 등장 배경(6-18절)
입다가 등장하는 시대는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활동하던 시기와 비교하여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먼저 언급한다. 그것은 사사기의 전형적인, 하나님을 떠난 징조인 “다시(또)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의 대상인 우상이 바알과 아스다롯에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죄는 반드시 전염되고 불어난다. 영향력은 축소되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다.

먼저 우상의 종류가 그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에 머문 것이 아니라, 아람(시리아)과 시돈(가나안 북부)의 신들, 모압과 암몬(가나안 동부), 블레셋(가나안 남서 해안) 사람의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한다. 가나안 땅을 중심에 놓고 사방의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거침없이 따라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새번역_7절)”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셨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신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런데 18년 동안 억압하고 학대당한 일을, 암몬 족속이 요단강 동쪽 길르앗 지방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한다. 블레셋의 억압은 향후 삼손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13:1).

또 암몬 족속의 억압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가나안 중앙에서 남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7-9절).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절).” “곤고(야차르)”는 “매다, 갑갑하다, 비좁다, 곤란하다”라는 뜻이다. 매우 쓰라린 고통 중에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파는 남서쪽의 블레셋과 요단 동편에서 침략하는 암몬 족속의 억압을 함께 받아 그 고통이 배나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개역개정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10절은 ‘그때에야(새번역)’로 시작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기간이 18년이나 지난 “그때에야” 부르짖었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 누린 45년의 평화 이후에 18년 동안 하나님 목전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암몬 족속에게 심한 곤고를 당한 “그때에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슬프셨다. 벌써 몇 번째인가? 너무도 괴로우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곧바로 구원을 행하시지 않는다. 출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여 주셨던 것을 먼저 상기시키신다(11-12절). 그리고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13절). 너희가 그토록 섬긴 이방 신들에게 가서 구해 달라고 하라(14절)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18년 동안 섬겨 오던 이방 신상들을 깨뜨리며 “오직 주님만 우리를 구하실 수 있으니 구해 주십시오!” 매달리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근심(고심)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15-16절).

*염치 불고하고 이 길밖에 없음을 외치며 우상을 제거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으로 둘러싼 이방 우상들을 애초에 쫓아냈어야 했다. 애초에 진멸했어야 했다. 자초한 곤고함에 하나님의 고민이 깊어 간다.



나는?
-사사 돌라와 야일은 아비멜렉의 폭정이 가져온 위기와 혼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45년 동안 안정된 통치를 이룬다(1~5절). 하지만 다른 사사들과 달리 3대에 걸쳐 돌라의 가문이 소개되고, 야일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며 성읍을 소유하는 모습은, 기드온 가문에서 대두된 ‘통치 세습’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지도자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조건에서도 자발적인 가난과 그로 인한 불편함을 자청하며, 물질이 우상이 된 이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사사 돌라가 다스릴 때 이스라엘이 누린 평화는 고작 23년이었다. 타락이 반복되고 심해질수록 그들이 누린 평화의 기간은 짧아졌다. 사사 야일은 아들 30명에 나귀 30마리, 성읍 30개를 가졌다. 그가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치 기드온 시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권력 집중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질병은 어김없이 터졌다. 여호와를 버리고 참 많은 신들을 섬겼다. 여호와는 그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파셨다. 18년 동안이나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셨다. 암몬은 강성해졌고 이스라엘은 악화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다(6~9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우상들을 섬기면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비참한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곤고함이 더할 뿐이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방의 헛된 우상들(신 7:4)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더욱 가중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자도, 성민이라는 신분도, 제사장 나라의 사명도 모두 망각한 그들을 향해 분노하신다(17~18절). 하지만 그 불타는 분노가 질투하시는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것이 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다시” 악을 행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지만, 자기 백성이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신다(10~16절). 번번이 잘못을 뉘우쳤다가 또다시 죄를 범하는 백성이지만, 못난 자식을 둔 아비처럼 또 받아 주시고 들어주신다. 하지만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빠른 구원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더 진실한 회개를 바라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고 실토한다. 그리고 구원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택한 신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에 근심하신다. 기억해야 한다. 회개 공식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만이 여호와를 움직인다.

-명백하다. 돌라와 야일이 사사로 있을 때의 평화는, 하나님만 온전히 섬길 때 그 백성의 삶이 얼마나 평탄한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는 왕이 없어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하신다.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없는 것은 도리어 그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돌라가 분배받은 땅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에 거하며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그 평화가 제한된 평화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야일의 “왕 같은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시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 간 사사의 모습이어서 씁쓸하다. 기드온이 이렇게 살다가 아비멜렉이 출현하지 않았던가!

-자녀들에게 풍족한 삶을 남겨 주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남겨 주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넘치도록 풍성한 삶은 아비멜렉과 같은 이단아를 낳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어 다시 이방 우상들에게로 넘어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평화로움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누릴 때 변질되지 않는다.” 지키라 하신 명령을 꿋꿋하게 지켜 살아낼 때, 지금 누리는 평화가 다음 세대에게도 평화가 된다. 나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세상이 지금 내가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가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 기도제목

*주님, 평안을 누릴수록 더욱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지혜를 주십시오.
*주님, 너무도 잘 아시기에 근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앞에 죄송합니다. 좀 더 잘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