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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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매일묵상
각각의 요지부동, 틈을 만들어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창 42:18-38]
2026년 05월 16일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2026년 05월 16일
각각의 요지부동, 틈을 만들어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창 42:18-38]
요셉은 감옥에 있는 형들에게 한 사람만 남도록 하고 나머지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가족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한다. 요셉이 자루 안에 돈을 넣게 하여 가족들을 도우려 하지만, 이 조치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르우벤이 두 아들의 목숨까지 걸고 베냐민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하지만 야곱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사흘동안 형들을 감옥에 투옥시킨 요셉은 어떤 마음 이었을까?, 사흘동안 감옥에 갇힌 형들은 어떤 마음 이었을까?, 애굽에서의 자초지종을 들은 야곱은 왜 요지부동 이었을까?
요셉과 가족의 상봉을 다루는 본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본문은 기록 되지 않았지만 7년 흉년이 시작되면서 요셉은 언젠가 가족들이 식량을 구하러 올 것을 분명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7년의 풍년을 보내면서 이렇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제하며, 자기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려는가에 대하여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 없다. 애굽으로 팔려와 총리가 되기까지 고난과 고통의 기억이었던 지난 날이 므낫세를 낳고서 하나님의 큰 그림의 인도함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상처에서도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더욱 확신 할 수 있었다. 후에 형들에게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 모든 환난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형들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하셔서” 이미 회복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형들과 야곱은 다르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걷고 있을 때, 가나안의 야곱 가족은 짙은 암흑속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아 넘긴 후 지금껏 야곱을 속이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았어야 했다.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야곱을 속이고 있었다. 야곱은 요셉을 들짐승에게 잃은 후(형들의 거짓 속임으로 늘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꿈을 꾸어도 짐승에게 요셉이 찢기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자신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그 고통은 더 심해져 갔을 것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라헬에게서 얻은 두 아들 중 남은 베냐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편애였다. 어림잡아 족히 30세가 넘었을 베냐민을 여전히 보호하려고 한다. 만약 아직 이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 야곱의 몫을 구하러 가기 위해 충분히 홀로라도 갈 수 있는 나이임에도 야곱은 베냐민만은 자신이 꼭 지켜야 한다고 고수하였다(42:4).
요셉을 잃은 후 야곱은 더욱 라헬에게서 얻은 자식에 대해 편애에 빠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머지 형들의 마음은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하여 굳은 마음이 되었다. 형들과 아버지 야곱의 관계는 큰 간격이 존재했다. 그런데 20년이 넘도록 요지부동한 이런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1. 우리가 이제 괴로움을 당하는구나!(21-22절)
엉뚱하게도 첩자로 오해받아 사흘간 애굽의 감옥에 갇히고,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가나안에 남아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애굽 총리의 명령 앞에 20년전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이 소환된다.이 기간 동안 요셉에게 저질렀던 일은 철저히 감춰지고 잊혀진 것이었다는 의미다. 심지어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는 맥락이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줄 자각조차 하지 못하거나 혹은 망각하고 있던 것을 의외의 사건을 통해 자각 시키실 때가 있다. 전혀 연결점이 없는데 마음을 요동 시키신다.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그 죄악은 무엇이든 연결되어 있어서 생뚱맞은 일이 계기가 되어 소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 이렇게 먼저 시작하실 때가 있다.
형들의 깨달음… 르우벤의 절규… 이것은 요셉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통역을 세워 놓고 이야기 했기에 설마 애굽 총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한 채 20년전 요셉을 팔아넘길 때의 상황을 서로 소환 한 것이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새번역_21절) “…..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다.”(새번역_22절) 요셉의 살려달라는 애원조차 20년의 세월속에 철저히 감추었던 형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 생각지도 못한 애굽에서의 3일 동안의 감옥생활은 “요지부동”했던 요셉에 대한 마음에 균열을 가져 왔다.
2.듣다 못한 요셉… 잠시 물러가 울었다(24절)
형들의 대화 속에서 20년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들었다. 형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르우벤 형이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요셉은 이미 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린 르우벤도 아니고 그 뒤를 잇는 유다가 아니라 셋째 시므온을 볼모로 잡는다. 그것도 형들이 보는 앞에서 끈으로 묶는다(24절). 형들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20여년전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길 때를 되살리는 데자뷔였다. 시므온이 묶이는 것을 보며 그들은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묶어 상인들에게 팔았던 기억이 소환 되었다. 그 “못할 짓(새번역_22절)”이 새록새록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므낫세를 낳으며 치유 되었던 마음에다 위로를 얻었다. 아, 르우벤 형은 나를 도우려 했구나. 20년전 그렇게 매몰찼던 형들이 지금 그 일을 기억하며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진다. 형들과 가나안에서 굶주리고 있을 아버지 야곱, 그리고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시므온을 포로로 붙잡고 나머지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러 오라는 조건부를 달아 충분한 곡식과 여행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 보낸다. 그리고 형들은 모르게 곡식값을 곡식 자루에 넣어 주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픈가!
형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방으로 들어와 흘린 눈물은 이미 용서한 형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3.그러나 요지부동의 야곱(36-38절)
야곱은 아들들이 겪었던 애굽에서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다. 자초지종을 들으며 이미 시므온을 잃어버린 아들로 단정한다(36절). 베냐민을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런 지독한 편애라니, 이런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라니, 한편으로 요셉을 잃은 충격을 이해하나, 시므온도 자기 아들이다. 야곱의 현 수준은 자기 중심적인 어른아이나 다름없다.
야곱의 이런 투정(?)을 지켜보던 장남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이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잘 데리고 돌아오겠다며 맹세하지만(37절), 야곱은 요지부동이다. 형들의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죄악의 요지부동은 애굽에서 크게 흔들리고 왔는데, 야곱의 편애는 오히려 더욱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은 육신의 식량이 떨어져 고통당하고 이 문제만 해결하시고자 움직이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육적인 기근보다 영적 기근의 회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한 하나님의 도전이 일어났고 형들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나, 야곱은 오히려 더욱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하지만 곧 흔들릴 것이다. 육신의 배고픔, 기근을 해결하는 것보다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고달픔을 통해 여지껏 해결하지 못하고 요지부동하게 굳어버린 영적인 기근에 은혜의 단비를 쏟으시고 의지하는 토대를 흔들어 해결하시려고 개입하신다. 이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흔드심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기근이 해결된다. 육적인 기근보다 더 심각한 영적인 기근…. 도무지 내려놓지 않는 자기고집, 집착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요셉의 형들이 20년동안의 외면하고 있었던 죄에 대한 요지부동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야곱의 편애도 고달프게 다루고 있다. 이처럼 강하게 흔들려야 무너지는 요지부동이 내게 많을수록 삶이 많이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이 흔드시기 전에 지혜롭게 그의 뜻과 인도히심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나는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과 상관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영역, 한번도 이것을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수하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나의 요지부동이겠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흔들린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굳게 다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 할 때 가장 먼저 흔들린다. 그것이 무너져 내려야 산다.
-이것이 빼앗기고 무너지면 내 자신이 죽을 것 같지만, 이것이 무너져야 내가 산다. 삶의 다음 쳅터로 넘어간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을 미뤄두면 인생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정체되는 것이다. 아니 퇴보한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그때부터 또 하나의 요셉을 만들어 더 집착하며 매달린다. 베냐민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지독하게 편애하며 집착하는 아버지 야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곱의 요지부동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임과 동시에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았다. 그의 고집으로 인해 형들과 야곱은 늘 서로 강 건너편에서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르우벤이 애굽에서의 흔들림으로 인해 먼저 야곱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다가섰다. 매우 급진적이지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온 가족에게 일어난 이 난국을 정면돌파하려 한다. 적어도 형들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야곱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더 강하게 이 도전에 저항한다. 다른 아들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가족들의 굶주림보다 베냐민을 보호하려는 것이 더 우선이다. 편애가 집착이 되고 쓸데없는 인생의 주인노릇이 과해졌다.
-한편 요셉의 가족을 챙기는 마음이 감동이다. 곡식값을 형들이 모르게 곡식자루 깊숙한 곳에 숨겨 돌려 보내고, 여행할 때의 식량까지 덤으로 챙겨준다. 형들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꼼꼼히 가나안의 가족들을 챙기는 요셉의 마음이 애닮다!
-요셉이 가족들을 20년만에 만나고, 아버지 야곱의 전 가족이 이주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늘 감동이다. 읽으면서 나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감동이 멈추질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벅찬 감격의 주인공인 요셉은 이를 잘 제어하며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꼭 붙잡는다.
-당장이라도 형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싶지만, 집안 식구 모두가 애굽으로 내려 와야 한다.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애굽으로 이주해야 한다. 이 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요셉의 인내와, 절제가 얼마나 대단한가?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꿋꿋하게 절제하며 견디는 그의 모습이 큰 도전이다.
-또한 본문은 르우벤의 역할이 도드라진다. 형제들에게 요셉 앞에서의 모습이나,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맹세하여 베냐민을 책임 지겠다고 하는 모습은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이런 모습과 달리 형제들이나, 야곱에게 르우벤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은 듯 하다. 특히 야곱은 르우벤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르우벤은 디나 사건 이후로 장남이었으나 이미 장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르우벤의 책임감 있는 행동, 희생은 분명 도전이 된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형제들의 안정도, 아버지 야곱의 인정도 없었지만, 묵묵하게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감당하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한 부분은 형들의 20여년전의 죄를 소환한 장면이다. 도무지 연결되지 않을 장면이지만 하나님께서 몰아넣은 감옥안에서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셉을 팔아버린 죄악에 대해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온 첩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그 순간,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그들의 “범죄”를 직면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반응한다. 지난 20여년간의 부정직한 반응이 아니다. 애써 외면하고 함구하였던 그들이 아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당시 당했던 요셉의 고통에 공감한다.
-요셉의 애걸과 괴로움을 금새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요셉처럼 애걸하고 괴로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직면하여 고백한다. “우리가 범죄하였다.” 그리고 요셉 앞에서 진실하게 반응한다. 또 돌아오는 길에서 발견한 곡식자루의 돈을 보고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는가?”라며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진실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여기까지다. 요셉과 야곱 앞에서 이 죄악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다루신다. 내가 해결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결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되었다 할 때 해결 되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들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지난 20여년간 요셉에 대하여 지은 죄에 대해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애굽에서의 투옥 3일만에 그 죄에 직면한다. 진실하게 그때 그 사건을 소환한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것이다.
*야곱은 라헬의 아들들에 대한 편애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르우벤이 아무리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까지 했어도 베냐민은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 요지부동이 흔들리지 않으면 야곱의 가족에 희망은 없다. 이런 요지부동이 온 가족을 위기로 빠뜨린다.
*아무쪼록 나는 요셉과 같은 믿음의 요지부동이 확고하기 바라고, 형들이나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은 무너지기 원한다. 그래야 산다.
요셉과 가족의 상봉을 다루는 본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본문은 기록 되지 않았지만 7년 흉년이 시작되면서 요셉은 언젠가 가족들이 식량을 구하러 올 것을 분명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7년의 풍년을 보내면서 이렇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제하며, 자기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려는가에 대하여 한 순간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 없다. 애굽으로 팔려와 총리가 되기까지 고난과 고통의 기억이었던 지난 날이 므낫세를 낳고서 하나님의 큰 그림의 인도함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상처에서도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더욱 확신 할 수 있었다. 후에 형들에게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 모든 환난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형들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하셔서” 이미 회복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형들과 야곱은 다르다. 요셉이 애굽에서 그 파란만장한 삶을 걷고 있을 때, 가나안의 야곱 가족은 짙은 암흑속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아 넘긴 후 지금껏 야곱을 속이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았어야 했다.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야곱을 속이고 있었다. 야곱은 요셉을 들짐승에게 잃은 후(형들의 거짓 속임으로 늘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꿈을 꾸어도 짐승에게 요셉이 찢기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자신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그 고통은 더 심해져 갔을 것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라헬에게서 얻은 두 아들 중 남은 베냐민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편애였다. 어림잡아 족히 30세가 넘었을 베냐민을 여전히 보호하려고 한다. 만약 아직 이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 야곱의 몫을 구하러 가기 위해 충분히 홀로라도 갈 수 있는 나이임에도 야곱은 베냐민만은 자신이 꼭 지켜야 한다고 고수하였다(42:4).
요셉을 잃은 후 야곱은 더욱 라헬에게서 얻은 자식에 대해 편애에 빠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머지 형들의 마음은 아버지를 속이고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하여 굳은 마음이 되었다. 형들과 아버지 야곱의 관계는 큰 간격이 존재했다. 그런데 20년이 넘도록 요지부동한 이런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1. 우리가 이제 괴로움을 당하는구나!(21-22절)
엉뚱하게도 첩자로 오해받아 사흘간 애굽의 감옥에 갇히고,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가나안에 남아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애굽 총리의 명령 앞에 20년전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이 소환된다.이 기간 동안 요셉에게 저질렀던 일은 철저히 감춰지고 잊혀진 것이었다는 의미다. 심지어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는 맥락이다.
하나님은 때로 죄인줄 자각조차 하지 못하거나 혹은 망각하고 있던 것을 의외의 사건을 통해 자각 시키실 때가 있다. 전혀 연결점이 없는데 마음을 요동 시키신다.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그 죄악은 무엇이든 연결되어 있어서 생뚱맞은 일이 계기가 되어 소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 이렇게 먼저 시작하실 때가 있다.
형들의 깨달음… 르우벤의 절규… 이것은 요셉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통역을 세워 놓고 이야기 했기에 설마 애굽 총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한 채 20년전 요셉을 팔아넘길 때의 상황을 서로 소환 한 것이다. “그렇다!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아우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에,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아우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이제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구나.”(새번역_21절) “…..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다.”(새번역_22절) 요셉의 살려달라는 애원조차 20년의 세월속에 철저히 감추었던 형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셨다. 생각지도 못한 애굽에서의 3일 동안의 감옥생활은 “요지부동”했던 요셉에 대한 마음에 균열을 가져 왔다.
2.듣다 못한 요셉… 잠시 물러가 울었다(24절)
형들의 대화 속에서 20년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들었다. 형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르우벤 형이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요셉은 이미 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린 르우벤도 아니고 그 뒤를 잇는 유다가 아니라 셋째 시므온을 볼모로 잡는다. 그것도 형들이 보는 앞에서 끈으로 묶는다(24절). 형들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20여년전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길 때를 되살리는 데자뷔였다. 시므온이 묶이는 것을 보며 그들은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묶어 상인들에게 팔았던 기억이 소환 되었다. 그 “못할 짓(새번역_22절)”이 새록새록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므낫세를 낳으며 치유 되었던 마음에다 위로를 얻었다. 아, 르우벤 형은 나를 도우려 했구나. 20년전 그렇게 매몰찼던 형들이 지금 그 일을 기억하며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진다. 형들과 가나안에서 굶주리고 있을 아버지 야곱, 그리고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시므온을 포로로 붙잡고 나머지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러 오라는 조건부를 달아 충분한 곡식과 여행 식량까지 챙겨서 돌려 보낸다. 그리고 형들은 모르게 곡식값을 곡식 자루에 넣어 주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픈가!
형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방으로 들어와 흘린 눈물은 이미 용서한 형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
3.그러나 요지부동의 야곱(36-38절)
야곱은 아들들이 겪었던 애굽에서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다. 자초지종을 들으며 이미 시므온을 잃어버린 아들로 단정한다(36절). 베냐민을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힌다. 이런 지독한 편애라니, 이런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라니, 한편으로 요셉을 잃은 충격을 이해하나, 시므온도 자기 아들이다. 야곱의 현 수준은 자기 중심적인 어른아이나 다름없다.
야곱의 이런 투정(?)을 지켜보던 장남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이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잘 데리고 돌아오겠다며 맹세하지만(37절), 야곱은 요지부동이다. 형들의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죄악의 요지부동은 애굽에서 크게 흔들리고 왔는데, 야곱의 편애는 오히려 더욱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은 육신의 식량이 떨어져 고통당하고 이 문제만 해결하시고자 움직이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육적인 기근보다 영적 기근의 회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한 하나님의 도전이 일어났고 형들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나, 야곱은 오히려 더욱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하지만 곧 흔들릴 것이다. 육신의 배고픔, 기근을 해결하는 것보다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고달픔을 통해 여지껏 해결하지 못하고 요지부동하게 굳어버린 영적인 기근에 은혜의 단비를 쏟으시고 의지하는 토대를 흔들어 해결하시려고 개입하신다. 이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흔드심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기근이 해결된다. 육적인 기근보다 더 심각한 영적인 기근…. 도무지 내려놓지 않는 자기고집, 집착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나는?
-요셉의 형들이 20년동안의 외면하고 있었던 죄에 대한 요지부동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야곱의 편애도 고달프게 다루고 있다. 이처럼 강하게 흔들려야 무너지는 요지부동이 내게 많을수록 삶이 많이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이 흔드시기 전에 지혜롭게 그의 뜻과 인도히심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나는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이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과 상관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영역, 한번도 이것을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수하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나의 요지부동이겠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흔들린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굳게 다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 할 때 가장 먼저 흔들린다. 그것이 무너져 내려야 산다.
-이것이 빼앗기고 무너지면 내 자신이 죽을 것 같지만, 이것이 무너져야 내가 산다. 삶의 다음 쳅터로 넘어간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을 미뤄두면 인생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정체되는 것이다. 아니 퇴보한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그때부터 또 하나의 요셉을 만들어 더 집착하며 매달린다. 베냐민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지독하게 편애하며 집착하는 아버지 야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곱의 요지부동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임과 동시에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았다. 그의 고집으로 인해 형들과 야곱은 늘 서로 강 건너편에서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르우벤이 애굽에서의 흔들림으로 인해 먼저 야곱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다가섰다. 매우 급진적이지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온 가족에게 일어난 이 난국을 정면돌파하려 한다. 적어도 형들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야곱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더 강하게 이 도전에 저항한다. 다른 아들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가족들의 굶주림보다 베냐민을 보호하려는 것이 더 우선이다. 편애가 집착이 되고 쓸데없는 인생의 주인노릇이 과해졌다.
-한편 요셉의 가족을 챙기는 마음이 감동이다. 곡식값을 형들이 모르게 곡식자루 깊숙한 곳에 숨겨 돌려 보내고, 여행할 때의 식량까지 덤으로 챙겨준다. 형들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꼼꼼히 가나안의 가족들을 챙기는 요셉의 마음이 애닮다!
-요셉이 가족들을 20년만에 만나고, 아버지 야곱의 전 가족이 이주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늘 감동이다. 읽으면서 나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감동이 멈추질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벅찬 감격의 주인공인 요셉은 이를 잘 제어하며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꼭 붙잡는다.
-당장이라도 형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싶지만, 집안 식구 모두가 애굽으로 내려 와야 한다.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애굽으로 이주해야 한다. 이 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요셉의 인내와, 절제가 얼마나 대단한가?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꿋꿋하게 절제하며 견디는 그의 모습이 큰 도전이다.
-또한 본문은 르우벤의 역할이 도드라진다. 형제들에게 요셉 앞에서의 모습이나,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두 아들의 생명을 맹세하여 베냐민을 책임 지겠다고 하는 모습은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이런 모습과 달리 형제들이나, 야곱에게 르우벤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은 듯 하다. 특히 야곱은 르우벤의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 르우벤은 디나 사건 이후로 장남이었으나 이미 장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르우벤의 책임감 있는 행동, 희생은 분명 도전이 된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형제들의 안정도, 아버지 야곱의 인정도 없었지만, 묵묵하게 장남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감당하며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한 부분은 형들의 20여년전의 죄를 소환한 장면이다. 도무지 연결되지 않을 장면이지만 하나님께서 몰아넣은 감옥안에서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셉을 팔아버린 죄악에 대해 스스로 고백한다.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온 첩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그 순간,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그동안 외면해 왔던 그들의 “범죄”를 직면한다. 그리고 정직하게 반응한다. 지난 20여년간의 부정직한 반응이 아니다. 애써 외면하고 함구하였던 그들이 아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당시 당했던 요셉의 고통에 공감한다.
-요셉의 애걸과 괴로움을 금새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이 요셉처럼 애걸하고 괴로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직면하여 고백한다. “우리가 범죄하였다.” 그리고 요셉 앞에서 진실하게 반응한다. 또 돌아오는 길에서 발견한 곡식자루의 돈을 보고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시는가?”라며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진실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여기까지다. 요셉과 야곱 앞에서 이 죄악에 대하여 진실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다루신다. 내가 해결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해결이 아니다. 하나님이 해결되었다 할 때 해결 되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 이루어질 때까지 형들 앞에서 “요지부동”이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지난 20여년간 요셉에 대하여 지은 죄에 대해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애굽에서의 투옥 3일만에 그 죄에 직면한다. 진실하게 그때 그 사건을 소환한다. 이런 요지부동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것이다.
*야곱은 라헬의 아들들에 대한 편애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르우벤이 아무리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까지 했어도 베냐민은 자신이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 요지부동이 흔들리지 않으면 야곱의 가족에 희망은 없다. 이런 요지부동이 온 가족을 위기로 빠뜨린다.
*아무쪼록 나는 요셉과 같은 믿음의 요지부동이 확고하기 바라고, 형들이나 야곱과 같은 요지부동은 무너지기 원한다.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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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5일
재회 _ 영적 기근속에서 기근을 만났다. 애굽에서 형제들을 만났다.
[창 42:1-17]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갔다면 20년이 지난 시점이 된다. 그는 13년이 지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어서 7년 동안의 풍년 기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온 세상에 엄습한 기근은 팔레스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굽에 엄청난 식량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온 땅에 알려졌으며, 그 소식은 야곱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식량 고갈을 염려한 야곱은 애굽에서 식량을 사오기로 결심한다.
1.식량 기근보다 더 오래된 영적 기근(1-5절)
본문의 시작은 요셉이 애굽에서 고분분투하고 있던 약 20여년(노예생활 13년, 7년의 풍년 이후 기근이 시작 되었으므로) 시간 동안 야곱의 가족도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먼저,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새번역_1절)’ 라고 한다.
생각해 보았다. 야곱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까? 아니다 형들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들이 먼저 애굽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셉때문이다. 자신들이 발버둥치며 살려달고 애원했던 요셉을 구덩이에게 던지고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쉽사리 애굽에 내려가서 식량을 구해와야지 할수 없었던 머뭇거림은 이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년동안 형들과 야곱은 요셉에 관한 문제에 있어 철저히 속이고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 속임에 자신들은 늘 마음 한구석에 해결되지 못한 짐이 있었고, 야곱은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영적 기근은 야곱의 가족에게 이미 20년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속이고 속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함의 기근(그러나 알 수 없었던 영적 기근)이 무려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이나 무디어진 마음도 어쩔수 없었으리라.
또 있다.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형들 10명을 보내면서 베냐민은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새번역_4절).” 야곱의 편애는 요셉이 실종 된 후 더 심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야곱은 20여년전 요셉을 홀로 양을 치러 간 형들에게 보낸 것을 아마도 깊이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요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짐승에게 찢겨 죽지 않았을 것이다며 자책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한 순간도 형들에게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는 요셉의 모습을 잊을 리 없었을 것이고 갈기 갈기 찢겨지고 피가 흥건히 묻혀져 돌아온 ‘채색옷’은 밤마다 야곱의 꿈속에서 그의 마음을 헤집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라헬에게서 태어난 막내 베냐민을 더욱 감쌌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심화된 베냐민에 대한 편애는 10명의 형들과 야곱과 베냐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각한 관계의 기근이 야곱의 가족에게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식량 기근도 문제지만 오랬 동안 지속된 야곱의 가족안의 관계 기근은 어찌할까?
2.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하고…(9절)
형들은 요셉이 곡식을 파는 책임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른 채 그 앞에 나와 엎드린다. 요셉은 형들을 단박에 알아본다(7절). 자신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며 20여년도 족히 넘는 그때 꾼 꿈을 기억한다.
창 37장에서 요셉이 꾼 꿈을 소개했다.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첫 번째 꿈이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그 꿈이 바로 이 장면이구나! “….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였다(새번역_6절 하).” 동시에 두 번째 꿈도 생각해 냈을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첫 번째 꿈이 이루어졌다면 두번 째 꿈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열명의 형들만 나에게 절하고 있다…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이 생각 났다. 그들은 아직 애굽에 오지 않았다. 아! 야곱은 꾸었던 꿈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꿈이 이루어 질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3.요셉의 큰 그림…(9-17절)
요셉은 형들을 ‘첩자’로 밀어부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형들은 당황하며 항변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족들에 대하여 소개한다. “…소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모두 열둘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소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잃었습니다(새번역_13절).”
요셉은 더욱 더 몰아부친다.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가나안 땅에 남겨둔 당신들의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만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형들을 사흘동안 감옥에 가둔다(15-16절). 확실하게 첩자로 여기고 있음을 형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그 순간 통쾌한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꾼 꿈”을 기억했다. 지금 당장 형들에게 “보시오! 나의 꿈 대로 지금 당신들이 나에게 절하고 있지 않소!”라며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다. 개인의 통쾌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 이루어진 현장에서 나머지 이루어질 꿈을 기억해 낸 것이다. 추측이지만 요셉은 순간에라도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을 기억해 내어 감정적인 행동을 억제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 순간 내 정욕을 따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억(꿈, 뜻)을 따라 절제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더 큰 그림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삶이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가장 통쾌하게 복수 할 수 있는 그 순간,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절제 시킨다. 너는 과연 인간적인 복수의 통쾌함이 주는 짜릿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그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요셉이 참으로 대단하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요셉은 알았을 것이다. 기근이 시작되면 언젠가 형들도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올 것을 말이다. 그때를 어떻게 맞이할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생각으로 이 날을 준비 했을지는 본문이 힌트를 준다. 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했다(새번역_9절). 형들이 절하는 순간 그 꿈을 기억해 냈다. 아니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셨다. 아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정황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절하는 형들 앞에서 첩자로 누명을 씌우고 막내를 데려 올 것까지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지난 20년의 시간 속에 사라지지 못했던,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의 야속하기만 했던 얼굴들이 자신 앞에서 절하는 순간 피끓는 복수의 마음으로 기억난 것이 아니라 “형들을 두고 꾼 꿈”이 기억 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순간 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임기응변하며 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기에 인내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요셉의 큰 그림(꾼 꿈)을 따라가는 삶의 자세에서 이것을 배운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인생 역전의 순간은 나의 해묵은 감정을 시원하게 해소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도 그러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온갖 조롱으로 자극하던 대제사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얼마든지 그 순간 그들을 벌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결심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말이다.
*가장 통괘한 순간은 지금이 아니다. 두 번째 꿈도 이루질 그 순간이 가장 환희의 순간이 될 것이다. 이를 바라본 요셉은 열명의 형들 앞에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열한명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 할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살면서 이런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섣불리 터뜨린 샴페인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적이 많았던가! 급히 마신 김칫국 때문에 두고 두고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었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가는대로여서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한편 요셉 만큼이나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야곱의 가족들이 안쓰럽다. 형들은 자신들의 속인 일로 인해 20여년의 삶은 온 가족이 모여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그 일 이후 언제나 열한 형제는 변함 없었으나 한 명은 잃어버린(?) 형제로 남았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은 늘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명의 형들과 야곱은 콘크리트벽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야곱은 야곱대로 요셉의 빈자리를 베냐민을 더욱 감싸는 편애로 나타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형들의 마음은 더욱 차가워 졌을 것이다.
*야곱은 요셉은 지키지 못했지만, 베냐민은 꼭 자기 힘으로 지키겠다고 결심한 듯 하다. 애굽에 식량을 구하려 보내는 열명의 형들과도 구별 시켜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남겨 두었다. 잃어버린 한 명의 요셉에 대한 트라우마는 똑같이 소중해야 할 열 명의 아들들의 마음에 더욱 깊은 골의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영적 기근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요셉을 지켜주지 못했으니 나는 베냐민을 어떻게 해서라도 지킬거라는 마음으로 그랬을 수 있다. 야곱은 지금 심각한 영적침체에 있는 것이다. 요셉을 잃어버린 후 그 긴 시간을 하나님께 맡김보다 자기 힘으로 견뎌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곱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기근이 혹시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영적 기근이 심할 수록, 자기결정, 자기 변호가 견고해 짐을 야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나의 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풍년이 풍성했으면 좋겠다. 육적 기근이 삶을 힘들게 할 때에도 성령충만함으로 넉넉히 인내하는 풍성한 영적 풍년의 삶이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 가운데, 말씀대로 이루실 그때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절제하는 순간 순간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여년 만의 형제 상봉은 형들은 알아채지 못했고, 요셉은 그 순간 “형들에 대하여 꾼 꿈”을 기억해내며 만났다. 형들은 기근으로 인해 마지못해 애굽으로 내려왔지만, 요셉은 이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20여년 만에 꿈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꿈도 곧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꿈의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 이루어진 꿈을 기억하며 절제하는 요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큰 그림)을 따라 사는 인생을 배운다!
*기근은 애굽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온 땅’에,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덮쳤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의 영적 기근은 20년동안 지속 되고 있었다.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채색옷에 피를 흥건하게 묻히며 아버지 야곱을 속인 그 날부터 이미 영적 기근은 덮친 것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형제들은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을 유지했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낸 것에 자책하며, 고통속에 울부짖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과잉보호(편애)가 점점 더 도드라졌다.
*온 땅에 찾아온 기근은 20년 넘게 야곱의 집안을 묶고 있던 거짓과 편애의 사슬을 끊으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영적 기근을 깨뜨리시기 위해 기근을 부르셨다.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영적 기근을 끝내시기 위해 온 세상의 기근을 불러 오셨다.
1.식량 기근보다 더 오래된 영적 기근(1-5절)
본문의 시작은 요셉이 애굽에서 고분분투하고 있던 약 20여년(노예생활 13년, 7년의 풍년 이후 기근이 시작 되었으므로) 시간 동안 야곱의 가족도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먼저,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얘들아, 왜 서로 얼굴들만 쳐다보고 있느냐?(새번역_1절)’ 라고 한다.
생각해 보았다. 야곱만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까? 아니다 형들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들이 먼저 애굽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일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셉때문이다. 자신들이 발버둥치며 살려달고 애원했던 요셉을 구덩이에게 던지고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쉽사리 애굽에 내려가서 식량을 구해와야지 할수 없었던 머뭇거림은 이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년동안 형들과 야곱은 요셉에 관한 문제에 있어 철저히 속이고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 속임에 자신들은 늘 마음 한구석에 해결되지 못한 짐이 있었고, 야곱은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영적 기근은 야곱의 가족에게 이미 20년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속이고 속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함의 기근(그러나 알 수 없었던 영적 기근)이 무려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그 시간만큼이나 무디어진 마음도 어쩔수 없었으리라.
또 있다.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형들 10명을 보내면서 베냐민은 보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베냐민만은 형들에게 딸려 보내지 않았다. 베냐민을 같이 보냈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보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새번역_4절).” 야곱의 편애는 요셉이 실종 된 후 더 심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야곱은 20여년전 요셉을 홀로 양을 치러 간 형들에게 보낸 것을 아마도 깊이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요셉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짐승에게 찢겨 죽지 않았을 것이다며 자책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한 순간도 형들에게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는 요셉의 모습을 잊을 리 없었을 것이고 갈기 갈기 찢겨지고 피가 흥건히 묻혀져 돌아온 ‘채색옷’은 밤마다 야곱의 꿈속에서 그의 마음을 헤집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라헬에게서 태어난 막내 베냐민을 더욱 감쌌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욱 심화된 베냐민에 대한 편애는 10명의 형들과 야곱과 베냐민 사이의 골을 더욱 깊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각한 관계의 기근이 야곱의 가족에게 2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식량 기근도 문제지만 오랬 동안 지속된 야곱의 가족안의 관계 기근은 어찌할까?
2.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하고…(9절)
형들은 요셉이 곡식을 파는 책임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모른 채 그 앞에 나와 엎드린다. 요셉은 형들을 단박에 알아본다(7절). 자신에게 절하는 형들을 보며 20여년도 족히 넘는 그때 꾼 꿈을 기억한다.
창 37장에서 요셉이 꾼 꿈을 소개했다. 두 개의 꿈을 꾸었는데, 첫 번째 꿈이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그 꿈이 바로 이 장면이구나! “…. 요셉의 형들은 거기에 이르러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요셉에게 절을 하였다(새번역_6절 하).” 동시에 두 번째 꿈도 생각해 냈을 것이다.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첫 번째 꿈이 이루어졌다면 두번 째 꿈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열명의 형들만 나에게 절하고 있다…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이 생각 났다. 그들은 아직 애굽에 오지 않았다. 아! 야곱은 꾸었던 꿈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꿈이 이루어 질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3.요셉의 큰 그림…(9-17절)
요셉은 형들을 ‘첩자’로 밀어부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형들은 당황하며 항변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족들에 대하여 소개한다. “…소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모두 열둘입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소인들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잃었습니다(새번역_13절).”
요셉은 더욱 더 몰아부친다.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가나안 땅에 남겨둔 당신들의 막내 아우를 데려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만 보내어 데리고 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형들을 사흘동안 감옥에 가둔다(15-16절). 확실하게 첩자로 여기고 있음을 형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런데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그 순간 통쾌한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꾼 꿈”을 기억했다. 지금 당장 형들에게 “보시오! 나의 꿈 대로 지금 당신들이 나에게 절하고 있지 않소!”라며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 것이다. 개인의 통쾌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 이루어진 현장에서 나머지 이루어질 꿈을 기억해 낸 것이다. 추측이지만 요셉은 순간에라도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을 기억해 내어 감정적인 행동을 억제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 순간 내 정욕을 따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억(꿈, 뜻)을 따라 절제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더 큰 그림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삶이다. 어쩌면 인간적으로 가장 통쾌하게 복수 할 수 있는 그 순간,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절제 시킨다. 너는 과연 인간적인 복수의 통쾌함이 주는 짜릿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그런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요셉이 참으로 대단하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요셉은 알았을 것이다. 기근이 시작되면 언젠가 형들도 식량을 구하러 애굽으로 올 것을 말이다. 그때를 어떻게 맞이할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생각으로 이 날을 준비 했을지는 본문이 힌트를 준다. 형들을 두고 꾼 꿈을 기억했다(새번역_9절). 형들이 절하는 순간 그 꿈을 기억해 냈다. 아니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셨다. 아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정황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절하는 형들 앞에서 첩자로 누명을 씌우고 막내를 데려 올 것까지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지난 20년의 시간 속에 사라지지 못했던,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의 야속하기만 했던 얼굴들이 자신 앞에서 절하는 순간 피끓는 복수의 마음으로 기억난 것이 아니라 “형들을 두고 꾼 꿈”이 기억 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순간 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임기응변하며 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기에 인내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요셉의 큰 그림(꾼 꿈)을 따라가는 삶의 자세에서 이것을 배운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인생 역전의 순간은 나의 해묵은 감정을 시원하게 해소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살아야 한다.
*주님도 그러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온갖 조롱으로 자극하던 대제사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얼마든지 그 순간 그들을 벌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결심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말이다.
*가장 통괘한 순간은 지금이 아니다. 두 번째 꿈도 이루질 그 순간이 가장 환희의 순간이 될 것이다. 이를 바라본 요셉은 열명의 형들 앞에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열한명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 할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살면서 이런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섣불리 터뜨린 샴페인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적이 많았던가! 급히 마신 김칫국 때문에 두고 두고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었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마음가는대로여서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한편 요셉 만큼이나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야곱의 가족들이 안쓰럽다. 형들은 자신들의 속인 일로 인해 20여년의 삶은 온 가족이 모여도 편치 못했을 것이다. 그 일 이후 언제나 열한 형제는 변함 없었으나 한 명은 잃어버린(?) 형제로 남았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은 늘 보이지 않는 긴장관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명의 형들과 야곱은 콘크리트벽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야곱은 야곱대로 요셉의 빈자리를 베냐민을 더욱 감싸는 편애로 나타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형들의 마음은 더욱 차가워 졌을 것이다.
*야곱은 요셉은 지키지 못했지만, 베냐민은 꼭 자기 힘으로 지키겠다고 결심한 듯 하다. 애굽에 식량을 구하려 보내는 열명의 형들과도 구별 시켜 혹시 무슨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남겨 두었다. 잃어버린 한 명의 요셉에 대한 트라우마는 똑같이 소중해야 할 열 명의 아들들의 마음에 더욱 깊은 골의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다.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영적 기근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요셉을 지켜주지 못했으니 나는 베냐민을 어떻게 해서라도 지킬거라는 마음으로 그랬을 수 있다. 야곱은 지금 심각한 영적침체에 있는 것이다. 요셉을 잃어버린 후 그 긴 시간을 하나님께 맡김보다 자기 힘으로 견뎌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곱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기근이 혹시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영적 기근이 심할 수록, 자기결정, 자기 변호가 견고해 짐을 야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 나의 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풍년이 풍성했으면 좋겠다. 육적 기근이 삶을 힘들게 할 때에도 성령충만함으로 넉넉히 인내하는 풍성한 영적 풍년의 삶이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 가운데, 말씀대로 이루실 그때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절제하는 순간 순간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여년 만의 형제 상봉은 형들은 알아채지 못했고, 요셉은 그 순간 “형들에 대하여 꾼 꿈”을 기억해내며 만났다. 형들은 기근으로 인해 마지못해 애굽으로 내려왔지만, 요셉은 이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20여년 만에 꿈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두 번째 꿈도 곧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꿈의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 이루어진 꿈을 기억하며 절제하는 요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큰 그림)을 따라 사는 인생을 배운다!
*기근은 애굽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온 땅’에,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덮쳤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의 영적 기근은 20년동안 지속 되고 있었다.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기고, 그의 채색옷에 피를 흥건하게 묻히며 아버지 야곱을 속인 그 날부터 이미 영적 기근은 덮친 것이다. 그 오랜 시간동안 형제들은 요셉에 관해서는 늘 아버지 야곱에게 거짓말을 유지했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낸 것에 자책하며, 고통속에 울부짖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과잉보호(편애)가 점점 더 도드라졌다.
*온 땅에 찾아온 기근은 20년 넘게 야곱의 집안을 묶고 있던 거짓과 편애의 사슬을 끊으려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영적 기근을 깨뜨리시기 위해 기근을 부르셨다.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영적 기근을 끝내시기 위해 온 세상의 기근을 불러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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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4일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창 41:25~36]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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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3일
바로의 꿈을 해몽한 요셉
[창 41:25~36]
하나님은 미래의 흥망을 주관하신다. 요셉은 바로의 두 꿈 이야기를 듣고, 두 꿈은 같은 내용임을 밝힌다. 또한 이 꿈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부연한다. 요셉은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7년의 풍년을, 흉한 일곱 소와 마른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가리킨다고 선언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대비할 방안까지 제안한다.
1. 요셉의 꿈 해석(25~32절)
요셉은 바로가 말한 대로 두 꿈은 ‘하나’의 꿈이라고 확인해준다. 또한 그는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이 조만간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준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두 꿈은 하나의 꿈이다. 둘째, 일곱 마리 소와 일곱 이삭은 7년을 상징한다. 셋째, 7년의 풍년 후 7년의 흉년(기근)이 따를 것이다. 넷째, 두 번의 꿈은 그 일이 속히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뜻한다.
이어 요셉은 꿈의 전체 의미를 설명한다. 온 애굽 땅에 일곱 해의 풍년이 있으나 그 후에 일곱 해의 흉년이 들 것이고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 풍년을 기억하거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바로가 두 번 반복하여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확정’하셨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강조한다(32절).
요셉의 해몽을 통해 바로의 꿈이 지니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확정된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보여주신 사건들에 대한 대비책을 일러준다.
2. 요셉의 대비책 제안(33~36절)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뽑아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제안한다(33절). 그리고 34절에서는 나라 안에 감독관을 두어 일곱 해 풍년 동안 수확물의 5분의 1을 거두게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요셉은 장차 있게 될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어 바로의 권한 아래 그것을 흉년 때의 양식을 위하여 성읍에 쌓아두고 보존하게 하라고 말한다(35절). 그리고 요셉은 이러한 조치의 의미를 설명한다(36절). 그것은 일곱 해 동안 임할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애굽 땅의 사람들이 흉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의 대비책 제안은 바로가 기대하지 않았던 해몽의 영역이었다. 바로는 요셉에게 단지 신통력 있는 해몽을 원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찬 요셉은 대안까지 내놓게 된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삼중적이다. 먼저 장관을 임명하는 것, 그리고 지역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 마지막으로 국가적 배급 제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이 바로 그 적임자다. 요셉이 이 자리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는 그저 히브리 출신의 종일 뿐이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이 일의 적임자를 구해 적극적으로 대비하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바로가 요셉의 조언대로 풍년이 깃든 7년 동안 창고에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한다면, 애굽은 7년 대흉년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망하다’는 문자적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두 번 사용된다(9:11; 17:14). 특히 노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을 ‘끊어짐’으로 표현현 했다(9:11). 이처럼 위중한 표현을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국운이 걸린 흉년(가문, 기근)에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애굽은 멸망할 것이다.
나는?
-말씀이 기록되기 전,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꿈으로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꿈은 계시의 한 방편이었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창 28:12~15), 요셉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가르쳐주셨다(창 37:5~11). 오늘날에도 꿈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말씀에 모두 기록해두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할 때는 언제나 말씀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무시한 채 신비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바로에게 주신 꿈을 통해 애굽에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말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일강의 풍족한 수원을 의지하여 번영을 구가하던 애굽에 기근이 닥친다는 것은 이 거대한 나라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만들고, 농사는 자연현상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말씀 앞에 복종할 대상이다. 인간은 힘을 가진 듯 보이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처할 방안까지 제시한다. 명철하고 지혜로운 인재 등용과 행정 제도의 정비, 풍년 때 흉년을 대비하는 경제 제도 등 탁월한 정책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겠지만,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하면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으면서, 왕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조우하면서, 꿈에 대비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고 연단되었을 것이다. 함께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성실로 응답하여 산 결과일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 앞날을 대비하는 대안까지 들려주었다. 지난날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온 나라를 위한 멋진 정책을 제안하나, 지난날 훈련받을 때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순간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은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기억하고 그 꿈이 우리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믿음으로 살며, 그 꿈을 나를 통해 실현하려고 하실 때, 감당할 준비를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은 ‘부르심’이나 다름 없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1. 요셉의 꿈 해석(25~32절)
요셉은 바로가 말한 대로 두 꿈은 ‘하나’의 꿈이라고 확인해준다. 또한 그는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이 조만간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준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두 꿈은 하나의 꿈이다. 둘째, 일곱 마리 소와 일곱 이삭은 7년을 상징한다. 셋째, 7년의 풍년 후 7년의 흉년(기근)이 따를 것이다. 넷째, 두 번의 꿈은 그 일이 속히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뜻한다.
이어 요셉은 꿈의 전체 의미를 설명한다. 온 애굽 땅에 일곱 해의 풍년이 있으나 그 후에 일곱 해의 흉년이 들 것이고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 풍년을 기억하거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바로가 두 번 반복하여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확정’하셨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강조한다(32절).
요셉의 해몽을 통해 바로의 꿈이 지니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확정된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보여주신 사건들에 대한 대비책을 일러준다.
2. 요셉의 대비책 제안(33~36절)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뽑아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제안한다(33절). 그리고 34절에서는 나라 안에 감독관을 두어 일곱 해 풍년 동안 수확물의 5분의 1을 거두게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요셉은 장차 있게 될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어 바로의 권한 아래 그것을 흉년 때의 양식을 위하여 성읍에 쌓아두고 보존하게 하라고 말한다(35절). 그리고 요셉은 이러한 조치의 의미를 설명한다(36절). 그것은 일곱 해 동안 임할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애굽 땅의 사람들이 흉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의 대비책 제안은 바로가 기대하지 않았던 해몽의 영역이었다. 바로는 요셉에게 단지 신통력 있는 해몽을 원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찬 요셉은 대안까지 내놓게 된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삼중적이다. 먼저 장관을 임명하는 것, 그리고 지역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 마지막으로 국가적 배급 제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이 바로 그 적임자다. 요셉이 이 자리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는 그저 히브리 출신의 종일 뿐이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이 일의 적임자를 구해 적극적으로 대비하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바로가 요셉의 조언대로 풍년이 깃든 7년 동안 창고에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한다면, 애굽은 7년 대흉년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망하다’는 문자적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두 번 사용된다(9:11; 17:14). 특히 노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을 ‘끊어짐’으로 표현현 했다(9:11). 이처럼 위중한 표현을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국운이 걸린 흉년(가문, 기근)에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애굽은 멸망할 것이다.
나는?
-말씀이 기록되기 전,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꿈으로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꿈은 계시의 한 방편이었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창 28:12~15), 요셉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가르쳐주셨다(창 37:5~11). 오늘날에도 꿈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말씀에 모두 기록해두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할 때는 언제나 말씀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무시한 채 신비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바로에게 주신 꿈을 통해 애굽에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말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일강의 풍족한 수원을 의지하여 번영을 구가하던 애굽에 기근이 닥친다는 것은 이 거대한 나라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만들고, 농사는 자연현상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말씀 앞에 복종할 대상이다. 인간은 힘을 가진 듯 보이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처할 방안까지 제시한다. 명철하고 지혜로운 인재 등용과 행정 제도의 정비, 풍년 때 흉년을 대비하는 경제 제도 등 탁월한 정책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겠지만,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하면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으면서, 왕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조우하면서, 꿈에 대비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고 연단되었을 것이다. 함께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성실로 응답하여 산 결과일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 앞날을 대비하는 대안까지 들려주었다. 지난날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온 나라를 위한 멋진 정책을 제안하나, 지난날 훈련받을 때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순간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은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기억하고 그 꿈이 우리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믿음으로 살며, 그 꿈을 나를 통해 실현하려고 하실 때, 감당할 준비를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은 ‘부르심’이나 다름 없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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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2일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창 41:1-24]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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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2일
요셉의 꿈과 형들의 시기
[창 37:1-17]
야곱의 가정은 벧엘의 회복 이후에도 여전히 긴장과 갈등 속에 있었다. 그 중심에 요셉이 등장한다. 요셉은 열일곱 살의 소년으로 형들과 함께 양을 치면서 자랐다(2절). 그런데 그는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고,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요셉을 위해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3절). 이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과 ‘구별된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랑은 형제들 사이에 깊은 균열을 만들어 낸다.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평안하게 말하지 못한다(4절). 여기에 더해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한다. 요셉은 곡식 단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이를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한다(5-11절).
이 꿈은 단순한 소년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 꿈이었다. 그러나 형들에게는 교만으로 들렸고, 아버지에게조차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결국 형들의 마음에는 미움이 쌓이고 또 쌓인다. 그러던 중 요셉은 형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세겜으로, 다시 도단으로 보내지게 된다(12-17절). 이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를 향한 출발점이었다.
1. 하나님의 계획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1-4절)
요셉의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양을 치는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흐르고 있었다. 야곱의 편애는 분명 인간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연약함조차 사용하셔서 더 큰 구원의 이야기를 이루어 가신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은 것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는 계기가 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시작된다. 때로는 우리의 부족함과 관계의 갈등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2. 하나님의 뜻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도 이루어진다(5-11절)
요셉의 꿈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즉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을 일으켰다.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했고, 아버지 야곱도 그 말을 책망한다. 그러나 중요한 표현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절).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즉시 이해되지 않는다. 때로는 오해를 낳고, 갈등을 일으키며, 심지어 관계를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꿈은 훗날 애굽에서 정확히 이루어진다. 지금은 오해와 미움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은 순종의 걸음을 요구한다(12-17절)
요셉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형들을 찾아 나선다. 세겜에 갔다가 그곳에 형들이 없자, 다시 도단까지 찾아간다. 이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요셉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순종하여 길을 떠났지만, 그 길 끝에는 형들의 배신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순종의 걸음’을 요구한다.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요셉의 순종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로 이어지고,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된다.
나는?
-요셉처럼 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아니면 눈앞의 상황만 보고 흔들리고 있는가?
-내 삶 속의 관계의 갈등과 오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부일 수 있음을 믿는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계산하며 머무르는가, 아니면 요셉처럼 “예, 가겠습니다” 하고 순종의 길을 걷는가?
하지만 이 사랑은 형제들 사이에 깊은 균열을 만들어 낸다.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평안하게 말하지 못한다(4절). 여기에 더해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한다. 요셉은 곡식 단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이를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한다(5-11절).
이 꿈은 단순한 소년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적 꿈이었다. 그러나 형들에게는 교만으로 들렸고, 아버지에게조차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결국 형들의 마음에는 미움이 쌓이고 또 쌓인다. 그러던 중 요셉은 형들의 안부를 살피기 위해 세겜으로, 다시 도단으로 보내지게 된다(12-17절). 이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를 향한 출발점이었다.
1. 하나님의 계획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1-4절)
요셉의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양을 치는 일상’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일상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흐르고 있었다. 야곱의 편애는 분명 인간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연약함조차 사용하셔서 더 큰 구원의 이야기를 이루어 가신다. 요셉이 채색옷을 입은 것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는 계기가 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시작된다. 때로는 우리의 부족함과 관계의 갈등조차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2. 하나님의 뜻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도 이루어진다(5-11절)
요셉의 꿈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즉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을 일으켰다.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했고, 아버지 야곱도 그 말을 책망한다. 그러나 중요한 표현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절).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즉시 이해되지 않는다. 때로는 오해를 낳고, 갈등을 일으키며, 심지어 관계를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꿈은 훗날 애굽에서 정확히 이루어진다. 지금은 오해와 미움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은 순종의 걸음을 요구한다(12-17절)
요셉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형들을 찾아 나선다. 세겜에 갔다가 그곳에 형들이 없자, 다시 도단까지 찾아간다. 이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요셉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순종하여 길을 떠났지만, 그 길 끝에는 형들의 배신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순종의 걸음’을 요구한다.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요셉의 순종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로 이어지고,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된다.
나는?
-요셉처럼 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아니면 눈앞의 상황만 보고 흔들리고 있는가?
-내 삶 속의 관계의 갈등과 오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부일 수 있음을 믿는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계산하며 머무르는가, 아니면 요셉처럼 “예, 가겠습니다” 하고 순종의 길을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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