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묵상
매일의 묵상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의 매일묵상
치밀한 계획과 관리, 성실한 충성끝에 새로운 애굽이 되었다.[창 46:28-47:12]
2026년 05월 25일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2026년 05월 25일
치밀한 계획과 관리, 성실한 충성끝에 새로운 애굽이 되었다.
[창 47:13-26]
애굽을 살리는 요셉의 치밀함이 보인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제시한 대비책을 구체화 시켰고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구상이 계획으로 계획이 결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바로와 애굽의 유익에 헌신했다. 애굽은 바로의 것이 되었어도 그 안에서 백성들은 기근에서 구출받았고 보호를 받게 되었다. 요셉은 어떻게 7년 기근속에서 애굽을 다스렸을까?
1.관리능력
이 과정에서 발휘된 요셉의 능력은 “관리”로 압축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7년 풍년의 풍성함을 관리하지 못하면 흥청망청 낭비될 식량들이었다. 결코 7년의 흉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의 풍년 동안 넘치는 식량을 관리하면서 7년의 흉년을 충분히 견딜수 있다.
요셉의 관리의 핵심은 “중앙 관리”였다. “자치 관리”가 아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 넘치는 생산량으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식량을 모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침에 따라 “각 성에 저장하기 위해” 모았다.
차고 넘치는 7년의 풍년을 얼마든지 흥청망청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달은 요셉은 풍년을 관리했고, 흉년을 관리했다. 잘 나갈때나, 막힐때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관리하고 제어했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과 온 땅의 생명을 기근에서 살린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리능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 되어야 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사회 신뢰도 꼴찌라는 충격적인 지표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강하게 리모델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먹칠되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하나님께서 펼치신 이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의 가치를 지혜롭게 돌아보고 세워가야할 관리와 양육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한 감동에 순종하는 이들의 말씀을 따라 감당하는 성실한 관리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는 “관리”가 이루어지게 하셔서 선선히 이 때를 지나게 하실 줄 믿는다.
2.성실함, 이런 성실한 충성이라니(20절)
그렇게 모은 식량을 흉년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이 “돈”을 주고 샀고, 이후 가축과 땅을 차례로 지불하며 식량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대단하다. 요셉은 이 과정에서 축재를 하지 않는다. 성실하고 올곧게 백성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돈’, ‘가축’, ‘땅’을 그대로 바로에게 올린다(20절).
모든 식량 판매의 수입을 바로에게 온전히 바친다. 대단하지 않는가? 요셉은 보디발에게, 그리고 간수장에게 그렇게 했듯, 바로에게도 충성을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 성실한 충성이 애굽을 기근에서 관리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다. 성실이 요셉을 살렸고, 성실이 애굽을 살렸고, 성실이 온 땅을 살렸다! 한 사람의 성실이 세상을 살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3.준비된 계획대로(21, 24, 26절)
이와 함께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새번역_21절).” 단, 제사장들의 토지는 건들지 않았다. “…..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고, 바로가 그들에게 주는 녹 가운데는 먹거리가 넉넉하였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새번역_22절).”
그리고는 씨앗을 나누어 주고 소출의 1/5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5는 각각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24절). 7년 기근 동안 이루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백성들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25절)” 라고 하였다.
요셉에게는 단지 관리능력이나 성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을 미리 수립한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기근이 길어지면 돈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고 그 다음 대책이 필요하다. 7년의 기근은 충분히 삶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존의 상식, 보편적이 체계로는 이 기근을 견딜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예상한 대책이 필요 했으리라.
7년 기근 이라는 시간을 세밀히 고찰하고 그때 그때 맞는 대책을 진행해야 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혜안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시행 대책도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분명 아니다.
요셉은 계획을 준비했고 차분히 실행했다. 백성들의 돈이 떨어지니, 그들의 가축을 식량 대금으로 받아주었고, 이마저도 떨어지니 그들이 가진 땅을 식량 대금으로 받았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개혁을 시작했다.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옮겼다(21절). 즉 계획에 따라 이주 시켰다는 의미다. 그리고 종자들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소출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개인 소득이 되게 하였다(24절). 즉, 국가의 땅을 소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기근을 지나는 백성들은 이를 상당히 기쁘게 받아들였다(25절).
이런 정책의 시행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많은 고대 시대에 순발력있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틀을 확립했다는 의미다. 또, 백성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오분의 일만 내면 됐는데, 이 부과 기준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세 기준에 따라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 후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에 공평한 분배와 경작이 이루어져 고대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평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복잡한 계급사회,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따른 억압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 체계가 철저히 균등한 배분에 기초한 공정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토지는 480년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며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원리와 비슷하다. 요셉의 통치를 통해 그 나라의 토지 개념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땅의 소유로 인한 다툼, 분쟁이 사라지고 오직 분배 받은 대로 경작하고 삶을 영위하는 그 원리를 말이다. 7년의 흉년이 철저히 불평등의 사회였던 애굽을 적어도 삶의 기반 만큼은 모두가 바로의 땅에서 농사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평등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현재의 각자 도생, 전쟁의 시대가 우리를 어떻게 변모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격변들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심을 각성 시키신다. 교만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오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존재 앞에 겸손하도록 교정하신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채우게 하신다.
애굽에 기근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평등이 훌쩍 들어왔다.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나는?
-애굽의 7년 기근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준비한 요셉을 통해 극복하게 하시듯,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 시시각각 도전해 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순종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킨다. 요셉처럼 말이다.
-그 영향력은 단지 입에 발린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이 수반된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을 살렸고, 온 세상을 살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영향력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 걸음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릴 것이다.
-요셉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축재도 임의로 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결국 온 나라가 바로의 것이 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분명한 목적이 이내 드러난다. 억압과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균등과 평등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균형있게 배분하고 배치하여 어떤 백성도 소득에 있어 불평등한 차이를 두지 않게 하였다. 누구라도 바로의 땅을 경작하면 예외 없이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오분의 사의 양이 충분히 자신들의 삶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바로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이것이 백성들이 평등하게 사는 묘수였다. 기근에서만 견디어 살아내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기근 이후를 바라본 정책이었다. 7년 기근 이후는 모두가 고통 분담하여 견디고 살아낸 보상을 공평하게 누리도록 한 것이다. 기근 전보다 오히려 더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묘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피어났다.
-요셉이 이렇게 되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을 수립했을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요셉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처럼 실제적이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난만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를 넘어 근심거리가 된 이 시대… 그럼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분별하고 깨우쳐서 그 뜻대로 순종하면 된다. 순종 하기를 성실하게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변모된 교회를 보게 되리라. 지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하나님과 깊은 동행을 멈추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만 충만한 한국교회에 강제 안식년을 선언하신 듯 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교회, 사회가 인식과 실상의 격차가 날로 더 벌어지는 세태속에서도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하면, 기근 뒤에 개혁이 뒤따랐듯, 곤란과 곤경 이후 바른 교회가 서 있을 것이다.
*요셉의 관리능력, 성실, 충성, 치밀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 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애굽을 살렸다. 온 땅을 살렸다.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기근의 때만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이후의 삶이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나라 되게 하였다.
*고통의 순간만 임기응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통 이후의 삶을 함께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현상만 극복하려 하지 말자. 각종 반성경적 세태의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교회를 꿈꿔보자. 달라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셉의 통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무리일까?
1.관리능력
이 과정에서 발휘된 요셉의 능력은 “관리”로 압축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7년 풍년의 풍성함을 관리하지 못하면 흥청망청 낭비될 식량들이었다. 결코 7년의 흉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의 풍년 동안 넘치는 식량을 관리하면서 7년의 흉년을 충분히 견딜수 있다.
요셉의 관리의 핵심은 “중앙 관리”였다. “자치 관리”가 아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 넘치는 생산량으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식량을 모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침에 따라 “각 성에 저장하기 위해” 모았다.
차고 넘치는 7년의 풍년을 얼마든지 흥청망청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달은 요셉은 풍년을 관리했고, 흉년을 관리했다. 잘 나갈때나, 막힐때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관리하고 제어했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과 온 땅의 생명을 기근에서 살린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리능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 되어야 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사회 신뢰도 꼴찌라는 충격적인 지표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강하게 리모델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먹칠되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하나님께서 펼치신 이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의 가치를 지혜롭게 돌아보고 세워가야할 관리와 양육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한 감동에 순종하는 이들의 말씀을 따라 감당하는 성실한 관리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는 “관리”가 이루어지게 하셔서 선선히 이 때를 지나게 하실 줄 믿는다.
2.성실함, 이런 성실한 충성이라니(20절)
그렇게 모은 식량을 흉년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이 “돈”을 주고 샀고, 이후 가축과 땅을 차례로 지불하며 식량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대단하다. 요셉은 이 과정에서 축재를 하지 않는다. 성실하고 올곧게 백성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돈’, ‘가축’, ‘땅’을 그대로 바로에게 올린다(20절).
모든 식량 판매의 수입을 바로에게 온전히 바친다. 대단하지 않는가? 요셉은 보디발에게, 그리고 간수장에게 그렇게 했듯, 바로에게도 충성을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 성실한 충성이 애굽을 기근에서 관리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다. 성실이 요셉을 살렸고, 성실이 애굽을 살렸고, 성실이 온 땅을 살렸다! 한 사람의 성실이 세상을 살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3.준비된 계획대로(21, 24, 26절)
이와 함께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새번역_21절).” 단, 제사장들의 토지는 건들지 않았다. “…..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고, 바로가 그들에게 주는 녹 가운데는 먹거리가 넉넉하였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새번역_22절).”
그리고는 씨앗을 나누어 주고 소출의 1/5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5는 각각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24절). 7년 기근 동안 이루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백성들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25절)” 라고 하였다.
요셉에게는 단지 관리능력이나 성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을 미리 수립한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기근이 길어지면 돈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고 그 다음 대책이 필요하다. 7년의 기근은 충분히 삶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존의 상식, 보편적이 체계로는 이 기근을 견딜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예상한 대책이 필요 했으리라.
7년 기근 이라는 시간을 세밀히 고찰하고 그때 그때 맞는 대책을 진행해야 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혜안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시행 대책도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분명 아니다.
요셉은 계획을 준비했고 차분히 실행했다. 백성들의 돈이 떨어지니, 그들의 가축을 식량 대금으로 받아주었고, 이마저도 떨어지니 그들이 가진 땅을 식량 대금으로 받았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개혁을 시작했다.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옮겼다(21절). 즉 계획에 따라 이주 시켰다는 의미다. 그리고 종자들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소출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개인 소득이 되게 하였다(24절). 즉, 국가의 땅을 소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기근을 지나는 백성들은 이를 상당히 기쁘게 받아들였다(25절).
이런 정책의 시행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많은 고대 시대에 순발력있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틀을 확립했다는 의미다. 또, 백성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오분의 일만 내면 됐는데, 이 부과 기준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세 기준에 따라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 후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에 공평한 분배와 경작이 이루어져 고대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평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복잡한 계급사회,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따른 억압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 체계가 철저히 균등한 배분에 기초한 공정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토지는 480년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며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원리와 비슷하다. 요셉의 통치를 통해 그 나라의 토지 개념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땅의 소유로 인한 다툼, 분쟁이 사라지고 오직 분배 받은 대로 경작하고 삶을 영위하는 그 원리를 말이다. 7년의 흉년이 철저히 불평등의 사회였던 애굽을 적어도 삶의 기반 만큼은 모두가 바로의 땅에서 농사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평등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현재의 각자 도생, 전쟁의 시대가 우리를 어떻게 변모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격변들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심을 각성 시키신다. 교만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오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존재 앞에 겸손하도록 교정하신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채우게 하신다.
애굽에 기근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평등이 훌쩍 들어왔다.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나는?
-애굽의 7년 기근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준비한 요셉을 통해 극복하게 하시듯,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 시시각각 도전해 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순종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킨다. 요셉처럼 말이다.
-그 영향력은 단지 입에 발린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이 수반된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을 살렸고, 온 세상을 살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영향력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 걸음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릴 것이다.
-요셉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축재도 임의로 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결국 온 나라가 바로의 것이 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분명한 목적이 이내 드러난다. 억압과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균등과 평등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균형있게 배분하고 배치하여 어떤 백성도 소득에 있어 불평등한 차이를 두지 않게 하였다. 누구라도 바로의 땅을 경작하면 예외 없이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오분의 사의 양이 충분히 자신들의 삶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바로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이것이 백성들이 평등하게 사는 묘수였다. 기근에서만 견디어 살아내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기근 이후를 바라본 정책이었다. 7년 기근 이후는 모두가 고통 분담하여 견디고 살아낸 보상을 공평하게 누리도록 한 것이다. 기근 전보다 오히려 더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묘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피어났다.
-요셉이 이렇게 되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을 수립했을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요셉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처럼 실제적이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난만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를 넘어 근심거리가 된 이 시대… 그럼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분별하고 깨우쳐서 그 뜻대로 순종하면 된다. 순종 하기를 성실하게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변모된 교회를 보게 되리라. 지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하나님과 깊은 동행을 멈추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만 충만한 한국교회에 강제 안식년을 선언하신 듯 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교회, 사회가 인식과 실상의 격차가 날로 더 벌어지는 세태속에서도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하면, 기근 뒤에 개혁이 뒤따랐듯, 곤란과 곤경 이후 바른 교회가 서 있을 것이다.
*요셉의 관리능력, 성실, 충성, 치밀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 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애굽을 살렸다. 온 땅을 살렸다.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기근의 때만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이후의 삶이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나라 되게 하였다.
*고통의 순간만 임기응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통 이후의 삶을 함께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현상만 극복하려 하지 말자. 각종 반성경적 세태의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교회를 꿈꿔보자. 달라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셉의 통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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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4일
고센 땅에 정착하는 야곱의 가족
[창 46:28-47:12]
창 46:28-47:12 고센 땅에 정착하는 야곱의 가족
야곱과 요셉이 22년만에 상봉한다.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지 22년만에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땅 고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늘 생각나는 장면은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새번역_29절).” 22년만의 상봉은 꼭 껴안고 한참 울다, 또 껴안고 울다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기쁘면 저리 꼭 안은 손 풀지 않으려 또 안고 또 안았을까!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누린 후 바로 접견 계획과 향후 정착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31-34절). 요셉은 가족들을 맞아 들이기 위해 치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치밀한 준비는 이후 400년간 장기간 거류하게 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교,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게 하였다. “….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하)”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며 민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요셉이 미리 일러둔 대로 바로를 접견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에서 살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요셉이 계획한 대로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이르고 형제들 중 자신의 짐승을 맡아 기르도록 명령한다(5-6절). 이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따로 바로를 접견하도록 했다.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두 번의 축복(기도)를 해 준다. 야곱의 축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바로가 야곱에게 묻는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새번역_8절). 야곱이 대답한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새번역_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12:3), 야곱 자신에게도 약속하셨던(28:14)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성취 되었다. 애굽과 온 땅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 요셉을 통해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살아남게 된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하며 야곱은 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기막히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1.왜? 고센 땅일까?(34절)
요셉은 일관되게 야곱과 형제들에게 ‘고센땅’을 바로에게 고하도록 치밀하게 답변까지 미리 알려주며 준비했다. 왜 그랬을까?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절).”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기에 쉽게 애굽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고센땅을 허락할 것이다는 논리다. 요셉은 왜 이렇게 계획을 세웠을까?
22년간의 애굽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종교와 문화, 사회, 정치 구조 속에서 그도 원치 않는 애굽의 문화, 격식에 맞춰야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애굽 총리로서 애굽의 격식과 복장을 했기에 형제들이 알아채지 못한 점 등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의 체계가 애굽의 중심부에 함께 섞여 지내는 순간부터 겉잡을 수 없이 혼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나님이 없는 제국의 문명은 가나안 땅 시골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눈이 돌아가고 마음이 빼앗길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가족이 하나님 없는 애굽처럼 동화 된다면 이처럼 심각한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애굽 안에서 살아야 하나 애굽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없는 우상문화와 타락한 문화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애굽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고센 땅은(실제로 이 땅의 위치는 가나안과 가장 근접한 애굽의 변방이다) 하나님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요셉의 배려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이와같은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속에 살지만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2.축복의 힘(권위)는 어디서 나오나?(9절)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처음과 끝,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접견을 시작하며 왕국 규례에 걸맞지 않는 야곱의 축복은 결례가 될 수 있었겠으나 바로는 감명을 받은 듯하다. 야곱의 나이를 묻는 것은 그가 받은 축복에서 오묘하고도 신비한 뭔가를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그저 나이만 밝히지 않았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_새번역)”이라고 첨언 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 130년이라는 거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걸어온 햇수, 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햇수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로 읽어도 될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연수(연륜)에서 나오는 축복의 깊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뜻대로 조각된 시간들에서 나오는 삶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입술의 가벼운 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깃든 음성은 ‘오묘하고도 신비한’ 깊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증거할 때 힘이 되고 연륜이 더 하여 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나의 뜻을 꺽고 내려 놓는 시간들 속에서 다져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무게가 나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빌 때 권위(힘)가 드러난다.
나는?
-요셉의 치밀한 준비가 도전이 된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 삶이 매우 비체계적, 비논리적이 될 수 있지만, 충분히 설득되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야곱의 가족들의 거주지를 무리없이 확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이끌기 위해 요셉의 이런 면이 나에게 더욱 갈고 닦여지면 좋겠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가다듬어 마음에 동의가 일어나게 하여 기꺼이 움직이도록 하는 그 치밀함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 이루시는 일이지만, 요셉의 지혜로운 치밀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돋보이게 한다. 나의 목회도 나의 지혜로운 치밀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돋보이도록 하고싶다. 나의 무지나, 지혜롭지 못함이나, 준비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셉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거주지를 정했다면 가나안의 순박한 삶을 살다온 이들에게 당시 세계의 중심부의 화려한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달콤함과 구별되고 믿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성해야 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속에 있으니 분발하여 굳세게 하나님 나라 가치를 지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 온 사람이 빌어주는 축복은 급이 다르다! 흔히 영성, 혹은 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의 문명과 부대끼며, 정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녹아져 연륜이 되는 것이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럭 저럭, 대충 형식에 맞추어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흉내내며 살아온 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권위가 상대방이 느끼지 못한다. 왕궁의 접견 양식조차 뛰어 넘는 돌출된 행동이었겠지만 바로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아 야곱과 좀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 근거한다.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이를 충분히 견디고 이기게 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동행에서 삶의 힘이 나온다! 권위가 나온다. 나에게도 이 힘과 권위를 여전히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내가 고뇌하며 근심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능히 견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나의 힘이다. 오늘도 나에게 깨닫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말씀이 나의 힘이다.
*말씀이 힘(HIM)!
야곱과 요셉이 22년만에 상봉한다.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지 22년만에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땅 고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늘 생각나는 장면은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새번역_29절).” 22년만의 상봉은 꼭 껴안고 한참 울다, 또 껴안고 울다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기쁘면 저리 꼭 안은 손 풀지 않으려 또 안고 또 안았을까!
그렇게 재회의 기쁨을 누린 후 바로 접견 계획과 향후 정착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31-34절). 요셉은 가족들을 맞아 들이기 위해 치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치밀한 준비는 이후 400년간 장기간 거류하게 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교,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게 하였다. “….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하)”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며 민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요셉이 미리 일러둔 대로 바로를 접견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에서 살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요셉이 계획한 대로 고센 땅에 거주하도록 이르고 형제들 중 자신의 짐승을 맡아 기르도록 명령한다(5-6절). 이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따로 바로를 접견하도록 했다.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두 번의 축복(기도)를 해 준다. 야곱의 축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바로가 야곱에게 묻는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새번역_8절). 야곱이 대답한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새번역_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12:3), 야곱 자신에게도 약속하셨던(28:14) ‘땅의 모든 족속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성취 되었다. 애굽과 온 땅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 요셉을 통해 심각한 기근으로부터 살아남게 된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실제하며 야곱은 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기막히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1.왜? 고센 땅일까?(34절)
요셉은 일관되게 야곱과 형제들에게 ‘고센땅’을 바로에게 고하도록 치밀하게 답변까지 미리 알려주며 준비했다. 왜 그랬을까?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집짐승을 길러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이 다 그러합니다’ 하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형님들이 고센 땅에 정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목자라고 하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새번역_34절).”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리고 가까이 하지 않기에 쉽게 애굽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고센땅을 허락할 것이다는 논리다. 요셉은 왜 이렇게 계획을 세웠을까?
22년간의 애굽에서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종교와 문화, 사회, 정치 구조 속에서 그도 원치 않는 애굽의 문화, 격식에 맞춰야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애굽 총리로서 애굽의 격식과 복장을 했기에 형제들이 알아채지 못한 점 등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의 체계가 애굽의 중심부에 함께 섞여 지내는 순간부터 겉잡을 수 없이 혼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나님이 없는 제국의 문명은 가나안 땅 시골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눈이 돌아가고 마음이 빼앗길 가능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가족이 하나님 없는 애굽처럼 동화 된다면 이처럼 심각한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애굽 안에서 살아야 하나 애굽처럼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없는 우상문화와 타락한 문화에 젖어 들지 않기 위해, 애굽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고센 땅은(실제로 이 땅의 위치는 가나안과 가장 근접한 애굽의 변방이다) 하나님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요셉의 배려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이와같은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속에 살지만 세상 문화와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중요한 정체성이다.
2.축복의 힘(권위)는 어디서 나오나?(9절)
야곱은 바로를 접견하며 처음과 끝,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접견을 시작하며 왕국 규례에 걸맞지 않는 야곱의 축복은 결례가 될 수 있었겠으나 바로는 감명을 받은 듯하다. 야곱의 나이를 묻는 것은 그가 받은 축복에서 오묘하고도 신비한 뭔가를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그 질문에 그저 나이만 밝히지 않았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_새번역)”이라고 첨언 한다.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 130년이라는 거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걸어온 햇수, 혹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햇수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세월로 읽어도 될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연수(연륜)에서 나오는 축복의 깊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뜻대로 조각된 시간들에서 나오는 삶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의미기도 하다. 입술의 가벼운 말로 표현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깃든 음성은 ‘오묘하고도 신비한’ 깊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한 세월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증거할 때 힘이 되고 연륜이 더 하여 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나의 뜻을 꺽고 내려 놓는 시간들 속에서 다져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무게가 나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행동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나님의 권위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빌 때 권위(힘)가 드러난다.
나는?
-요셉의 치밀한 준비가 도전이 된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 삶이 매우 비체계적, 비논리적이 될 수 있지만, 충분히 설득되는 논리적이고 치밀한 준비가 야곱의 가족들의 거주지를 무리없이 확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이끌기 위해 요셉의 이런 면이 나에게 더욱 갈고 닦여지면 좋겠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가다듬어 마음에 동의가 일어나게 하여 기꺼이 움직이도록 하는 그 치밀함이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 이루시는 일이지만, 요셉의 지혜로운 치밀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돋보이게 한다. 나의 목회도 나의 지혜로운 치밀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돋보이도록 하고싶다. 나의 무지나, 지혜롭지 못함이나, 준비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셉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거주지를 정했다면 가나안의 순박한 삶을 살다온 이들에게 당시 세계의 중심부의 화려한 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섞이지 않는 것이었다.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달콤함과 구별되고 믿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각성해야 한다.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졌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 문명의 중심부에서 스스로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속에 있으니 분발하여 굳세게 하나님 나라 가치를 지켜 나가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 온 사람이 빌어주는 축복은 급이 다르다! 흔히 영성, 혹은 영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세상의 문명과 부대끼며, 정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기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녹아져 연륜이 되는 것이다.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럭 저럭, 대충 형식에 맞추어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흉내내며 살아온 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권위가 상대방이 느끼지 못한다. 왕궁의 접견 양식조차 뛰어 넘는 돌출된 행동이었겠지만 바로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아 야곱과 좀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에 근거한다.
-나그네와 같은 험악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이를 충분히 견디고 이기게 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동행에서 삶의 힘이 나온다! 권위가 나온다. 나에게도 이 힘과 권위를 여전히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내가 고뇌하며 근심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능히 견디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나의 힘이다. 오늘도 나에게 깨닫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말씀이 나의 힘이다.
*말씀이 힘(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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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3일
나도 너와 함께,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창 46:1-27]
요셉 이야기가 진행 되면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등장 하신다. 하지만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셉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함의 증거였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그 존재하심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바로 옆에 있었던 파랑새를 찾아 일평생 헤매는 어리석음의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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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2일
바로의 환대, 야곱의 기쁨
[창 45:16-28]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했다. 이를 통해 요셉에 대한 바로와 신하들의 신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면한다. 말뿐이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배려하는데, 곧 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야곱이 타고 올 ‘수레’도 여러 대 가지고 다녀 오라고 한다. 내려 올 때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굳이 가나안의 물건들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고 까지 이른다. 요셉을 얼마나 신뢰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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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1일
요셉은 한참을 울었다. 형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창 45:1-15]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면이다. 요셉은 유다의 연설에 감동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그리고 그는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애굽에 팔려온 것이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하며 안심시키고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를 모셔 오도록 요청한다. 요셉과 형제들이 뜨거운 포옹을 하며 감격적으로 재회한다.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을 밝힌다. 유다의 진실한 탄원을 듣고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민족으로 태동하기 위한 요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도단의 들에서 비극적인 생이별을 해야 했던 형제들이 22년만에 얼굴을 직면한다. 형들은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요셉은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처음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고 억눌렀던 재회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하는 형제들인가를 주시하며 점검했다. 그들이 말한대로 “한 사람의 아들들”임을 진실하게 증명하는 시험에 시험을 진행했다. 이 시험에 형제들은 그들의 ‘범죄’를 스스로 고백함으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돌아옴으로,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은잔으로 도붇으로 몰릴 때 공동 연대의 책임을 표명함으로, 결정적으로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간구함으로 “증명” 되었다.
형제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22년동안 암묵적으로 묻어 둔,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도단 사건이 자연스레 소환되고 이에 대해 직면하는 시간들이었다. 22년동안 외면하고 속이며, 감추었던 그 범죄에 “진실”하게 직면함으로서 이 시험들을 통과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험”은 진실함으로 인도하는 지렛대가 틀림없다. 스스로 진실에 대면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시험이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시험이 진실을 직면할 기회가 되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아버지와 서로를 속이며 뻔뻔스럽게 살아갔을 것이다. 믿음의 가족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속이면서도 예배도 드리고, 사역들도 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던져진 이 시험은 그야말로 은혜였다. 형제들은 이 시험 속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도 진지하게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거쳐 회복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은혜다.
1.한참 동안 울었다(1-4절)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22년동안의 세월이 담긴 통곡이었다.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새번역_2절).” 그의 통곡소리가 총리 관저와 바로의 궁에 울려 퍼졌다. 22년만의 재회의 기쁨은 이렇게 우렁찼다.
반면 형제들은 놀랐다. 요셉의 통곡 소리 만큼이나 마음이 놀랐다!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새번역_3절 하).” 유구무언. 말문이 탁 막혔다! 어찌할 줄 모르는 형들을 일일히 안으며 한참을 운다. 막내 베냐민을 꼭 끌어 안고 한참을 운다. 형제들은 함께 달려들어 요셉을 끌어안아야 하지만, 22년전 도단에서 저지른 일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그들은 말문도 막히고 몸도 굳어져 버렸다.
한참 동안 울고 있는 요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베냐민을 부둥켜 안고 우는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일일이 부둥켜 안고 우는(15절) 요셉에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2.똑같은 사건… 다른 해석…(5, 7, 8절)
형제들은 얼어붙었고, 요셉은 기쁨의 통곡이 터졌다. 22년만의 형제 상봉의 현장이 왜 이리 어색할까? 당연하다. 형제들은 22년전 그 사건을 늘 감추고, 덮으며 외면하고 살아왔다.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동생 요셉을 뒤돌아 보지 않고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들짐승에게 죽었다고 속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있다!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요셉을 만난 지금 형제들에게 22년 도단의 들이 소환 되었다. 그 때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형들의 마음은 딱딱한 경직함이… 이미 이 일을 해결한 요셉은 기쁨의 통곡으로 형들을 끌어안는다.
요셉은 이 22년전 도단 들의 사건을 성숙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새번역_5절).”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새번역_7-8절)”
형들이 나를 팔아넘기긴 했지만 “하나님이” 앞서서 나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앞서 나를 보낸신 것은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기 위하여, 자손들을 살아 남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애굽으로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형제들에게 선언한다. 요셉은 도단 들에서 팔려 애굽에서 보낸 노예생활을 이렇게 해석한다.
단지 보내신 것 뿐 아니라 ‘바로의 아버지,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 어른,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라고 말한다. 태양신과 그의 아들 바로마저 자신에게 절하였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기막히다! 하나님 이끄신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 일을 통해, 억울한 시간들이 쌓여서, 그 기나긴 시간들을 바라보며 관통하는 요셉 스스로의 해석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시간, 하나님이 완성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셉처럼 해석하는 믿음이 간절하다.
3.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오시라(9-13절)
아직 흉년이 다섯해나 남았음을 상기 시키며(11절) 형제들에게 ’이제 곧’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 올 것을 당부한다(9절).
요셉의 당부에는 매우 구체적인 애굽 이주 계획이 담겨 있다. 온 땅을 휩쓸 심각한 다섯해 동안의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지키시려는, 더 나아가 이미 말씀대로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담겼다(창 15:13-14).
요셉은 형제들에게 극심한 기근 속에서 살아남도록 살 땅을 이미 살 땅을 고센에 마련하고 온 가족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내려 올 것을 요청한다.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새번역_10-11절)”
“지체하지 마시고(9절)…빨리 모시고 내려 오십시오(13절)”
지난 세월 동안을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노의 시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으로 성숙하게 해석하였다. 이런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은혜로 바라보고 채우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다!
나는?
-그렇다! 극적인 형제 상봉의 감동보다 더 극적인 것은 요셉의 지난 삶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신 것이다” 이를 통해 분노와 원망의 시선을 가뿐히 뛰어 넘고 화해와 용서에서 나오는 기쁨의 통곡을 터뜨릴 수 있었다.
-요셉의 통곡은 한 맺힌 통곡이 아니라 용서와 기쁨의 통곡이었다. 이미 한은 풀렸다. 노예에서 총리로, 총리로서 애굽 전역을 다니며 성실하게 사역하고 결혼하여 얻은 첫 째 아들을 낳으며 이 고백을 고스란히 이미 담았다.(므낫세-잊다)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실제가 되었다. 아무리 고백하여 해결했다 하더라도 원수를 직면했다… 그러나 원수같은 형들을 바라보는 요셉의 눈은 이미 변해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신 길”이었기에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임을 밝힌 그 자리에서 형들이 온 몸이 ‘얼어붙은 것’과 비교가 된다.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범죄를 고백하고 회개 했지만, 당사자 요셉 앞에서 정작 온 몸음 얼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미 “하니님이 하신 일”에 대해 고백과 삶이 실제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형제들을 끌어안고 기쁨의 통곡을 흘릴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가족들의 이주 계획을 세우고 살 땅도 미리 정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하다. 아마도 형들이 첫 번째 식량을 구하러 올 때, 아니 아들 므낫세를 낳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이미 준비했을 것이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이처럼 실제적이었다.
-아… 나도 이처럼 실제적으로 말하고(고백하고) 행동하는 목사이기를 원한다.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이 이처럼 일치되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실제 하며 누리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 이겠나! 요셉은 기나긴 애굽에서의 22년동안 이를 실제 하며 누렸다. 주님으로 인해 구원 얻은 삶을 사는 오늘… 나도 역시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을 이리 일치하며 주님 안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 똑같이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마음으로 알고 보아야 하리라.
*특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새번역_8-9절)” 라고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하고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감동과 확신을 잊지 않고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인생의 어떤 사건들을 만날 때 과거 어느 때 말씀을 통해 각인해 주셨던 그 감동들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긴밀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 되는가?
*이것이 내가 말씀을 끈질기게 묵상하는 이유 중 하나다. “말씀으로 주신 감동….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하신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분명한 목표가 있다… “말씀이 살아내게 한다”는 것을 날마다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과 여건속에서 나를 굳건하게 붙잡는 것,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것, 온전한 쉼을 쉴 수 있는 것… 그것은 “말씀이 나를 살아내도록 이끄심”을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맡겨주실 영혼들이 이것 하나로 각자의 삶을 꿋꿋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곧 나의 목사로서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오늘도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한다. 요셉의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다!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자신을 밝힌다. 유다의 진실한 탄원을 듣고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민족으로 태동하기 위한 요람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도단의 들에서 비극적인 생이별을 해야 했던 형제들이 22년만에 얼굴을 직면한다. 형들은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요셉은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처음온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고 억눌렀던 재회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하는 형제들인가를 주시하며 점검했다. 그들이 말한대로 “한 사람의 아들들”임을 진실하게 증명하는 시험에 시험을 진행했다. 이 시험에 형제들은 그들의 ‘범죄’를 스스로 고백함으로,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돌아옴으로,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 은잔으로 도붇으로 몰릴 때 공동 연대의 책임을 표명함으로, 결정적으로 유다가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간구함으로 “증명” 되었다.
형제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22년동안 암묵적으로 묻어 둔,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도단 사건이 자연스레 소환되고 이에 대해 직면하는 시간들이었다. 22년동안 외면하고 속이며, 감추었던 그 범죄에 “진실”하게 직면함으로서 이 시험들을 통과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험”은 진실함으로 인도하는 지렛대가 틀림없다. 스스로 진실에 대면할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시험이 진실에 직면하게 했다. 시험이 진실을 직면할 기회가 되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아버지와 서로를 속이며 뻔뻔스럽게 살아갔을 것이다. 믿음의 가족이라고 했으니 이렇게 속이면서도 예배도 드리고, 사역들도 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던져진 이 시험은 그야말로 은혜였다. 형제들은 이 시험 속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고,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도 진지하게 목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거쳐 회복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은혜다.
1.한참 동안 울었다(1-4절)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22년동안의 세월이 담긴 통곡이었다.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새번역_2절).” 그의 통곡소리가 총리 관저와 바로의 궁에 울려 퍼졌다. 22년만의 재회의 기쁨은 이렇게 우렁찼다.
반면 형제들은 놀랐다. 요셉의 통곡 소리 만큼이나 마음이 놀랐다!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새번역_3절 하).” 유구무언. 말문이 탁 막혔다! 어찌할 줄 모르는 형들을 일일히 안으며 한참을 운다. 막내 베냐민을 꼭 끌어 안고 한참을 운다. 형제들은 함께 달려들어 요셉을 끌어안아야 하지만, 22년전 도단에서 저지른 일이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그들은 말문도 막히고 몸도 굳어져 버렸다.
한참 동안 울고 있는 요셉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베냐민을 부둥켜 안고 우는 그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일일이 부둥켜 안고 우는(15절) 요셉에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2.똑같은 사건… 다른 해석…(5, 7, 8절)
형제들은 얼어붙었고, 요셉은 기쁨의 통곡이 터졌다. 22년만의 형제 상봉의 현장이 왜 이리 어색할까? 당연하다. 형제들은 22년전 그 사건을 늘 감추고, 덮으며 외면하고 살아왔다.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동생 요셉을 뒤돌아 보지 않고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렇게 하고 아버지 야곱에게 들짐승에게 죽었다고 속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살아있다!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요셉을 만난 지금 형제들에게 22년 도단의 들이 소환 되었다. 그 때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형들의 마음은 딱딱한 경직함이… 이미 이 일을 해결한 요셉은 기쁨의 통곡으로 형들을 끌어안는다.
요셉은 이 22년전 도단 들의 사건을 성숙하게 해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새번역_5절).” ”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새번역_7-8절)”
형들이 나를 팔아넘기긴 했지만 “하나님이” 앞서서 나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앞서 나를 보낸신 것은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기 위하여, 자손들을 살아 남게 하시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애굽으로 나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형제들에게 선언한다. 요셉은 도단 들에서 팔려 애굽에서 보낸 노예생활을 이렇게 해석한다.
단지 보내신 것 뿐 아니라 ‘바로의 아버지,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 어른,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라고 말한다. 태양신과 그의 아들 바로마저 자신에게 절하였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기막히다! 하나님 이끄신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 일을 통해, 억울한 시간들이 쌓여서, 그 기나긴 시간들을 바라보며 관통하는 요셉 스스로의 해석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 시간, 하나님이 완성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셉처럼 해석하는 믿음이 간절하다.
3.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오시라(9-13절)
아직 흉년이 다섯해나 남았음을 상기 시키며(11절) 형제들에게 ’이제 곧’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 올 것을 당부한다(9절).
요셉의 당부에는 매우 구체적인 애굽 이주 계획이 담겨 있다. 온 땅을 휩쓸 심각한 다섯해 동안의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지키시려는, 더 나아가 이미 말씀대로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담겼다(창 15:13-14).
요셉은 형제들에게 극심한 기근 속에서 살아남도록 살 땅을 이미 살 땅을 고센에 마련하고 온 가족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내려 올 것을 요청한다. “아버지께서는 고센 지역에 사시면서, 저와 가까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여러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시고, 양과 소와 모든 재산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더 계속됩니다. 제가 여기에서 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께 딸린 모든 식구가 아쉬운 것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새번역_10-11절)”
“지체하지 마시고(9절)…빨리 모시고 내려 오십시오(13절)”
지난 세월 동안을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노의 시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으로 성숙하게 해석하였다. 이런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은혜로 바라보고 채우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다!
나는?
-그렇다! 극적인 형제 상봉의 감동보다 더 극적인 것은 요셉의 지난 삶에 대한 해석이다.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이루신 것이다” 이를 통해 분노와 원망의 시선을 가뿐히 뛰어 넘고 화해와 용서에서 나오는 기쁨의 통곡을 터뜨릴 수 있었다.
-요셉의 통곡은 한 맺힌 통곡이 아니라 용서와 기쁨의 통곡이었다. 이미 한은 풀렸다. 노예에서 총리로, 총리로서 애굽 전역을 다니며 성실하게 사역하고 결혼하여 얻은 첫 째 아들을 낳으며 이 고백을 고스란히 이미 담았다.(므낫세-잊다)
-그리고 그 고백이 오늘 실제가 되었다. 아무리 고백하여 해결했다 하더라도 원수를 직면했다… 그러나 원수같은 형들을 바라보는 요셉의 눈은 이미 변해 있었다. “하나님이.. 이끄신 길”이었기에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임을 밝힌 그 자리에서 형들이 온 몸이 ‘얼어붙은 것’과 비교가 된다.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범죄를 고백하고 회개 했지만, 당사자 요셉 앞에서 정작 온 몸음 얼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미 “하니님이 하신 일”에 대해 고백과 삶이 실제가 되어 있었다. 기꺼이 형제들을 끌어안고 기쁨의 통곡을 흘릴 수 있었다.
-이는 이미 가족들의 이주 계획을 세우고 살 땅도 미리 정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하다. 아마도 형들이 첫 번째 식량을 구하러 올 때, 아니 아들 므낫세를 낳고 에브라임을 낳으면서 이미 준비했을 것이다. 요셉의 신앙고백은 이처럼 실제적이었다.
-아… 나도 이처럼 실제적으로 말하고(고백하고) 행동하는 목사이기를 원한다.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이 이처럼 일치되어 함께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을 실제 하며 누리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 이겠나! 요셉은 기나긴 애굽에서의 22년동안 이를 실제 하며 누렸다. 주님으로 인해 구원 얻은 삶을 사는 오늘… 나도 역시 입술의 고백과 삶의 행동을 이리 일치하며 주님 안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한다. “…..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 똑같이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마음으로 알고 보아야 하리라.
*특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새번역_8-9절)” 라고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기억하고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감동과 확신을 잊지 않고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인생의 어떤 사건들을 만날 때 과거 어느 때 말씀을 통해 각인해 주셨던 그 감동들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긴밀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 되는가?
*이것이 내가 말씀을 끈질기게 묵상하는 이유 중 하나다. “말씀으로 주신 감동…. 말씀을 통해 확인하게 하신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분명한 목표가 있다… “말씀이 살아내게 한다”는 것을 날마다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과 여건속에서 나를 굳건하게 붙잡는 것, 앞으로 달려 나가게 하는 것, 온전한 쉼을 쉴 수 있는 것… 그것은 “말씀이 나를 살아내도록 이끄심”을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맡겨주실 영혼들이 이것 하나로 각자의 삶을 꿋꿋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 곧 나의 목사로서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오늘도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한다. 요셉의 “하나님이…” 하셨습니다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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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0일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창 44:18-34]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형제들을 대표해서 요셉 앞에서 구구절절 호소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어 절망 가운데 요셉의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이 다시 요셉 앞에 섰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이 요셉의 종이 되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자 유다는 형제를 대표해서 베냐민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감동적으로 설명한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의 생명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인 베냐민 대신 요셉의 종이 되어 남겠다고 말한다.
1.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보내야 할 이유(20, 23, 26, 29-31절)
먼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인데 이 아이와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은 죽고, 홀로 남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다(20절)는 것과 고로 아버지의 생명이 막내와 연결되어 있다고 간절하게 설명한다. 이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아버지는 의욕을 잃고 목숨을 내려놓을 것이고(23절), 그러니 베냐민은 꼭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시기와 질투로 요셉을 잔인하게 팔아 넘긴 유다의 모습은 온간데 없다. 요셉을 없애므로 야곱이 받을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유다가 이제 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유다의 호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17번 정도 등장한다.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아버지 야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지금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편애하는 야곱은 정말 변하지 않고 있으나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2년전 태연하게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했고 야곱의 고통스러움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그는 지금 야곱이 겪어야 할 깊은 절망에 공감하며 이를 방지하고자 적극 직면하고 있다. 두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해서일까?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32-34절)
유다는 아버지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베냐민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다(32-33절). 자신은 그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간청한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죽이려던 형제들에게 몸값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유다가 이제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것으로 인해 상심하고 영혼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보다 차라리 여기에 남겠다는 것이다.
베냐민과 연결된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구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 놓는다. 동생 베냐민뿐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이 실제다!.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를 넘어선 “긍휼”이 기꺼이 자신을 종으로 내어 놓겠다고 호소한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했듯 기꺼이 ‘담보’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3.더 나아가(33절)
유다가 이렇게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3절).” 이 고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은잔이 나온 막내가 자기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막내를 대신해 남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형제들도 다 내려가고 ‘자신만’ 총리의 노예로 이 땅에 남겠다는 것이다.
유다는 애굽으로 떠나오기전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맹세 그대로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셉에게 보인다. 22년전 동생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넘긴 그 형이 아니다.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내가 죽은 후 거리의 창녀를 찾았던 그 유다가 아니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나는?
-22년동안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긴 후 유다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악함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죽음의 심판을 행하셨다. 후손을 이어야 할 문제로 인해 갈등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아내도 죽는다. 창녀를 거리낌 없이 찾을 정도로 그의 삶은 무절제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동생 베냐민을 보호하고 아버지 야곱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뒤처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지키려고 자신을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달리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간섭받는 인생은 이렇게 변한다. 22년동안 무던히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 순식간에 이리 바뀔 수 있다. 격한 감정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자신과 자기의 가족조차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야곱이 처하게 될 고통과 슬픔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거리낌이 없다.
*22년전에는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서슴없이 노예로 팔아 넘겼지만, 지금은 아버지 야곱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 보내려 한다.
*멈추지 않는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담보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위해 베냐민을 대신하여 스스로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다.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의 조상다운 면모가 틀림없다. 이런 자기희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후 넷째지만 영적 장자와 같은 자리로 우뚝 서게 했다.
*”제가 대신하게 하소서” 요셉이 보고자 했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실한 형제애가 구현되고 있다. 진실로 한 형제됨이 드러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을 탓하기 보다 “다 함께” 총리 관저로 다시 돌아와 “함께” 탄원하는 모습에서, 더 나아가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남을테니 동생 베냐민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이 시험은 이미 통과 되었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8)”라고 말했던 유다가 이제는 “베냐민과 형제들은 다 돌아가고 내가 남겠습니다”, 즉 “다 살고 나는 죽으리다”고 외치는 것이다.
*유다의 이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죽어 다 살리이다!”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살리려 한다! 나도 내가 확실히 죽고 죽어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지독한 내 입장, 주장을 죽여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거창한 희생을 꿈꾸는 망상보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의 이기적인 마음부터,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부터 버려야 겠다.
*오늘 내가 기꺼이 자처해야 할 그 무엇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실 때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유다도 확실히 변했음을 보는데, 나의 삶도 이렇게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공동체의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1.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보내야 할 이유(20, 23, 26, 29-31절)
먼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인데 이 아이와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은 죽고, 홀로 남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각별하다(20절)는 것과 고로 아버지의 생명이 막내와 연결되어 있다고 간절하게 설명한다. 이 아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면 아버지는 의욕을 잃고 목숨을 내려놓을 것이고(23절), 그러니 베냐민은 꼭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에 시기와 질투로 요셉을 잔인하게 팔아 넘긴 유다의 모습은 온간데 없다. 요셉을 없애므로 야곱이 받을 고통과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유다가 이제 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유다의 호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17번 정도 등장한다. 베냐민을 반드시 고향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아버지 야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유다는 지금 아버지 야곱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편애하는 야곱은 정말 변하지 않고 있으나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2년전 태연하게 요셉을 팔아넘기자고 했고 야곱의 고통스러움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그는 지금 야곱이 겪어야 할 깊은 절망에 공감하며 이를 방지하고자 적극 직면하고 있다. 두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해서일까?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2.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32-34절)
유다는 아버지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베냐민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자청한다(32-33절). 자신은 그런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고 간청한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죽이려던 형제들에게 몸값을 받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자고 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유다가 이제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 온 것으로 인해 상심하고 영혼이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 보다 차라리 여기에 남겠다는 것이다.
베냐민과 연결된 아버지 야곱의 생명을 구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 놓는다. 동생 베냐민뿐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이 실제다!.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를 넘어선 “긍휼”이 기꺼이 자신을 종으로 내어 놓겠다고 호소한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아버지 야곱에게 약속했듯 기꺼이 ‘담보’가 되겠다고 한 것이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3.더 나아가(33절)
유다가 이렇게 확실하게 변화된 것은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새번역_33절).” 이 고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청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은잔이 나온 막내가 자기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막내를 대신해 남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형제들도 다 내려가고 ‘자신만’ 총리의 노예로 이 땅에 남겠다는 것이다.
유다는 애굽으로 떠나오기전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맹세 그대로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셉에게 보인다. 22년전 동생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넘긴 그 형이 아니다.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내가 죽은 후 거리의 창녀를 찾았던 그 유다가 아니다.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나는?
-22년동안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긴 후 유다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악함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죽음의 심판을 행하셨다. 후손을 이어야 할 문제로 인해 갈등도 있었다. 그 와중에 아내도 죽는다. 창녀를 거리낌 없이 찾을 정도로 그의 삶은 무절제 했다. 그런 그가 변했다.
-동생 베냐민을 보호하고 아버지 야곱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하다.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뒤처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약속한 대로 지키려고 자신을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다. 달리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유다는 확실히 변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간섭받는 인생은 이렇게 변한다. 22년동안 무던히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이 순식간에 이리 바뀔 수 있다. 격한 감정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자신과 자기의 가족조차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야곱이 처하게 될 고통과 슬픔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말뿐 아니라 행동이 거리낌이 없다.
*22년전에는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서슴없이 노예로 팔아 넘겼지만, 지금은 아버지 야곱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막내 베냐민을 반드시 돌려 보내려 한다.
*멈추지 않는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담보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고, 이제는 아버지 야곱을 위해 베냐민을 대신하여 스스로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한다.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시는 가문의 조상다운 면모가 틀림없다. 이런 자기희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후 넷째지만 영적 장자와 같은 자리로 우뚝 서게 했다.
*”제가 대신하게 하소서” 요셉이 보고자 했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실한 형제애가 구현되고 있다. 진실로 한 형제됨이 드러난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온 은잔을 탓하기 보다 “다 함께” 총리 관저로 다시 돌아와 “함께” 탄원하는 모습에서, 더 나아가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남을테니 동생 베냐민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이 시험은 이미 통과 되었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43:8)”라고 말했던 유다가 이제는 “베냐민과 형제들은 다 돌아가고 내가 남겠습니다”, 즉 “다 살고 나는 죽으리다”고 외치는 것이다.
*유다의 이 말과 행동이 곧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가! “내가 죽어 다 살리이다!”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살리려 한다! 나도 내가 확실히 죽고 죽어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지독한 내 입장, 주장을 죽여 공동체가 살아나도록 해야겠다. 거창한 희생을 꿈꾸는 망상보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의 이기적인 마음부터,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부터 버려야 겠다.
*오늘 내가 기꺼이 자처해야 할 그 무엇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실 때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유다도 확실히 변했음을 보는데, 나의 삶도 이렇게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공동체의 확실한 변화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유다가 확실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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