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로의 환대, 야곱의 기쁨 [창 45:16-28]
 – 2026년 05월 22일
– 2026년 05월 22일 –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했다. 이를 통해 요셉에 대한 바로와 신하들의 신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면한다. 말뿐이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배려하는데, 곧 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야곱이 타고 올 ‘수레’도 여러 대 가지고 다녀 오라고 한다. 내려 올 때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굳이 가나안의 물건들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고 까지 이른다. 요셉을 얼마나 신뢰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 기도제목

*주님, 공동체의 문제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순전하게 풀어지고 해결되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주님, 바로의 선대 속에 요셉의 애굽에서의 삶이 증명됩니다. 나의 세상속에서의 삶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선대를 통해 증거되도록, 제가 먼저 세상을 선대하며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요셉의 꿈이, 야곱의 꿈이 이루어짐을 봅니다. 꿈꾸게 하고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저도 그렇게 꿈을 꾸며 살겠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했다. 이를 통해 요셉에 대한 바로와 신하들의 신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할 것을 권면한다. 말뿐이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배려하는데, 곧 아이들과 부인들, 그리고 야곱이 타고 올 ‘수레’도 여러 대 가지고 다녀 오라고 한다. 내려 올 때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굳이 가나안의 물건들을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고 까지 이른다. 요셉을 얼마나 신뢰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1.해와 달, 열 한별이 엎드리다(16-20절)
태양신의 아들, 자신이 곧 태양인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이른 말은 왕이 내리는 명령(조서)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가족들에게 하듯 세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요셉의 말이기는 하지만 창 45:8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이어 생각한다면 바로의 반응은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는 상황으로 바라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바로의 선대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받드는 공경이 묻어 있다.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 이렇게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형식적인 엎드림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엎드림으로 이루어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드릴 터이니, 그 기름진 땅에서 나는 것을 누리면서….(새번역_18절)”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새번역_20절)”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을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가족’처럼 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바로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새번역_8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요셉을 노예로 내몰아 애굽으로 내던져지게 한 이해 못 할 섭리다. 노예로 내던져졌으나 총리의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신 놀라운 은혜다. 결국 꿈을 주신대로 이루시는 섭리다. 그 과정이 요셉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완성된 섭리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은 시점에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안전히 보호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미리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를 위해 온 애굽이 요셉에게 큰 빚을 지게 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불가지만 그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성실하게 걷다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누리게 하신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헛되이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를 그저 하나님 뜻대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라는 고백처럼 의지하고 살 때 “때”가 되면 찬란하게 누리게 되는 은혜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 꾸게 하신대로, 요셉은 그 놀라운 정점을 누리고 있다.



2.요셉의 여행 준비(21-24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정점을 누리는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지키고 나누려고 세밀하게 반응한다.

먼저 형제들에게 바로가 명령한 대로 수레 여러 대를 내주고 여행길의 먹을 것도 내어 준다(21절). 이것은 바로의 궁에서 내온 것들일 것이다. 형제들에게는 새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비한다. 베냐민에게는 특히 용돈과 옷을 다섯벌이나 주었다(22절). 여기에 ‘아버지에게 드릴 또 다른 예물’을 마련한다. “…이집트에서 나는 귀한 물건을 수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싣고, 아버지가 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 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분량 자체가 어마 어마하다.

요셉은 아끼지 않는다.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베풀고 베푼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신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 권력은 이렇게 나누고 섬기도록 허락하셨음을 알고, 머리 속 지식에 머물게 하지 말고 행동하는 베풂이 기쁨을 배가 시킴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보다 더 중요한 행간은 요셉의 용서와 화해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바로가 선대하니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형식적인 베풂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선물뿐 아니라 오가는 여정의 준비까지 완벽하게 준비한다. 온 가족이 내려와야 하기에 그에 걸맞는 치밀한 준비를 함께 배려한다. “이집트의 진귀한 물건은 수나귀 열 마리에…이집트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빵과 다른 먹거리는 암나귀 열마리에 나누어 실었다(새번역_23절)”

애굽과 가나안을 오가는 여정은 단순한 일정이 아니다. 가나안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가축들도 함께 내려와야 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소요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물과 곡식을 싣고 올라간 나귀들의 등에 다시 가족들의 짐을 싣고 내려 올 것이다. 그러나 굳이 수나귀, 암나귀 각 열마리씩 준비한 것은 그 기간에라도 자연스럽게 나귀들이 불어나도록 염두 한 것이 틀림없다. 또 여행중의 우유 공급도 염두한 듯 하고… 요셉은 이렇게 지혜롭고 치밀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는 길에 서로들 탓하지 마십시오(새번역_24절)”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형제들이 여행 중에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로 대부분 받아들이지만,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굳이 이런 다툼을 다시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와 관련된 유대 주석가들의 해석은 여행길에서 늘상 마주치는 노상강도를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귀중품과 물건을 싣고 가나안으로 돌려 보내는데 요셉이 어느 정도의 경호원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알릴 때 자신들의 과거 범죄의 책임 공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요셉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들에 이런 상황들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고하게 행동으로 보여준다.

충분히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기에 그저 감사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룬 마당에 과거의 행적에 얽매여 마음을 빼앗기고, 다시 그 선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이 기쁨의 여정이 훼손되지 않기를 최선을 다해 점검하는 모습으로 나에게는 비춰진다. 화해하여 아낌없이 선물을 베풀고 용서 했으니, 더 이상 과거의 책임 유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으며,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 오가는 모든 여행 물품을 넘치도록 여유롭게 준비하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귀한 은혜를 지키며 누리려는 모습이 읽힌다. 나도 그리해야겠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지키기를 베풀고 나누며 누려야지. 말로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 노력해야 겠다.



3.내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니! 암, 가고 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25-28절)
상상해 보았다! 그 웅장한 수레 행렬이 야곱의 집에 도착하고, 형제들이 내려서 야곱의 장막으로 들어가 “오매불망” 애굽으로 내려간 베냐민을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차 있던 그에게 아들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야곱은 꿈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 생시인 것을 알아 차리게 한 것은 한껏 흥분하여 말하는 아들들의 아우성이 아니었다. 베냐민의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말을 듣고서 야곱은 정신이 나간 듯 어리벙벙하여, 그 말을 곧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아들들에게서 모두 전해 듣고, 또한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 야곱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새번역_26-27절).”

열한명의 아들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시 돌아 온 것 만으로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출발한 그 날부터 계속 ‘오매불망’ 바랬던 일이었을 것이다. 늘상 꿈 꾸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돌아온 그 날도 어쩌면 전날 밤 꿈을 꾸었든지,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든지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돌아왔다. 더구나 아들들이 전해 준 말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이야기다. 죽은 줄 알고 그렇게 힘들었던 요셉이 살아있고 더구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렇지! 이것은 꿈이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보낸 애굽의 수레들… 아마 이 수레는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의전용으로 사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아마도 야곱은 평생 보지도, 타보지도 못했을 화려한 수레였을 것이다. “그 수레들을 보고서야!”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새번역_28절).”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다.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임했던 “함께하심”의 형통이 22년만에 돌아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요셉의 살아돌아옴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형제들의 화해가, 친형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조차하지 못했던 베냐민 등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야곱이 바라는 대로가 아니었다. 형제들이 원하는 대로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형통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죄에 대한 회개와 형제간의 화해가 이루어 지며 야곱의 가족 뿐 아니라 온 애굽 땅과 주변 세계까지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바로 그 ‘형통’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요셉의 이야기의 행복한 클라이막스는 “하나님의 뜻”이 일상에서 행복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2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셉에게는 노예로서의 삶이, 형제들에게는 죄에 대한 자각과 고백과 회개가 이루어지기까지, 야곱에게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비탄에 잠기며 막내 아들도 애굽으로 내려 보내야 하는 결단이 이루어지기까지, 결국 시간이 필요했다. 삶의 모든 걸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때가 필요하다.

-나의 삶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 속에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한다. 형들처럼 죄를 감추고, 속이는 시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의 선대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요셉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요셉을 위해 그렇게 베풀었다. 도전된다. 나의 삶도 나로 인해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선대 받을 수 있도록 올바르게 살아야겠다. 세상을 선함으로 대하며 살아야겠다.

-요셉은 자신을 악함으로 대한 애굽을 선대하였다. 충분히 노예의 신분을 안긴 애굽을 원망하고 대적할 수 있었으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성한다. 성실하게 일을 행한다. 그렇게 애굽을 선대했다. 더 나아가 극심할 7년 흉년을 대비하는 7년의 풍년 기간에 온 힘을 쏟아 준비하였다. 그 선대함이 바로의 선대함으로 돌아왔다.

-바로가 얼마나 요셉을 신뢰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일상을 하나님의 선함으로 채워 나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그 시간”에 세상의 선대도 나타나지 않을까? 까닭없는 조롱과 비난과 환난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바로의 선대는 내 자신과 교회가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선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게 했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를 살리고, 가족도 지킬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들을 이미 용서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의 실제가 이렇게 중요하다.

-결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일 수 없다. 말로만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곧 예상치 못한 삶의 환경이 닥치면 그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난에 처해지면 처해지는대로,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말뿐이 신뢰는 불평과 원망, 혹은 교만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인격적인 관계를 다지고, 온 삶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며 이를 믿음으로 행사하며 뚜벅뚜벅 걷다보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살아온” 요셉으로 인해 형제들도 회복되고 특히 아버지 야곱도 회복된다. 즉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내 자신 뿐 아니라 형제들을, 공동체를 살린다는 의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가 살아난다. 주위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게 된다. 주위의 환경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함을 꿋꿋히 지키고 누리며 사는 것이 곧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사리며,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

*오늘 나는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 “감추고, 속이며” 범죄하며 살 것인가? 오늘을 살리는 삶이 내일도 살린다. 내가 신뢰함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도 신뢰가 살아난다. 요셉의 신실한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함이 온 애굽을 기근에서도 기쁨이 그치지 않게 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형제들을 회복시켰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바로와 신하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요셉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되었다. 요셉의 신실한 동행이 야곱을 살려냈다! 나의 하나님과의 신실함 동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