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살리는 요셉의 치밀함이 보인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제시한 대비책을 구체화 시켰고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구상이 계획으로 계획이 결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요셉은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바로와 애굽의 유익에 헌신했다. 애굽은 바로의 것이 되었어도 그 안에서 백성들은 기근에서 구출받았고 보호를 받게 되었다. 요셉은 어떻게 7년 기근속에서 애굽을 다스렸을까?
1.관리능력
이 과정에서 발휘된 요셉의 능력은 “관리”로 압축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7년 풍년의 풍성함을 관리하지 못하면 흥청망청 낭비될 식량들이었다. 결코 7년의 흉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의 풍년 동안 넘치는 식량을 관리하면서 7년의 흉년을 충분히 견딜수 있다.
요셉의 관리의 핵심은 “중앙 관리”였다. “자치 관리”가 아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 넘치는 생산량으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식량을 모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침에 따라 “각 성에 저장하기 위해” 모았다.
차고 넘치는 7년의 풍년을 얼마든지 흥청망청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달은 요셉은 풍년을 관리했고, 흉년을 관리했다. 잘 나갈때나, 막힐때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관리하고 제어했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과 온 땅의 생명을 기근에서 살린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리능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 되어야 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사회 신뢰도 꼴찌라는 충격적인 지표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강하게 리모델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먹칠되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하나님께서 펼치신 이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의 가치를 지혜롭게 돌아보고 세워가야할 관리와 양육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한 감동에 순종하는 이들의 말씀을 따라 감당하는 성실한 관리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는 “관리”가 이루어지게 하셔서 선선히 이 때를 지나게 하실 줄 믿는다.
2.성실함, 이런 성실한 충성이라니(20절)
그렇게 모은 식량을 흉년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이 “돈”을 주고 샀고, 이후 가축과 땅을 차례로 지불하며 식량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대단하다. 요셉은 이 과정에서 축재를 하지 않는다. 성실하고 올곧게 백성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돈’, ‘가축’, ‘땅’을 그대로 바로에게 올린다(20절).
모든 식량 판매의 수입을 바로에게 온전히 바친다. 대단하지 않는가? 요셉은 보디발에게, 그리고 간수장에게 그렇게 했듯, 바로에게도 충성을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 성실한 충성이 애굽을 기근에서 관리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다. 성실이 요셉을 살렸고, 성실이 애굽을 살렸고, 성실이 온 땅을 살렸다! 한 사람의 성실이 세상을 살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3.준비된 계획대로(21, 24, 26절)
이와 함께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새번역_21절).” 단, 제사장들의 토지는 건들지 않았다. “…..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고, 바로가 그들에게 주는 녹 가운데는 먹거리가 넉넉하였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새번역_22절).”
그리고는 씨앗을 나누어 주고 소출의 1/5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5는 각각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24절). 7년 기근 동안 이루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백성들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25절)” 라고 하였다.
요셉에게는 단지 관리능력이나 성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을 미리 수립한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기근이 길어지면 돈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고 그 다음 대책이 필요하다. 7년의 기근은 충분히 삶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존의 상식, 보편적이 체계로는 이 기근을 견딜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예상한 대책이 필요 했으리라.
7년 기근 이라는 시간을 세밀히 고찰하고 그때 그때 맞는 대책을 진행해야 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혜안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시행 대책도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분명 아니다.
요셉은 계획을 준비했고 차분히 실행했다. 백성들의 돈이 떨어지니, 그들의 가축을 식량 대금으로 받아주었고, 이마저도 떨어지니 그들이 가진 땅을 식량 대금으로 받았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개혁을 시작했다.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옮겼다(21절). 즉 계획에 따라 이주 시켰다는 의미다. 그리고 종자들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소출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개인 소득이 되게 하였다(24절). 즉, 국가의 땅을 소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기근을 지나는 백성들은 이를 상당히 기쁘게 받아들였다(25절).
이런 정책의 시행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많은 고대 시대에 순발력있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틀을 확립했다는 의미다. 또, 백성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오분의 일만 내면 됐는데, 이 부과 기준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세 기준에 따라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 후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에 공평한 분배와 경작이 이루어져 고대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평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복잡한 계급사회,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따른 억압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 체계가 철저히 균등한 배분에 기초한 공정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토지는 480년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며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원리와 비슷하다. 요셉의 통치를 통해 그 나라의 토지 개념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땅의 소유로 인한 다툼, 분쟁이 사라지고 오직 분배 받은 대로 경작하고 삶을 영위하는 그 원리를 말이다. 7년의 흉년이 철저히 불평등의 사회였던 애굽을 적어도 삶의 기반 만큼은 모두가 바로의 땅에서 농사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평등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현재의 각자 도생, 전쟁의 시대가 우리를 어떻게 변모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격변들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심을 각성 시키신다. 교만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오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존재 앞에 겸손하도록 교정하신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채우게 하신다.
애굽에 기근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평등이 훌쩍 들어왔다.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나는?
-애굽의 7년 기근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준비한 요셉을 통해 극복하게 하시듯,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 시시각각 도전해 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순종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킨다. 요셉처럼 말이다.
-그 영향력은 단지 입에 발린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이 수반된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을 살렸고, 온 세상을 살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영향력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 걸음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릴 것이다.
-요셉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축재도 임의로 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결국 온 나라가 바로의 것이 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분명한 목적이 이내 드러난다. 억압과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균등과 평등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균형있게 배분하고 배치하여 어떤 백성도 소득에 있어 불평등한 차이를 두지 않게 하였다. 누구라도 바로의 땅을 경작하면 예외 없이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오분의 사의 양이 충분히 자신들의 삶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바로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이것이 백성들이 평등하게 사는 묘수였다. 기근에서만 견디어 살아내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기근 이후를 바라본 정책이었다. 7년 기근 이후는 모두가 고통 분담하여 견디고 살아낸 보상을 공평하게 누리도록 한 것이다. 기근 전보다 오히려 더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묘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피어났다.
-요셉이 이렇게 되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을 수립했을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요셉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처럼 실제적이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난만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를 넘어 근심거리가 된 이 시대… 그럼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분별하고 깨우쳐서 그 뜻대로 순종하면 된다. 순종 하기를 성실하게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변모된 교회를 보게 되리라. 지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하나님과 깊은 동행을 멈추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만 충만한 한국교회에 강제 안식년을 선언하신 듯 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교회, 사회가 인식과 실상의 격차가 날로 더 벌어지는 세태속에서도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하면, 기근 뒤에 개혁이 뒤따랐듯, 곤란과 곤경 이후 바른 교회가 서 있을 것이다.
*요셉의 관리능력, 성실, 충성, 치밀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 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애굽을 살렸다. 온 땅을 살렸다.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기근의 때만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이후의 삶이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나라 되게 하였다.
*고통의 순간만 임기응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통 이후의 삶을 함께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현상만 극복하려 하지 말자. 각종 반성경적 세태의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교회를 꿈꿔보자. 달라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셉의 통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무리일까?
1.관리능력
이 과정에서 발휘된 요셉의 능력은 “관리”로 압축할 수 있다. 철두철미한 7년 풍년의 풍성함을 관리하지 못하면 흥청망청 낭비될 식량들이었다. 결코 7년의 흉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7년의 풍년 동안 넘치는 식량을 관리하면서 7년의 흉년을 충분히 견딜수 있다.
요셉의 관리의 핵심은 “중앙 관리”였다. “자치 관리”가 아니다. 자신의 수고와 땀의 결실이 넘치는 생산량으로 나타나면서 백성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식량을 모은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침에 따라 “각 성에 저장하기 위해” 모았다.
차고 넘치는 7년의 풍년을 얼마든지 흥청망청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보여주신 뜻을 분명히 깨달은 요셉은 풍년을 관리했고, 흉년을 관리했다. 잘 나갈때나, 막힐때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삶을 관리하고 제어했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과 온 땅의 생명을 기근에서 살린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리능력이 어느 때보다 발휘 되어야 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한국사회 신뢰도 꼴찌라는 충격적인 지표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를 강하게 리모델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 먹칠되고 있다. 지금은 그저 하나님께서 펼치신 이 상황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의 가치를 지혜롭게 돌아보고 세워가야할 관리와 양육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한 감동에 순종하는 이들의 말씀을 따라 감당하는 성실한 관리가 험난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세워지는 “관리”가 이루어지게 하셔서 선선히 이 때를 지나게 하실 줄 믿는다.
2.성실함, 이런 성실한 충성이라니(20절)
그렇게 모은 식량을 흉년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이 “돈”을 주고 샀고, 이후 가축과 땅을 차례로 지불하며 식량을 구입했다. 이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다. 대단하다. 요셉은 이 과정에서 축재를 하지 않는다. 성실하고 올곧게 백성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돈’, ‘가축’, ‘땅’을 그대로 바로에게 올린다(20절).
모든 식량 판매의 수입을 바로에게 온전히 바친다. 대단하지 않는가? 요셉은 보디발에게, 그리고 간수장에게 그렇게 했듯, 바로에게도 충성을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 성실한 충성이 애굽을 기근에서 관리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다. 성실이 요셉을 살렸고, 성실이 애굽을 살렸고, 성실이 온 땅을 살렸다! 한 사람의 성실이 세상을 살린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
3.준비된 계획대로(21, 24, 26절)
이와 함께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새번역_21절).” 단, 제사장들의 토지는 건들지 않았다. “…..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정기적으로 녹을 받고 있고, 바로가 그들에게 주는 녹 가운데는 먹거리가 넉넉하였으므로, 그들은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새번역_22절).”
그리고는 씨앗을 나누어 주고 소출의 1/5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4/5는 각각의 소유가 되게 하였다(24절). 7년 기근 동안 이루어진 일종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고 백성들은 소작인이 되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 백성들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25절)” 라고 하였다.
요셉에게는 단지 관리능력이나 성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치밀한 계획을 미리 수립한 것이 틀림없다.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것은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기근이 길어지면 돈은 반드시 고갈될 것이고 그 다음 대책이 필요하다. 7년의 기근은 충분히 삶의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기존의 상식, 보편적이 체계로는 이 기근을 견딜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충분히 예상한 대책이 필요 했으리라.
7년 기근 이라는 시간을 세밀히 고찰하고 그때 그때 맞는 대책을 진행해야 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혜안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시행 대책도 필요했을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것이 분명 아니다.
요셉은 계획을 준비했고 차분히 실행했다. 백성들의 돈이 떨어지니, 그들의 가축을 식량 대금으로 받아주었고, 이마저도 떨어지니 그들이 가진 땅을 식량 대금으로 받았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개혁을 시작했다.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전 지역에 사는 백성들을 옮겼다(21절). 즉 계획에 따라 이주 시켰다는 의미다. 그리고 종자들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지어 소출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오분의 사는 개인 소득이 되게 하였다(24절). 즉, 국가의 땅을 소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극심한 기근을 지나는 백성들은 이를 상당히 기쁘게 받아들였다(25절).
이런 정책의 시행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수가 많은 고대 시대에 순발력있게 대처할 수 있는 국가의 틀을 확립했다는 의미다. 또, 백성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오분의 일만 내면 됐는데, 이 부과 기준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세 기준에 따라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된 후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기에 공평한 분배와 경작이 이루어져 고대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평등’의 개념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복잡한 계급사회, 혹은 불평등한 구조에 따른 억압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 체계가 철저히 균등한 배분에 기초한 공정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토지는 480년후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하며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원리와 비슷하다. 요셉의 통치를 통해 그 나라의 토지 개념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땅의 소유로 인한 다툼, 분쟁이 사라지고 오직 분배 받은 대로 경작하고 삶을 영위하는 그 원리를 말이다. 7년의 흉년이 철저히 불평등의 사회였던 애굽을 적어도 삶의 기반 만큼은 모두가 바로의 땅에서 농사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평등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코로나 이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현재의 각자 도생, 전쟁의 시대가 우리를 어떻게 변모 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격변들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심을 각성 시키신다. 교만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오만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존재 앞에 겸손하도록 교정하신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정신없이 통과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채우게 하신다.
애굽에 기근이라는 고통이 없었다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평등이 훌쩍 들어왔다. 이전보다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나는?
-애굽의 7년 기근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준비한 요셉을 통해 극복하게 하시듯,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통해 시시각각 도전해 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아래 순종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킨다. 요셉처럼 말이다.
-그 영향력은 단지 입에 발린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는 능력이 수반된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순발력있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 관리능력이 애굽을 살렸고, 온 세상을 살렸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영향력은 이와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 걸음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며 나라를 살릴 것이다.
-요셉은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 축재도 임의로 하지 않는다. 오직 바로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결국 온 나라가 바로의 것이 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의 분명한 목적이 이내 드러난다. 억압과 속박이 아니다. 오히려 균등과 평등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균형있게 배분하고 배치하여 어떤 백성도 소득에 있어 불평등한 차이를 두지 않게 하였다. 누구라도 바로의 땅을 경작하면 예외 없이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신이 하기에 따라 오분의 사의 양이 충분히 자신들의 삶의 토대가 되도록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바로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이것이 백성들이 평등하게 사는 묘수였다. 기근에서만 견디어 살아내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기근 이후를 바라본 정책이었다. 7년 기근 이후는 모두가 고통 분담하여 견디고 살아낸 보상을 공평하게 누리도록 한 것이다. 기근 전보다 오히려 더 공정한 사회가 되게 한 것이다. 이런 묘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피어났다.
-요셉이 이렇게 되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계획을 수립했을까?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요셉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늘 “하나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처럼 실제적이다. 반드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난만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나아간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를 넘어 근심거리가 된 이 시대… 그럼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분별하고 깨우쳐서 그 뜻대로 순종하면 된다. 순종 하기를 성실하게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변모된 교회를 보게 되리라. 지금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하나님과 깊은 동행을 멈추지 않으면 이루어 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열심만 충만한 한국교회에 강제 안식년을 선언하신 듯 하다. 갈수록 위축되는 교회, 사회가 인식과 실상의 격차가 날로 더 벌어지는 세태속에서도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고 집중하면, 기근 뒤에 개혁이 뒤따랐듯, 곤란과 곤경 이후 바른 교회가 서 있을 것이다.
*요셉의 관리능력, 성실, 충성, 치밀한 계획의 수립과 실행 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애굽을 살렸다. 온 땅을 살렸다. 하나님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이는 기근의 때만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이후의 삶이 이전과 확연히 다른 나라 되게 하였다.
*고통의 순간만 임기응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통 이후의 삶을 함께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현상만 극복하려 하지 말자. 각종 반성경적 세태의 세상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교회를 꿈꿔보자. 달라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셉의 통치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무리일까?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은혜를 함께 나누는 댓글이 여기에 표시됩니다.
대댓글도 같은 공간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