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도 너와 함께,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창 46:1-27]
 – 2026년 05월 23일
– 2026년 05월 23일 –
요셉 이야기가 진행 되면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등장 하신다. 하지만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셉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함의 증거였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그 존재하심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바로 옆에 있었던 파랑새를 찾아 일평생 헤매는 어리석음의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 기도제목

*주님, 하나님의 민족을 이루기 위해 잠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하는 야곱의 가족과 동행하시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큰 위로가 됩니다. 저의 작은 삶도 하나님이 돌보시고 사용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을 붙잡고 살아가겠습니다.
요셉 이야기가 진행 되면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등장 하신다. 하지만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셉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함의 증거였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그 존재하심을 분명하게 보이신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바로 옆에 있었던 파랑새를 찾아 일평생 헤매는 어리석음의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이 드디어 애굽으로 일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쁨과 아브라함때부터 삶을 일구어 온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두려움(막막함, 아쉬움 등등 여러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 교차하였다. 무엇보다 매우 늙어서 이동하는 여정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앞둔 야곱은 하나님과 어떻게 이 길을 시작했을까?



1. 하나님과 독대하다!(1-2절)
22년동안 자신의 삶을 깊은 어둠에 거하게 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자체가 그의 영혼에 햇빛이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온 가족이 “함께” 내려간다. 기쁨과 환희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삶의 중대한 변환점, 도전점 이었기에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다.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의 ‘브엘세바’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새번역_3-4절).”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즉 독대하였다. 형 에서의 살의를 피해 하란으로 내려가는 중 ‘벧엘’(‘브니엘’)에서, 그리고 온 가족과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 올 때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사를 받으신 후 밤중에 야곱을 부르신 것이다. 온 가족이 애굽으로 출발할 때 이미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자신이 살아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장), 아버지 이삭이(26장) 거처를 옮길 때 제사 드렸던 것처럼 자신도 드렸을 가능성이 크다. 브엘세바는 야곱의 가족들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고, 이곳은 남방 한계선 이었기에 여기를 지나면 광야가 시작되고 그 광야를 지나면 애굽이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이렇게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제사(예배)를 드린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다. 삶을 마무리해야 할 나이임에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그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인생은 두려울 것 없다. 또한 여지껏(매번) 드러나지 않았을 지라도 하나님은 늘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다(3-4절)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새번역_3-4절).”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요셉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분명히 있었음을 하나님은 아셨다.그래서 먼저 격려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2절)” 이후 분명한 약속을 주신다.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3절)’ ‘나도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 간다!. 그리고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온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4절)’

세 가지의 약속을 주셨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 민족을 이루게 하는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겠다는 거다. 두 번째 약속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이루어 가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있는 곳에 나도 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하나님께서)” 주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약속은 야곱의 연로함으로 인해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혹시 내려가는 길에 잘못되어 요셉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와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야곱을 어루만져 주시는 약속이다. 걱정마라, 요셉이 너의 죽음을 지킬 것이다.

특히 두번 째 약속은 야곱의 온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든든한 약속이다. 지금 내려가는 것에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돌아오는 것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은 400여년이 지난 훗날 후손들이 누리게 될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애굽에 있는 요셉에게만 있는 약속이 아니다.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야곱에게만 약속된 것도 아니다.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새번역_6-7절).”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6절)….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7절)’ 라고 기록한 대로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다. “함께” 살고 있었던 모든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들어 가시고 민족으로 불어난 “모두”를 하나님께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다.



3. “함께”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8-27절)
레아와 실바의 후손들(8-18절), 라헬과 빌하의 후손들(19-27절)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모두 합한 가족 수는 70명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이래 벌써 70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70명의 가족 인원은 정확한 총합이 아니다. 병행 본문인 민수기 26장이나 역대상 4장의 기록과 차이가 분명하다. 또, 요셉의 자손도 아들 둘만 두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명으로 명시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을 9명으로 기록한 70인역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계다. 즉 의도적으로 ’70’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기록했다는 뜻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가족 인원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먼저 노아 후손이 흩어져서 이룬 열국의 수도 70개로 기록했다. 이를 신학적으로 흩어진 70개의 열국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70명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애굽으로 내려간지 4대(430년)만에 민족을 이룰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신 대로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후손의 숫자는 장정만 60만명이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시며 야곱의 가족들 70명이 “함께” 애굽에 거주하는 4대 동안 늘 함께 하셨다.

야곱의 가족 70명이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정확한 인원수가 아니라, 아무도 배제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형제간의 살해, 유기라는 극악 범죄 가운데서, 또 극심한 기근 가운데서도 이 가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문제 많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끄신 “진실함”의 시험에서 범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끄신 후 비로소 “한 사람의 아들들”로 “함께”하는 이들을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문제 없는 인생, 가족이 어디있겠는가! 모두가 문제 투성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명’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야곱의 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함께” 이끄신다. 개개인의 면면이 잘나고 완전해서 “모두 칠십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저 암묵적인 동의와 묵인으로 잔혹한 형제에 대한 범죄가 벌어지게 했던 잇사갈이나, 납달리, 스불론과 같은 형제들도, 이후 제 멋대로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방탕했던 유다도, 세겜성에서 잔혹함을 절제하지 못했던 르우벤이나 레위도,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서 배제 되지 않았다. 모두 다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민족을 이루게 된다.

늘 하나님과 동행했다던 요셉, 회개의 확실한 변화를 보인 유다 정도만 구원의 계보, 민족의 계보에 기록하지 않으셨다.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셨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조차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은혜 아니면 이 나라에 들어가 살아 갈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바지, 안정으로 마감해야 할 나이에 애굽 이민을 결정했다! 아무리 그 나라의 총리 빽이 있다하나 새로운 도전이 주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다. 이때 드디어 하나님께서 야곱과 독대하신다! 걱정마라! 이 모든 일은 나의 계획대로 되어지는 일이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내려갈 때부터 다시 올라올 때까지 내가 함께 한다! 가족 70명으로 내려가지만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다. 너의 죽음을 요셉이 지킬 것이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자 거기서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곳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갱신하신 곳이다(창 21:31~33). 야곱은 분명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기근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옳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았던 옛날의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처럼 환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청종하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은 이처럼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며 그에게 애굽행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 않고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복된 약속도 주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애굽이라도 안전할 것이다. 애굽의 안전은 요셉이나 애굽 땅의 부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4대만에 번성케 하여 다시 약속의 따응로 친히 이끌고 나오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4대 내내 이 백성의 안전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안전하게 살면서도 늘 나그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실제 애굽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낳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선민의 수가 장정만 70만명에 이르게 하셨다.

-한편 야곱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다의 아들들과 라헬이 낳은 아들들이다.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까지 기록하고 있고, 라헬에게만 유독 ‘야곱의 아내’라는 호칭을 불러서 강조한다. 야곱의 영적인 장자는 유다가, 육적인 장자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70명의 이스라엘(가족)을 구원하고, 다른 한 사람 유다는 그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야곱의 가족 명부에는 이례적으로 여러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남성들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다섯 명의 여인도 이러한 정신을 보여준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