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5-38 요한의 증언, 하늘과 족보의 증언 _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한은 더 강한 자로 오시는 예수님과 여러 가지로 좋은 소식을 전하다(15~20절), 헤롯에게 투옥을 당한다. ‘누가’는 요한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투옥되는 장면으로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고 곧바로 예수님의 세례와 계보를 이어간다(21~38절).
1. 더 강한 이를 소개한 요한(15~17절)
백성들은 요한을 “그 그리스도”가 아닌지 궁금해한다(15절). 이스라엘의 자유를 소망하며 해방의 통로인 광야로 몰려왔고 하나님께서 요한을 해방을 이끄는 “그리스도”로 세우신 것은 아닌지 알고 싶어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보다 다른 한 사람을 지위와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한다(16~17절).
먼저, 오시는 이는 요한보다 강한 분이기에 요한은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되지 못한다. 당시 문화는 주인이 식사하려고 앉을 때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하인의 몫이었다. 요한은 오시는 이와 자신의 지위가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힌 것이다. 둘째,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 용서와 구원을 상징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는 정화의 역할을 한다. 씻음 받기를 거부하면 심판으로 귀결된다. 회개하는 자는 세례를 받고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세례를 거부한다. 중요한 것은 요한은 실제로 죄를 용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물세례는 죄 용서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 여기서 성령과 불은 물과 같은 정화와 씻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다만, 물세례는 구원의 상징이지만, 성령과 불세례는 실제로 구원을 주는 행위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원의 상징인 물세례를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
요한의 세례와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들은 곳간에 모이는 알곡과 같게 된다. 반면, 요한의 경고를 거부하여 예수님의 불과 성령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쭉정이로 간주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누가’는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 요한이 회개를 외치고 그리스도가 시작한 나라에 초대하지만, 그에게는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능력은 없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태어나 자랐고 일생 광야에서 경건의 훈련을 받고 있어도 구원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도 자신은 구원하는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요한은 구약의 예언대로 태어나고 여자가 낳는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7:26~28),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만 향하게 했다.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거짓 선지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빌미로 사람들을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
2. 요한의 투옥(18~20절)
‘누가’는 요한의 투옥 이야기를 예수님이 세례받는 이야기 앞에 배치하여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 배열을 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요한의 시대와 도래할 예수의 시대를 완전하게 구분하려는 의도였다. 누가의 시각으로 보면 요한은 여전히 구약 시대에 속한 인물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시대는 그가 속한 옛 시대와 다른 새 시대(눅 16:16)다.
이 단락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있어 끝부분에 해당한다.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포괄적인 표현으로 그의 사역을 정의한다. 좋은 소식은 메시아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요한은 여러 가지로 권하면서 예수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이어지는 19~20절은 요한의 투옥 이야기를 기록한다. 특이한 점은 마가와 마태와는 달리 그의 죽음을 다루지는 않는다. ‘누가’는 이제까지 요한의 사역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이제 요한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요한의 일을 길게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안디바)가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헤롯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요한은 후에 헤롯의 생일 때 그 딸의 요청 때문에 처형을 당한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정해진 그의 때에 왔다가 메시아가 온 후 정해진 그의 때가 다하여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다.
3. 예수가 세례받는다(21~22절)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하늘이 열리는 일, 성령이 강림하신 일, 하늘에서 소리가 난 일, 이 모든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하늘로부터 난 소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한다. 그 소리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메시지와 “나는 너를 기뻐한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전자는 이스라엘의 왕위 대관식 때 선포되는 메시지(시 2:7)이고, 후자는 이사야에 언급된 하나님의 종에 관한 메시지를 반영한다(사 42:1).
21절에서 “기도하실 때”라는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변화산 사건에서 “기도하시러(9:28)” 산에 가셨고, “기도하실 때(9:29)”라는 언급과 제자들이 기도에 관해 묻고(11:1),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11:2~40), 그리고 종말론적 실제에 직면하여 항상 기도할 것을 강조(18:1; 21:36)하는 것과 기도에 대한 비유들인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11:5~8), 과부와 재판관 비유(18:1~8),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18:9~14) 등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예들은 누가가 기도를 강조했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기도의 중요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 그분을 만나는 행위이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마음을 느끼며 그의 뜻을 새기는 행위다.
22절에서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즈음 성령이 그 위에 강림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4:14)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성령과의 공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하늘에서 난 소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 이후 예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최후에 하나님까지 기술하여 이를 통해 족보를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족보를 세례를 받으신 일과 시험을 받으신 일 사이에 배치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그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 14:6).
4. 예수의 족보(23~28절)
23절은 예수의 나이를 직접 밝힌다. 극히 이례적이다.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의 공적 사역과 관련하여 나이를 기록한 곳은 없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의 나이를 분명하게 명시한다. 이미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받은 것과(2:21) 유년 시절 열두 살 때 성전에서의 사건 때도 언급했었다(2:42). 삼십 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밝힌 것에 대한 이유를 본문이 밝히지 않지만, 추측하기로 다윗이 왕위에 오른 나이를 염두했을 것이다(삼하 5:4). 이것은 아들의 왕권을 다윗의 보좌와 연결한 것(1:32)을 고려하면 수긍이 간다.
누가복음의 예수 족보는 마태복음 족보와 비교하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올라간다. 예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 더 나아가 아담,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내려온다. 이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유대인의 족보 형식을 취하는 것이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이기에 헬라식 족보 형식을 취한 것이다.
또 누가복음의 신학적 특성 중의 하나가 보편성의 추구인데,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예수의 세례 장면과 연결해 나열한다는 점이다. 예수의 세례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분을 드러낸 후 인간의 족보를 소개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 즉 “인자”임을 나타내려 했다. 이를 통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드러내어 그가 참 하나님이자 또한 참사람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족보의 구조를 살피자면, 하나님을 제외하고 78명을 일곱씩 11대로 나누면, 예수는 열두 번째 대의 시작으로 등장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요셉(23절)과 요셉(24)이 그리고 맛다디아(25절)와 맛다디아(26절)가 각각 일곱 대로 묶인다. 29절의 동명이인인 “예수”는 전체 명단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그를 기점으로 위아래에 각각 “엘리에셀-맛닷-레위-요셉-맛다디아(맛다다)”가 순서대로 공히 등장한다. 또 다윗의 아들로 솔로몬이 아닌 나단(대상 3:5)이 언급된 것도 독특하다. 누가의 족보에 나타난 패턴과 구조에서 그의 기록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동일한 이름은 17명 밖에 없다. 두 족보가 예수님을 다윗적 메시아로서 정체성을 강조하지만, ‘누가’는 다윗 왕조의 계보 명단을 의도적으로 꺼린다. 대신 세례받으실 때 “네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된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기원인 이 족보를 통해 확증된다.
나는?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기대를 따라 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사명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며, 자신이 하는 일은 메시아가 오셔서 할 일과 비교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오직 메시아이신 그분을 드러내며, 그분이 하실 무서운 심판에 이 백성이 대비하게 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이었다. 이처럼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지를 묻지 않으면, 신앙의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륜과 많은 악행에 눈감지 않고 담대히 지적하다가 옥에 갇힌다. 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신다는 “좋은 소식”을 받기 위해 먼저 내가 죄인이라는 “궂은 소식”부터 받아야 한다. 거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분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지역의 구분도 없다. 좋은 소식에 대한 소망이 간절할수록 나의 죄를 지적하는 궂은 소식이라는 마중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요한의 지도자의 죄악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의 소극성과 묘하게 비교된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전함에 있어 대상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것은 비루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라도 하나님 말씀의 선명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서명자여야 하겠다.
-또한 “좋은 소식”에 목마르다고 무작정 좋은 소식을 남발하면 곤란하다. 좋은 소식이 좋은 소식 되기 위해서는 내 안의 죄악이라는 “궂은 소식”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궂은소리에 민감할수록 좋은 소식은 더 선명해진다.
-요한은 좋은 소식과 궂은 소식을 같이 전했다. 진실로 죄를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는 메시아의 나라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의 복을 누리겠지만, 헤롯과 헤로디아처럼 악행을 고집하는 이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받은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했건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투옥이었다. 그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내다보게 한다. 오늘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복음으로 산 대가가 요한과 예수님이 겪은 것과 같을지라도 거기에만 생명이 있으니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받을 때가 있고, 전성기를 지나 뒤안길로 들어갈 때가 반드시 온다. 나 또한 그러하리라. 요한의 입장과 퇴장, 특히 끝까지 자기 사명의 자리인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 모습 깊이 새기고, 퇴장을 잘 염두에 둬야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시면서도 죄인을 구원할 자신의 사명에 “순종”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죄인들과 똑같은 운명 아래 자신을 놓는다. 특별히 예수님의 공생애 첫 행동을 “기도”로 묘사한 것은, 주님의 삶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기도의 삶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죄인인 백성들이 회개를 위해 받는 세례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받으셨다. 그렇게 하여 백성과 하나가 되셨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린다. 이는 예수님이 세례받는 다른 죄인들과는 달리 새 창조의 시대(홍수 뒤에 새 시대를 알린 비둘기, 창 8:11) 를 여는 약속된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사 11:1, 2; 42:2; 61:1~2). 예수님의 순종에 하늘이 화답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명 선언문이요, 취임식이다. 하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자기 백성을 대속할 고난 받는 종(사 42:1)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이 요단강 강가에서 하늘의 증언 속에 공생애 시작을 준비하신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새번역_21절)”이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다는 부분이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지 모른다. 요한의 만류에도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셨던 주님은 세례받으신 후에도 겸손하게 “기도하셨다” 그렇게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
-예수님조차 겸손하게 기도하셨다. 이때뿐 아니라 공생애 모든 시간 동안 주님은 늘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공생애를 감당하셨다. 예수님처럼 닮아 살아가겠노라 한다면, 예수님의 기도부터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아들인 아담을 대신하여 온 새 아담이다. 첫 아담은 인류에게 정죄와 사망의 역사를 가져왔지만, 새 아담이신 예수님은 아담의 죄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음을, 이 족보는 보여준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역사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는 마태의 족보와 달리, 누가의 족보는 예수님부터 아브라함을 넣어 아담과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는 “요셉의 아들(23절)”인 예수님은 세례를 받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21절)”뿐 아니라, 온 인류”를 하나님의 첫아들 아담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지막 아들(22, 28절)”임을 보여주는 족보이다.
-요셉부터 하나님까지는 모두 77명(7×11)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예수님은 12(선민의 수) 번째 7(완전한 수)을 시작하시는 분이다. 즉, 자기가 택한 백성의 새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다.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예수님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받을 때가 있고, 전성기를 지나 뒤안길로 들어갈 때가 반드시 온다. 나 또한 그러하리라. 요한의 입장과 퇴장, 특히 끝까지 자신의 사명의 자리인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 모습 깊이 새기고, 퇴장을 잘 염두해야겠다.
**예수님이 요단강가에서 하늘의 증언 속에 공생애 시작을 준비하신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새번역_21절)”이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다는 부분이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지 모른다. 요한의 만류에도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셨던 주님은 세례 받으신 후에도 겸손하게 “기도하셨다” 그렇게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 오셨다”
**예수님조차 겸손하게 기도하셨다. 이때 뿐 아니라 공생애 모든 시간동안 주님은 늘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공생애를 감당하셨다. 예수님처럼 닮아 살아가겠노라한다면, 예수님의 기도부터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다.
**족보의 증언도 기막히다. 목적은 여인의 후손임을 행간 속에서 읽히도록 했다는 점이다. 다윗의 직계는 없어졌다. 유대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고 돌아오며, 말라기 이후 430년을 지나면서 친척들이 서로 후계를 이어 나갔다…. 가장 최근의 예수님의 할아버지도 친 할아버지가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어질 수 없는 계보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시기 합당한 것이다. 유대 사람들은 다윗의 아들 예수여 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펼쳐 진다. 세례를 받으신 장면에서, 하늘의 증언, 족보의 증언을 거치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신 공생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힘차게 시작하신다. 요한도 이를 증언하고, 하늘도 증언하며, 족보도 증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주님, 세례 요한의 삶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왕의 불의에 눈 감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저도 세상과 세상 지도자들의 불의에 하나님의 시선으로 분명하게 바라보겠습니다. “좋은 소식”만이 아닌 좋은 소식을 좋은 소식 되게 하는 궂은 소식을 전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주님, 새 이스라엘의 시작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족보가 인상적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왔으니, 그에 합당하게 살아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