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교회와 성도, 어떻게? 이렇게! [고전 3:16-4:5]
 – 2026년 06월 06일
– 2026년 06월 06일 –
바울을 비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을 추종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가 지도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교회에 속했다고 말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사람을 따르지 말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인 사도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분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맡겨 주신대로 함께 지어가는(16-17절)’ 교회 공동체임을 상기시킨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성도)”임을 인식시키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 성전 답게(16-17절)
특정 지도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뭉쳐서 결국 분쟁으로까지 나타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전되었음과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질문한다. 분쟁하는 것 만으로도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더럽히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를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파당을 만들고 분쟁을 일삼는 문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새번역_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벌이는 분쟁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거다.

어릴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교회가 즐거운 곳만은 아니었다. 같은 동네 교회가 서로 그렇게 싸웠다. 어른들은 상대 교회를 비방했다. 얼마나 말씀을 몰랐는지…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대로 헤쳐모여 반대 진영의 성도들과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나는 그것이 교회인줄 알았다.

그런데 차츰 성경에 눈을 뜨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가면서 그런 모습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어른들은 싸움이 취미인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평안함이 얼마나 기막힌 은혜인지 늘 실감한다. 더온누리교회가 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평안한 걸음 걸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바울은 “거룩”을 힘있게 강조한다. 우리가 성전임을 이미 선포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는 이미 성전 되었다.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도 거룩하다 여기듯, 성도된 나의 몸도 거룩하게 그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2. 세상과 다르게!(18-4:5절)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 땅에서 실제로 어떻게 드러내며 살까? 크게 교회에 대한 시각과 인식의 측면에서(18-23절)와 원치 않게 분쟁의 도구가 된 지도자에 대한 자세(2:1-5) 측면에서 살펴보자.


1). 세상 지혜로 성전을 관리하려 마라(18-23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것이 지혜다(18절). 주님께 있어 세상 지혜는 어리석은 것, 헛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라(19-21절). 그리고 교회 뿐 아니라 지도자들, 생명이나 사망 다 하나님의 것이다(22-23절). 즉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경쟁하고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말라는 의미다.

곰곰히 생각하며 반복하다보니, 결국 분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교회를 세상 지혜로 바라보고 세상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나 철학과 충돌될 때 이로 인해 힘들어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하나님의 것이 분명한데, 세상 지혜, 제도, 상식의 기반하여 내 교회, 우리 교회로 여기는 강한 의식이 왜 이리 익숙할까!


2).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보라(4:1-5)
지도자들에 대한 시선을 이렇게 가지라고 직언한다. 인식을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 지혜의 철학자나 선생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지혜, 복음)을 맡은 자로 여기라(1절). 이렇게 직언하면서 “마땅히(이와 같이)” 라고 조건을 단다. 세상 지혜를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비밀, 복음을 맡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지도자들을 자기들이 듣고 싶은 철학, 학문을 알려주는 “세상 지혜의 책 읽어주는 남자”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당사자는 “충성(신실함)”이 필요하지만, 성도들도 세상 지혜를 전하는 자로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전하고 가르치며 양육하는) 자로 보라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전적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다. 성경에 이른대로 가르치지 못하니 선택청취하는 성도들에게 당연히 맺혀진 열매다. 한낱 교회의 관리인으로, 대신 전도하는 이로, 섬겨주는 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생각과 자세로 지도자들을 대하는 무수한 성도들이 있다. 이런 생각과 자세가 가져오는 교회안의 파열음은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를 피멍들게 하고 있다.

교회,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공동체이니까. 세상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겨야 하니까.



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 백성으로 새 창조하셨다. 그리고 교회(성도)를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아주셨다. 구약에서 성전을 파괴하거나 더럽히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듯이, 하나님의 새 성전인 교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를 흔들고 하나 됨을 깨뜨리는 파벌적 행태 역시 멸망을 당할 일이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삼아주셨다(16~17절).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은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해위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의 기초를 흔들거나 교회의 하나 됨과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참 성전은 반목과 미움과 소외가 자리 잡을 틈을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공동체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의 눈에 가장 미련한 메시아였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사람을 둘러싼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속적 지혜에 집착한 결과다. 세상 지혜를 내세워 다투고 갈라서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독히 어리석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모른 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자,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오만이다(18~20절). 하나님의 지혜에는 민감하고 세상의 헛된 지혜에는 둔감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며 화평을 이루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되, 다툼을 일으켜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속적인 지혜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모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성도들의 소유다. 그들은 교인들이 상전으로 모시고 시기하고 다투면서까지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지도자나 성도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을 자랑하고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만물의 상속자인 교회가 세상 지혜와 사람에 기대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자기모순일 뿐이다. 사역자들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4:1)일 뿐, 성도들이 상전처럼 모시거나 시기하고 다투면서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21~23절).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판단하실 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할 뿐이라고 말한다(4:1~5절). 그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개의치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살피시는 주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소명과 충성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사람들의 인정이나 대가에 목말라한 적이 없는지 늘 돌아볼 일이다.


-교회 문제만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프다. 바울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생각할 때마다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바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다움의 출발은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 계신다는 “실제”다. 이 실제가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 실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지혜로가 아니다.

-이 실제는 세상 선생을 따라 가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낸 바울과 아볼로, 게바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 선생에게서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마라…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맡은 자들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단과 회복 지침을 내리는 바울의 단호한 명령형들이 본문에 가득 차있다.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 세상 철학과 비교하여 선택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하나님의 지혜”를 명령한다.

-당시와 오늘날의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하겠으나 바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복음”, “지혜”에 대한 확고하고 선명한 가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필요하다. 오늘날은 지식이 없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가득한 수많은 주장들, 가르침들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따를 것인가의 문제는 의외로 “확신”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확고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 주님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세상 철학이 세상 선생이 이를 헷갈리게 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에서 출발한다는 것…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이를 따르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생기는 실제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인박힌 세상 관습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다. 신앙 연수에 상관없이 이 싸움에 무지하다면 늘 세상 철학과 선생을 찾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지혜를 구하여 분쟁의 씨앗이 된다. 또 여전히 세상 철학과 선생을 고집한다면 분쟁의 열매를 계속 맺히는 것이 된다.

-결국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기에 세상 나라를 떠나야 하는데,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연약함이다. 그래서 구원은 변재되지 않지만 세상 나라 관습, 철학, 선생을 떠나지 못하면 불을 통과할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불타 없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얻으나 남는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아….. 나에게는 아직도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할 세상 철학, 관습… 여전히 많구나… 이런 나의 연약함이 교회의 근심이나 아픔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를 온전히 주관 하시도록, 주님이 주님 되시도록 오늘도 세상 철학과 관습에 맞서 싸워야 겠다!

+ 기도제목

*주님,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복음의 진리로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며 충성하겠습니다.
*주님, 교회를 세우라고 보냄받은 사역자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평판보다, 다시 오실 주님의 평가에 더욱 마음을 집중하며 사역하겠습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을 추종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가 지도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교회에 속했다고 말함으로써 성도들에게 사람을 따르지 말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인 사도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분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맡겨 주신대로 함께 지어가는(16-17절)’ 교회 공동체임을 상기시킨 바울은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성도)”임을 인식시키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1. 성전 답게(16-17절)
특정 지도자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뭉쳐서 결국 분쟁으로까지 나타난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의 성전되었음과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질문한다. 분쟁하는 것 만으로도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더럽히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이를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파당을 만들고 분쟁을 일삼는 문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새번역_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벌이는 분쟁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거다.

어릴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교회가 즐거운 곳만은 아니었다. 같은 동네 교회가 서로 그렇게 싸웠다. 어른들은 상대 교회를 비방했다. 얼마나 말씀을 몰랐는지… 자신들의 주장과 논리대로 헤쳐모여 반대 진영의 성도들과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나는 그것이 교회인줄 알았다.

그런데 차츰 성경에 눈을 뜨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가면서 그런 모습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어른들은 싸움이 취미인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평안함이 얼마나 기막힌 은혜인지 늘 실감한다. 더온누리교회가 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평안한 걸음 걸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바울은 “거룩”을 힘있게 강조한다. 우리가 성전임을 이미 선포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는 이미 성전 되었다.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도 거룩하다 여기듯, 성도된 나의 몸도 거룩하게 그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2. 세상과 다르게!(18-4:5절)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 땅에서 실제로 어떻게 드러내며 살까? 크게 교회에 대한 시각과 인식의 측면에서(18-23절)와 원치 않게 분쟁의 도구가 된 지도자에 대한 자세(2:1-5) 측면에서 살펴보자.


1). 세상 지혜로 성전을 관리하려 마라(18-23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것이 지혜다(18절). 주님께 있어 세상 지혜는 어리석은 것, 헛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라(19-21절). 그리고 교회 뿐 아니라 지도자들, 생명이나 사망 다 하나님의 것이다(22-23절). 즉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경쟁하고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말라는 의미다.

곰곰히 생각하며 반복하다보니, 결국 분쟁의 원인인 세상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교회를 세상 지혜로 바라보고 세상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이나 철학과 충돌될 때 이로 인해 힘들어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면 좋나! 하나님의 것이 분명한데, 세상 지혜, 제도, 상식의 기반하여 내 교회, 우리 교회로 여기는 강한 의식이 왜 이리 익숙할까!


2).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보라(4:1-5)
지도자들에 대한 시선을 이렇게 가지라고 직언한다. 인식을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상 지혜의 철학자나 선생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지혜, 복음)을 맡은 자로 여기라(1절). 이렇게 직언하면서 “마땅히(이와 같이)” 라고 조건을 단다. 세상 지혜를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비밀, 복음을 맡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지도자들을 자기들이 듣고 싶은 철학, 학문을 알려주는 “세상 지혜의 책 읽어주는 남자”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당사자는 “충성(신실함)”이 필요하지만, 성도들도 세상 지혜를 전하는 자로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전하고 가르치며 양육하는) 자로 보라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전적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다. 성경에 이른대로 가르치지 못하니 선택청취하는 성도들에게 당연히 맺혀진 열매다. 한낱 교회의 관리인으로, 대신 전도하는 이로, 섬겨주는 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생각과 자세로 지도자들을 대하는 무수한 성도들이 있다. 이런 생각과 자세가 가져오는 교회안의 파열음은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를 피멍들게 하고 있다.

교회,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공동체이니까. 세상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겨야 하니까.



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 백성으로 새 창조하셨다. 그리고 교회(성도)를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아주셨다. 구약에서 성전을 파괴하거나 더럽히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듯이, 하나님의 새 성전인 교회의 기초(예수 그리스도)를 흔들고 하나 됨을 깨뜨리는 파벌적 행태 역시 멸망을 당할 일이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삼아주셨다(16~17절).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은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해위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의 기초를 흔들거나 교회의 하나 됨과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참 성전은 반목과 미움과 소외가 자리 잡을 틈을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공동체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출세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는 도리어 세상의 눈에 가장 미련한 메시아였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는 길이다.

-사람을 둘러싼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속적 지혜에 집착한 결과다. 세상 지혜를 내세워 다투고 갈라서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독히 어리석을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모른 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자,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오만이다(18~20절). 하나님의 지혜에는 민감하고 세상의 헛된 지혜에는 둔감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며 화평을 이루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되, 다툼을 일으켜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속적인 지혜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모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성도들의 소유다. 그들은 교인들이 상전으로 모시고 시기하고 다투면서까지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지도자나 성도 모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을 자랑하고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

-만물의 상속자인 교회가 세상 지혜와 사람에 기대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자기모순일 뿐이다. 사역자들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4:1)일 뿐, 성도들이 상전처럼 모시거나 시기하고 다투면서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21~23절).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판단하실 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맡겨진 일에 충성할 뿐이라고 말한다(4:1~5절). 그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개의치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살피시는 주님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소명과 충성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사람들의 인정이나 대가에 목말라한 적이 없는지 늘 돌아볼 일이다.


-교회 문제만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고 또 아프다. 바울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생각할 때마다 심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바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다움의 출발은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 계신다는 “실제”다. 이 실제가 삶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이 실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지혜로가 아니다.

-이 실제는 세상 선생을 따라 가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낸 바울과 아볼로, 게바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 선생에게서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마라…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맡은 자들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단과 회복 지침을 내리는 바울의 단호한 명령형들이 본문에 가득 차있다.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 세상 철학과 비교하여 선택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하나님의 지혜”를 명령한다.

-당시와 오늘날의 문화적인 차이가 분명하겠으나 바울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복음”, “지혜”에 대한 확고하고 선명한 가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필요하다. 오늘날은 지식이 없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가득한 수많은 주장들, 가르침들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따를 것인가의 문제는 의외로 “확신”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확고한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 주님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세상 철학이 세상 선생이 이를 헷갈리게 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에서 출발한다는 것…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이를 따르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생기는 실제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인박힌 세상 관습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다. 신앙 연수에 상관없이 이 싸움에 무지하다면 늘 세상 철학과 선생을 찾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지혜를 구하여 분쟁의 씨앗이 된다. 또 여전히 세상 철학과 선생을 고집한다면 분쟁의 열매를 계속 맺히는 것이 된다.

-결국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기에 세상 나라를 떠나야 하는데, 여전히 떠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연약함이다. 그래서 구원은 변재되지 않지만 세상 나라 관습, 철학, 선생을 떠나지 못하면 불을 통과할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불타 없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얻으나 남는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아….. 나에게는 아직도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할 세상 철학, 관습… 여전히 많구나… 이런 나의 연약함이 교회의 근심이나 아픔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를 온전히 주관 하시도록, 주님이 주님 되시도록 오늘도 세상 철학과 관습에 맞서 싸워야 겠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