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37-50 누가 크냐?_어린 아이를 영접하듯 누구든 영접하는 자가 크다
본 단락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를 통해 앞으로의 여정에 나타날 주제를 예고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와 달리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들을 치유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주신다(37~43절). 예수님은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지만(43~45절) 제자들은 누가 높은 자인지 토론하고(46~48절),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배타성을 보인다(49~50절).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마침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치유 부탁을 듣고 이 사역에 실패한 직후였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귀신을 내쫓을 수 있는 권세를 받았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다.
1.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37~43절)
37~38절을 마가는 예수님과 변화산에 동행했던 세 명의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왔는데, 마침 큰 무리에 둘러싸인 채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바로 질문을 하나 던지신 것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누가는 이러한 보도를 생략하고 바로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39~40절은 귀신 들린 아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고 소개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있었을 때와 동시간대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제자들은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었다(9:1~2).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다.
41~42절에서 제자들이 벙어리 귀신을 내쫓지 못한 이유는 즉각적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표현에 제자들도 포함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라는 언급은 예수님이 이미 언급하신 수난이 가까이 왔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자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이 이 사역을 이어가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안타까운 의지도 엿보인다. 예수님은 제자들 책망하시기를 그치고 아이를 데려오라 명하신다. 아이를 데려오자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
누가는 이 과정을 마가와 달리 아들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이의 긴 대화를 생략하고 아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에게로 집중한다. 아이를 데려오라 명하신 예수님은 “더러운 영”을 꾸짖어 그 아이를 치료하신 후에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위엄에 놀란다(43절). 예수님의 사역은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다(4:1~13). 귀신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온 증거다(11:20~22). 예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들은 회복을 위한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으며, 교회가 이 책임감으로 활동할 때 세상의 소망과 위로가 될 것이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43~45절).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랍게 여길 때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절).”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이 언급되었으나,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사람들’이 강조된다. 변화산에서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엑소더스(떠남)” 하실 것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로부터 다시 한 번 예고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실제로 유대종말론을 잘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아는 유대종말론 안에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신적 통치의 대리자로 악과 악에 동조한 자들을 심판하고 의와 의로운 자들을 신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분인데, 그러한 분이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두려워했다는 언급은 아마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의 모습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메시아로 등극했을 때 그들이 누리려고 했던 어떤 지위와 연관된 것 같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성취하려는 예수님의 계획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 사이에는 분명한 엇박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을 해결해 주어야 할 예수님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욕망을 해결해주는 것과 거리가 있는 교훈에는 귀를 닫는다. 이처럼 예수께서 가르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할 때 반드시 뒤틀린 욕망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3. 누가 큰 자인지 논쟁하는 제자들(46~48절)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정반대 편에 가 있다. 제자들은 누가 더 큰지 비교하면서 변론을 벌인다(47절).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48절). 여기서 어린아이는 사회적 개념이다. 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고대 팔레스타인과 같은 명예와 수치의 사회에서 사람의 명예와 지위는 그 사람이 함께 만나고 식사하는 타인의 지위에 의해 결정됐다. 즉, 사회적 약자를 영접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의 명예는 낮은 등급으로 내려간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지위와 명예도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며,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명예와 지위를 누가 획득할 것인지 논쟁한 것이다.
이런 문화와 반대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도록 가르치신다. “내 이름으로”는 “나 때문에”와 동일한 의미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 지어서, 즉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생각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낮은 자인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낮은 모습으로 오시고 낮은 자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 공동체에서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논리가 된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 비추어 보면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 즉 가장 큰 분을 영접하게 되므로 가장 높은 명예를 얻게 된다. 이런 제자의 명예는 가장 큰 분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름으로써 큰 자가 되는 길은 없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낮은 곳을 지향함으로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회에 도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사회적 약자를 영접함으로써 지위에 기반을 둔 사회의 가치를 전복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다.
4. 큰 자의 권위를 행사하고 싶은 요한(49~50절)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큰 자라고 가르쳤지만, 요한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예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요한은 귀신을 쫓아낸 사람이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축귀 행위를 금했다(49절). “금했다”는 미완료 시제로 이런 경우에 대해 요한이 지속적으로 금하는 반응을 보였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그가 당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않기 때문에”라며 자신들의 지휘와 통제를 따르지 않은 문제에 분노했다.
요한은 자신과 열두 제자 공동체가 큰 자들의 특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자의 부르심을 섬김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특권과 배제의 권리로 이해했다. 이러한 요한의 엘리트 의식의 면모는 뒤에 다시 나타난다(9:54; 막 10:35). 요한의 태도는 어린이를 영접하는 이야기에 나타난 교훈과 완전히 대조된다.
예수님은 요한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신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50절).” 제자 공동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해서도 동일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열두 제자 밖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열두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동료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포용과 환대의 마음이 특권 의식과 배타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영광의 산을 내려온 직후에 인자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 주신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고 또한 제자들의 정체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자의 수난과 죽음과 동떨어진 채 그와 제자들을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 충분한 의미를 숨기셨으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묻기도 두려워했다. 그것이 문제다. 자신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행보가 다를 수 있다는 불안감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제자들은 무기력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던 예전의 제자들은 없고(9:10-11),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위엄에 놀라고 전율할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받고 죽을 일을 말씀하신다. 산 위의 영광을 보고 세 제자가 오해했듯이, 산 아래의 영광도 나머지 제자들의 눈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할 말을 하시고 묵묵히 제 길을 가셨다.
-인자의 죽음을 가르치시는 길 위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을 벌였다.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제자로서는 더욱 그렇게 주님과 전혀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남을 밟고 내가 올라서는 나라라면, 하나님 나라는 나를 죽여서 남을 섬기며 올리는 나라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인 어린아이를 영접하듯 누구든 영접하는 나라다. 스스로 가장 작은 자로 여기고 남을 섬기면 가장 큰 자로 대접 받을 것이다. 그런 이의 진가를 알아주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면, 그런 사람을 더욱 업신여기고 이용하는 곳이 세상이다. 더 크다고 주장하며 다투는 곳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놓고 동료 제자들과 다투었다. 주님은 자신을 버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차별하고 높아지는 세상 권력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님을 통해 얻는 기득권을 독차지하려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과 상관 없는 나라, 예수님이 줄 수 없는 영광을 꿈꾸고 있었다.
-진리를 따라 공동체로 모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는 늘 배타성과 독선, 배제의 위험이 있음을 스스로 의식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이를 금하자고 한 요한의 제안은 “주의 이름”이 자신들만의 특권인 줄로 아는 착각이고 오만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신뢰하는 자의 기도는 그가 누구든지 들어주시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드리는 기도는 응답되게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은 특정한 그룹만 사용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소유하게 되는 하늘의 축복이다.
*주님, 세상에서 큰 자보다 하나님 나라의 작은 자 되어 섬기겠습니다.
*주님, 먼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기득권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늘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섬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