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필요와 만족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제자의 삶 [눅 12:13-34]
 – 2025년 03월 17일
– 2025년 03월 17일 –
눅 12:13-34 나의 필요와 만족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제자의 삶
 
본 단락은 예수님께서소유와 재물에 대해 취해야 할 하나님 나라 제자들의 태도를 다룬다. 생명의 가치를 재물로 이해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평가(13~21절), 재앙으로 끝난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을 피하는 길(22~34절)을 제시하신다.
 
 
 
1. 생명의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다(13~21절)
예수님이 핍박 가운데서 신실한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실 때(12:1~12)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13절). 그는 동생으로, 자신이 결정한 해결책을 예수님의 권위로 승인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중재자가 되기를 거절하면서 그가 중재를 요청한 동기를 탐심으로 규정하신다. 생명의 가치는 소유로 평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탐심(플레오넥시아)”의 배후에는 불안이 존재하고 불안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소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확신이 생긴다.
 
예수님은 탐심에 이끌려 인간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16~20절).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얻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자 탐심이 발동해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에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려 한다. 그는 곳간을 만들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마음으로 부풀어 오른다(20절). 그는 “나의”를 강조하여 “내 곡식,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17~19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느 날 그의 영혼을 데려가시자 자기를 위해 준비한 재산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 만다. 부자는 지혜로운 계획을 세웠다고 확신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실 때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는 자신을 위해 쌓는 소유가 아니라(15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21절).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를 위하여 제물을 쌓아” 두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 쌓은 것이 없었다.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탐심을 채우지만, 생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자가 되려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요해지는(깊어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최고의 준비다. 다른 사람을 위해 부릂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고 생명이 더욱 풍성해진다(12:33~34).
 
 
 
2. 궁핍함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말라(22~34절)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욕망이나 열망은 염려로 이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숨과 몸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22~30절).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22절)은 탐심을 물리치라는 명령(15절)과 비슷하고, 사람의 목숨이 먹고 입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23절)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많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교훈(15절)과 연결된다. 24절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치를 근거로 ‘염려하지 않도록’ 가르치신다. 까마귀는 씨를 뿌려 추수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곳간과 창고에 쌓지 않는다. 까마귀는 탐욕스럽고 부정하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지 않으실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까마귀도 돌보신다. 곳간과 창고에 저장하는 모습은 곳간에 재산을 쌓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과 연결된다(18~19절). 부자는 자신이 쌓은 재산에 기대어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믿으나 하나님은 쌓아 놓은 곳간과 창고가 없어도 자녀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저장하지 않는 까마귀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면 존귀한 자녀를 돌보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당사자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신다(25~26절). 염려한다고 해서 생명의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듯, 염려는 도리어 생명을 단축할 뿐이다. 생명의 길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는 자신의 나약한 능력에 의존하는 데서 오는 염려에 시달리지 말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인생에 개입하시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염려를 극복하는 길이다.
 
27~28절은 다시 한 번 제자들의 존귀한 가치를 피조물과 비교해서 강조한다. 들꽃은 사람이 정성껏 가꾸는 식물이 아니다. 오늘 잠시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의 땔감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하찮게 보이는 들꽃의 아름다움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인생을 산 솔로몬의 업적보다 아름답다. 사람들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신 것 같지만, 돌봄을 받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들꽃, 하루를 생존하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도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이럼 제자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 아니라 아버지가 되신다. 장녀의 미약한 풀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다면 자기 자녀를 얼마나 아름답게 돌보시겠는가.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결코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돌봄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29~30절에서 예수님은 자연의 교훈을 요약하신다. 하나님은 제자들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아시므로, 근심으로 이런 것들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대표하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말한다.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채워주실(31절) 아버지가 계신다. 자녀의 필요를 아시는 능력의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자체가 성도들에게는 선물이며 감사다. 따라서 염려는 하나님을 망각할 때 생기고 감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생긴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대표적으로 비록 쌓을 곳간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부를 축적한 것이 미래를 최고로 잘 준비한 거처럼 자부한 부자이다. 하지만 그는 미래의 소망을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에 두었기에 어리석었다. 특히 부의 원천을 “나(자신)”로 생각했기에 어리석었다(17~19절).
 
31~32절은 제자들이 염려하는 것 대신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권면하신다. “그의 나라”는 자녀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시는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다. 제자들은 큰 세상에 비해 ‘작은’ 존재고 맹수처럼 힘 있는 세력에 비해 약한 ‘양 무리’이므로, 강한 자들이 살아가는 큰 세상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은 양 무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분이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약해서 힘을 얻지 못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작은 양 무리를 위해 “선한 뜻”을 갖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양 떼를 기쁜 마음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와 목자이시다.
 
 
 
나는?
-한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이라 부르면서 상속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상속 분할의 달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이를 자를 부르러 오신 분인 줄 몰랐다. 탐심으로 생긴 분쟁을 해결하러 오시지 않고 우리를 탐심의 죄에서 건져 나눔과 감사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러오셨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 예수님이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들만 처리해 주는 분으로 간주하는 그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과 차이가 있을까? 깊은 고민이 올라온다.
 
-비유 속 부자에게 또 다른 풍년이 찾아왔다. 부자는 소출이 적어서가 아니라 쌓을 곳이 없을까 고민한다.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고 쌓을 생각만 가득했다. 로마의 착위 아래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썩히더라도 쌓아두겠다고만 생각한다. 부자는 자신의 부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는 것에 온통 마음이 가 있다. 혹시 우리는 나눔의 빗장을 여는데 인색하지는 않는가? 탐욕의 곳간을 만들려고 힘쓰지 않는가?
 
-소유의 많고 적음은 생명과 고나계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 찾아온 사람의 관심은 생명이 아니라 돈에 있었다. 생명을 주려고 온 예수께 소유를 넉넉하게 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비유 속 부자를 향해 “어리석다”고 하신다. 그는 수확을 선물로 여기지 않고 자기 거승로 여겼고, 땀 흘려 일하는 대신 일하지 않고 먹고 즐길 계획만 세웠다. 하나님은 얼마를 벌었는지를 묻지 않으신다.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보신다. 부자는 이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사람이다. 땅의 재물은 풍성했으나 하나님 앞에서 빈곤한 자일 뿐이었다. 혹시 나의 삶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말씀의 등대를 놓치지 않아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을, 몸을 위하여 입을 것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이렇게 근심하는 것은 내 목숨과 몸은 하나님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물을 쌓을 곳이 없을까 염려했던 부자와 다를 바 없는 태도다. 재물 때문이라면 부자의 근심이나 가난한 자의 근심이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제자들에게 허용된 염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염려”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더 먼저, 더 잘 아신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까지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솔로몬의 영광의 옷보다 아릅답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것들보다 존귀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온갖 진귀한 음식과 값진 옷을 누리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참 복을 누리기 원하신다. 그렇기에 내가 갖고 싶은 것보다 꼭 나에게 있어야 할 것을 분별하는 능력과 또 필요한 만큼 구할 줄 아는 자족의 마음을 구비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닐까 싶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해야 하는 “무서운” 상황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제자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나라를 얻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이다. 설령 내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나라가 선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들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내 재물을 내주어 더 궁핍한 이들을 구제해서라도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허비가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두는 일이다. 내가 하고 있고 계획하는 모든 일에서 “돈”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돈”이 결정을 위한 첫 번째 고려사항이 되고도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과 돈을 우상화 하는 시대에 몸과 돈의 섬김 없이 참된 섬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님, 주님을 향한 나의 마음과 태도에서 나의 필요만을 채워주셔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고민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성숙한 마음과 시각을 구합니다.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나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당연하게 일어나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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