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처럼… [눅 13:22-35]
 – 2025년 03월 21일
– 2025년 03월 21일 –
눅 13:22-35 좁은 문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질문을 계기로 구원을 받는 기준과 심판을 받는 대상을 설명하신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문은 좁기 때문에 모두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22~24절). 혈통으로 구원의 문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며, 문으로 들어간 여부는 삶으로 입증된다(25~30절). 선민의 도성인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31~35절).
 
 
 
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24절)
예수께서 각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가르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다(22절).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내용이 언급된다. 길 위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적은 수만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한다(23절).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에 대한 질문은 당시의 관심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실지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앞선 본문에서 18년 동안 굽어져 있던 여자를 회복하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가 놀랍게 성장한다고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의미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처럼 소수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을 것인가? 이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질문자의 추정과 달리 소수만 구원받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할당제가 아니다. 구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문은 좁다.  “힘쓰라(아고니제스쎄)”는 운동선수가 시합을 하거나 군인이 전쟁을 치를 때 사용하는 단어다.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제한이 없으나 예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30절에서도 지금 구원의 문에서 멀다고 생각하더라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2.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5~30절)
구원의 문은 열려 있으나 항상 열려 있지는 않다. 문이 좁을 뿐 아니라 들어가는 기회도 여원하지 않다. 언젠가 닫힌다(25절). 닫히기 전에 지금 반응해야 한다. 내일로 연기해놓고 문이 닫힌 후에 열어달라고 간청해도 더 이상 기회는 오지 않는다. 문제는 문이 닫힐 때 사람들이 억울해하는 점이다. 그들은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문 밖에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주와 자신들의 관계를 말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 하실 것이다. 
 
이유는 그들의 행위 때문이다(27절). 예수님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는 아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그 문에 들어간 여부는 행위로 입증된다. 그 구원의 문은 특정 혈통을 위해 여려지는 것이 아니자. 심판의 때가 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다(28a절). 28절의 ‘하나님 나라’는 문맥상 최후 심판 이후에 주어지는 종말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기쁨은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조상들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들과 식사를 나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동서남북, 즉 열방에서 온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혈통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오직 너희)은 밖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28절).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 6회), 누가 1회)는 지옥에 던져지는 자들의 고통을 표현한다. 역사의 끝에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29절). 30절은 22절에 대한 답변인데, 먼저 된 자들이 아니라 나중 된 자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3.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1~35절)
구원은 예루살렘 백성이라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열린 문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구원의 문 밖에 서서 울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바리새인이 와서 위험을 알려준다. 당시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바리새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헤롯이 죽이려고 찾는 중이므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정보를 전달한다(31절). 
 
예수님은 그의 제보를 계기로 예루살렘의 운명을 애가 형식으로 전하신다. 그러시면서 “저 여우(헤롯)”에게 경고를 전하라고도 하신다(32절). 여우는 파괴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나 다른 맹수에 비해 위협적인 짐승은 아니다. 헤롯은 여우처럼 예수님을 위협하지만 그런 힘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예수님의 길을 막을 수 없다. 32절의 “오늘과 내일”은 매일의 활동을, “완전하여지리라”는 의도한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생활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로 채워진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금 하는 일을 내일도 행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줄곧 걸어가고 있는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이루는 것이므로 비극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된다. 예수님도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굳은 의지를 표명하신다. 예수님의 선지자 역할(4:24)도 예루살렘에서(9:31) 완성하실 것이다(33절).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인 곳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이게 될 예루살렘의 운명을 2인칭을 사용해 탄식하신다(34~35절).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곳에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도시다. 구약에서 돌로 치는 행위는 신성 모독(레 24:14, 16, 23)과 배교(레 20:2; 신 13:11)의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전형적인 처형 방식이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배교 행위를 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와 열정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목표를 수행하는 자들을 배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메시아다(3:15~16; 7:18, 22).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확신과 목표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예루살렘은 비극적인 운명을 자초할 것이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으는 것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라고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원치 않았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35a절).” 예수님은 예레미야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지 않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을 예고하신다(렘 12:7; 22:5).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그의 대리자를 죽이는 것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와 같이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자는 적다. 들어가고 싶은 자들은 많지만 정작 들어가는 자는 적다. 못 들어가게 해서가 아니라 그 “좁음”이라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전부를 내주어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를, 으뜸이 아니라 나중을 스스로 선택하는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통치자로 삼고 그분께만 충성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문은 좁다.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 당연히 들어갈 자격이 있을 거라고 여겼던 이스라엘(무화과나무)도 한 번 문이 닫히고 나면 들어갈 수 없다. 그 문이 좁기에 그리로 들어가는 자는 적고 들어가지 못한 자는 많을 것이다. 그만큼 자기 나라를 포기하고 자기 주권을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만큼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정도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이 적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미 다 들어온 사람마냥 나태하게 행하지 말고 오늘도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아직 믿음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 사탄이 다 패퇴하지도 않았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 주인은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는다. 그날 주인과 친분을 앞세워 문을 열어달라고 구해도 소용없다. 주 앞에서 먹고,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나 주인은 모른다고 한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라는 뜻이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행악한 자가 참여할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는 없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며 안심하던 자들, 율법을 알고 준수했다고 생각하던 자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던 자들은 그 문 앞에서 쫓겨날 것이다. 
 
-구원을 축하하는 잔치에 제때 들어오지 못한 자들은 아무리 사정해도 거부당할 것이다. 예수님을 본 적이 있고 들은 적이 있고 심지어 함께 음식을 먹은 적이 있다고 해도, 세상에 취해 사느라고 주님의 초청에 즉시 응하지 않는 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 삼지 않은 채 피상적인 지식과 관습적인 종교행위만 일삼는 것이 “행악”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신의 후손일지라도 행악하는 자들은 믿음의 족장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이방인들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출신과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그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공평하게 열린 나라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나라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헤롯을 “그 여우”로 호칭한다. 그 여우가 지금, 여기에도 존재한다. 여전히 여우짓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적어도 “그 여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일부 목소리 큰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여우와 양도 구분하지 못하는 듯하다… 참담하다… 어쩌면 혼란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그 여우”를 분별하는 안목과 그 여우짓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아니겠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예수님, 예수님은 헤롯의 살해 의도를 아시고도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자신의 생명은 헤롯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셨고, 죽음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사명의 정점으로 여기셨다. 자신보다는 회개 기회를 져버림으로써 장차 큰 파멸을 겪게 될 예루살렘을 걱정하면서 탄식하신다. 그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좁은 문을 몸소 통과하신다.  
 
*나의 삶이 좁은 문이 열려 있을 때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크다. 진리를 알고 깨닫게 해 주셔서 이 문을 들어와 이 길을 걷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크다. 이 길을 걷고 있는 표지가 “말씀대로 순종하며, 드러나는 선한 행위의 삶”임을 주지하고 주님 뜻 따라 살아가는 선한 삶을 살아내야지…. 주님 뜻대로 살아내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주님,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을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몸소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길을 걸으셨음을 알기에 저도 용기를 잃지 않고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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