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26~43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해골이라는 곳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장을 향해 가는 길에서 예루살렘 여성들이 겪을 비극적인 고통을 예고한다(26~31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에게 수치와 모욕을 안겨 주면서 자신을 구원하라는 마귀의 음성을 전한다(32~39절). 십자가의 수치를 견디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죄수는 낙원을 약속받는다(40~43절).
1.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_고통의 길_26~31절)
“그들”은 예수님을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26절). ‘누가’는 로마 군인들 외에도 이제까지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압박한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도 “이들” 안에 포함한다. 죄수를 도시 바깥에서 처형하는 것은 유대의 관습이었다(레 24:14; 민 15:35~36). 그들은 예수를 끌고 관저를 벗어나 처형장으로 향했다. 이때 군인들은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형수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통과하게 하여 이를 본 백성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라야 할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셨었다(9:23; 14:27).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 채 해골 언덕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감람산에서 땀에 핏방울이 맺히도록 기도했고, 체포된 후 대제사장과 빌라도와 헤롯의 관저로 끌려다니셨다. 다시 빌라도의 관저에서는 재판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셨다. 잠을 자거나 쉴 틈이 전혀 없이 고난을 받았고 녹초가 되셨다. 이에 군인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다.
구레네는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북아프리카 키레나이카(현재의 리비아)의 중심지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레네에서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유대인들을 언급한다(행 2:10). 또한 스데반과 논쟁하는 자유인들의 회당 소속 구레네 사람들을 언급한다(행 6:9). 본문은 구레네 출신 시몬을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언급한다(막 15:21). 루포는 로마서 16:13에 언급된다.
십자가 처형 장소까지 예수님을 따랐지만 모두 그분의 제자로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는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고 슬피 우는 여자들도 있었다(27절). 예수님은 울고 있는 여자들을 향해 돌이켜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28절).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셨다(13:34). 예수님은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 영광에 이르실 것이지만, 자녀를 잃은 여성들의 비극적인 고통은 길어질 것이다. 심판의 날이 이르면 사람들이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되다고 말할 것이다(29절). 당시 문화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이 여성에게 복의 상징이지만, 이것이 도리어 비극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여성들이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인다면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심판의 때가 닥치면 사람들은 산들에 대해 “우리 위에 무너지리라”, “우리를 덮어라.”” 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30절).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이는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이런 고통이 주어졌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마른나무에 불이 붙듯 순식간에 완전히 태워버릴 정도의 고통이 닥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 조롱과 모욕을 받으시는 예수님(32~39절)
골고다에는 예수님 외에 사형을 선고받은 다른 두 범죄자도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32절).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범죄자도 못 박았다(33절). 당시 로마의 처형 방식에 따르면 처형장으로 가는 길뿐 아니라 처형 장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형벌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34절).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자들과 다른 모든 관련자를 포함한다. 이 기도는 이사야 53:12의 성취다. 예수님은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고난의 종으로서 용서해 주시도록 간구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의 저주 아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며 중보기도 하신다. 이와 같이 용서하는 기도의 모습은 자신의 가르침대로 몸소 실천하신 것을 보여주고 초대 교회가 계승하는 유산이 된다.
34~39절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모욕하는 내용이다. 먼저, 지도자들(관리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눠 누가 가질지 제비를 뽑았다(34절). 이 장면은 시편 22:18의 성취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다른 사람을 구원했듯이 자기 자신도 구원해야 한다고 예수를 비웃는다(35절; 시 22:7).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이 연상되게 한다(4:1~13). 얼마 동안 예수를 떠난 마귀(4:13)는 골고다의 처형장에서 조롱하는 지도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고난을 회피하고 자신을 구원하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자기의 목숨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군인들은 조롱하고 신 포도주를 주면서 말했다(36절). 신 포도주를 주는 것은 조롱의 목적이다(시 69:21).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라고 군인들은 외친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힌 패가 있었는데(38절), 군인들의 조롱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는 자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군인들은 무력하게 달린 예수님을 철저하게 비웃는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한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이번에도 마귀는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의 목소리로 유혹한다. 예수님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고 범죄자가 받는 조롱을 받으면서 고난의 종에게 주어진 길을 가신다(사 53:12).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과 사형수는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한다. 벌거벗겨서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다. 마귀는 예수님이 연속되는 수치와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도록 이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22:17~18과 시사야 52:12에 예고된 고난받는 종으로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수치를 견디셨다(히 12:2).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참음으로써 무지한 죄인들을 구원하는 길을 여셨다.
3. 죄수에게 낙원을 약속하시는 예수님(40~43절)
다른 한 사형수는 비웃고 있는 죄수를 꾸짖으면서 같은 죄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한다(40절). 그는 자신의 십자가 처형이 범죄 행위에 합당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중앙에 매달린 사람이 행한 일은 옳은 것으로 평가한다(41절). 즉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고통당하는 의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의인의 기도를 영접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신적인 능력을 의지한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간청한다(42절). 예수님은 죄수의 간청을 듣고 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신다(43절). 사형수는 역사의 끝에 의인들이 부활할 때 펼쳐지는 낙원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곧 죽고 나서 즉시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낙원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의 간구와 예수님의 반응은 구원받는 대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윤리적 행실을 강조했었다. 하지만 죄수에게는 선한 행위를 할 기회가 없다. 이는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하는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리아의 노래가 예고한 것과 같이(1:54) 예수님은 죄수를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해서 낙원으로 초대하신다.
나는?
-죽는 데까지 주를 따르겠다며 장담하던 시몬 베드로를 대신하여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베드로는 주님이 자신을 높여주기를 바랐지만, 주님과 함께 높은 십자가에 달리기는 원하지 않았다. 참 제자는 주님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만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까지 끝까지 동참해야 참 제자다.
-주님의 영광에만 참여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진짜 제자다.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지금 애통해야 할 대상은 너희와 너희 자녀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의 영광으로 끝나겠지만 예수님을 배척한 예루살렘은 심판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에 대한 슬픔보다는 우리 자신의 악함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대상이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애써 눈물샘을 자극하기보다 오늘도 악의 세력에게 고난 겪는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통감하고 참여하는 것이 제자의 자세이며 악한 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제자의 태도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들의 무지를 긍휼히 여기시고 악함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신다. 죄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와 죄인을 향한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그 은총이 우리를 회개와 감사로 인도하며,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게 한다.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힌 행악자 중 한 사람은 죄를 인정하고 자비를 구한다.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영광의 낙원으로 영접하신다. 그는 예수님이 찾으시던 바로 그 잃어버린 자였다. 은혜를 시험하지 말고 오늘 그 은혜를 수용해야 한다.
*고난주간은 주님의 고난 받으심에 늘 초점을 맞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자신의 고난 받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 하신다. 오히려 “죄인인 나와 내 자녀들”, “행악자인 한편 강도와 같은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라 하신다. 도무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게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이 당하신 부당함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렇게라도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죽으심이, 나와 내 자녀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평생 행악하며 살아온 한편, 강도와 같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주님의 고통에 집중하여 동정하거나 불쌍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는 것보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바라보며 오히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채우라는 것이다. 슬피 울 수밖에 없는 고통 받을 인생이었지만, 나와 내 자녀들이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과 같이 죄 가운데서 죽어갈 운명이었지만, 주님께서 대신 그 고통을 져 주심으로 구원을 누리게 되었음을 묵상하며 감사하라는 것이다.
*도무지 일말의 구원 기회조차 받을 수 없었던 행악자 한편 강도와 같은 죄인이었지만, 강권적으로, 오로지 주님께서 선언하신 그 강권적인 십자가상의 선언으로 내가 “오늘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고 있음을 감사하며 찬양하라는 것이다.
*고난주간은 주님의 처참한 고난을 집중하여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인 것을 처절하게 돌아보아 “나와 내 자녀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리 죽으신 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시간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죄인 중의 죄인, 죄악 중의 죄악을 행하던 나에게 강권적으로 십자가상에서 선언하신 그 선언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았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로 보내야 할 것이다.
*오늘 내 죄악의 참상을 보게 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이 죄악의 대가를 대신 지신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증언하며 살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되돌아 보고…. 오직 감사의 고백만….
*주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걸음이 새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한 생명의 길이었기에 지금 제가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주님, 가장 처절한 고통의 시간에도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으신 것도 봅니다. 주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