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기억된 말씀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증언되는 부활을 증거하는 삶 [눅 24:1-12]
 – 2025년 04월 20일
– 2025년 04월 20일 –
눅 24:1-12 기억된 말씀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증언되는 부활을 증거하는 삶
    
갈릴리에서부터 따른 여인들이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 무덤을 떠나가 제자들에게 달려가는 장면이다. 여인들은 천사들에게서 부활의 소식을 듣고(1~8절), 이를 믿은 여인들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으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전한다(9~12절).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탄생 서사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 갈릴리 사역에서 등장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예루살렘 여정에서 마르다, 마리아 자매, 불의한 재판장에 간청하는 과부, 고난 주간에 등장하는 갈릴리로부터 온 어떤 여인들 등이 있다. 이들은 신앙의 모본으로 묘사되고 예수님의 구원 역사의 중요한 목격자로도 기록된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 ‘누가’는 제자들(남자들)과 여인들을 병행 배열하여 여인들을 부각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여인들을 등장시키셨다.
    
    
    
1.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1~8절)
여인들은 금요일(안식일 준비일)에 향품(아로마타)을 준비했고 안식일(금요일 저녁~토요일 저녁)이 지나 일요일 매우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왔다(1절). 이른 시간에 가야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고 가능한 한 빨리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덤에 갔을 때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2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 특이한 기록은 누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 예수”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시체가 아니라 “주 예수의 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몸을 찾지 못한 여인들은 당황한다. “당황하다(아포레오)”로 번역된 단어는 “근심하다”로도 번역된다.
    
여인들이 근심과 당혹감에 빠져 있을 때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갑자기 그녀들 옆에 나타나 서 있었다(4절).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천사를 희고 밝은 옷을 입은 사람으로 묘사한다(행 1:10; 10:30).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여인들이 본 두 남자를 천사로 명시한다(24:23). 천사들을 본 여자들은 두려움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떨었다. 천사들은 왜 살아있는 자(단수)를 죽은 자들(복수) 가운데서 찾는지 묻는다. 즉, 왜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묻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여인들이 찾는 예수님은 무덤 밖에 계신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알린다(6a절). “일어나셨다(에게르쎄)”는 수동태 과거형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 사건임을 뜻한다.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예수님이 이미 갈릴리에서 부활에 대해 예고하신 사실을 기억하도록 한다(6b절).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천사들이 전한 이 내용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던 말씀이었다(9:22, 44).
    
누가복음에는 십자가 처형 이전에 네 차례 수난 예고가 나오고(9:22, 44: 17:25; 18:32~33), 십자가 처형 이후에 네 차례 수난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24:7, 27, 44, 46). 예수님은 예고하신 대로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3일째에 살아나셨다. ‘누가’는 예수님이 “3일째”, 즉 셋째 날에 부활하신 것으로 반복해서 언급한다(13:32; 18:33; 24:7, 21, 46; 행 10:40). 또 천사들이 “~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것임을 밝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에 응답해 주셨다. 천사들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낸다. (8절).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천사들의 선포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통해 믿게 된다.
    
그리고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러나 빈 무덤 자체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을 때 처음 보인 반응은 어찌할 줄 모르는 당혹감이었다. 이후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 역시 빈 무덤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돌아가 버린다(11절). 여인들은 빈 무덤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부활을 믿은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들의 증언을 헛소리로 생각한다(11절).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수난과 부활을 지속적으로 예고하셨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예고된 사건이듯 부활도 예고된 사건이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목격했다면 부활도 믿어야 했지만, 죽음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어서 당연히 받아들였으나 몸의 부활은 경험한 적이 없기에 믿지 못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십자가가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을 통과한 승리라면 부활은 승리를 입증하고 면류관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무덤을 떠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9~12절)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천사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9절).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의 말씀을 들은 기억”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담대함으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천사들의 선포는 여인들의 기억으로, 여인들의 기억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도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여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선포함으로써 사도들도 부활을 믿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은 여인들이 무덤에서 목격한 것과 천사들을 만난 사건을 포함한다.
    
‘누가’는 사도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한 여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증언의 역사성을 확인한다. 여인들은 8:1~3에 소개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다. 요안나의 남편은 헤롯 안티파스의 청지기로 일했다(8:3).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누가복음에서는 처음 소개되고, 그녀들과 함께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10절).
    
한편,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이 허탄하게 들려 믿지 않는다. “허탄하다(레로스)”는 “어리석은 이야기, 잡담, 허튼 말”이라는 의미가 있다.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로 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나 정신적 충격을 받아 내뱉는 “헛소리”에 해당한다. 또한 사도들은 천자들이 전했다는 부활 자체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인들의 말을 다른 사도들과는 다른 태도로 이해한다. 그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간다. 몸을 숙여 무덤을 보니 예수님을 감쌌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12절). 베드로는 이 상황을 보고 놀랐지만, 부활을 믿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12절). 역시 빈 무덤이 부활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가’는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선포한 사람들이 여인들이었음을 강조하며 그녀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과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목격했다. 남자 사도들은 이렇게 부활을 증언하는 여인들을 목격자로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초기 교회가 허구인 부활을 사실로 믿게 만들려고 했다면 당시 사람들이 증인으로 신뢰하지 않는 여인들을 목격자로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역할이 인간의 조건에 제약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신학과 일반 지식이 많거나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이 있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부활을 믿기 유리한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선포를 받아들이는 길이 부활의 믿음을 얻는 길이기에 선포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인들은 천사들처럼 사도들과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도록 전하는(선포하는) 증인의 임무를 수행했다. 흥미롭게도, 본문에서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선포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부활의 목격자들로서 부활을 증언했다.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1세대가 지나고 나서 초기 교회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고서도 “믿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다. 증거 없이 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사도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할 때 부활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포 외의 길이 없기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나는?
-안식 후 첫날 새벽,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목격한 것은 죽은 시신이 아닌 빈 무덤이었다. 당장에는 절망의 소식이었지만, 결국엔 기쁨과 소망의 소식이 되었다. 빈 무덤은 “주”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이심을 만천하에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이 한 의인의 억울한 죽음이나, 실패한 혁명가의 죽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구속 사건임을 천명한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자랑하며, 담대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여자들이 주님의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시신이 없어졌다. 당황했다. 천사들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눅 24:5-6, 새번역).” 천사는 단순히 ‘주님이 살아나셨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라는 말을 첨부했다. 여자들에게, 그리고 그 당시 모든 신자에게 주님이 살아나신 것이 중요하지만, 부활의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의 현장에서 주의 천사는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주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십자가 이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으로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 주의 말씀을 기억해 낼 수 없다면, 부활은 믿기 힘든 사건이었을 것이다. “기억했기에” 믿을 수 있었고 전할 수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들은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더 많은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갈릴리에서부터 무덤까지 한결같이 주를 따르고 섬기던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들이 된다. 천사에게서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먼저 사도들에게 전했다. 하지만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을 허탄한 듯 여기고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누구보다 더 많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었던 제자들이 아닌가? 게다가 1차 목격자들에게서 확실한 증언까지 듣고 있음에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다는 상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빈 무덤을 봐도 부활을 기뻐할 수도, 부활의 증인이 될 수도 없다.
    
    
*여자들은 주님이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상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을 믿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제자들조차도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여자들은 믿었고 사도들은 믿지 못했고 베드로는 무덤을 확인하고도 이상하게 여겼다. 이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믿음은 대부분은 상식적이다. 하나님이 상식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경우에는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믿음은 상식의 범주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행동이 상식에 제한되거나 상식에도 못 미친다면 그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신자라고 하면서 왜 상식에 제한되거나 상식 이하의 몰상식한 사고와 삶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억’ 또는 ‘회상’에 있다. 그의 삶에서 ‘기억할 주님의 말씀’이 있는지 없는지가 상식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 신자는 기억할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삶을 걸어야 한다. ‘기억할 주님의 말씀’이 신자의 생명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난 뒤에 비로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설교하고 박해를 받을 때 ‘박해받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주심’에 감사하는 성숙한 신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성령은 주님이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즉 ‘기억나게’ 하는 일을 하신다(요 14:26). 사도들은 결국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기억하면서부터 사도로 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고,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신앙의 본질은 ‘말씀’이다. 신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억할 말씀’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운 순간에 찾아올 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만날 때, 자기 생각과 사고와 가치관의 수준으로 결정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기억할 말씀’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스스로 말씀 속에서 보석을 캐내었을 때 비로소 ‘기억할 말씀’이 된다. 그 말씀은 기억 속에 잘 남아 있다가 위기의 순간, 상식을 초월해야 할 순간에 자기 생각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목사가 들려준 말씀만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상식을 뛰어넘는 희생과 용서와 헌신은 결국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다 해도 ‘목사 말에 순종해야 복 받는다’라는 헛되고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서 할 뿐이니, 올바른 신앙이라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해서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뜻을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깨닫게 될 때, 그 말씀은 ‘기억할 말씀’이 된다. ‘기억할 말씀’이 하나하나 내면에 쌓여가면서 삶이 조금씩 변한다.
    
    
    
*주님, 주님께서 들려주신 “그 말씀”이 부활을 믿어 증언하게 했음을 봅니다. 성령께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제 생각, 마음, 행동 속에 주관하도록 깨우쳐주실 때 순종하겠습니다. 부활의 증인답게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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