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으로 누리다 [대하 20:20-21:1]
 – 2025년 10월 08일
– 2025년 10월 08일 –
대하 20:20-21:1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으로 누리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유다는 위기 상황을 신앙으로 극복한다.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중과부적의 대적들을 믿음으로 상대하여 결국 대승을 거둔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탄원의 장소를 “브라가 골짜기” 즉, “축복과 찬양의 골짜기”로 바꾸시고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다. 여호사밧이 이룬 업적들은 그의 인간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다. 여호사밧이 인간의 힘을 의지할 때는 언제나 실패했었다.
    
본문도 열왕기 평행 본문이 없다. 저자 에스라의 의도가 짙게 깔린 본문이라는 의미다. 역대기에는 열왕기가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 왕들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열왕기가 선한 왕으로 평가하는 왕들에 대해서, 역대기가 그들의 선한 모습을 부각하면서도 오히려 열왕기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경우가 있는데, 북 왕국 아하시야 왕(주전 852~851)과 협력한 여호사밧의 경우가 그렇다. 반면 역대기는 악한 왕도 회개해서 용서받을 수 있고, 선한 왕도 죄를 범하고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 유다의 승전과 감사(20~30절)
다음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야하시엘을 통해 알려 주신 대로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뜰로 나갔다. 여호사밧은 “주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라고 전투에 임하는 유다 백성들을 격려한다. 격려한 후에는 그들과 의논하는데, 그들이 결정한 것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들은 긴박한 전쟁터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기로 한다. 이 부분까지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군인들이 전투하러 나가는데,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찬양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예복을 입히고 그들에게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기가 죽을 만큼 용맹한 군사들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세우고 또 그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예복을 입혀서 악기를 들고 전쟁터에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대적들이 비웃을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노래하는 사람들이 찬송하기 시작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호사밧이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복병을 배치하였는데, 그들이 적군을 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이 승리는 다음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다 군사들이 적군을 쳐서 대승을 거뒀는데,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이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시킨 다음 서로 공격하여 전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일은 유다 사람들에게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재차 확인하게 된 사건이었다.
    
24~30절은 기적적인 승리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유다 사람들이 적군 진영이 이르러서 본 것은 적군의 시체뿐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적진에 들어가 그들이 남긴 물건들(재물, 의복, 보물)을 거둬들이는 데 사흘이 걸릴 정도였다. 나흘째 되는 날 전리품을 거두는 일을 마치고 그들은 골짜기에 모여 주님을 송축한다. 그래서 그 골짜기의 이름을 “브라가”, 즉 “찬양”이라고 불렀다. 부르짖는 간구로 시작한 전투가 커다란 찬양, 즉 브라가로 끝난 것이다. 그렇게 승전한 유다 사람들은 여호사밧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 구절은 “즐겁다”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데, 주님이 승전하게 하심으로 그들로 즐겁게 하셨기에 즐거워했다는 의미다. 주님이 주시는 즐거움이다. 유다 백성들이 위기 가운데서도 확신한 것처럼, 주님은 끝내 즐거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출정하며 즐거이 찬양하며 나간 백성들은 승전하여 개선하면서도 당연히 찬양하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그들은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면서 성전으로 갔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금식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성전이 이제 즐거움의 축제 자리가 되었다.
    
한편, 주변 나라들은 유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이 유다가 승전하게 하신 것을 그들도 분명하게 알았다. 유다는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으로 평화를 누렸다.
    
    
    
2. 여호사밧에 대한 평가(31~21:1절)
31~34절은 여호사밧에 대한 평가다. 어떤 왕이 왕위에 몇 년 동안 있었는지를 언급하는 것은 그 왕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는 신호다. 여호사밧은 3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5년을 다스리고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여호사밧 재위 25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17:1~20:30까지 기록했다.
    
17장은 여호사밧의 종교개혁과 종교교육 강화, 그리고 국방력을 강화한 것을 소개한다. 그리고 18장은 여호사밧이 참여한 길르앗 라못 전투에 대하여, 19장은 여호사밧이 행한 종교개혁에 관하여, 20장은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연합군과 싸워 승리한 이야기다. 즉, “종교개혁(17장)-전투(18장)-종교개혁(19장)-전투(20장)”의 구조다.
    
저자의 여호사밧에 대한 평가는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물론 아사가 말년에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나라를 다스렸고, 어머니인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긴 것 때문에 태후에서 폐위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15:17)”라고 평가한다. 여호사밧이 이런 아사의 행적을 따랐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30절에서는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나라가 태평하고,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아사의 기록과 비슷하다(비교, 대하 15:15).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런 여러 많은 일들을 했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았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산당 철폐는 왕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들이었다. 산당을 철폐하는 일은 왕을 가장 신앙심이 깊고 훌륭한 왕으로 평가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이런 산당을 철폐하지 않았기에 그를 탁월한 왕이 아닌 “선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35~37절은 여호사밧의 재위 기간이다. 여호사밧이 북 왕국 아하시야 왕과 한 일을 마지막 일화로 삼고 여호사밧과 아하시야가 서로 협력하여 해상 무역을 한 것을 언급하는데, 성경은 아하시야를 심히 악한 왕으로 평가한다. 아하시야는 아합의 아들로 아합이 전산 후에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두 왕은 합심하여 다시스를 오가는 해상 무역을 위해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었다. 그런데 엘리에셀이라는 예언자가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왕이 만든 배를 주님이 깨뜨리실 것이라는 예언대로 배가 부서져서 다시스와 무역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기록은 여호사밧의 업적이 인간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나는?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를 신뢰하면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확신대로 전쟁의 선두에 찬양대를 앞세웠다. 이미 승리를 얻은 자처럼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 그 찬양은 수천 승의 병거보다 수만 개의 화살보다 수십만 명의 군사보다 강한 무기인 믿음이었다.
    
-이렇게 갑옷도 입지 않은 성가대를 앞세운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의 행동이었다. 두려운 상황은 바뀌지 않았으나 미래의 승리를 말씀을 통하여 약속으로 받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전장에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찬양하는 찬양자로서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로 서 있는가?
    
-찬양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작전으로 대적들은 자중지란에 빠져 서로 섬멸하고  유다는 전리품을 취하는 일만 하게 된다. 선물로 받은 승리를 온 백성이 즐거이 찬양한다. 찬양은 은혜를 아는 자만이 부를 수 있고, 믿음의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전쟁과 사망의 골짜기를 축복의 골짜기로 바꾸셨다. 모압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유다 백성들은 어떤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엄청난 승리의 영광을 누린다. 이런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적들에게는 두려움을 주시지만, 자기를 신뢰하는 백성들에게는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평강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때문이 아니라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시는(신 32:10)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으며, 누구도 깰 수 없기에 가장 안전한 것이다. 나의 삶 사방으로, 평강으로 둘러싸고 계시는 하나님의 샬롬 안에 오늘도 나 거하리라.
    
-정작 이스라엘의 승전 소식은 이방 나라들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스라엘의 전술이나 용맹함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여호와께 놀라고 두려워한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전쟁만이 아니라 믿음의 왕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동안 그 나라에 평안을 주신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챙겨주셔야 진정한 승리, 참 승리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하나님만이 인생의 전장에서 승리를 얻게 하시는 승리자다.
    
-여호사밧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인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인정하며 순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당을 철거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했다. 또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 왕과 악한 동맹을 이어가기도 했다. 어제의 성공적인 개혁이 오늘 실패한 개혁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늘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비록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온전해 지기 위해 날마다 노력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평화도 하나님이 주신다. 전쟁을 하나님이 막으신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칼과 창을 노래와 찬송으로 맞서 얻어낸 평화다. 주님께서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라고도 하셨다. 참 평화가 하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여호사밧은 북 왕국의 악한 왕 아합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 왕과도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지만, 끝까지 이방 신당만은 철거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호사밧의 시대가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승리와 평화가 오직 하나님께 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신 이도,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여호사밧이 악한 왕 아하시야와 연합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건조하지만, 하나님이 그 배를 부수신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와 평화를 언제든 다시 가져가실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뒤에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지만,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도 참된 샬롬을 누려야 하리라.
    
    
    
*주님, 어제의 승리와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날마다 말씀 안에 거하여 죄를 물리치겠습니다.
*주님, 인생의 전장에서 늘 찬송하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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