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람의 자멸, 애곡 없는 그의 장례가 주는 교훈 [대하 21:2-20]
 – 2025년 10월 09일
– 2025년 10월 09일 –
대하 21:2-20 여호람의 자멸, 애곡 없는 그의 장례가 주는 교훈
    
말씀을 버린 자는 인생의 막대기로 심판하신다는 경고(삼하 7:14)가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를 통해 선명하게 이뤄진다.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윗과 선왕들의 길을 버렸다. 그 대신 아합의 길을 쫓아 악을 행하며, 백성들을 음행의 길로 미혹했다. 하나님은 여호람을 꾸짖으시고, 경고대로 그와 그의 가족과 유다 땅에 전쟁과 죽음과 질병의 큰 재앙을 내리신다. 그러나 심판 속에서도 다윗 왕가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등불을 꺼지지 않게 지켜주셨다.
    
여호람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주님을 높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했다. 평생 여호와를 높이는 삶이 아닌 아합의 길로 행한다. 여호사밧은 아들들이 화목하도록 많은 애를 썼지만, 여호람은 형제들을 살해하고, 아합의 길로 행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고 만다. 아버지만 한 아들이 되지 못했다. 그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가 사필귀정이었다.
    
    
    
1. 왕에 오른 여호람, 이스라엘 왕의 길로 행하다(2~7절)
여호사밧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다(1절). 그는 여호사밧의 맏아들이다. 그에게는 여섯 명의 동생이 있었다. 2절은 그들의 이름이다. 여호사밧은 생전에 아들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부족함 없이 살도록 배려해 주었다. 여호사밧의 이런 행동은 왕자들 사이에 혹여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얻은 후에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인다. 적어도 자기 왕권에 대해서 도전할 여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고 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4절).
    
5~7절을 통해 여호람의 통치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요약한다. 여호사밧은 35세에 왕위에 올랐고 여호람은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인 32세에 왕위에 올랐다. 여호람은 8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40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이 60세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은 셈이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또,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아우들을 죽였으나, 고작 8년을 통치하고 40세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저자는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되었다”라고 고발한다. 그리고 그 까닭을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라고 밝힌다.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 태어났다.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의 친화 정책에 따라 그의 집과 왕래하면서 가깝게 지낸 결과로 맞아들인 며느리였다. 아달랴가 단순히 아합의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그가 영향력을 받아 온 것이 문제였다. 두로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의 영향을 받았고 이세벨은 당시 악질적인 바알을 섬기는 길로 북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장본인이었다.
    
저자는 여호람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왕위에서 내쫓고 다윗 왕가를 단절하지 않으신 것은 예전에 다윗과 맺으신 약속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다윗 왕가가 영원할 것)”라고 약속하셨다.
 
    
    
2. 위기에 처한 여호람(8~16절)
여호람 통치 기간에 에돔이 유다에게서 분리 독립하고 왕을 세운다. 다윗이 에돔을 정복한 이래로 늘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고, 남북으로 이스라엘이 나뉜 후에도 남 유다의 수하에 있었다. 여호람은 독립을 시도하는 에돔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이 시기에 에돔뿐 아니라 립나(지중해와 유다 산지 사이 저지대에 있는 도시)도 독립했는데, 이 일들로 인해 유다는 여러 면에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저자는 여호람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여호람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힌다(8~10절).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이 그 나라를 약하게 하셔서 주변 나라들이 노리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11절은 여호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가 한 대표적인 배교행위는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운 것이었다. 산당을 세움으로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가게 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유다를 미혹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여호람의 이러한 배교 통치에 선지자 엘리야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엘리야는 여호람에게 조상들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한다. 하나님은 먼저 여호람이 여호사밧과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아사와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부족함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유다를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여호람은 그들과 다른 길,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택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했다’고 말한다. 이는 이세벨이 바알을 들여와서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한 것을 가리킨다. 또 하나님이 지적하는 죄는 아우들을 살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우들이 여호람보다 착하다고 하셨다.
    
이렇게 여호람의 죄를 지적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겠다”라고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여호람은 중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하나님께서 여호람에게 내리실 병을 묘사하는데, 창자가 병들어 고통당할 것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병이 날로 심해져서 결국 창자가 빠져나오는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여호람에게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를 보여주며 엘리야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앙의 수호자들이 여호람이 행한 배교적인 행동에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6~17절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이 유다를 공격했는데, 그들은 왕궁의 모든 재물과 여호람의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했다. 그래서 막내 아들인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않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3. 여호람 통치 종결부(18~20절)
“이 모든 일 후에”는 여호람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일을 겪으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여호람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여호람이 도무지 고칠 수 없는 중병으로 고통당하게 하셨다. 그 병으로 2년 동안 고생하고 결국 창자가 빠져나오는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난다.
    
여호람은 32세에 왕위에 올라서 8년 동안 다스리고, 40세에 고통스러운 삶을 마친다.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여호람의 불행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면서 시작된다. 타락한 북이스라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에서는 아달랴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의 시대에 전멸을 면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물질보다 신앙을 물려주어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는다(1~3절). 여호사밧은 장자 여호람에게는 왕위를, 나머지 여섯 명의 아들에게는 보물과 요새를 물려주었지만, 여호람에게 모두 죽고 만다. 아버지가 물려준 권력과 부가 자녀들을 모두 잃게 만든 꼴이 되었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수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어떤 믿음을 물려주어야 할지 곰곰이 고민해야 한다.
    
-여호람은 왕위에 만족하지 않고 아우들에게 물려준 은금과 보물과 성읍들을 장악하려고 모든 아우를 다 죽인다. 그러자 에돔과 립나가 유다를 배반하고,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유다를 약탈한다. 여호람의 배교는 주변 나라들의 배반으로 돌아왔다.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여 참으시고, 징계하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7절). 나의 의로움과 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맺으신 새 언약의 긍휼로 인해 내가 지금 여기, 은혜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또한 죄악에 취해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또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죄악과 벗한 삶의 걸음, 은혜의 기회가 찾아올 때 기회를 놓치지 않는 분별력과 믿음의 결단이 회복의 시작이다. 아쉽게도 여호람은 기회를 깨닫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등지고 배신한 여호람에게 두 속국에 배신당하는 징계를 내리신다(8~10절). 에돔과 립나는 독립을 선포하고 왕을 세웠다. 이는 유다의 국력이나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유다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버린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되 철저하게 심판하신다(16~19절). 엘리야의 예언대로 여호람은 주위 나라의 공격으로 막내 아들 외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더 나아가 병으로 2년 동안 고생하다가 결국 죽는다. 내가 짓는 죄가 내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안다면 죄짓는 것이 두렵지 않겠는가!
    
-여호람은 고치지 못할 병에 걸려 고통당하다 죽는다. 동생들을 죽이면서까지 장악한 모든 재물은 결국 탈취당하고 막내 아들 여호아하스만 빼고 아들들과 아내들마저 빼앗긴다. 그러다 아무도 아끼는 자 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너무 교만했다. 하나님도 그를 버렸고 백성들도 그를 버렸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위와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다. 여호람은 창자가 빠져나와 비참하게 죽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도, 분향하지도 않는다. 그는 통치자로서 인정도 존경도 받지 못한 삶을 산 것이다. 그 사람의 죽음의 현장에서 그의 지나온 삶이 보인다. 고인의 죽음 앞에 진실하게 울어줄 사람이 있는 인생이 복 되다.
    
    
*여호람을 바라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출발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축복을 저주로 바꾼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형제들마저 무참하게 살해한 여호람은 결국 자기 자녀들과 아내들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는다. 가족을 통해 받은 축복이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탐욕이 얼마나 무섭게 삶을 망치는지 분명한 예가 된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는 것, 높은 자가 더 높아지려는 것, 그 탐욕이 자신이 누리고 있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다. 가진 것에 만족과 감사가 이리도 어렵다.
    
*여호람은 선왕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주변국들은 유다를 두려워했고, 나라는 평화로웠다. 이는 여호사밧과 그 백성들이 여호와를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대하 20:20). 그러나 여호람 시대에 주변국들이 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이는 그가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10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배반하니 그 역시 배반당한다. 하나님을 버리니 그도 버림당한다.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을 얻고도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이다.
    
*넘치는 은혜를 나눠주는 풍성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남이 받은 은혜의 부스러기로 사는 인생도 있다.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길을 따라 아합의 딸과 혼인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나마 그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더불어 맺은 언약 때문이다(7절). 여호람은 이방 신당을 세우며 백성들로 음행하게 하여 심판을 자처한다. 언약을 심판으로 바꾼 이는 여호람 자신이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7절). 언약의 최대치를 누리며 사는가? 아니면 최소치로 연명하고 있는가?
    
*로마 시대 유명한 격언이 있다. “메멘토 모리(‘죽을 것임을 기억하라’, ‘네가 필멸자임을 잊지 말라’)”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분향하지 않은 여호람의 죽음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출발이 좋다고 끝까지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불평과 욕심으로 영혼을 갉아먹는 인생이 아니라, 자족과 감사로 하루하루를 빛내는 복된 인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적으로 무지하다 라는 것은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경고)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펼쳐지는 일들을 통해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든 실수할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실수와 잘못된 선택을 깨닫지 못한 채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죄를 짓고도 죄인 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다양하게 경고하시며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양심의 자각이을 통해, 때로는 특별한 상황들을 통해, 또 주변 사람들을 통해 경고하신다. 하지만 이미 죄의 욕심에 취해 있으면 내게 들려오는 무수한 하나님의 음성들을 무시함으로 무력화 된다. 그러므로 작은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날때 사소한 타협이라도 하면 안 된다. 그 작은 죄를 무시하고 덮어두면 점점 둔감해질뿐더러, 죄가 죄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까지 이른다.
 
*죄는 급격하게 밀려오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무수한 잘못된 선택들이 죄의 수렁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지금 나에게 죄에 대한 경고가 살아 있을 때 분별하여 떨쳐내야 할 것이다. 아직 양심의 소리가 들린다면 그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평소 주위 사람들의 말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도 안되지만, 어느 순간 깊이 공감이 된다면 그 한마디는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순간의 죄의 유혹은 대개 양심의 소리나, 주변 상황을 통해 영적 방어기재가 함께 따라온다. 이때 죄를 잡지 못하면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늘 경각해야 한다.
 
    
    
    
*주님, 여호람의 교만한 인생이 처량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그였지만, 하나님을 버림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봅니다. 반면교사를 삼아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음을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순간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담대하게 죄를 떨쳐내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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