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1:17-35 야곱의 돌아감과 라반의 추격전
야곱이 부유해짐으로 말미암아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때마침 하나님께서도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다. 야곱이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모든 소유를 끌고 고향으로 출발하자 바로 라반이 야곱을 잡기 위해 쫓아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계시를 받고 야곱을 보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라헬은 집을 떠나며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고 라반은 이것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라헬에게 속아 드라빔을 찾지 못한다.
야곱은 제2의 아브라함이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이 했던 ‘떠남’을 재현한다. 아브라함도 아내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었다(창 12:5). 하지만 이번에는 야반도주와 같은 탈출극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밧단아람에 올 때는 낙타도 없이 홀몸으로 걸어서 왔고, 신붓값도 없었던 빈털터리 도망자가 이제 낙타들을 거느리고 많은 가축 때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돌아간다.
1. 야곱 가족의 야반도주(17~22절)
야곱은 두 아내의 동의를 얻고 귀향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즉시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최적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디데이를 양털 깎는 시기로 정한다(19절). 양털 깎기는 봄에 진행되었다. 이때는 대부분의 식구가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나 커다란 수입이 보장되는 그 일에 집중한다. 라반의 가족들이 모두 양털 깎기에 동원되어 나갔을 때, 야곱은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17절).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들을 모두 낙타들에 태우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가지고 나와 가나안 땅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향한다. 이때 라헬은 라반의 막사에서 드라빔을 훔쳐 나온다(19절).
드라빔은 여러 신들의 단일 합일체로 추정한다. 그렇기에 한 개체이면서 항상 복수형 ‘테라핌’으로 표기된다. 드라빔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일단 점술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겔 21:26; 슥 10:2). 드라빔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가족 수호신이었다. 그렇기에 라헬은 이역만리 타향으로 떠나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번성의 복을 위해 드라빔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모습을 통해 라헬이 평소 메소포타미아 우상숭배에 익숙했기에 자녀를 얻기 위해 합환채의 신통력에 의존했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창 30:14).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으로 도주한다(21절). 이 ‘강’은 유프라테스강이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쪽으로 오기 위해서는 남서쪽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야 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행진하면 갈릴리 호수 근처의 북부 길르앗에 도착한다. 한편, 야곱의 가족이 도주한 지 삼 일이 지나서야 라반이 알아차린다(23절). 참고로 ‘삼 일(사흘 길)’은 문자적인 삼 일을 초월하여 여러 날일 수 있다.
2. 라반의 추격(23~30절)
라반이 야곱의 가족을 뒤쫓는다. 그는 형제들(아마 친족들)을 데리고 ‘칠 일 길’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 도착하여 야곱의 대열에 바짝 붙었다(23절). 거의 야곱을 따라잡았던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야곱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잘잘못을 따지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24절). 흥미로운 것은 앞서 20절부터 라반은 ‘아람 사람’으로 불린다. 이때부터 야곱과 라반의 근본적인 민족적 간격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표현으로 인해 그들 사이의 ‘조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한편, ‘칠 일 길’에서 ‘칠 일’은 분명 어림수거나 혹은 꽉 찬 기간을 표현하는 문학적 숫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밧닷아람에서 북부 길르앗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450km나 된다. 당시 대상들의 일반적인 여행 속도는 하루 약 24km였다. 라반의 추격 속도가 매우 빨랐더라도 거의 보름은 걸릴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단순히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삼 일’과 ‘칠 일’은 문자적인 거리라기보다 상당히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아 야곱이 막사를 설치한 맞은편 길르앗 산에 자신의 막사를 친다(25절). 그리고 야곱을 만나 그를 강하게 질책하며 꾸중한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전쟁 포로처럼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26절). 아이러니하게도 라반 그가 야곱을 그처럼 취급하지 않았던가?
라반은 그가 자신을 훔쳐 갔다고 거듭 비난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이별을 통보했다면, 성대한 송별식을 마련해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라반의 허세이자 거짓말이다. 그는 그동안 사탕발림으로 야곱을 열 차례나 속였기 때문이다.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에게 이별의 입맞춤도 하지 못하게 하고 빼돌린 야곱의 행위가 비열하고 어리석다고 구석으로 몰아간다. 그는 군사적 행동을 들먹이며 야곱에 대한 힘의 우위를 최대로 과시한다(29절). 그러나 라반은 지난밤 자신에게 현몽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무력 행위를 참는다고 말한다.
다신 숭배자인 그가 야곱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지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야곱의 귀향 명분을 인정하면서 결국 야곱을 놓아준다(29절). 하지만 결코 보낼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족 수호신으로 섬겼던 드라빔이었다. 라반은 야곱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신들(엘로힘)’을 ‘훔쳐 갔다고(가나브)’ 항의한다. ‘신들’은 드라빔을 지칭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라반은 야곱이 ‘훔쳤다’라는 말을 세 번(내 마음을 훔쳤다(26절); 나를 훔쳤다(27절); 내 신들을 훔쳤다(30절) 이나 언급한다.
3. 라헬이 드라빔을 숨기다(31~35절)
야곱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강력히 변호한다. 요지는 이 모든 것은 외삼촌 라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내를 라반이 강제로 빼앗아 갈까(가잘) 두려워 탈출극을 벌였다고 항변한다. 이 표현들에는 야곱에게 20년 동안 자행된 라반의 탄압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비난이 들어가 있다(창 31:36~42). 야곱은 라반의 ‘신들’ 훔쳐 간 자가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이런 드라빔을 훔친 것에 대한 형벌이 어느 정도였을지 알 수 없지만, 야곱은 라반의 의심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 자기 가족이 결코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야곱의 이런 발언은 라헬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라반은 야곱과 레아의 막사에 이어 라헬의 막사로 들어가서 수색을 진행했다(33절). 하지만 라헬은 드라빔을 빼돌려 ‘그것들을’ 낙타 아래 안장에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라반은 장막 구석구석을 모두 찾았으나 허탕을 쳤다. 라헬은 자신이 생리 중이라 일어나 영접하여 안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아버지의 양해를 구했다. 이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레위기 15장 19~30절은 생리하는 여인은 부정하므로 격리된 채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된다고 규정하는데, 레위기 이전이지만, 이미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유사한 정결법이 적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따라서 라반은 라헬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라헬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셈이다. 하지만 이로써 드라빔을 지키기 위해 드라빔을 부정하게 하는 일을 감수해야 했다. 관습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신들이 더럽혀진 것’이다. 또한 이런 모습은 라반의 가족들이 드라빔을 목숨처럼 간직하려 했지만, 정작 드라빔을 대하는 태도나 종교심은 느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에서를 피해 도망하여 하란에 왔던 야곱은 이제 장인 라반을 피해 도망한다. 자신이 주도하려던 인생이 늘 도망자로 끝나고 있었다. 야곱(동생)이 아비를 속여 축복을 빼앗았듯이 라헬(동생)도 아비를 속여 드라빔을 훔쳤다. 드라빔이 고대 관습상 상속을 상징하는 물건이니, 이는 형의 상속권을 빼앗은 야곱처럼 라헬도 라반의 아들들에게서 상속권을 훔쳐 야곱에게 옮기려고 한 것이다. 내 힘으로 미래를 열어보겠다는 자기중심성과 야심이 여전히 야곱의 집을 사로잡고 있었다.
-라반은 사흘 만에 야곱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다. 라반은 그를 사로잡거나 해할 마음으로 친족들을 거느린 채 7일을 뒤쫓아 야곱 일행이 머물던 길르앗 산에 이른다. 20년을 부렸는데도 성에 차지 않은 라반의 모습에서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음을 보게 된다. 열 번이나 품삯을 속인 자가 도리어 분노 가운데 뒤쫓다니, 죄가 죄를 더욱 불러오는 꼴이다. 자신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을 책망하지만, 정작 책망받아야 할 사람은 위선적이고 살기등등한 라반이였다.
-그는 겉으로는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말로는 친절하고 너그러웠지만, 그의 삶은 내내 자기가 한 말을 배신하는 삶이었다. 입술로는 야곱 뒤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시기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하나님보다 드라빔의 위력을 더 신뢰한 것이다.
-라반의 살기등등한 추격 의지를 꺾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28:15)”이라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라반에게 야곱을 향해 아무 말도 못 하게 막으셨다. 마치 40년 전에 리브가를 시집보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라반 자신이 가부간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창 24:50), 야곱의 결혼과 떠남도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세상은 늘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려고 뒤쫓는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추월할 수 없다. 이 믿음으로 살아내자.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이런 경고를 하신 이유는 실제로 라반이 야곱을 죽이고 야곱의 모든 재산과 가족을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벧엘에서 야곱에게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28:15)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라반의 손에 죽을 뻔한 야곱을 보호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라반은 추격에 성공하고도 야곱을 어찌하지 못하고 언약을 맺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4~55절). 내가 모르는 가운데서도 정확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리라.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줄도 모르고 라헬에게 사형을 선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확언을 한다. 이후 공교롭게도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며, 이는 야곱의 가족에서 제일 먼저 맞은 죽음이었다. 속임 당하는 인생을 하란에 떨치고 온 듯했지만, 야곱은 여전히 속고 있었다.
-하나님은 야곱을 라반으로부터 보호하시지만, 라헬이 그토록 쥐고 있던 라반의 드라빔은 라반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몸도 보호하지 못하고 라헬에게 납치당하여 그녀에게 깔린다. 라반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하나님에 비해, 라반이 믿는 수호신은 라헬 밑에서 꼼짝 못 하고 깔린 것이다. 오늘날 우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우상을 믿고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지.
-하란에서의 20년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존재감이 깊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내들은 야곱과 같지 않았다. 특히 라헬은 종교적으로 집안의 수호자와 사회적으로는 상속권의 보증으로 여기는 드라빔을 몰래 훔쳐 탈출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열악했다. 출산도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힘으로 축복을 받아보려는 측면이 더 보인다. 20년 전 야곱의 모습이 라헬에게서 보이다니 그래서 자기와 비슷해서 야곱이 첫 만남에서 첫눈에 반했을까?
*주님, 20년 전 도망은 비참했지만, 지금의 도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귀환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20년 만에 맛보는 야곱을 보며, 믿음의 인내가 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더욱 인내하겠습니다.
*주님, 그런데 라반의 감춰져 있던 악함이 드러난 순간, 하나님이 라반을 제어해 주시고, 이를 알 턱 없는 야곱은 얼떨결에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신뢰해야 할 분명한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신뢰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라헬은 아직입니다. 하나님보다 드라빔이 더 중요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가져가려 합니다. 결국 그런 유혹과 고집은 관심조차 두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