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야곱의 돌아감과 라반의 추격 [창 31:17-35]
 – 2026년 04월 27일
– 2026년 04월 27일 –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라헬은 오래도록 임신하지 못한다. 아들을 무려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야곱과 언쟁한다.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에서 사랑하는 모습 이후 처음 등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싸움이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자신도 자식을 낳게 하라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시작된다. 라헬은 자신이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자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게 된다. 마침내 라헬도 요셉을 낳음으로 두 자매의 출산 경쟁은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열두 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1. 라헬의 여종 빌하의 출산(1~8절)29장에서 아들을 넷이나 낳은 레아와 대조적으로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는 열지 않으셔서(29:31)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다. 라헬은 아들을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를 질투한다.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실상 행복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남편에게 아들을 낳게 하라고 요구한다.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이런 라헬에게 야곱은 아이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냐며 반박한다. 야곱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실을 알고 리브가를 위해 무려 20년을 기도했었다. 그런데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불임의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이때 라헬이 생각한 방법은 예전에 사라가 한 것처럼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 대신 아들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무릎에 둔다’라는 뜻은 그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여 자신이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헬은 양자를 얻어서라도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다. 라헬은 이 결심을 곧바로 결행한다. 4절에서 라헬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었고 야곱은 그녀에게 들어갔다. 그 결과 빌하는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 서서 변호해 주셨다는 의미로 ‘단’이라고 짓고, 둘째 아들은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면서 ‘납달리’로 짓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라헬이 모든 면에서 언니를 이기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예전에 형의 장자권을 갖고 싶어 에서와 갈등하던 야곱의 모습과 닮았다. 그로 인해 가정에 갈등이 불거지고, 결국 집에서 도망 나오게 된 것처럼, 야곱의 가정에서 그런 불안이 재현되고 있다.

2. 레아의 여종 실바의 출산(9~13절)9절도 레아가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레아는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보았다. 둘 다 불임의 상태라는 것을 안 것이다. 자신의 출산이 멈춘 것을 알게 된 레아는 라헬이 했던 방법과 동일하게 자신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어, 실바를 통해서도 ‘복되다’, ‘행운이다’라는 의미의 아들 ‘갓’과 ‘행복’이라는 의미의 아들 ‘아셀’을 얻게 된다. 레아는 실바를 통해 얻은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신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라헬뿐 아니라 레아 또한 동생과 경쟁하는 모습은 레아 또한 완전한 평안의 상태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두 자매의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을 많아지게 하셨다.

3. 레아의 출산(14~21절)이 단락은 레아와 라헬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여종들을 통해 대리적으로 경쟁했다면 이제는 레아와 라헬이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발단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추수하러 들로 나갔다가 우연히 합환채를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가져오면서 시작되었다. 합환채는 당시에 성욕을 자극하며 임신을 돕는 역할을 하는 식물로 알려져 있었다. 르우벤은 출산이 멈춘 어머니를 위해 챙겨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헬은 레아를 찾아와 자신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레아는 겉으로 정중하게 보이지만, 단호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레아는 남편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게 하는 합환채까지 가져가려는 라헬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라헬은 화를 내는 레아에게 야곱과 동침할 기회를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보는 남편보다 임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합환채가 더 간절했기 때문이다. 레아는 라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합환채보다 남편과 함께하는 기회가 더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밤 야곱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한편, 레아는 합환채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합환채를 양보한 레아에게 아들 잇사갈과 스불론, 딸 디나를 주시고, 합환채를 가져간 라헬에게는 아무 자식도 주지 않으신다. 태를 여닫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잘 드러낸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모든 꾀를 무용지물로 만드셨다.

4. 라헬의 출산(22~24절)남편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했던 라헬이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즉,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소리를 들으셨고, 마침내 아들을 주셨다. ‘부르짖었다’라는 단어 뒤에 ‘하나님이 기억하셨다’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은 라헬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은 라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감사하며, 여호와께 아들을 더 달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요셉’으로 짓는다. 이제 라헬은 자식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야곱의 결혼생활은 라반의 속임수로 시작하여 레아에 대한 박대와 라헬의 질투와 갈등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로 야기된 불행을 불행으로 두지 않으시고 많은 자녀(12명)를 주시는 계기로 삼으신다. 인간은 악하게 행동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다. 나는?-레아와 라헬은 경쟁하듯 아이를 낳고 남편 쟁탈전을 벌인다. 레아는 아들이 있고 남편의 사랑은 없었으며,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었다. 둘은 빌하와 실바라는 여종들을 동원하고 합환채(최음제)까지 사용하여 자식 낳기 경쟁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야곱에게 약속하신 “많은 자식을 주시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남편의 사랑은 있지만 자식이 없는 라헬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레아의 합환채를 넘겨받아 그 힘으로 자식을 낳아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 사이에 레아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얻는다. 자식을 낳는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야곱의 말을 라헬은 새겨듣지 않았다. -평생 자기 힘과 지혜로만 원하던 것을 얻어 내던 야곱의 입에서 하나님만이 자식을 주실 수 있다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라헬마저도 그 사실을 인정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태를 여셨다. 요셉을 주셔서 아이 못 낳은 수치를 라헬에게서 거두신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다. 이유는 라반의 사기행각과 관련 있다. 라반에 대한 분풀이 대상이 레아였다. 레아의 처지가 기구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잘 아셨다.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다. 이와 관련하여 야곱에게 그 원인을 둔다. 하나님께서는 결혼까지 한 이상 레아에 대한 책임을 라반에게 묻지 않으셨다. 야곱의 행동을 기억하셨다. *한편, 야곱은 레아를 미워했음에도(사랑받지 못함_29:31) 육체적인 관계는 맺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늘어날수록 레아가 붙인 아들들의 이름은 야곱의 자세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 훗날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는 부인은 레아다. 야곱이 그토록 사랑한 라헬은 이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베들레헴 근처 길에 장사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아에 대한 야곱의 마음이 미움에서 사랑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본문은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주”를 보여준다. 한 남자 야곱의 사랑을 구하고 찾는 레아와 자신을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는 라헬이 자신들의 몸종까지 아내로 주어 자녀 출산에 여념이 없다. 마치 부부간의 사랑 확인이 출산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긋난 출산 경쟁을 통해서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고 계신다. 야곱의 어긋난 라헬만을 향한 사랑과 이런 야곱에게 지아비의 사랑을 기다리는 레아의 마음과 출산을 통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는 지파들의 출발은 성스럽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의 출발이 아니라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다투는 과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순탄하고 평이하기보다 왜곡된 가정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환경과 조건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인도하심이 더욱 발휘되고 드러날 것이다. *출산 경주의 결승선은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에 임신과 출산이 달려 있음을 레아든 라헬이든 깨달은 것이었다. 남편 야곱의 사랑만을 추구했던 레아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깨달았고, 합환채가 임신시켜 줄 것이라는 그릇된 신앙을 가졌던 라헬도 임신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임을 깨달아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화하였다. 길고 긴 출산 경주의 결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발견한 것이다. 레아든 라헬이든 하나님을 깨달았다. *한편, 하란에서 자란 하란의 딸들이 이제 하나님의 딸들이 되는데 이리 오래 걸렸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다. 출산 경주의 결과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레아는 하나님께 사랑받음을 깨달았고, 레아의 거듭된 출산에서 시기와 질투로 몸종을 통해서라도, 합환채를 사용하여서라도 자녀들을 원했던 라헬은 임신은 인간적이고 우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철저히 깨닫고 결국 “호소”하는 여인으로 변한다. 하나님은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도 후손에 대한 약속을 철저히 이루고 계셨고, 야곱의 부인들도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역사하셨다.

-역시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 기도제목

* 주님, 생명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 주님, 야곱의 가정이 북적북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북적거림이 아니라 불안정한 부부관계로 인해 어지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후손들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큽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31:17-35 야곱의 돌아감과 라반의 추격전
    
야곱이 부유해짐으로 말미암아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때마침 하나님께서도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다. 야곱이 아내들의 동의를 얻어 모든 소유를 끌고 고향으로 출발하자 바로 라반이 야곱을 잡기 위해 쫓아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계시를 받고 야곱을 보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라헬은 집을 떠나며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고 라반은 이것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라헬에게 속아 드라빔을 찾지 못한다.
    
야곱은 제2의 아브라함이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이 했던 ‘떠남’을 재현한다. 아브라함도 아내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었다(창 12:5). 하지만 이번에는 야반도주와 같은 탈출극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밧단아람에 올 때는 낙타도 없이 홀몸으로 걸어서 왔고, 신붓값도 없었던 빈털터리 도망자가 이제 낙타들을 거느리고 많은 가축 때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돌아간다.
    
    
    
1. 야곱 가족의 야반도주(17~22절)
야곱은 두 아내의 동의를 얻고 귀향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즉시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최적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디데이를 양털 깎는 시기로 정한다(19절). 양털 깎기는 봄에 진행되었다. 이때는 대부분의 식구가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나 커다란 수입이 보장되는 그 일에 집중한다. 라반의 가족들이 모두 양털 깎기에 동원되어 나갔을 때, 야곱은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17절).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들을 모두 낙타들에 태우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가지고 나와 가나안 땅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향한다. 이때 라헬은 라반의 막사에서 드라빔을 훔쳐 나온다(19절).
    
드라빔은 여러 신들의 단일 합일체로 추정한다. 그렇기에 한 개체이면서 항상 복수형 ‘테라핌’으로 표기된다. 드라빔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일단 점술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겔 21:26; 슥 10:2). 드라빔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가족 수호신이었다. 그렇기에 라헬은 이역만리 타향으로 떠나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번성의 복을 위해 드라빔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모습을 통해 라헬이 평소 메소포타미아 우상숭배에 익숙했기에 자녀를 얻기 위해 합환채의 신통력에 의존했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창 30:14).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으로 도주한다(21절). 이 ‘강’은 유프라테스강이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쪽으로 오기 위해서는 남서쪽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야 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행진하면 갈릴리 호수 근처의 북부 길르앗에 도착한다. 한편, 야곱의 가족이 도주한 지 삼 일이 지나서야 라반이 알아차린다(23절). 참고로 ‘삼 일(사흘 길)’은 문자적인 삼 일을 초월하여 여러 날일 수 있다.
    
    
    
2. 라반의 추격(23~30절)
라반이 야곱의 가족을 뒤쫓는다. 그는 형제들(아마 친족들)을 데리고 ‘칠 일 길’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 도착하여 야곱의 대열에 바짝 붙었다(23절). 거의 야곱을 따라잡았던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야곱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잘잘못을 따지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24절). 흥미로운 것은 앞서 20절부터 라반은 ‘아람 사람’으로 불린다. 이때부터 야곱과 라반의 근본적인 민족적 간격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표현으로 인해 그들 사이의 ‘조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한편, ‘칠 일 길’에서 ‘칠 일’은 분명 어림수거나 혹은 꽉 찬 기간을 표현하는 문학적 숫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밧닷아람에서 북부 길르앗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450km나 된다. 당시 대상들의 일반적인 여행 속도는 하루 약 24km였다. 라반의 추격 속도가 매우 빨랐더라도 거의 보름은 걸릴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단순히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삼 일’과 ‘칠 일’은 문자적인 거리라기보다 상당히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아 야곱이 막사를 설치한 맞은편 길르앗 산에 자신의 막사를 친다(25절). 그리고 야곱을 만나 그를 강하게 질책하며 꾸중한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전쟁 포로처럼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26절). 아이러니하게도 라반 그가 야곱을 그처럼 취급하지 않았던가?
    
라반은 그가 자신을 훔쳐 갔다고 거듭 비난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이별을 통보했다면, 성대한 송별식을 마련해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라반의 허세이자 거짓말이다. 그는 그동안 사탕발림으로 야곱을 열 차례나 속였기 때문이다.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에게 이별의 입맞춤도 하지 못하게 하고 빼돌린 야곱의 행위가 비열하고 어리석다고 구석으로 몰아간다. 그는 군사적 행동을 들먹이며 야곱에 대한 힘의 우위를 최대로 과시한다(29절). 그러나 라반은 지난밤 자신에게 현몽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무력 행위를 참는다고 말한다.
    
다신 숭배자인 그가 야곱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지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야곱의 귀향 명분을 인정하면서 결국 야곱을 놓아준다(29절). 하지만 결코 보낼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족 수호신으로 섬겼던 드라빔이었다. 라반은 야곱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신들(엘로힘)’을 ‘훔쳐 갔다고(가나브)’ 항의한다. ‘신들’은 드라빔을 지칭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라반은 야곱이 ‘훔쳤다’라는 말을 세 번(내 마음을 훔쳤다(26절); 나를 훔쳤다(27절); 내 신들을 훔쳤다(30절) 이나 언급한다.
    
    
    
3. 라헬이 드라빔을 숨기다(31~35절)
야곱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강력히 변호한다. 요지는 이 모든 것은 외삼촌 라반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내를 라반이 강제로 빼앗아 갈까(가잘) 두려워 탈출극을 벌였다고 항변한다. 이 표현들에는 야곱에게 20년 동안 자행된 라반의 탄압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비난이 들어가 있다(창 31:36~42). 야곱은 라반의 ‘신들’ 훔쳐 간 자가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이런 드라빔을 훔친 것에 대한 형벌이 어느 정도였을지 알 수 없지만, 야곱은 라반의 의심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 자기 가족이 결코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야곱의 이런 발언은 라헬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라반은 야곱과 레아의 막사에 이어 라헬의 막사로 들어가서 수색을 진행했다(33절). 하지만 라헬은 드라빔을 빼돌려 ‘그것들을’ 낙타 아래 안장에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라반은 장막 구석구석을 모두 찾았으나 허탕을 쳤다. 라헬은 자신이 생리 중이라 일어나 영접하여 안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아버지의 양해를 구했다. 이 장면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레위기 15장 19~30절은 생리하는 여인은 부정하므로 격리된 채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된다고 규정하는데, 레위기 이전이지만, 이미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유사한 정결법이 적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따라서 라반은 라헬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라헬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셈이다. 하지만 이로써 드라빔을 지키기 위해 드라빔을 부정하게 하는 일을 감수해야 했다. 관습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신들이 더럽혀진 것’이다. 또한 이런 모습은 라반의 가족들이 드라빔을 목숨처럼 간직하려 했지만, 정작 드라빔을 대하는 태도나 종교심은 느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에서를 피해 도망하여 하란에 왔던 야곱은 이제 장인 라반을 피해 도망한다. 자신이 주도하려던 인생이 늘 도망자로 끝나고 있었다. 야곱(동생)이 아비를 속여 축복을 빼앗았듯이 라헬(동생)도 아비를 속여 드라빔을 훔쳤다. 드라빔이 고대 관습상 상속을 상징하는 물건이니, 이는 형의 상속권을 빼앗은 야곱처럼 라헬도 라반의 아들들에게서 상속권을 훔쳐 야곱에게 옮기려고 한 것이다. 내 힘으로 미래를 열어보겠다는 자기중심성과 야심이 여전히 야곱의 집을 사로잡고 있었다.
    
-라반은 사흘 만에 야곱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다. 라반은 그를 사로잡거나 해할 마음으로 친족들을 거느린 채 7일을 뒤쫓아 야곱 일행이 머물던 길르앗 산에 이른다. 20년을 부렸는데도 성에 차지 않은 라반의 모습에서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음을 보게 된다. 열 번이나 품삯을 속인 자가 도리어 분노 가운데 뒤쫓다니, 죄가 죄를 더욱 불러오는 꼴이다. 자신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을 책망하지만, 정작 책망받아야 할 사람은 위선적이고 살기등등한 라반이였다.
    
-그는 겉으로는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말로는 친절하고 너그러웠지만, 그의 삶은 내내 자기가 한 말을 배신하는 삶이었다. 입술로는 야곱 뒤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시기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하나님보다 드라빔의 위력을 더 신뢰한 것이다.
    
-라반의 살기등등한 추격 의지를 꺾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28:15)”이라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라반에게 야곱을 향해 아무 말도 못 하게 막으셨다. 마치 40년 전에 리브가를 시집보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라반 자신이 가부간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창 24:50), 야곱의 결혼과 떠남도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신 것이다. 세상은 늘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려고 뒤쫓는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추월할 수 없다. 이 믿음으로 살아내자.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이런 경고를 하신 이유는 실제로 라반이 야곱을 죽이고 야곱의 모든 재산과 가족을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벧엘에서 야곱에게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28:15)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라반의 손에 죽을 뻔한 야곱을 보호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라반은 추격에 성공하고도 야곱을 어찌하지 못하고 언약을 맺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4~55절). 내가 모르는 가운데서도 정확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리라.
    
-야곱은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줄도 모르고 라헬에게 사형을 선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확언을 한다. 이후 공교롭게도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며, 이는 야곱의 가족에서 제일 먼저 맞은 죽음이었다. 속임 당하는 인생을 하란에 떨치고 온 듯했지만, 야곱은 여전히 속고 있었다.
    
-하나님은 야곱을 라반으로부터 보호하시지만, 라헬이 그토록 쥐고 있던 라반의 드라빔은 라반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몸도 보호하지 못하고 라헬에게 납치당하여 그녀에게 깔린다. 라반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하나님에 비해, 라반이 믿는 수호신은 라헬 밑에서 꼼짝 못 하고 깔린 것이다. 오늘날 우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우상을 믿고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지.
 
-하란에서의 20년은 야곱에게 하나님의 존재감이 깊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내들은 야곱과 같지 않았다. 특히 라헬은 종교적으로 집안의 수호자와 사회적으로는 상속권의 보증으로 여기는 드라빔을 몰래 훔쳐 탈출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열악했다. 출산도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힘으로 축복을 받아보려는 측면이 더 보인다. 20년 전 야곱의 모습이 라헬에게서 보이다니 그래서 자기와 비슷해서 야곱이 첫 만남에서 첫눈에 반했을까?
    
    
    
*주님, 20년 전 도망은 비참했지만, 지금의 도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귀환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20년 만에 맛보는 야곱을 보며, 믿음의 인내가 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더욱 인내하겠습니다.
*주님, 그런데 라반의 감춰져 있던 악함이 드러난 순간, 하나님이 라반을 제어해 주시고, 이를 알 턱 없는 야곱은 얼떨결에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듣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신뢰해야 할 분명한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신뢰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라헬은 아직입니다. 하나님보다 드라빔이 더 중요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가져가려 합니다. 결국 그런 유혹과 고집은 관심조차 두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