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날짜가 적시되지 않아서 정확한 기간을 유추하기 어렵다. ‘그 후에’, 즉 요셉이 옥에 갇힌 후 어느 날 두 정치범이 새로 수감되었고, 또한 다시 여러 날이 지나(4절) 두 사람이 꿈을 꾸었다. 요셉은 고위 관료들이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어 나간 후 2년을 더 갇혀 있었다. 그러나 총 수감 기간을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정황상 요셉은 20대 중반 즈음에 수감되었을 것으로 본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 후에’로 시작한다.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후 라는 의미다. 상황은 이렇게 늘 변한다. 비록 노예로 애굽에 팔려 보디발의 집에 들어왔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본 주인 보디발은 그에게 모든 가정사를 맡겼다. 노예로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상황은 한 여인의 욕정(?) 탓에 순식간에 돌변한다. 그렇게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곳 간수장도 역시 요셉의 남다름을 보게 되고 감옥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감옥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안정적인 환경이 요셉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감옥은 감옥이다.
본문은 “꿈”이야기다. 요셉 본인의 꿈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이 꾼 꿈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다. 본문까지 요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흘러 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요셉이 꾼 두 개의 꿈이 영향을 미쳤다. 그 꿈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가 형들의 미움은 격화 되었고, ‘어디 우리가 너를 죽여도 네 꿈대로 이루어지는 보자!’(창 37:20) 서로 이야기하며 요셉을 결국 노예로 팔았다. 그런 꿈 이야기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순진(?)하게 섣불리 이야기 했다가 결국 노예로 팔려 애굽까지 흘러 들어왔다. 성경 본문은 꼭집어 이야기 하지 않지만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함”이 드러날 정도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된 원동력은 “그 꿈을 통해 마음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함께 동행함이 삶 속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인정을 이끌어 낼 정도로 구별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근동지역에 닥칠 전무후무한 가뭄 속에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이해하지 못할 곤경에 빠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차근차근 큰 가뭄에서의 구원을 준비해 가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뜻,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민족으로의 태동을 준비 시키신다.
한편 요셉은 예상치 못하는 막막한 지경에 수시로 빠졌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함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시간속에서 죄를 범치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은 요셉을 더 심한 곤경으로 몰아 넣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1.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과정을 따라(14절)
요셉은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하면서, 특히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며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시종장께서 잘 되시는 날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나를 따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나의 사정을 말씀드려서, 나도 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4절).” 자연스러운 거다. 이 장면 하나를 가지고 요셉이 하나님 보다 사람을 의지했다 라고 과장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억울한 옥살이에서 어떻게든 풀려나고 싶은 것이 인지 상정이다. 하지만 요셉은 풀려나더라도 노예다. 지금 술 맡은 관원이 부탁해서 왕의 사면을 받은 들, 다시 보디발의 노예로 복권 될 뿐이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의 꿈을 기막히게 해석해 주고 사면에 대한 기대를 품고 무려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보디발의 노예로 다시 복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이 이를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 되고 난 후부터 얼마나 그의 소식을 기다렸을까? 점차 시간이 흐를 수록 얼마나 아쉬웠을까? 감옥에서 자신의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불안이 왜 없겠나? 두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에서 요셉은 점차 잊혀졌다. 하님은 술맡은 관원장(사람)의 힘(도움)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하는 정교한 믿음을 다듬고 계셨다.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을 거쳐 바로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와 요셉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원하는 상황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이끄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삶의 곤고함을 견디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나의 성급함대로 섣불리 누리기를 원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어주실 그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견디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2.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8절)
친위대장(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다. 왕궁에서 거물 정치인 둘이 한 날 감옥에 투옥된다. 그들을 굳이 요셉에게 수종들게 한다(4절).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노예인 요셉에게, 두 거물 정치인의 수종을 들도록 맡길 정도로 보디발은 여전히 요셉을 아끼고 있다. 요셉은 그 두 거물 정치인을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들 낯빛의 밝고 어두움을 금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하게 섬겼다. “다음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갔는데, 요셉은 그들에게 근심스런 빛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혀 있는 바로의 두 시종장에게 물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새번역_6-7절)
그들의 근심은 꿈이 원인이었다. 누구도 해석을 해주지 못한 것이다. 감옥 안에 갇혀 있으니 당연하다. 왕궁에 있었을 때는 손 쉽게 박수들에게 물어 보고 궁금증을 해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감옥이다. 박수, 무당은 없다. 답답했다. 그냥 지나치기에 그 꿈은 너무나 생생했다. 요셉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새번역_8절 하).
바로 이 장면이다. 요셉의 감옥생활은 억울하게 들어온 것을 한탄하고 비관하며 생활하지 않았다. 이 지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시간을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하루 하루 지내고 있었다. 주어진 상황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당당하고 당연하게 두 거물 정치인에게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동행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그들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게 하신 분도 하나님, 그것을 해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요셉의 감옥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나는?
-상황과 여건이 하나님과의 동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내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속에서 실제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특권이다. 이는 상황은 변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 명백한 증거며, 그렇기에 변치 않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위로와 소망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아닌가 하여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어도 요셉이 낙심하지 않은 것도 상황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교제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요셉의 삶이 성경에 일일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가득했다는 전제가 된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요셉의 이야기의 초점이 요셉 일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에 시시콜콜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함축적으로 담긴 이 “행간”은 이미 요셉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이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삶도 세상속에서 세상의 가치에 종속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 나라 가치를 잃지 않는 당당함으로 살고 싶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성실하게 만나고 교제할 때 힘을 얻어 지속할 수 있다.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은 아버지 야곱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 그 꿈에 대한 의미를 일깨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노예로서 감방생활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의 총기를 잃지 않게 하였다.
*지금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이끄신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과 교제는 어떤 상황, 특히 어떤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신뢰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가 노예일지라도 그 말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요셉이 박수 무당이 아니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이 요셉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이다. 애굽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의 통치로 보이지만, 바로를 움직이는 것은 박수 무당들의 세치 혀에 있었음을 알게 하셨다. 그런 애굽의 문화속에서,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박수, 무당이 없어도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라며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실 정도로 이미 요셉에게 충분히 임상을 행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 확신 없이 아무리 감옥에 갇혀 있다하더라도 감히 고개를 들수 없는 두 정치 거물에게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으리라.
*요셉에게는 이런 시간들이 분명히 필요했다. 이후 애굽을 다스리며 의지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그의 온 몸에 각인 시키고 영혼을 무장시키는 시간들 말이다.
*번개 한 번으로 충분히 각인 시킬 수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요셉에게 지난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감하게 하심으로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와 능력 그 자체가 되게 하고, 아울러 요셉도 다른 어떤 것에 눈 돌리지 않도록 다지고 또 다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단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나타나 사람들의 인정도 함께 받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이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삶의 문제는 하나님께 해답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의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 근심의 빛이 가득한 사람을 돌아보며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이 삶을 지지(지탱)하지 못하면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삶에 함몰되어 한탄하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요셉이 근심의 빛을 띠는 두 정치인의 낯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혜안은 하나님과 함께함의 실제적인 은혜안에서 그의 마음이 평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은 이렇게 실제적이다.
*아직 2년이 더 남았다. 요셉은 자신이 감옥에서 2년을 더 보내게 될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2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요셉은 감옥에 있지만 일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는 당당한 요셉의 언행이 나의 언행이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해답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근심의 낯을 가진 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도와 줄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는 행간에 깊이 담긴,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과 인격적인 교제의 요셉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의 인생의 행간도 이처럼 주님과 더욱 친밀하여 지기를 기대하고 기대한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 후에’로 시작한다.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후 라는 의미다. 상황은 이렇게 늘 변한다. 비록 노예로 애굽에 팔려 보디발의 집에 들어왔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본 주인 보디발은 그에게 모든 가정사를 맡겼다. 노예로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상황은 한 여인의 욕정(?) 탓에 순식간에 돌변한다. 그렇게 요셉은 주인 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곳 간수장도 역시 요셉의 남다름을 보게 되고 감옥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감옥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안정적인 환경이 요셉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감옥은 감옥이다.
본문은 “꿈”이야기다. 요셉 본인의 꿈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이 꾼 꿈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다. 본문까지 요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흘러 오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요셉이 꾼 두 개의 꿈이 영향을 미쳤다. 그 꿈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가 형들의 미움은 격화 되었고, ‘어디 우리가 너를 죽여도 네 꿈대로 이루어지는 보자!’(창 37:20) 서로 이야기하며 요셉을 결국 노예로 팔았다. 그런 꿈 이야기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순진(?)하게 섣불리 이야기 했다가 결국 노예로 팔려 애굽까지 흘러 들어왔다. 성경 본문은 꼭집어 이야기 하지 않지만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내면서 “하나님과 함께 함”이 드러날 정도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된 원동력은 “그 꿈을 통해 마음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함께 동행함이 삶 속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인정을 이끌어 낼 정도로 구별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근동지역에 닥칠 전무후무한 가뭄 속에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이해하지 못할 곤경에 빠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차근차근 큰 가뭄에서의 구원을 준비해 가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뜻,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민족으로의 태동을 준비 시키신다.
한편 요셉은 예상치 못하는 막막한 지경에 수시로 빠졌으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함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시간속에서 죄를 범치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은 요셉을 더 심한 곤경으로 몰아 넣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1.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과정을 따라(14절)
요셉은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하면서, 특히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며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시종장께서 잘 되시는 날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나를 따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나의 사정을 말씀드려서, 나도 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_14절).” 자연스러운 거다. 이 장면 하나를 가지고 요셉이 하나님 보다 사람을 의지했다 라고 과장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라면 억울한 옥살이에서 어떻게든 풀려나고 싶은 것이 인지 상정이다. 하지만 요셉은 풀려나더라도 노예다. 지금 술 맡은 관원이 부탁해서 왕의 사면을 받은 들, 다시 보디발의 노예로 복권 될 뿐이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의 꿈을 기막히게 해석해 주고 사면에 대한 기대를 품고 무려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보디발의 노예로 다시 복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이 이를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 되고 난 후부터 얼마나 그의 소식을 기다렸을까? 점차 시간이 흐를 수록 얼마나 아쉬웠을까? 감옥에서 자신의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불안이 왜 없겠나? 두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에서 요셉은 점차 잊혀졌다. 하님은 술맡은 관원장(사람)의 힘(도움)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신뢰하는 정교한 믿음을 다듬고 계셨다.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을 거쳐 바로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와 요셉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원하는 상황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이끄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삶의 곤고함을 견디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나의 성급함대로 섣불리 누리기를 원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어주실 그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견디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2.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8절)
친위대장(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다. 왕궁에서 거물 정치인 둘이 한 날 감옥에 투옥된다. 그들을 굳이 요셉에게 수종들게 한다(4절).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노예인 요셉에게, 두 거물 정치인의 수종을 들도록 맡길 정도로 보디발은 여전히 요셉을 아끼고 있다. 요셉은 그 두 거물 정치인을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들 낯빛의 밝고 어두움을 금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하게 섬겼다. “다음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갔는데, 요셉은 그들에게 근심스런 빛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혀 있는 바로의 두 시종장에게 물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새번역_6-7절)
그들의 근심은 꿈이 원인이었다. 누구도 해석을 해주지 못한 것이다. 감옥 안에 갇혀 있으니 당연하다. 왕궁에 있었을 때는 손 쉽게 박수들에게 물어 보고 궁금증을 해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감옥이다. 박수, 무당은 없다. 답답했다. 그냥 지나치기에 그 꿈은 너무나 생생했다. 요셉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새번역_8절 하).
바로 이 장면이다. 요셉의 감옥생활은 억울하게 들어온 것을 한탄하고 비관하며 생활하지 않았다. 이 지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시간을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대하며 하루 하루 지내고 있었다. 주어진 상황과 여건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당당하고 당연하게 두 거물 정치인에게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동행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그들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게 하신 분도 하나님, 그것을 해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요셉의 감옥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나는?
-상황과 여건이 하나님과의 동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내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이라도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속에서 실제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특권이다. 이는 상황은 변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 명백한 증거며, 그렇기에 변치 않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위로와 소망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아닌가 하여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어도 요셉이 낙심하지 않은 것도 상황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교제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요셉의 삶이 성경에 일일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가득했다는 전제가 된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요셉의 이야기의 초점이 요셉 일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에 시시콜콜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함축적으로 담긴 이 “행간”은 이미 요셉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이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삶도 세상속에서 세상의 가치에 종속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 나라 가치를 잃지 않는 당당함으로 살고 싶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성실하게 만나고 교제할 때 힘을 얻어 지속할 수 있다.
*요셉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은 아버지 야곱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 그 꿈에 대한 의미를 일깨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노예로서 감방생활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의 총기를 잃지 않게 하였다.
*지금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이끄신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소통과 교제는 어떤 상황, 특히 어떤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신뢰하여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가 노예일지라도 그 말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요셉이 박수 무당이 아니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이 요셉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이다. 애굽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의 통치로 보이지만, 바로를 움직이는 것은 박수 무당들의 세치 혀에 있었음을 알게 하셨다. 그런 애굽의 문화속에서, “근심할 필요 없습니다. 박수, 무당이 없어도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라며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실 정도로 이미 요셉에게 충분히 임상을 행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 확신 없이 아무리 감옥에 갇혀 있다하더라도 감히 고개를 들수 없는 두 정치 거물에게 이리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으리라.
*요셉에게는 이런 시간들이 분명히 필요했다. 이후 애굽을 다스리며 의지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그의 온 몸에 각인 시키고 영혼을 무장시키는 시간들 말이다.
*번개 한 번으로 충분히 각인 시킬 수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요셉에게 지난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감하게 하심으로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와 능력 그 자체가 되게 하고, 아울러 요셉도 다른 어떤 것에 눈 돌리지 않도록 다지고 또 다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단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나타나 사람들의 인정도 함께 받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이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삶의 문제는 하나님께 해답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의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 근심의 빛이 가득한 사람을 돌아보며 도와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이 삶을 지지(지탱)하지 못하면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삶에 함몰되어 한탄하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요셉이 근심의 빛을 띠는 두 정치인의 낯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혜안은 하나님과 함께함의 실제적인 은혜안에서 그의 마음이 평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은 이렇게 실제적이다.
*아직 2년이 더 남았다. 요셉은 자신이 감옥에서 2년을 더 보내게 될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2년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요셉은 감옥에 있지만 일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는 당당한 요셉의 언행이 나의 언행이 되기를 소망한다.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해답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근심의 낯을 가진 이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도와 줄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라는 행간에 깊이 담긴,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과 인격적인 교제의 요셉을 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나의 인생의 행간도 이처럼 주님과 더욱 친밀하여 지기를 기대하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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