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로의 꿈을 해몽한 요셉 [창 41:25-36]
 – 2026년 05월 13일
– 2026년 05월 13일 –
하나님은 미래의 흥망을 주관하신다. 요셉은 바로의 두 꿈 이야기를 듣고, 두 꿈은 같은 내용임을 밝힌다. 또한 이 꿈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부연한다. 요셉은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7년의 풍년을, 흉한 일곱 소와 마른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가리킨다고 선언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대비할 방안까지 제안한다.



1. 요셉의 꿈 해석(25~32절)
요셉은 바로가 말한 대로 두 꿈은 ‘하나’의 꿈이라고 확인해준다. 또한 그는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이 조만간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준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두 꿈은 하나의 꿈이다. 둘째, 일곱 마리 소와 일곱 이삭은 7년을 상징한다. 셋째, 7년의 풍년 후 7년의 흉년(기근)이 따를 것이다. 넷째, 두 번의 꿈은 그 일이 속히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뜻한다.

이어 요셉은 꿈의 전체 의미를 설명한다. 온 애굽 땅에 일곱 해의 풍년이 있으나 그 후에 일곱 해의 흉년이 들 것이고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 풍년을 기억하거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바로가 두 번 반복하여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확정’하셨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강조한다(32절).

요셉의 해몽을 통해 바로의 꿈이 지니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확정된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보여주신 사건들에 대한 대비책을 일러준다.



2. 요셉의 대비책 제안(33~36절)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뽑아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제안한다(33절). 그리고 34절에서는 나라 안에 감독관을 두어 일곱 해 풍년 동안 수확물의 5분의 1을 거두게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요셉은 장차 있게 될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어 바로의 권한 아래 그것을 흉년 때의 양식을 위하여 성읍에 쌓아두고 보존하게 하라고 말한다(35절). 그리고 요셉은 이러한 조치의 의미를 설명한다(36절). 그것은 일곱 해 동안 임할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애굽 땅의 사람들이 흉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의 대비책 제안은 바로가 기대하지 않았던 해몽의 영역이었다. 바로는 요셉에게 단지 신통력 있는 해몽을 원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찬 요셉은 대안까지 내놓게 된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삼중적이다. 먼저 장관을 임명하는 것, 그리고 지역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 마지막으로 국가적 배급 제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이 바로 그 적임자다. 요셉이 이 자리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는 그저 히브리 출신의 종일 뿐이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이 일의 적임자를 구해 적극적으로 대비하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바로가 요셉의 조언대로 풍년이 깃든 7년 동안 창고에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한다면, 애굽은 7년 대흉년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망하다’는 문자적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두 번 사용된다(9:11; 17:14). 특히 노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을 ‘끊어짐’으로 표현현 했다(9:11). 이처럼 위중한 표현을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국운이 걸린 흉년(가문, 기근)에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애굽은 멸망할 것이다.



나는?
-말씀이 기록되기 전,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꿈으로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꿈은 계시의 한 방편이었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창 28:12~15), 요셉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가르쳐주셨다(창 37:5~11). 오늘날에도 꿈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말씀에 모두 기록해두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할 때는 언제나 말씀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무시한 채 신비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바로에게 주신 꿈을 통해 애굽에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말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일강의 풍족한 수원을 의지하여 번영을 구가하던 애굽에 기근이 닥친다는 것은 이 거대한 나라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만들고, 농사는 자연현상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말씀 앞에 복종할 대상이다. 인간은 힘을 가진 듯 보이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처할 방안까지 제시한다. 명철하고 지혜로운 인재 등용과 행정 제도의 정비, 풍년 때 흉년을 대비하는 경제 제도 등 탁월한 정책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겠지만,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하면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으면서, 왕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조우하면서, 꿈에 대비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고 연단되었을 것이다. 함께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성실로 응답하여 산 결과일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 앞날을 대비하는 대안까지 들려주었다. 지난날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온 나라를 위한 멋진 정책을 제안하나, 지난날 훈련받을 때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순간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은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기억하고 그 꿈이 우리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믿음으로 살며, 그 꿈을 나를 통해 실현하려고 하실 때, 감당할 준비를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은 ‘부르심’이나 다름 없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 기도제목

*주님, 제가 걸어왔던 모든 과정 속, 경험들이 의미 있게 사용될 것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지혜와 믿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은 미래의 흥망을 주관하신다. 요셉은 바로의 두 꿈 이야기를 듣고, 두 꿈은 같은 내용임을 밝힌다. 또한 이 꿈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부연한다. 요셉은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7년의 풍년을, 흉한 일곱 소와 마른 일곱 이삭은 7년의 흉년을 가리킨다고 선언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을 대비할 방안까지 제안한다.



1. 요셉의 꿈 해석(25~32절)
요셉은 바로가 말한 대로 두 꿈은 ‘하나’의 꿈이라고 확인해준다. 또한 그는 그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이 조만간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알려준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두 꿈은 하나의 꿈이다. 둘째, 일곱 마리 소와 일곱 이삭은 7년을 상징한다. 셋째, 7년의 풍년 후 7년의 흉년(기근)이 따를 것이다. 넷째, 두 번의 꿈은 그 일이 속히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을 뜻한다.

이어 요셉은 꿈의 전체 의미를 설명한다. 온 애굽 땅에 일곱 해의 풍년이 있으나 그 후에 일곱 해의 흉년이 들 것이고 흉년이 너무 심하여 이전 풍년을 기억하거나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나타내는 꿈을 바로가 두 번 반복하여 꾼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확정’하셨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강조한다(32절).

요셉의 해몽을 통해 바로의 꿈이 지니는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며, 하나님께서 확정된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에게 꿈을 통해 보여주신 사건들에 대한 대비책을 일러준다.



2. 요셉의 대비책 제안(33~36절)
요셉은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뽑아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라고 제안한다(33절). 그리고 34절에서는 나라 안에 감독관을 두어 일곱 해 풍년 동안 수확물의 5분의 1을 거두게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요셉은 장차 있게 될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어 바로의 권한 아래 그것을 흉년 때의 양식을 위하여 성읍에 쌓아두고 보존하게 하라고 말한다(35절). 그리고 요셉은 이러한 조치의 의미를 설명한다(36절). 그것은 일곱 해 동안 임할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애굽 땅의 사람들이 흉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셉의 대비책 제안은 바로가 기대하지 않았던 해몽의 영역이었다. 바로는 요셉에게 단지 신통력 있는 해몽을 원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찬 요셉은 대안까지 내놓게 된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삼중적이다. 먼저 장관을 임명하는 것, 그리고 지역 감독관을 임명하는 것, 마지막으로 국가적 배급 제도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이 바로 그 적임자다. 요셉이 이 자리를 기대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는 그저 히브리 출신의 종일 뿐이다. 다만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이 일의 적임자를 구해 적극적으로 대비하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바로가 요셉의 조언대로 풍년이 깃든 7년 동안 창고에 곡물을 대량으로 저장한다면, 애굽은 7년 대흉년이 와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망하다’는 문자적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를 뜻한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두 번 사용된다(9:11; 17:14). 특히 노아 홍수로 인한 세상의 멸망을 ‘끊어짐’으로 표현현 했다(9:11). 이처럼 위중한 표현을 바로의 꿈을 해석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국운이 걸린 흉년(가문, 기근)에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애굽은 멸망할 것이다.



나는?
-말씀이 기록되기 전,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꿈으로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꿈은 계시의 한 방편이었다(민 12:6).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창 28:12~15), 요셉에게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가르쳐주셨다(창 37:5~11). 오늘날에도 꿈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말씀에 모두 기록해두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원할 때는 언제나 말씀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무시한 채 신비한 체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바로에게 주신 꿈을 통해 애굽에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말려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일강의 풍족한 수원을 의지하여 번영을 구가하던 애굽에 기근이 닥친다는 것은 이 거대한 나라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만들고, 농사는 자연현상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미래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말씀 앞에 복종할 대상이다. 인간은 힘을 가진 듯 보이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처할 방안까지 제시한다. 명철하고 지혜로운 인재 등용과 행정 제도의 정비, 풍년 때 흉년을 대비하는 경제 제도 등 탁월한 정책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겠지만,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일하면서, 감옥의 모든 일을 맡으면서, 왕실 감옥에서 죄수들과 조우하면서, 꿈에 대비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고 연단되었을 것이다. 함께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성실로 응답하여 산 결과일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 앞날을 대비하는 대안까지 들려주었다. 지난날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온 나라를 위한 멋진 정책을 제안하나, 지난날 훈련받을 때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순간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꿈은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기억하고 그 꿈이 우리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믿음으로 살며, 그 꿈을 나를 통해 실현하려고 하실 때, 감당할 준비를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꿈은 ‘부르심’이나 다름 없다.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 아니겠는가!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