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오찬이 끝났다. 그런데 진정한 즐거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현재의 즐거움은 요셉을 팔아버린 죄를 덮고 있는 즐거움이다. 즐거워도 즐거운 것이 아니다. 요셉은 형들과의 20여년전의 고통을 정리하려고 움직인다. 그때 나를 버린 것처럼 베냐민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막내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모습을 보일 것 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사실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와 요셉 앞에 서게 된 그 날부터 이미 요셉의 ‘진실’의 검증대 앞에 섰다. 요셉은 형들에게 첩자가 아닌 것을 ‘진실하게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가족에 대해 물어보고 막내를 데려오면 진실이 증명 될 것이라 명하면서 형들의 말을 시험하여 진실함이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창 42:16).
겉으로 일어난 상황은 첩자에 대한 진실 유무 지만, 이때부터 요셉은 형들이 과거에 행했던 “범죄”에 대한 진실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애굽 총리가 막내 베냐민의 소환을 요청할 때 요셉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고 괴로워 했다(창 42: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죄에 대해 이실직고 했지만 범죄의 당사자인 요셉과 아버지 야곱에게 직접 죄를 고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말의 진실함은 형식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형들이 요셉 앞에서 첩자가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들은 “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말했었다(창 42:11). 베냐민을 데려 오면서 열 한명의 형제들이 함께 모여 형식적으로는 이를 증명했지만, 진정한 “한 사람의 아들들”을 입증해야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시므온을 애굽에 볼모로 두고 다시 돌아온 시점이 두 번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한 형제들’ 이라면서 시급을 다투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늦게라도 돌아왔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왔으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나름 시험을 통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정말 “한 사람의 아들들”인 이 형제들에게서 막내 베냐민을 갈라놓는다면? 형들의 반응, 태도가 궁금했다. 베냐민을 22년전(노예 13년, 풍년 7년, 흉년 2년째) 자신처럼 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하나되어 행동할 것인가?
요셉은 형들의 죄에 대한 자백이 진실한 것인지, 제대로 시험을 걸어본다. 22년전 도단 들에서 자신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버려졌기 때문이다. 형들에게 요셉은 다른 어미의 아들이고 꿈 이야기하며 잘난체 하며, 아버지의 편애로 채색옷만 입는 밉상이었다. 도단 들에 자신들을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꿈 대로 되나 보자’며 어떤 방법이든 상관 없이 “살해”하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구덩이에 던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자신을 외면한 채 태연스럽게 밥을 먹은 형들이었다. 그리고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로 자신을 넘겼다. 형들에게 자신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마음은 어떨까? 요셉을 잃은 후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중 유일하게 남은 그를 요셉에게 한 것 이상으로 편애 했을 그 시간들 속에서 형들은 과연 베냐민을 “한 사람의 아들들”로 진정 받아들였을까? 요셉이 시험하고 싶은 대목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1.이구동성, 한 마음으로…(9, 13, 16절)
요셉이 청지기를 통해 미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감춰두고 청지기를 보내 자초지종을 말하며 나무랄 때,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런말씀을 하십니까? 소인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새번역_7절)…… 소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9절).” 은잔이 나온 그는 죽여도 좋고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일단 “한 사람의 아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한 사람의 아들들’의 끈끈함이 일단 보인다!.
청지기는 모두가 종이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나온 자만 종이 되면 된다고 했다(10절).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말았다! 형제들은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새번역_13절).”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 고통스러워 하며 움직인다!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따로 총리의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 “다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질책하는 요셉 앞에 모두가 엎드린다(14절). 호통을 치는 요셉에게 유다가 말한다. “우리가 주인 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 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16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함께” 종이 되겠다고 자청들을 한다.
2.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16절)
이렇게 “함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끈끈함, 책임의식, 연대감을 보이는 형제들의 모습은 “진실”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일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형들의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은잔이 별견된 베냐민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형제라며 “다같이 노예가 되겠다”며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에서 한 짓을 재연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요셉을 팔 때처럼 베냐민을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요셉을 배척하거나 손 댄 것처럼 막내 베냐민을 그렇게 하지 않고 형들이 보호할 것이다.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할 것이다 라며 당연히 함께 움직인다.
유다가 요셉에게 고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으니…” 이 죄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추어진 은잔을 들추어 내신 것으로 문맥상 표현하지만, 실상은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들추어 내신 것으로 읽혀도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던 그 때의 죄를 들추어 내셔서 지금 다시 “한 사람의 아들들”로 이 위기를 직면하게 하신 것으로 받아 들인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이는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인신매매를 제안한 유다이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내려올 때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약속도 했다. 이것이 기근에서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이 아니었고 “진실한” 마음이었음을 증명하는 듯 하다.
유다 뿐 아니라 형들은 처음 식량을 구하러 내려온 그때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3일동안 ‘요셉에게 지은 죄’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삭량 값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범죄함을 깨달아 두려워 하였다. 또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온 애굽에서 즐거운 점심을 함께 나눈 후 발견된 은잔 앞에서 유다는 22년전 요셉에게 행하였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형제중 어느 누구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으로 “다같이 종이 되겠나이다!” 바짝 엎드린다.
나는?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 맞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도착하고 이어진 애굽 총리와의 즐거운 오찬으로 볼모로 잡혔던 시므온도 구했고,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여 식량을 구하고,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이렇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형들에게 또 시험이 기다린다.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정한 형제애가 있는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난 22년전 지은 죄에 대해 다루신다. 형제애가 있는지 보려 했던 시험을 직면하면서 유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들추셨다’ 고백한다. 이 고백은 이중적임에 틀임없다. 어느 누구도 몰랐던 감추어진 은잔을 들춰 내신 하나님이 이를 통해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계속 상기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다루신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대충 얼버무리고, 덮고 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철저하게 드러내시되…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케 하시면서 해결하지 못한 죄를 떠올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죄는 회개하여 해결받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런데 그 해결은 단지 고백이나 자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고백 이후 변화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단지 말 몇마디, 흘리는 몇방울의 눈물이 다가 아니다. 삶의 변화가 진정한 회개의 열매다.
-말 뿐인 “한 사람의 아들들”의 관계… 시기와 질투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명목상의 형제들이 아니라 진실한 “한 사람의 아들들” 형제애가 증명 되어야 한다. 그 실제적인 변화가 증명되야 시험이 끝난다. 지금 요셉 앞에 선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의 그들이 아니다. 베냐민과 공동 운명 되기를 기꺼이 자청하는 모습으로 확연하게 변화 되어있었다. 자기들 끼리의 도단 범죄에 대해 고백하던 입술에서, 발견된 은잔 앞에서 함께 통곡하고, 옷을 찢으며, 함께 다시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이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함께 남아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2년전 도단 범죄를 재연 하지 않았다.
*묵상하며 나의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결된 하나된 공동체”이다. 형식적인 공동체일까?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공동체일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하나된 공동체다! 시험의 연속인 삶의 현장에서 “한 형제”인 우리의 공동체는 “함께” 시험을 감당하고 책임을 지려고 기꺼이 함께 할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기꺼이 함께 감당한다!
*나의 삶도 언제나 시험의 연속임을 안다. 요셉이 형들을 지켜보듯, 누군가 반드시 내 삶을 지켜보고 있음을 안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문제까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꼼꼼하게 바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볼 것이다. 나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와 질투에 취해 “한 사람의 아들들”이기를 포기한 결정의 도단 들에서 살지 않겠다. 은잔이 발견된 현장에서 함께 울고, 함께 달려와, 함께 엎드리는 그 현장과 같이 살겠다.
*묵상하며 문득 든 생각은 요셉의 치밀한 시험이다. 이만 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았다.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 단지 복수를 위한 시험이 아니라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22년전 형들의 행동에 대하여는 이미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리했다. 그럼에도 형들을 어떤 지점까지 줄기차게 밀어부친다.
*놀랍다! 문득 공동체에서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믿는 경향이 떠올랐다. 특히 이런 경우와 상황으로 인해 공동체의 고통이 가중되는 경우를 꽤 보았기에.. 요셉의 치밀한 시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적어도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치밀하게 살펴보는 올바른 분별력은 정말 중요하다.
*이 세상은 험하고 인간은 악하다… 살펴보고 분별하여 판단해야 한다. 성도라고 무작정 믿으면 절 대 안 된다. 살펴볼 시간, 분별할 사건 등을 충분히 거치고 판단해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인지…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축복이다. 22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 형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요셉은 철저하게, 매몰차게 검증했다.
*이구동성… 우리도 세상의 시험을 직면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기를…
*함께… 문득 이런 말씀이 생각난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교회 공동체는 이래야 한다.
*나의 마음의 상태, 삶의 상황이 기준이 아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에 하나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구동성의 고백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우선이다! 말씀 우선의 습관이 최소한 말씀이 나를 붙잡는 경험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가 없다면… 빨리 만들어야 한다. 뜬금없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본문 과도 상관 없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난다. 마치 전혀 연관성 없는 애굽 총리앞에서 22년전 도단 들 에서의 죄가 생각나는 유다와 형제들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 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의 문지방이 닳아야 산다. 적어도 말씀을 다루는 목사라면 그래야 한다…. 내 마음을 헤집는 말씀을 경험해야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이 일어나야 산다. 아픔이 있어야 성숙해 지듯, 말씀고민, 말씀직면, 말씀도전이 없는 목사가 어떻게 말씀으로 산다 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이 말씀 고뇌가 끊이지 않는 삶 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겉으로 일어난 상황은 첩자에 대한 진실 유무 지만, 이때부터 요셉은 형들이 과거에 행했던 “범죄”에 대한 진실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의지가 있는지를 시험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형들은 자기들끼리 애굽 총리가 막내 베냐민의 소환을 요청할 때 요셉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고백하고 괴로워 했다(창 42:21).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죄에 대해 이실직고 했지만 범죄의 당사자인 요셉과 아버지 야곱에게 직접 죄를 고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말의 진실함은 형식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형들이 요셉 앞에서 첩자가 아님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들은 “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말했었다(창 42:11). 베냐민을 데려 오면서 열 한명의 형제들이 함께 모여 형식적으로는 이를 증명했지만, 진정한 “한 사람의 아들들”을 입증해야 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시므온을 애굽에 볼모로 두고 다시 돌아온 시점이 두 번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한 형제들’ 이라면서 시급을 다투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늦게라도 돌아왔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왔으니 요셉의 입장에서는 나름 시험을 통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시험이 남았다. 정말 “한 사람의 아들들”인 이 형제들에게서 막내 베냐민을 갈라놓는다면? 형들의 반응, 태도가 궁금했다. 베냐민을 22년전(노예 13년, 풍년 7년, 흉년 2년째) 자신처럼 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진정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하나되어 행동할 것인가?
요셉은 형들의 죄에 대한 자백이 진실한 것인지, 제대로 시험을 걸어본다. 22년전 도단 들에서 자신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만 하나같이 그렇게 여겨지지 않고 버려졌기 때문이다. 형들에게 요셉은 다른 어미의 아들이고 꿈 이야기하며 잘난체 하며, 아버지의 편애로 채색옷만 입는 밉상이었다. 도단 들에 자신들을 찾아오는 모습을 보며 ‘꿈 대로 되나 보자’며 어떤 방법이든 상관 없이 “살해”하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구덩이에 던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자신을 외면한 채 태연스럽게 밥을 먹은 형들이었다. 그리고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로 자신을 넘겼다. 형들에게 자신은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다.
막내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마음은 어떨까? 요셉을 잃은 후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중 유일하게 남은 그를 요셉에게 한 것 이상으로 편애 했을 그 시간들 속에서 형들은 과연 베냐민을 “한 사람의 아들들”로 진정 받아들였을까? 요셉이 시험하고 싶은 대목이 이런 부분일 것이다. 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1.이구동성, 한 마음으로…(9, 13, 16절)
요셉이 청지기를 통해 미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감춰두고 청지기를 보내 자초지종을 말하며 나무랄 때, 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런말씀을 하십니까? 소인들 가운데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새번역_7절)…… 소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그것이 나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9절).” 은잔이 나온 그는 죽여도 좋고 우리는 주인의 종이 되겠습니다! 일단 “한 사람의 아들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한 사람의 아들들’의 끈끈함이 일단 보인다!.
청지기는 모두가 종이 될 필요는 없고 은잔이 나온 자만 종이 되면 된다고 했다(10절).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말았다! 형제들은 “이것을 보자, 그들은 슬픔이 북받쳐서 옷을 찢고 울면서, 저마다 나귀에 짐을 다시 싣고, 성으로 되돌아갔다(새번역_13절).” “한 사람의 아들들”이 “함께” 고통스러워 하며 움직인다! 은잔이 나온 베냐민만 따로 총리의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 “다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질책하는 요셉 앞에 모두가 엎드린다(14절). 호통을 치는 요셉에게 유다가 말한다. “우리가 주인 어른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없음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주인 어른의 종이 되겠습니다(새번역_16절).” 우리와 이 잔을 가지고 간 아이가 모두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함께” 종이 되겠다고 자청들을 한다.
2.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셨으니….(16절)
이렇게 “함께”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의 끈끈함, 책임의식, 연대감을 보이는 형제들의 모습은 “진실”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일 형식적인 것이었다면… 22년전 도단 들에서의 형들의 모습이 나타났을 것이다. 은잔이 별견된 베냐민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형제라며 “다같이 노예가 되겠다”며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에서 한 짓을 재연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요셉을 팔 때처럼 베냐민을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요셉을 배척하거나 손 댄 것처럼 막내 베냐민을 그렇게 하지 않고 형들이 보호할 것이다.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할 것이다 라며 당연히 함께 움직인다.
유다가 요셉에게 고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이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으니…” 이 죄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추어진 은잔을 들추어 내신 것으로 문맥상 표현하지만, 실상은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들추어 내신 것으로 읽혀도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아들들”이 아니었던 그 때의 죄를 들추어 내셔서 지금 다시 “한 사람의 아들들”로 이 위기를 직면하게 하신 것으로 받아 들인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이는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고 인신매매를 제안한 유다이다.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내려올 때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지키겠다고 약속도 했다. 이것이 기근에서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이 아니었고 “진실한” 마음이었음을 증명하는 듯 하다.
유다 뿐 아니라 형들은 처음 식량을 구하러 내려온 그때 첩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3일동안 ‘요셉에게 지은 죄’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삭량 값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범죄함을 깨달아 두려워 하였다. 또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내려온 애굽에서 즐거운 점심을 함께 나눈 후 발견된 은잔 앞에서 유다는 22년전 요셉에게 행하였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다시는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형제중 어느 누구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으로 “다같이 종이 되겠나이다!” 바짝 엎드린다.
나는?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 맞다. 베냐민과 함께 애굽에 도착하고 이어진 애굽 총리와의 즐거운 오찬으로 볼모로 잡혔던 시므온도 구했고, 첩자가 아님을 증명하여 식량을 구하고, 기근으로부터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이렇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형들에게 또 시험이 기다린다.
-요셉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정한 형제애가 있는지 또 다른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난 22년전 지은 죄에 대해 다루신다. 형제애가 있는지 보려 했던 시험을 직면하면서 유다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들추셨다’ 고백한다. 이 고백은 이중적임에 틀임없다. 어느 누구도 몰랐던 감추어진 은잔을 들춰 내신 하나님이 이를 통해 22년전 요셉에게 지은 죄를 계속 상기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다루신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대충 얼버무리고, 덮고 가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철저하게 드러내시되…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케 하시면서 해결하지 못한 죄를 떠올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죄는 회개하여 해결받고 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그런데 그 해결은 단지 고백이나 자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고백 이후 변화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단지 말 몇마디, 흘리는 몇방울의 눈물이 다가 아니다. 삶의 변화가 진정한 회개의 열매다.
-말 뿐인 “한 사람의 아들들”의 관계… 시기와 질투가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명목상의 형제들이 아니라 진실한 “한 사람의 아들들” 형제애가 증명 되어야 한다. 그 실제적인 변화가 증명되야 시험이 끝난다. 지금 요셉 앞에 선 형들은 22년전 도단 들의 그들이 아니다. 베냐민과 공동 운명 되기를 기꺼이 자청하는 모습으로 확연하게 변화 되어있었다. 자기들 끼리의 도단 범죄에 대해 고백하던 입술에서, 발견된 은잔 앞에서 함께 통곡하고, 옷을 찢으며, 함께 다시 요셉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들이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함께 남아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2년전 도단 범죄를 재연 하지 않았다.
*묵상하며 나의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연결된 하나된 공동체”이다. 형식적인 공동체일까?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공동체일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하나된 공동체다! 시험의 연속인 삶의 현장에서 “한 형제”인 우리의 공동체는 “함께” 시험을 감당하고 책임을 지려고 기꺼이 함께 할까? 맞다! 우리 공동체는 기꺼이 함께 감당한다!
*나의 삶도 언제나 시험의 연속임을 안다. 요셉이 형들을 지켜보듯, 누군가 반드시 내 삶을 지켜보고 있음을 안다.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공동체의 큰 문제까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볼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꼼꼼하게 바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볼 것이다. 나는 요셉의 형들처럼 시기와 질투에 취해 “한 사람의 아들들”이기를 포기한 결정의 도단 들에서 살지 않겠다. 은잔이 발견된 현장에서 함께 울고, 함께 달려와, 함께 엎드리는 그 현장과 같이 살겠다.
*묵상하며 문득 든 생각은 요셉의 치밀한 시험이다. 이만 하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았다.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한다. 단지 복수를 위한 시험이 아니라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22년전 형들의 행동에 대하여는 이미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리했다. 그럼에도 형들을 어떤 지점까지 줄기차게 밀어부친다.
*놀랍다! 문득 공동체에서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믿는 경향이 떠올랐다. 특히 이런 경우와 상황으로 인해 공동체의 고통이 가중되는 경우를 꽤 보았기에.. 요셉의 치밀한 시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싶다. “적어도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치밀하게 살펴보는 올바른 분별력은 정말 중요하다.
*이 세상은 험하고 인간은 악하다… 살펴보고 분별하여 판단해야 한다. 성도라고 무작정 믿으면 절 대 안 된다. 살펴볼 시간, 분별할 사건 등을 충분히 거치고 판단해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인지… 공동체를 위하는 결정인지… 분별하는 것이 곧 축복이다. 22년이 흐른 시간 속에서 형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요셉은 철저하게, 매몰차게 검증했다.
*이구동성… 우리도 세상의 시험을 직면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기를…
*함께… 문득 이런 말씀이 생각난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교회 공동체는 이래야 한다.
*나의 마음의 상태, 삶의 상황이 기준이 아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에 하나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이구동성의 고백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씀이 우선이다! 말씀 우선의 습관이 최소한 말씀이 나를 붙잡는 경험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가 없다면… 빨리 만들어야 한다. 뜬금없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본문 과도 상관 없다. 그런데 이 생각이 난다. 마치 전혀 연관성 없는 애굽 총리앞에서 22년전 도단 들 에서의 죄가 생각나는 유다와 형제들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 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출입구다. 이 출입구의 문지방이 닳아야 산다. 적어도 말씀을 다루는 목사라면 그래야 한다…. 내 마음을 헤집는 말씀을 경험해야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이 일어나야 산다. 아픔이 있어야 성숙해 지듯, 말씀고민, 말씀직면, 말씀도전이 없는 목사가 어떻게 말씀으로 산다 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이 이 말씀 고뇌가 끊이지 않는 삶 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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