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요셉 형들의 제2차 방문을 다루고 있는 43~45장의 첫 단락이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 애굽으로 다시 양식을 사러 가야 할 때,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베냐민이 동행해야 함을 역설하고 야곱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왜 유다 나섰을까? 유다 위로 맏형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가 있다. 둘째 시므온은 애굽에 잡혀 있고, 르우벤은 아버지에게 시므온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내놓은 바 있다(42:36~38). 그러나 이 결연한 제안은 아버지의 공감을 얻지 못하여 르우벤이 다시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레위 역시 디나가 겁탈을 당했을 때 세겜 학살을 주동하여 아버지의 눈 밖에 나 있었다.
1.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하는 요셉의 형들(1~5절)
어느 새 한 해가 지났다. 가나안 땅의 가뭄은 더욱 심각해졌다. 야곱의 아들이 애굽에서 사온 식량도 축났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다시 가서 식량을 조금 사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형제들은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형제들이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절도범으로 몰린 처지에서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야곱도 목숨처럼 아끼는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식량이 축날 때까지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극심한 기근 속에서 시므온의 생환은 최우선 과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야곱을 설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야곱 가문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유다는 르우벤과 레위와 함께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 어려운 전력일 지닌 아들이었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의 계략에 휘말려 부끄럽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39장). 그럼에도 유다가 현재 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는데, 최적의 적임자는 아닐지 몰라도 최상의 해결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유다는 반드시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한다(3절). 애굽 총리가 막내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접견이 불가하다며(내 얼굴을 보지못하리라) 으름장을 놨다고 말한다. 그래서 야곱을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유다의 논리와 명분은 뚜렸했다. 만약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총리를 접견할 수 없으니 전혀 식량을 살 수 없게 된다. 이는 식량이 동난 온 가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야곱은 유다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2. 베냐민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유다(6~10절)
야곱은 애굽 총리에게 베냐민의 존재를 알린 아들들을 원망한다(6절). 그들이 경솔하게 막내아들을 언급해서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질책을 들은 뒤 유다가 아닌 아들들 모두가 아버지에게 항변한다. 자신들은 애굽 총리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7절). 애굽의 총리가 가족 관계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존재를 상세히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계속해서 베냐민이 함께 가면 자신들이 밀정 협의를 벗고 식량을 구해 전 가족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야곱을 집요하게 설득한다(8절).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물로 내놓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만일 베냐민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일을 자신이 책임질 것이며평생 아버지 앞에서 죄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한다(9절). 이 장면은 성경 전체 구속사의 중대한 장면의 하나다. 유다는 막내 동생과 가족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는다. 유다는 다윗의 조상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다. 가족을 구하기 위한 그이 자발적인 희생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엿보인다.
형제들의 마음은 다급했다. 식량은 고갈되었고, 시므온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래서 유다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망설이는 아버지를 재촉한다(10절)
3.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11~15절)
야곱이 마침내 아들들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큰 통’에 담아 준비한다.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인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피스타치오), 감복숭아(아몬드)다. 그리고 첫 번째 여행 때보다 두 배의 현금을 준비해서 보낸다. 갑절의 돈(12절)은 딸려온 돈에 새로운 식량 구입비를 더한 총액을 가리킨다(43:21~22).
야곱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누군가의 실수로(미쉬게, 무심코 저지른 실수), 돈꾸러미들이 딸려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여행과 달리 식량을 사는 목적 외에 그 총리와의 특별한 접견을 위해 떠나야 했다. 더구나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있고, 거액의 돈 꾸러미가 딸려 와 범죄 혐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커서 대단히 위험한 여행이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특별한 은혜(라함)’를 구한다. ‘라함’은 연민에서 비롯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리킨다. 야곱의 절박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한 시기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5절)’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말이 연상된다. 설사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베냐민과 야곱 가족의 운명은 애굽 총리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전적으로 표현하고 의지한 것이다.
나는?
-야곱이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동안 두 번이나 애굽에 다녀올 시간이 지났다. 기근이 그칠 줄 알았고, 그러면 시므온을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야곱의 생각과 달리 기근은 심해졌고, 양식은 바닥이 났다. 창세기 야곱의 서사는 ‘양식(팥죽)’을 볼모로 장자권을 빼앗던 그가 이제 ‘양식’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이 가장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 도를 넘은 자식 편애가 그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위기로 몰아간다.
-어떻게든 베냐민을 내놓지 않으려는 야곱과 지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는 유다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유다는 다른 가족과 자신의 어린 자녀들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아버지 야곱의 집착을 책망하듯 지적한다. 유다는 야곱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심지어 자신이 담보가 되어서라도 베냐민의 안전은 책임지겠다고 나선다. 자기를 희생하는 유다의 이런 모습은 우리를 위해 담보가 되신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만족시킨 예물과 두 배의 돈과 함께 베냐민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이제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아들 베냐민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한 믿음은 아니다. 총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나안의 토산특산품들을 준비하고, 돈 도 두배로 준비하여 도둑 누명을 벗기려 한다.
-자기 부정만이 슬픔과 상실의 순환을 때뜨리고 배반과 속임수의 악순환을 그치게 한다.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넘길 때 상상도 못한 내일,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내일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리셔다. 자기애를 포기할 때 전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고, 이제는 나머지 하나마저 내어주기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다다랐다. 왜 베냐민의 존재를 말했는지 유다와 나머지 아들들을 원망해보아도 베냐민을 애굽으로 내려보내는 것 외에는 기근에서 가족들을 구할 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낸 야곱의 결단은 가족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에 더 큰 절망에 빠졌던 요셉을 살리신 하나님은 베냐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모든 가족까지 살리실 생명의 길을 예비해놓고 계셨다(15절).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나를 절망케 할 때 생명의 길로 옮기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흔든 것은 본문에서만 보면 유다의 자기 희생이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결연하게 야곱의 마음을 흔들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이것을 폄하 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이 일로 이후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장남 르우벤을 대체할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혈통으로는 이후 다윗과 예수님이 이 후손으로 나게 된다. 더구나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과의 일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다가 결연하게 일어선 것을 모세는 의미있게 기록해 놓았다.
*앞뒤 좌우로 꽉 막힌 상황을 뚫는 활로는 결국 “자기희생”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떠밀려 했든, 자발적으로 했든 중요한 것은 “희생”이다. 하지만 본문의 유다는 순전히 자발적으로 나선다. 유다의 과거에 상관없이 가족들에 대한 자발적인 희생은 온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고 유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요셉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이라는 초점으로만 본다면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애굽행을 촉구한 것은 자기희생이 아닌가? 그런데 야곱은 그런 르우벤의 모습에 꿈쩍하지도 않았다. 일단 식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대로 흉년은 7년동안 지속될 것인데, 그것도 첫 해부터 극심한 기근이었다. 야곱은 베냐민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일단 구해온 식량으로 견뎌보자는 심산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획 하신대로 기근은 멈추지 않았다. 식량은 떨어졌다. 야곱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좌절과 뻔히 보이는 가족들의 굶주림 앞에 더 이상 ‘자기 집착’, ‘요지부동’을 고수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죽을 집착, 요지부동의 고집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섭리”앞에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무너뜨린 것은 ‘결사각오’의 유다의 희생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말씀하신대로, 기근을 이끌어가시고 이를 통해 가족이 민족이 되게 하는 요람인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실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다의 모습에서 꽉 막힌 상황에서 리더가 해야 할 본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자발적인 희생” 의 가치가 공동체의 활로를 열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이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일상속 가장 꽉 막힌 순간, 나의 목자되신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 길을 따라 가련다! 이 결심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곱은 이렇게 내몰린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이 상황을 주관 하실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간절히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드디어 야곱의 영적인 기근에 소나기가 왔다.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오랜 기근에 단비가 내린다. 참 아이러니하다. 내몰리고 내몰린 한계점에서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런 모습일 수 있다. 내가 집착하는 어떤 것에 요지부동하여 공동체에 근심을 던져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몬 한계에 이르러서야 두 손들고 항복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의 이런 모습,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무던히도 무감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본문은 드디어 야곱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셉을 잃은 후, 아니 그 전부터 일수도 있겠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자기 힘으로 자기 방법으로 고집했던 야곱이었다. 이것이 베냐민에 대하여 특히 더 요지부동 삶의 방식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새번역_14절)”
*결국 삶의 주권을 하나님에 내어 드리기 까지의 여정이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삶에 지루하도록 계속 되는 싸움은 이 싸움이다. 결국 주도권 싸움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삶 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면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 헛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또 의지할 때 나의 최선의 땀방울이 헛 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는 발버둥은 헛수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최선, 최고이다.
*야곱의 집에 하나님의 주권이 돌아왔다!
1.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하는 요셉의 형들(1~5절)
어느 새 한 해가 지났다. 가나안 땅의 가뭄은 더욱 심각해졌다. 야곱의 아들이 애굽에서 사온 식량도 축났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다시 가서 식량을 조금 사오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형제들은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형제들이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절도범으로 몰린 처지에서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야곱도 목숨처럼 아끼는 베냐민을 그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식량이 축날 때까지 애굽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극심한 기근 속에서 시므온의 생환은 최우선 과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 야곱을 설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다는 야곱 가문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유다는 르우벤과 레위와 함께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 어려운 전력일 지닌 아들이었다. 부모의 뜻을 거슬러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의 계략에 휘말려 부끄럽게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39장). 그럼에도 유다가 현재 위기의 해결사를 자처하는데, 최적의 적임자는 아닐지 몰라도 최상의 해결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유다는 반드시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한다(3절). 애굽 총리가 막내동생을 데려오지 않으면 접견이 불가하다며(내 얼굴을 보지못하리라) 으름장을 놨다고 말한다. 그래서 야곱을 필사적으로 설득한다. 유다의 논리와 명분은 뚜렸했다. 만약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총리를 접견할 수 없으니 전혀 식량을 살 수 없게 된다. 이는 식량이 동난 온 가족의 죽음을 의미한다. 야곱은 유다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2. 베냐민을 위해 희생을 각오하는 유다(6~10절)
야곱은 애굽 총리에게 베냐민의 존재를 알린 아들들을 원망한다(6절). 그들이 경솔하게 막내아들을 언급해서 자신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질책을 들은 뒤 유다가 아닌 아들들 모두가 아버지에게 항변한다. 자신들은 애굽 총리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7절). 애굽의 총리가 가족 관계를 꼬치꼬치 캐물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존재를 상세히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계속해서 베냐민이 함께 가면 자신들이 밀정 협의를 벗고 식량을 구해 전 가족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야곱을 집요하게 설득한다(8절).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물로 내놓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만일 베냐민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 일을 자신이 책임질 것이며평생 아버지 앞에서 죄인으로 살겠다고 약속한다(9절). 이 장면은 성경 전체 구속사의 중대한 장면의 하나다. 유다는 막내 동생과 가족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물로 내놓는다. 유다는 다윗의 조상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다. 가족을 구하기 위한 그이 자발적인 희생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 희생을 당하신 그리스도가 엿보인다.
형제들의 마음은 다급했다. 식량은 고갈되었고, 시므온의 목숨이 위태롭다. 그래서 유다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망설이는 아버지를 재촉한다(10절)
3. 아들들을 다시 애굽으로 보내는 야곱(11~15절)
야곱이 마침내 아들들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큰 통’에 담아 준비한다.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인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피스타치오), 감복숭아(아몬드)다. 그리고 첫 번째 여행 때보다 두 배의 현금을 준비해서 보낸다. 갑절의 돈(12절)은 딸려온 돈에 새로운 식량 구입비를 더한 총액을 가리킨다(43:21~22).
야곱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 누군가의 실수로(미쉬게, 무심코 저지른 실수), 돈꾸러미들이 딸려 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여행은 첫 번째 여행과 달리 식량을 사는 목적 외에 그 총리와의 특별한 접견을 위해 떠나야 했다. 더구나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있고, 거액의 돈 꾸러미가 딸려 와 범죄 혐의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커서 대단히 위험한 여행이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의 특별한 은혜(라함)’를 구한다. ‘라함’은 연민에서 비롯된 자비심과 동정심을 가리킨다. 야곱의 절박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지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한 시기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5절)’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말이 연상된다. 설사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베냐민과 야곱 가족의 운명은 애굽 총리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전적으로 표현하고 의지한 것이다.
나는?
-야곱이 베냐민에게 집착하는 동안 두 번이나 애굽에 다녀올 시간이 지났다. 기근이 그칠 줄 알았고, 그러면 시므온을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야곱의 생각과 달리 기근은 심해졌고, 양식은 바닥이 났다. 창세기 야곱의 서사는 ‘양식(팥죽)’을 볼모로 장자권을 빼앗던 그가 이제 ‘양식’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이 가장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 도를 넘은 자식 편애가 그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위기로 몰아간다.
-어떻게든 베냐민을 내놓지 않으려는 야곱과 지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는 유다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유다는 다른 가족과 자신의 어린 자녀들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아버지 야곱의 집착을 책망하듯 지적한다. 유다는 야곱에게 간절히 호소하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설득한다. 심지어 자신이 담보가 되어서라도 베냐민의 안전은 책임지겠다고 나선다. 자기를 희생하는 유다의 이런 모습은 우리를 위해 담보가 되신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애굽 총리를 만족시킨 예물과 두 배의 돈과 함께 베냐민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이제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아들 베냐민을 “잃으면 잃으리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한 믿음은 아니다. 총리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나안의 토산특산품들을 준비하고, 돈 도 두배로 준비하여 도둑 누명을 벗기려 한다.
-자기 부정만이 슬픔과 상실의 순환을 때뜨리고 배반과 속임수의 악순환을 그치게 한다.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넘길 때 상상도 못한 내일,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내일이 열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을 기다리셔다. 자기애를 포기할 때 전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었고, 이제는 나머지 하나마저 내어주기 않으면 안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다다랐다. 왜 베냐민의 존재를 말했는지 유다와 나머지 아들들을 원망해보아도 베냐민을 애굽으로 내려보내는 것 외에는 기근에서 가족들을 구할 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낸 야곱의 결단은 가족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에 더 큰 절망에 빠졌던 요셉을 살리신 하나님은 베냐민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모든 가족까지 살리실 생명의 길을 예비해놓고 계셨다(15절).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나를 절망케 할 때 생명의 길로 옮기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흔든 것은 본문에서만 보면 유다의 자기 희생이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결연하게 야곱의 마음을 흔들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이것을 폄하 해서는 안 된다. 유다는 이 일로 이후 형제들에게 영향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장남 르우벤을 대체할 장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혈통으로는 이후 다윗과 예수님이 이 후손으로 나게 된다. 더구나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고, 며느리 다말과의 일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다가 결연하게 일어선 것을 모세는 의미있게 기록해 놓았다.
*앞뒤 좌우로 꽉 막힌 상황을 뚫는 활로는 결국 “자기희생”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떠밀려 했든, 자발적으로 했든 중요한 것은 “희생”이다. 하지만 본문의 유다는 순전히 자발적으로 나선다. 유다의 과거에 상관없이 가족들에 대한 자발적인 희생은 온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다고 유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요셉이야기의 핵심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이라는 초점으로만 본다면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애굽행을 촉구한 것은 자기희생이 아닌가? 그런데 야곱은 그런 르우벤의 모습에 꿈쩍하지도 않았다. 일단 식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대로 흉년은 7년동안 지속될 것인데, 그것도 첫 해부터 극심한 기근이었다. 야곱은 베냐민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일단 구해온 식량으로 견뎌보자는 심산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획 하신대로 기근은 멈추지 않았다. 식량은 떨어졌다. 야곱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좌절과 뻔히 보이는 가족들의 굶주림 앞에 더 이상 ‘자기 집착’, ‘요지부동’을 고수 할 수 없었다. 모두가 죽을 집착, 요지부동의 고집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섭리”앞에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야곱의 요지부동을 무너뜨린 것은 ‘결사각오’의 유다의 희생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말씀하신대로, 기근을 이끌어가시고 이를 통해 가족이 민족이 되게 하는 요람인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실 계획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다의 모습에서 꽉 막힌 상황에서 리더가 해야 할 본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자발적인 희생” 의 가치가 공동체의 활로를 열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이 구원의 길을 여신 것처럼,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일상속 가장 꽉 막힌 순간, 나의 목자되신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 길을 따라 가련다! 이 결심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곱은 이렇게 내몰린 상황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이 상황을 주관 하실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간절히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드디어 야곱의 영적인 기근에 소나기가 왔다.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오랜 기근에 단비가 내린다. 참 아이러니하다. 내몰리고 내몰린 한계점에서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런 모습일 수 있다. 내가 집착하는 어떤 것에 요지부동하여 공동체에 근심을 던져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 몬 한계에 이르러서야 두 손들고 항복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야곱의 이런 모습,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 무던히도 무감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본문은 드디어 야곱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셉을 잃은 후, 아니 그 전부터 일수도 있겠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자기 힘으로 자기 방법으로 고집했던 야곱이었다. 이것이 베냐민에 대하여 특히 더 요지부동 삶의 방식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키셔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게 해주시기를 빌 뿐이다. 그가 거기에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새번역_14절)”
*결국 삶의 주권을 하나님에 내어 드리기 까지의 여정이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의 삶에 지루하도록 계속 되는 싸움은 이 싸움이다. 결국 주도권 싸움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삶 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면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 헛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또 의지할 때 나의 최선의 땀방울이 헛 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 없는 발버둥은 헛수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최선, 최고이다.
*야곱의 집에 하나님의 주권이 돌아왔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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