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로 모이면서 그 안에서 세상유행이나 방식을 고수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본문은 이런 난맥상을 2-16절을 통해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다룬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그 질서를 따라 드려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인간들을 이끌어 구원하여 주신 사건(십자가)과 그 과정에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서로 권면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안에서 드려야 한다. 예배를 통해 복음을 누려야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예배를 통해 복음을 누리는 실제적인 것이 바로 주님께서 돌아가시 전날 밤에 친히 행하셨던 “주의 만찬”이다. 이것의 핵심은 “기념”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목적한 바를 생각나게 하는 것,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여 주님께서 그날 밤 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 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만찬은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 안에서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연회를 즐기기 위한 만찬이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기 위해”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새번역_26절)”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야야 하는지 분명하게 “주의 만찬”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님과 하나되어 모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할까?
1. 주님을 기념하는 공동체(24-26절)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 “주의 만찬”임을 분명히 밝힌다(23절). 그래서 초대교회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때, 특히 7일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일 때 “주의 만찬”을 준비하여 서로 나눠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했다. 주님의 죽으심이 곧 우리의 살아남(구원)임을 한시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모임이 해로움이 되고 말았다(17절). 모일 때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18절). 그 분쟁은 “함께 모여 지켜 기념해야 할” 주의 만찬이 “각각 자기의 만찬”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21절). 바울은 이것이 공동체 안의 빈궁한 자들에게 수치가 되었고 이는 주님을 수치되게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질책한다(22절).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굳이 모여 만찬을 행하는 것이냐고 분노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만찬은 먹고 마시며 자신의 배부름과 술취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게(증거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즐거움, 끼리 끼리의 모임, 신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기적인 모임등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의 지체들이 모두가 함께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됨을 고백하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기념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함께 믿음을 지켜 나가기 위해 “주님을 기억하고, 공동체를 통해 주님이 생각나게”하는 “만찬”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자기 즐거움의 목적으로 연회와 사교의 목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다. 주님을 생각나게(기념하는) 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2. 자기를 살피고, 서로를 살피는 공동체(28, 31절)
주님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은 “자신과 지체를 서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의 만찬은 완전한 의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모두가 죄인으로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죄인들과 식사하셨던 것처럼 공동체도 어떤 신분이나 지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함께 하기 위해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살핌이 필요하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못지 않게 주요하다. 공동체와 동떨어져서 특정한 몇몇이 모여 즐기는 “자기”가 아니라 주의 몸된 지체들과 주님의 몸에 함께 붙어 있는 “자기”인 것을 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된 주의 만찬을 ‘교회와 빈궁한 자를 수치스럽게 하는’ ‘자기만의 만찬’으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만찬을 행하여 자신의 배부른 배를 쓰다듬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을 볼 수 없다면, 여전히 교회와 빈궁한 자를 수치스럽게 하고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11장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세상방식, 세상 지위”를 예배와 만찬으로 끌어들여 자기만족에 취하여, 정작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지체들도 마음을 상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방식으로 공동체의 예배와 만찬을 ‘즐기는’ 오만함이 여전히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살피지 못하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죽으심을 수치스럽게 하게하여 결국 자신도 주님 앞에서 수치스럽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꼼꼼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세상방식을 추구하는 고집” “세상명예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 “자기 즐거움을 포기못하여 지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기심”이 발동하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3. 서로 기다리는 공동체(33절)
‘먹으러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라. 바울이 주의 만찬(주님의 식탁)에 모여 식사할 때는 시간을 제때 맞출 수 없는 당시 노예계층이나, 일반 노동자들을 기다려주라고 당부한다. 때마다 기념해야 할 주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다 함께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다리다”로 번역된 단어는 “환대하다, 마중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있다.
누가 아직 안왔는지, 누가 굶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환대해주어야 한다. 마중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을 때 힘이 나는 법이다. 관심과 사랑이다. 어떤 지체라도 무관심의 자리에 있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의미다.
교회 공동체가 기다려주어야 한 몸된 지체들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안에 미처 바라보지 못한 지체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기꺼이 기다려 줄 수 있게” 한다. 주를 기념하는 공동체는 서로 하나된 것을 늘 살피고 함께한 지체들을 기다려주는 공동체다. 무슨 일이든 어느 곳에서든… 교회는 나의 부족함을 참아주는 이들로 인해 위로를 얻는 곳이다. 다그치기 보다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서는 어떤 이유이든지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17~19절). 그런데 하나됨(10:17)을 상징하는 주의 만찬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도리어 분열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이로움과 즐거움’이 되어야 할 모임이 서로에게 ‘해로움과 불편함’만 준 것이다. 자기 부정이 없다면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모임이라도 가장 속된 화합으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누군가에게는 차별을 느끼게 하지 않는지 주의하여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굳이 모이는 본래 목적을 기억하고 꾸준히 구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나, 그들의 행태는 성전의 참 의미를 퇴색하게 했다. 먼저 참석한 부한 자들은 떡과 잔을 마음껏 먹어버려서 뒤늦게 참석한 가난한 이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20~22, 33~34절). ‘주의 만찬’을 ‘자신들만의 만찬’으로 바꾼 것이다. 떡과 잔에 담긴 고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공동체가 행하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성례식 등 각종 모임도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 유익에 머무른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만찬의 기원은 주님께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만찬의 목적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기념하는 데 있다. 따라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종교의식이나 전통을 준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과거),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미래), 주의 구속을 경험하며 전하는 일이다(현재, 23~26절). 매번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이 사실을 떠올리며 사람들에게 주님만 전해야 할 것이다.
-사죄의 장소가 범죄의 장소로, 용서의 대상이 정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성만찬의 참 의미도 모른 채 함께 했기 때문에, 빈궁한 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결국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동이 된 것이다.
-주의 만찬, 성찬을 묵상하며 생각나게 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서로 보살피며 기다리는 공동체를 꿈꾼다. 특히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공동체 각각의 지체들이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실감한다.
-세상방식이 주는 즐거움, 명예로움, 편리함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것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익숙하고 합리적인 세상방식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주님의 뜻과 방법이 주는 생명력과 하나됨은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지켜야” 한다.
*세상방식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아야 할 교회, 예배나 만찬이나 오직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뜻대로 순종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가장 단순하고 쉬워야 할 “주님 뜻대로”가 가장 어렵고 난해하게 다가오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의 말씀이 어색한 시대라는 의미겠다. 어쩌면 복음이 이제 막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시대보다 더 난해한 시대가 되어 버린 듯하다. 세상방식을 고집하고 세상지위를 어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하늘생명도 위험하다.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 더온누리공동체는 이럴때 일수록 주님을 더욱 기념하는 교회, 자신뿐 아니라 서로를 살피고 기다려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꿈꾼다.
예배를 통해 복음을 누리는 실제적인 것이 바로 주님께서 돌아가시 전날 밤에 친히 행하셨던 “주의 만찬”이다. 이것의 핵심은 “기념”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목적한 바를 생각나게 하는 것,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여 주님께서 그날 밤 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나누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 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만찬은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 안에서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연회를 즐기기 위한 만찬이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기 위해”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새번역_26절)”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야야 하는지 분명하게 “주의 만찬”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님과 하나되어 모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할까?
1. 주님을 기념하는 공동체(24-26절)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 “주의 만찬”임을 분명히 밝힌다(23절). 그래서 초대교회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때, 특히 7일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일 때 “주의 만찬”을 준비하여 서로 나눠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했다. 주님의 죽으심이 곧 우리의 살아남(구원)임을 한시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모임이 해로움이 되고 말았다(17절). 모일 때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18절). 그 분쟁은 “함께 모여 지켜 기념해야 할” 주의 만찬이 “각각 자기의 만찬”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21절). 바울은 이것이 공동체 안의 빈궁한 자들에게 수치가 되었고 이는 주님을 수치되게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질책한다(22절).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굳이 모여 만찬을 행하는 것이냐고 분노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만찬은 먹고 마시며 자신의 배부름과 술취함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게(증거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즐거움, 끼리 끼리의 모임, 신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기적인 모임등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의 지체들이 모두가 함께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됨을 고백하고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기념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함께 믿음을 지켜 나가기 위해 “주님을 기억하고, 공동체를 통해 주님이 생각나게”하는 “만찬”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자기 즐거움의 목적으로 연회와 사교의 목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다. 주님을 생각나게(기념하는) 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2. 자기를 살피고, 서로를 살피는 공동체(28, 31절)
주님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은 “자신과 지체를 서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의 만찬은 완전한 의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모두가 죄인으로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죄인들과 식사하셨던 것처럼 공동체도 어떤 신분이나 지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함께 하기 위해 서로를 지켜주기 위한 살핌이 필요하다.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것도 못지 않게 주요하다. 공동체와 동떨어져서 특정한 몇몇이 모여 즐기는 “자기”가 아니라 주의 몸된 지체들과 주님의 몸에 함께 붙어 있는 “자기”인 것을 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된 주의 만찬을 ‘교회와 빈궁한 자를 수치스럽게 하는’ ‘자기만의 만찬’으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만찬을 행하여 자신의 배부른 배를 쓰다듬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을 볼 수 없다면, 여전히 교회와 빈궁한 자를 수치스럽게 하고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11장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세상방식, 세상 지위”를 예배와 만찬으로 끌어들여 자기만족에 취하여, 정작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지체들도 마음을 상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방식으로 공동체의 예배와 만찬을 ‘즐기는’ 오만함이 여전히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살피지 못하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죽으심을 수치스럽게 하게하여 결국 자신도 주님 앞에서 수치스럽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꼼꼼히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세상방식을 추구하는 고집” “세상명예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 “자기 즐거움을 포기못하여 지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기심”이 발동하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3. 서로 기다리는 공동체(33절)
‘먹으러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라. 바울이 주의 만찬(주님의 식탁)에 모여 식사할 때는 시간을 제때 맞출 수 없는 당시 노예계층이나, 일반 노동자들을 기다려주라고 당부한다. 때마다 기념해야 할 주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에 다 함께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다리다”로 번역된 단어는 “환대하다, 마중하다”라는 의미도 함께 있다.
누가 아직 안왔는지, 누가 굶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환대해주어야 한다. 마중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을 때 힘이 나는 법이다. 관심과 사랑이다. 어떤 지체라도 무관심의 자리에 있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의미다.
교회 공동체가 기다려주어야 한 몸된 지체들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안에 미처 바라보지 못한 지체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기꺼이 기다려 줄 수 있게” 한다. 주를 기념하는 공동체는 서로 하나된 것을 늘 살피고 함께한 지체들을 기다려주는 공동체다. 무슨 일이든 어느 곳에서든… 교회는 나의 부족함을 참아주는 이들로 인해 위로를 얻는 곳이다. 다그치기 보다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서는 어떤 이유이든지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17~19절). 그런데 하나됨(10:17)을 상징하는 주의 만찬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도리어 분열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이로움과 즐거움’이 되어야 할 모임이 서로에게 ‘해로움과 불편함’만 준 것이다. 자기 부정이 없다면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모임이라도 가장 속된 화합으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 안에도 누군가에게는 차별을 느끼게 하지 않는지 주의하여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굳이 모이는 본래 목적을 기억하고 꾸준히 구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나, 그들의 행태는 성전의 참 의미를 퇴색하게 했다. 먼저 참석한 부한 자들은 떡과 잔을 마음껏 먹어버려서 뒤늦게 참석한 가난한 이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것이다(20~22, 33~34절). ‘주의 만찬’을 ‘자신들만의 만찬’으로 바꾼 것이다. 떡과 잔에 담긴 고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공동체가 행하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 성례식 등 각종 모임도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자기 유익에 머무른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만찬의 기원은 주님께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성만찬의 목적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기념하는 데 있다. 따라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종교의식이나 전통을 준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과거),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미래), 주의 구속을 경험하며 전하는 일이다(현재, 23~26절). 매번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이 사실을 떠올리며 사람들에게 주님만 전해야 할 것이다.
-사죄의 장소가 범죄의 장소로, 용서의 대상이 정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성만찬의 참 의미도 모른 채 함께 했기 때문에, 빈궁한 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결국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동이 된 것이다.
-주의 만찬, 성찬을 묵상하며 생각나게 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서로 보살피며 기다리는 공동체를 꿈꾼다. 특히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공동체 각각의 지체들이 옛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실감한다.
-세상방식이 주는 즐거움, 명예로움, 편리함보다 중요한 것이 주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것이다.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익숙하고 합리적인 세상방식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주님의 뜻과 방법이 주는 생명력과 하나됨은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지켜야” 한다.
*세상방식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아야 할 교회, 예배나 만찬이나 오직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뜻대로 순종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가장 단순하고 쉬워야 할 “주님 뜻대로”가 가장 어렵고 난해하게 다가오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의 말씀이 어색한 시대라는 의미겠다. 어쩌면 복음이 이제 막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시대보다 더 난해한 시대가 되어 버린 듯하다. 세상방식을 고집하고 세상지위를 어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하늘생명도 위험하다.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 더온누리공동체는 이럴때 일수록 주님을 더욱 기념하는 교회, 자신뿐 아니라 서로를 살피고 기다려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꿈꾼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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