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다윗의 기도와 하나님의 성품 [시편 5:1-12]
 – 2026년 07월 05일
– 2026년 07월 05일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본 시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다. 하지만 시인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렇게 이 시는 시인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기쁨을 확신한다.

거듭 이어지는 다윗의 기도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만 이미 다윗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1. 호소(1-2절)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의 신음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새번역_1-2절)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속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시인은 3개의 명령형 동사를 병행하여 하나님께 간구한다.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정을 헤아려 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뿐 아니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엣 터져나오는 탄식소리를 헤아려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왕이 재판장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에 대한 화신의 표현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의롭게 재판하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뢴 것이다.

기도의 시작이 늘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호소에서 시작한다. 미사여구는 없다. 직진이다. 굳이 형식적인 어휘를 나열 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의미다. 관계가 형식적일 수록 먼저 구비하여 빠짐없이 구성해주어야 할 형식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실제적인 관계는 형식보다 “진심”이다. 마음의 진실함을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 고백하며 토로한다. 다윗의 기도가 그렇다.

그런데 일방적인 호소에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기도에는 확실한 다름이 있었다.



2. 나의 호소보다 주님의 뜻(3절)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새번역_3절)” 시인은 아침에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므로 아침에 기도하겠다고 한다. ‘아침’이라는 표현이 아침 제사 시간이거나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열렬함에 대한 표현일 수 있으나, 아마도 어두운 고통의 시간이 물러가고 구원의 빛이 밝아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간에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며 시인은 주를 기다린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분명히 아뢰지만 역시자신이 바라는 해결책을 매달리지 않는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 다른 번역본들은 “주의 응답”, “주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주께 바란다” 등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동일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다리겠다는 고백이다.

기도가 나만의 호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윗의 기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표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판박이다. 다윗처럼 호소하고 이 고난의 십자가에 대하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호소하였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고백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나의 기도도 역시 호소에 치중하기 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어야 겠다. 기도는 드리면 드릴 수록 성령께서 이렇게 조율하실 것이다. 감정과 호소와 절박함으로 시작하나 평안과 기쁨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결국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중의 평안은 “나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반응임에 틀림없다.



3. 나의 탄식보다 하나님 찬양(4-12절)
시인은 1~3절에서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다가, 4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키)’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간청 드리는 하나님, 그의 상황을 판결해주실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기하며 기도 응답에 대한 단단한 초석을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이 아니다’ 또는 ‘~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관점(4~5a절)과 능동적 관점(5b~6절)으로 표현한다.

부정적인 관점은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능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며 피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특히 죄악에 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3개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표현을 통해 악을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한다. 따라서 햇빛에 눈이 곧바로 녹아버리듯 악은 거룩하신 주님과 잠시라도 공존할 수 없다. 4절의 ‘머물다(구르)’는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한 장소에 임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잠시라도 악이 주와 함께 공존할 수 없기에 자기 자랑이 가득한 오만한 자들, 행악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서슴치 않는 폭력적인 자들, 속이는 자들은 주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다. 주께서 아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다(6절).

7~8절에서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행악자들을 미워허시는 반면,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사랑을 배푸시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를 갈망하며 기도한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향한다는 것이므로 예배의 대상이 지성소가 아니라 지성소에 임재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의와 선행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 130:3).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예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도한다. 원수들은 시인을 지켜보며그를 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시인은 주의 의로 인도해주시고 ㅈ의 길을 곧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의 호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러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을 분명히 통제하고 계시는 하니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할지 막막한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지?” 이렇다. 그러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 장탄식만 하게 된다. 그리고 관전이 나의 고통, 아픔, 환난 이런 상황에 함몰되기 때문에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의 “희망가”에 머무르는 경우가 흔하다. 왜 그럴까?

나의 삶의 탄식을 바라보시는(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상황만 중얼거리다 끝난다.하나님을 잘 모르기 떄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에는 자신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너무나 확신 가운데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이 쏟아진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삶 속에서 이를 이미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생하게 삶을 관통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노래한다.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는…(4절)’, ‘교만한 자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미워하시는…(5절)’, ‘거짓말쟁이들, 싸움쟁이들, 사기꾼들을 몹시도 싫어하시는…(6절)’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2절).”라고 담대히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윗의 기도는 철저히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선포한다. 그가 구구절절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은 이미 하나님계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미 알려주신 것들이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확신했다. 지나온 삶을 통해 검증되었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다윗의 기도에는 넘쳐난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새번역_7절).”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러나”이다. 억울한 심정을을 호소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억울함에 시선을 맞추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겠다는 믿음의 확고함이다. 억울함보다 억울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억울함의 덫을 놓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한다.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님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님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새번역_8절).” 억울함과 그 덫을 놓은 원수들은 자신의 앞에 주의 길을 더욱 환히 열게 하는 통로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다윗은 기도를 늘 이렇게 드렸다!



나는?
-절규하듯 부르짖는 기도뿐 아니라 그 마음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애타는 그의 심사를 깊이 헤아려 살피신다(1~3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 분이 오늘 내 형편을 통해 나를 온전히 빚고 계심을,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음을 신뢰하리라. 지금은 한 숨 쉴 때가 아니라 큰 숨을 몰아쉬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아닐까?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의인의 피를 흘리며 거짓과 교만과 행악을 일삼는 자들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4~6절). 그러므로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용인은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혹 부당한 평가와 오해, 조소와 비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은 내 허물과 억울함뿐 아니라 그들의 속임과 악함까지도 다 아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뢰하며 주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윗은 큰 곤경 중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사랑을 힘입어, 우너수들의 숱한 훼방에도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고 끝까지 ‘주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7~8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의 인자하심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상황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가더라도 주를 겨외하고 경배하는 마음만은 생채기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의인의 길을 막고 주를 배역하는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쫓겨나도록 탄원한다. 반면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한다(10~12절).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거룩한 성품(4~6절)과 풍성한 인자(7절)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로 알려져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상황이 펼쳐 질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믿음의 고백일 것이다. 하루를 열며 나의 근심걱정, 탄식이 여전히 나를 짖누르며 시작할 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시작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어야 하리라!

-다윗의 기도는 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풍성하다. 상황에 대한 탄식보다 역사하실 하나님을 더 노래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노래다. 오늘 나의 노래도 이런 노래가 되어야지!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은 “그러나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1-12절).” 이다. 주님께 피신한 사람은 “누구나”, “길이길이” 기쁨을 누리도록 지켜주신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은혜로 지켜주신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확신 가운데 선포하는 다윗의 모습에 도전된다. 비록 삶의 중간 중간 잠시 죄에 미끄러졌어도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끈질기게 살아온 삶의 저력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드러난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삶을 이렇게 살아왔노라. 노래하는 다윗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기도제목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님께만 피하겠습니다. 주님만 따라 바르게 살아내겠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겠습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본 시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다. 하지만 시인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렇게 이 시는 시인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주실 기쁨을 확신한다.

거듭 이어지는 다윗의 기도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지만 이미 다윗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1. 호소(1-2절)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의 신음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새번역_1-2절)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 속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 시인은 3개의 명령형 동사를 병행하여 하나님께 간구한다.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심정을 헤아려 주시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뿐 아니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엣 터져나오는 탄식소리를 헤아려주시고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왕이 재판장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것에 대한 화신의 표현이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의롭게 재판하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뢴 것이다.

기도의 시작이 늘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호소에서 시작한다. 미사여구는 없다. 직진이다. 굳이 형식적인 어휘를 나열 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의미다. 관계가 형식적일 수록 먼저 구비하여 빠짐없이 구성해주어야 할 형식을 중요시 여긴다. 하지만 실제적인 관계는 형식보다 “진심”이다. 마음의 진실함을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 고백하며 토로한다. 다윗의 기도가 그렇다.

그런데 일방적인 호소에 그치지 않았다. 다윗의 기도에는 확실한 다름이 있었다.



2. 나의 호소보다 주님의 뜻(3절)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겠습니다.(새번역_3절)” 시인은 아침에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므로 아침에 기도하겠다고 한다. ‘아침’이라는 표현이 아침 제사 시간이거나 구원을 간구하는 시인의 열렬함에 대한 표현일 수 있으나, 아마도 어두운 고통의 시간이 물러가고 구원의 빛이 밝아오는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간에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며 시인은 주를 기다린다.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분명히 아뢰지만 역시자신이 바라는 해결책을 매달리지 않는다. “주님의 뜻”을 기다린다. 다른 번역본들은 “주의 응답”, “주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주께 바란다” 등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동일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마땅히 기다리겠다는 고백이다.

기도가 나만의 호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다윗의 기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이 표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판박이다. 다윗처럼 호소하고 이 고난의 십자가에 대하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호소하였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고 고백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나의 기도도 역시 호소에 치중하기 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어야 겠다. 기도는 드리면 드릴 수록 성령께서 이렇게 조율하실 것이다. 감정과 호소와 절박함으로 시작하나 평안과 기쁨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결국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중의 평안은 “나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반응임에 틀림없다.



3. 나의 탄식보다 하나님 찬양(4-12절)
시인은 1~3절에서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하다가, 4절에서 갑자기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키)’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간청 드리는 하나님, 그의 상황을 판결해주실 재판장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기하며 기도 응답에 대한 단단한 초석을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서 ‘~이 아니다’ 또는 ‘~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관점(4~5a절)과 능동적 관점(5b~6절)으로 표현한다.

부정적인 관점은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능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행악자를 미워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며 피흘리는 자와 속이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특히 죄악에 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는 3개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표현을 통해 악을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한다. 따라서 햇빛에 눈이 곧바로 녹아버리듯 악은 거룩하신 주님과 잠시라도 공존할 수 없다. 4절의 ‘머물다(구르)’는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한 장소에 임시적으로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잠시라도 악이 주와 함께 공존할 수 없기에 자기 자랑이 가득한 오만한 자들, 행악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피 흘리기를 서슴치 않는 폭력적인 자들, 속이는 자들은 주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설 수 없다. 주께서 아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다(6절).

7~8절에서 하나님은 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행악자들을 미워허시는 반면,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사랑을 배푸시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시인은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기를 갈망하며 기도한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장 친밀한 임재의 장소인 지성소를 향한다는 것이므로 예배의 대상이 지성소가 아니라 지성소에 임재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의와 선행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는 하나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시 130:3).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언약적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 예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도한다. 원수들은 시인을 지켜보며그를 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시인은 주의 의로 인도해주시고 ㅈ의 길을 곧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다윗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절박한 상황의 호소보다 더 풍성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러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을 분명히 통제하고 계시는 하니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할지 막막한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지?” 이렇다. 그러다 보면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 장탄식만 하게 된다. 그리고 관전이 나의 고통, 아픔, 환난 이런 상황에 함몰되기 때문에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의 “희망가”에 머무르는 경우가 흔하다. 왜 그럴까?

나의 삶의 탄식을 바라보시는(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상황만 중얼거리다 끝난다.하나님을 잘 모르기 떄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에는 자신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너무나 확신 가운데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단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이 쏟아진다.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삶 속에서 이를 이미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생하게 삶을 관통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노래한다.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는…(4절)’, ‘교만한 자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미워하시는…(5절)’, ‘거짓말쟁이들, 싸움쟁이들, 사기꾼들을 몹시도 싫어하시는…(6절)’ 그래서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2절).”라고 담대히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윗의 기도는 철저히 말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선포한다. 그가 구구절절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은 이미 하나님계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이미 알려주신 것들이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확신했다. 지나온 삶을 통해 검증되었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루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다윗의 기도에는 넘쳐난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자신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님의 집으로 나아갑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 바라보며, 주님께 꿇어 엎드립니다(새번역_7절).”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러나”이다. 억울한 심정을을 호소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억울함에 시선을 맞추지 않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겠다는 믿음의 확고함이다. 억울함보다 억울함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억울함의 덫을 놓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담대히 고백한다.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님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님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새번역_8절).” 억울함과 그 덫을 놓은 원수들은 자신의 앞에 주의 길을 더욱 환히 열게 하는 통로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억울한 상황에 내몰려도 흔들리지 않게 한다.

다윗은 기도를 늘 이렇게 드렸다!



나는?
-절규하듯 부르짖는 기도뿐 아니라 그 마음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애타는 그의 심사를 깊이 헤아려 살피신다(1~3절).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 분이 오늘 내 형편을 통해 나를 온전히 빚고 계심을,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음을 신뢰하리라. 지금은 한 숨 쉴 때가 아니라 큰 숨을 몰아쉬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아닐까?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어떤 죄악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의인의 피를 흘리며 거짓과 교만과 행악을 일삼는 자들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4~6절). 그러므로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용인은 아니기에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혹 부당한 평가와 오해, 조소와 비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은 내 허물과 억울함뿐 아니라 그들의 속임과 악함까지도 다 아신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뢰하며 주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윗은 큰 곤경 중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사랑을 힘입어, 우너수들의 숱한 훼방에도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고 끝까지 ‘주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소망했다(7~8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것이 그분의 인자하심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상황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가더라도 주를 겨외하고 경배하는 마음만은 생채기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의인의 길을 막고 주를 배역하는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쫓겨나도록 탄원한다. 반면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한다(10~12절).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거룩한 성품(4~6절)과 풍성한 인자(7절)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아침에 드리는 기도로 알려져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어떤 상황이 펼쳐 질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믿음의 고백일 것이다. 하루를 열며 나의 근심걱정, 탄식이 여전히 나를 짖누르며 시작할 지라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시작하는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어야 하리라!

-다윗의 기도는 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풍성하다. 상황에 대한 탄식보다 역사하실 하나님을 더 노래한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노래다. 오늘 나의 노래도 이런 노래가 되어야지!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은 “그러나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새번역_11-12절).” 이다. 주님께 피신한 사람은 “누구나”, “길이길이” 기쁨을 누리도록 지켜주신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은혜로 지켜주신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확신 가운데 선포하는 다윗의 모습에 도전된다. 비록 삶의 중간 중간 잠시 죄에 미끄러졌어도 다시 주님 앞에 서서 끈질기게 살아온 삶의 저력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드러난 것이다.

-주님께서 지켜주시는 삶을 이렇게 살아왔노라. 노래하는 다윗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