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시편 10:1-18]
 – 2026년 07월 10일
– 2026년 07월 10일 –
다윗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질문하여 환란의 때에 멀리 숨으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질문하고 호소하며 악을 꺾고 처벌해주시기를 간구한다. 다윗은 생생하게,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솔직하게 악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악을 갚아주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본 시편은 제목(부제)가 없다. 전통적으로 9편과 연결시켜 알파벳 시(또는 이합체 시)로 읽히지만, 현재는 독립적인 시로 읽기도 한다. 히브리어 자음 순서도 불완전한 형태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박해와 시련과 위기에 처한 사람이 탄식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탄식시로 분류된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실행되는 세상에서 왜, 악이 성행하고 의가 핍박당하는지 답답한 다윗의 마음이 솔직하게 녹아 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 악인의 행태를 묘사하고 고발한다. 특히 연약한 자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의 악독함을 은유와 직유로 표현한다. 악인들은 야수처럼 약한 자를 포획하려고 노려보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일어나서 그 악인들을 벌해주시고, 약자의 권리가 보호받기를 간구한다.



1. 여호와께 질문하다(1절)
다윗은 환난을 겪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따져 묻는다. ‘어찌하여 여호와여 멀리 서계십니까, 숨으십니까?” 다윗은 자기의 불행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숨으심, 곧 하나님의 부재가 더 큰 고통임을 토로한다. 무참한 고통에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확신하건만 그 분이 무심하게 숨어계신 것 같다.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문에 ‘어찌하여’라는 다윗의 질문은 여호와를 향한 비난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2. 악인들의 포악함을 고발하다(2~11절)
다윗은 ‘환난의 때’ 왜 여호와가 숨어 계시는지 따져 묻고서(1절), 환난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듯 악인들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악한 자의 교만 때문에 가련한 자가 심하게 압박 당한다. 이 때문에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엎어지기를 요청한다(2절). 악인들의 특성은 교만이다. 악인의 거드름피우는 거만함은 ‘가련한 자(가난한 자)’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다윗은 이렇게 악인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음모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요청한다.

악인에 대한 묘사는 계속되는데, 얼굴을 드높이 쳐든 악인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한다(3절). ‘마음의 욕심’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동의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악인은 교만한 얼굴을 하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의 모든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4절).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돌봄도 없고, 어떤 개입도 없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악인의 길은 언제나 번성하고 주님의 심판은 높기만 해서 악인에게 미치지 못하여 악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언제나 비웃고 경멸한다(6절)고 탄식한다. 다윗이 보기에 악인의 말과 행위는 환난과 시련의 원천임을 밝힌다(6下~7절).

다윗은 은유와 직유를 통해 악인의 본성을 계속 열거한다(8~9절). 그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고, 희생자들을 비밀리에 지켜보며,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 덮칠 준비를 하며 기다리다가 ‘가련한 자’를 사로잡는다(9절). 악인들은 가련한 자를 자신의 포획물로 삼는다. 그러므로 가련한 자들은 악인들의 포악스러움 앞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10절). 더구나 악인들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셔서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11절).

악인들은 하나님이 의로운 통치를 멈추셨고, 세상에 관심도 없으시며,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떠들어댄다. 그렇다면 악인들의 이런 확신처럼 하나님은 어떤 활동도 안 하고 계신 것인가? 다윗의 마음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3. 하나님의 보복을 구하는 기도(12~14절)
다윗은 더 이상 악인의 활동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침통해하며 우울하게 있을 수 없다. 다윗은 여호와를 부르며 재촉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을 드십시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12절).’ 다윗은 하나님 손의 힘과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악인을 처벌하시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악인의 오만함을 고발하면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질문한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13절_새번역).’ 다윗은 악인의 오만방자한 말에 반박하고 싶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기에 그에게 아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과 번민을 보시고, 그것을 주님의 손으로 갚으실 것이며, 불행한 자가 주를 의지하며, 이미 고아를 도우셨음(14절)”을 증언한다.

다윗은 가장 도움을 먼저 받아야 할 고아와 불행한 사람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회복될 것을 확신한다.



4. 여호와의 통치와 심판을 확신(15~18절)
다윗은 가련한 자, 불행한 자, 가난한 자, 고아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악인의 심판을 요청한다. 매우 담대하고 단호하게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악인들의 악을 하나님이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은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11절)’고 말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다르다. 그 어떤 악도 하나님에게서 숨겨질 수 없다.

그래서 악을 끝까지 찾아 처벌하시고 끝장내시기를 바라고 믿는 다윗의 언어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하는 찬양으로 바뀐다(16~18절). 다윗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 선포한다(16절). 다윗은 옛적 조상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의 악하고 강한 군대와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심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 것이다. 그 기억 속의 모세처럼 그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에 감격하여 ‘여호와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출 15:18)’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악한 나라와 통치자들을 완전히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지고한 믿음을 재천명한다. 여호와의 왕권을 이스라엘 땅에만 국한하지 않고 온 세상 끝까지 박해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왕권으로 소망하고 확신한다. 다윗은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횡포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일하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17절). 또한 고아들과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해 여호와가 심판하시고,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강자들이 더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18절).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해주시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희망과 기대를 끝까지 붙든다. ‘하나님이 잊으셨다(11절)’고 말하는 악인의 조롱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편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믿는 다윗의 신학적인 입장이 오롯이 반영되었다. 악이 당장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로운 재판장이며 왕이신 하나님의 신성한 원수 갚음의 날은 마침내 도래할 것이다.



나는?
-다윗은 악인으로 인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소망했으나, 악인은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멸시하여 거짓과 포악을 일삼았다(1, 6절). 우리가 처한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다. 나는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지 늘 돌아보고 분별해야 하겠다. 다윗처럼 상황보다 상황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인간의 악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고 의존하며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이 자기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을 돌아보거나 배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듯 악의 본질이 표현되는 정점에 자기중심성의 교만이 있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이 배제된 신앙은 악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한다. 그들은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욕심을 채우느라 힘없고 가련한 사람들을 짓밝고 괴롭히며 온갖 악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안전하며 아무 문제 없을 것라고 큰소리친다(2~11절). 나는 생각에서부터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일에서부터 공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잠 3:6) 생활하고 있을까?

-악인과 대조하여 가련한(가난한) 자(1, 9, 12절), 무죄한 자(8절), 외로운 자(14절), 겸손한 자(17절), 압제 당하는 자(18절)가 나온다. 악인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의인은 그들의 삶과 미래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 자들이다. 자기 힘과 자기 방식으로 악에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이 친히 대항하시고 심판하시도록 맡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이다(12~15절). 다윗의 탄식처럼 때로는 멀리 숨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악인의 조롱처럼 우리를 잊으셨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환난과 원한을 감찰하고 계신다. 또 때가 되면 의로운 손을 드셔서 악인들의 팔을 꺾고 그들의 악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갚아주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악인들의 저주와 거짓과 포악을 이겨낼 수 있다.

-다윗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있다. 악인은 자기의 꾀에 스스로 넘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교만함과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으리라던 헛된 안정감은 영원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강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멸시를 당할 것이다.

-여호와는 고아와 겸손한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왕이시다(16~18절). 하나님은 교만한 압제자들을 심판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며 그들의 피난처와 그늘이 되어주신다. 겸손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시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살다보면 이런 질문을 할 정도로 곤란해지고, 사방으로 막혀 좌절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일어날까?’ 이와같은 고백의 시편식 표현이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손이 짧은가?’가 아닐까 싶다. 대답하자면, 절대 그럴 일 없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이 무기력해 보이고, 도저히 그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도 자주 직면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그런데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보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알지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고 비웃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은 이런 악한 자들이 더욱 번성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정의를 나타내야 할 때 침묵하시는 무능하고 비겁한 하나님으로 여겨진다. 세상을 바르게 세워야 할 하나님의 손이 그 능력을 보이시기에 너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이다. 온몸이 쇠사슬로 묶여 있어도, 언젠가 다가올지 모를 죽음을 향해 아침을 깨우고 천상을 향한 거룩한 기쁨을 가슴에 품고 기뻐하라고 소리치던 바울의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 기도제목

*주님, 하나님은 없다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이렇게 살아낼 수 있는 은혜는 결국 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주님이시기에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저의 소리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질문하여 환란의 때에 멀리 숨으신 하나님께 불평하고 질문하고 호소하며 악을 꺾고 처벌해주시기를 간구한다. 다윗은 생생하게,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솔직하게 악인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악을 갚아주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본 시편은 제목(부제)가 없다. 전통적으로 9편과 연결시켜 알파벳 시(또는 이합체 시)로 읽히지만, 현재는 독립적인 시로 읽기도 한다. 히브리어 자음 순서도 불완전한 형태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박해와 시련과 위기에 처한 사람이 탄식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탄식시로 분류된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가 실행되는 세상에서 왜, 악이 성행하고 의가 핍박당하는지 답답한 다윗의 마음이 솔직하게 녹아 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 악인의 행태를 묘사하고 고발한다. 특히 연약한 자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들의 악독함을 은유와 직유로 표현한다. 악인들은 야수처럼 약한 자를 포획하려고 노려보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일어나서 그 악인들을 벌해주시고, 약자의 권리가 보호받기를 간구한다.



1. 여호와께 질문하다(1절)
다윗은 환난을 겪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따져 묻는다. ‘어찌하여 여호와여 멀리 서계십니까, 숨으십니까?” 다윗은 자기의 불행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숨으심, 곧 하나님의 부재가 더 큰 고통임을 토로한다. 무참한 고통에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확신하건만 그 분이 무심하게 숨어계신 것 같다.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이 때문에 ‘어찌하여’라는 다윗의 질문은 여호와를 향한 비난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2. 악인들의 포악함을 고발하다(2~11절)
다윗은 ‘환난의 때’ 왜 여호와가 숨어 계시는지 따져 묻고서(1절), 환난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듯 악인들의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악한 자의 교만 때문에 가련한 자가 심하게 압박 당한다. 이 때문에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져 엎어지기를 요청한다(2절). 악인들의 특성은 교만이다. 악인의 거드름피우는 거만함은 ‘가련한 자(가난한 자)’의 자존감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다윗은 이렇게 악인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음모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요청한다.

악인에 대한 묘사는 계속되는데, 얼굴을 드높이 쳐든 악인은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한다(3절). ‘마음의 욕심’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탐욕과 동의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악인은 교만한 얼굴을 하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그의 모든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4절).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돌봄도 없고, 어떤 개입도 없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악인의 길은 언제나 번성하고 주님의 심판은 높기만 해서 악인에게 미치지 못하여 악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을 언제나 비웃고 경멸한다(6절)고 탄식한다. 다윗이 보기에 악인의 말과 행위는 환난과 시련의 원천임을 밝힌다(6下~7절).

다윗은 은유와 직유를 통해 악인의 본성을 계속 열거한다(8~9절). 그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고, 희생자들을 비밀리에 지켜보며,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 덮칠 준비를 하며 기다리다가 ‘가련한 자’를 사로잡는다(9절). 악인들은 가련한 자를 자신의 포획물로 삼는다. 그러므로 가련한 자들은 악인들의 포악스러움 앞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10절). 더구나 악인들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셔서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11절).

악인들은 하나님이 의로운 통치를 멈추셨고, 세상에 관심도 없으시며,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떠들어댄다. 그렇다면 악인들의 이런 확신처럼 하나님은 어떤 활동도 안 하고 계신 것인가? 다윗의 마음은 곤혹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3. 하나님의 보복을 구하는 기도(12~14절)
다윗은 더 이상 악인의 활동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침통해하며 우울하게 있을 수 없다. 다윗은 여호와를 부르며 재촉한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손을 드십시오.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12절).’ 다윗은 하나님 손의 힘과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셔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악인을 처벌하시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악인의 오만함을 고발하면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질문한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13절_새번역).’ 다윗은 악인의 오만방자한 말에 반박하고 싶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기에 그에게 아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고통과 번민을 보시고, 그것을 주님의 손으로 갚으실 것이며, 불행한 자가 주를 의지하며, 이미 고아를 도우셨음(14절)”을 증언한다.

다윗은 가장 도움을 먼저 받아야 할 고아와 불행한 사람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회복될 것을 확신한다.



4. 여호와의 통치와 심판을 확신(15~18절)
다윗은 가련한 자, 불행한 자, 가난한 자, 고아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악인의 심판을 요청한다. 매우 담대하고 단호하게 사람이 찾을 수 없는 악인들의 악을 하나님이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은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11절)’고 말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다르다. 그 어떤 악도 하나님에게서 숨겨질 수 없다.

그래서 악을 끝까지 찾아 처벌하시고 끝장내시기를 바라고 믿는 다윗의 언어는 하나님의 왕권을 노래하는 찬양으로 바뀐다(16~18절). 다윗은 여호와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 선포한다(16절). 다윗은 옛적 조상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의 악하고 강한 군대와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심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 것이다. 그 기억 속의 모세처럼 그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에 감격하여 ‘여호와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출 15:18)’라고 노래한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악한 나라와 통치자들을 완전히 멸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지고한 믿음을 재천명한다. 여호와의 왕권을 이스라엘 땅에만 국한하지 않고 온 세상 끝까지 박해받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왕권으로 소망하고 확신한다. 다윗은 가난한 자들이 악인들의 횡포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일하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17절). 또한 고아들과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해 여호와가 심판하시고, 속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강자들이 더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18절).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해주시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희망과 기대를 끝까지 붙든다. ‘하나님이 잊으셨다(11절)’고 말하는 악인의 조롱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다.

이와같이 이 시편은 일상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믿는 다윗의 신학적인 입장이 오롯이 반영되었다. 악이 당장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로운 재판장이며 왕이신 하나님의 신성한 원수 갚음의 날은 마침내 도래할 것이다.



나는?
-다윗은 악인으로 인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소망했으나, 악인은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멸시하여 거짓과 포악을 일삼았다(1, 6절). 우리가 처한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다. 나는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지 늘 돌아보고 분별해야 하겠다. 다윗처럼 상황보다 상황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인간의 악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고 의존하며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자신이 자기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을 돌아보거나 배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듯 악의 본질이 표현되는 정점에 자기중심성의 교만이 있다.

-하나님 없는, 하나님이 배제된 신앙은 악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한다. 그들은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욕심을 채우느라 힘없고 가련한 사람들을 짓밝고 괴롭히며 온갖 악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안전하며 아무 문제 없을 것라고 큰소리친다(2~11절). 나는 생각에서부터 말과 행동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일에서부터 공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잠 3:6) 생활하고 있을까?

-악인과 대조하여 가련한(가난한) 자(1, 9, 12절), 무죄한 자(8절), 외로운 자(14절), 겸손한 자(17절), 압제 당하는 자(18절)가 나온다. 악인의 개념과 대조적으로 의인은 그들의 삶과 미래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한 자들이다. 자기 힘과 자기 방식으로 악에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께 피하며, 하나님이 친히 대항하시고 심판하시도록 맡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이다(12~15절). 다윗의 탄식처럼 때로는 멀리 숨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악인의 조롱처럼 우리를 잊으셨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환난과 원한을 감찰하고 계신다. 또 때가 되면 의로운 손을 드셔서 악인들의 팔을 꺾고 그들의 악행을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갚아주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악인들의 저주와 거짓과 포악을 이겨낼 수 있다.

-다윗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있다. 악인은 자기의 꾀에 스스로 넘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교만함과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으리라던 헛된 안정감은 영원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강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께 멸시를 당할 것이다.

-여호와는 고아와 겸손한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왕이시다(16~18절). 하나님은 교만한 압제자들을 심판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며 그들의 피난처와 그늘이 되어주신다. 겸손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시며,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살다보면 이런 질문을 할 정도로 곤란해지고, 사방으로 막혀 좌절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일어날까?’ 이와같은 고백의 시편식 표현이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손이 짧은가?’가 아닐까 싶다. 대답하자면, 절대 그럴 일 없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이 무기력해 보이고, 도저히 그 상황을 역전시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도 자주 직면한다. 참으로 난감하다.

*그런데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보지도 못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알지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고 비웃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은 이런 악한 자들이 더욱 번성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정의를 나타내야 할 때 침묵하시는 무능하고 비겁한 하나님으로 여겨진다. 세상을 바르게 세워야 할 하나님의 손이 그 능력을 보이시기에 너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이다. 온몸이 쇠사슬로 묶여 있어도, 언젠가 다가올지 모를 죽음을 향해 아침을 깨우고 천상을 향한 거룩한 기쁨을 가슴에 품고 기뻐하라고 소리치던 바울의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이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