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초막처럼, 참외밭 원두막처럼, 포위된 성읍과 같이 황폐해진 도성 예루살렘을 향한 슬픈 노래다. 그러나 소망의 노래이기도 하다. 창기처럼 되었고 살인자들이 들끓고 은도, 포도주도 찌끼가 섞이고 물이 섞여버린 예루살렘을 예전의 “신실함”으로 돌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소망의 노래다!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성읍으로 다시 되돌리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신다.
1. 어찌하여…(21-23절)
신실하던 성읍… 정의가 충만했던 그 곳… 공의가 가득하던 곳(21절)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불순물이 가득한 은처럼 되었고, 가장 좋다는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21-22절)
지도자들은 반역자, 도둑의 짝이다. 모두 뇌물을 좋아하고 보수를 쫓아 다닌다. 고아와 과부의 송사나 하소연은 귓전으로 흘린다(23절).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할 예루살렘이 다른 이방신을 섬겼다는 거다. 정의의 가치가 무너져 내렸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올바름(공의)이 무너져서 도둑질, 뇌물이 판을 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졌다.
신앙 공동체 안에 정의가 부재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의 결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서지 못하고 또한 지도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2. 슬프다! 하지만…(24-27절)
예루살렘을 보며 분노가 일어난다! 그 분노를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24절). 너(예루살렘)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끼를 씻어내듯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25절). 사사들을 다시 세우고, 처음에 그런것 처럼 슬기로운(모사, 지혜로운) 지도자를 보내 주겠다(26절). 시온(예루살렘)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27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원수, 대적으로 표현하신다. 겉모습은 하나님께 열심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이었지만 실상은 대적이고 원수였다는 것이다. 원수와 대적을 상대하시듯, 가차없이 찌꺼기를 제거하고 창기들을 쫓아내시며 살인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을 통해서야만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다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새번역_26절).” 그런데 확고한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해 하시는 것이 있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준 이후에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거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가르치며,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통해 “의로움”, “신실함”을 회복 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슬기롭게 정치하는 지도자들의 핵심 소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열매 맺는 의로움의 삶, 하나님의 뜻이 곧이 곧대로 스며들게 하는 신실한 삶의 향방은 지도자, 사람에게 달려 있다.
신앙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다. 이들은 지은 죄에 합당한 보응과 보복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보응을 행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복과 구속을 누리려면 먼저, 시온 곧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무릴적 귀환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회심을 보여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 나아오지 않고 죄에서 돌이킴이 없다면 회복과 구속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죄인들은(28-31절)
“그러나” 패역한 자(거역한 자)”와 죄인은 모두 패망한다. 또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한다. 삶의 의지와 기쁨으로 삼았던 상수리 나무와 동산(우상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29절). 마치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물 없는 동산이 같을 것이다(30절).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너희는 “삼오라기(삼 부스러기나 오라기_전혀 쓸모 없다는 뜻)”와 같을 것이고, 그가 한 일이 불씨가 되어 부타게 되는데, 꺼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완전한 심판_30-31절)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 날 때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어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대적, 원수가 되어 그들 스스로 심판의 불씨되어 타오르게 하며 꺼줄 이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원수처럼 조악 가운데 길을 가다가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속을 받게 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이들은 돌이키지 않아 결국 있을 곳이 없게 된다. 우상으로 인해 누리는 풍요는 메마를 것이고, 명예는 수치가 되며, 강성함은 불살라 질 것이다. 우상을 섬겼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들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여기에 있다.
현실적으로 또한 가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을 의지하고 숭배하며 하나님꼐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곧 그분을 버린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택한 것들로 인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많은 제사와 모임과 기도가 있던 나라에 살인자들이 가득하다. 정의와 공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은에 찌꺼기를 넣고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 관료들은 하나님보다 뇌물을 사랑했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보다 도둑과 짝했다(21~22절).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 약탈했고, 재판은 왜곡되었다. 거룩한 주님의 신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음란한 창기와 다름 없었다. 우리도 각성해야 한다. 돈과 권력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곳에서 하나님은 기억되지 않고 말씀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러고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며, 언약적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의와 공의를 실천한느 것이 참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순종해야 함을 곱씹고 곱씹는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신다. 심판의 고난을 거치면서 자녀들이 죄를 벗고 단호하게 청결해지기를 바라셨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섞이지 말고 단호하게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예전의 의와 신실함을 회복하는 나라가 되고,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땅이 되기를 바라셨다. 백성들과 지도자 모두 하나님만을 참 통치자로 모시고 말씀을 청종하는 데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셨다(25~27절). 지금 성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한국교회나 국가적으로 시련의 때를 지나고 있다고 판단되거든 재난이 지나가기만을 구하지 말고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 떠나야 할 것, 회복해야 할 가치를 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원수가 되고 말았다. 패역한 자가 되어 여호와를 버렸다.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부끄러운 짓을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악을 보응하고 보복하실 것이다. 패망하고 멸망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불에 탈 것이고 약속의 땅은 물 없는 황막한 광야가 될 것이다(24, 28~31절). 긴장하며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지 못할 만큼 바싹 메마른 신앙은 아닌지, 우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기면서 거짓 안전에 취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은 일상속에서 사람들을 향한 태도로 드러난다. 정의와 공의를 향한 노력을 그치며 기득권에 안주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심판이 나를 바꾸시는 마지막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말씀을 통해 들리는 경고를 듣고 죄를 떠나 정결해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의롭고 신실한 고을이 되기를 바라신다. 내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교회가 그런 곳이 되려면 어떤 역할을 구체적으로 해야할 지 경건한 고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 슬픔이 보복으로 이어지나 놀랍게도 회복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분노의 심판 앞에 멸망만을 남겨두지 않으시고 회복이라는 길도 예비해 주신다. 슬픔, 분노가 회복의 출발이 된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의미다. 슬픔과 분노가 없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이며, 죄로 인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가 차마 감사하고 감사하다!
*여전히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니까!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이 땅에 가득한 죄를 기어코 쓸어 버리시겠다는 거니까! 그렇다. 죄에 대하여 둔감하면 슬픔, 분노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지 않으면 주위에 널린 상수리나무, 동산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삶도 황폐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들러나되, 하나님의 뜻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신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곳에는 정의가 넘치고 공의로움이 굳게 서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이 사라진 교회는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무수한 신들이 마음을 빼앗으려고 활개친다. 물질이라는 신이, 명예라는 신이 활개치며 마음을 빼앗아간다. 자기 홀로 빠지지 않고 물고 늘어져 함께 죽어가자고 한다. “영적” 살인자들이 무수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순전하게 드러나야 할 곳에 이것 저것 잡다한 불순물들이 섞인 은들과 가장 좋은 포도주라고 여기는 것까지 이미 물이 섞여 버린 참담한 지경이 되어 버렸다. 정의과 공의가 사라지니 삶 속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예배(제사)를 무수히 드려도, 드리는 헌금(제물)이 넘쳐나도 역겹다 하시며 “분노와 슬픔”을 쏟아 내실 것이다. 그 분노와 슬픔의 심판을 통해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다시 불릴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유례없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한국 교회들에게 하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 슬픔과 분노의 시간이 우리에게 담금질의 시간이 될 것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우리에게 묻혀진 찌꺼기들을 녹여 청결하게 하시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어 어느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어려운 이 때 하나님의 신비하신 심판이 “혼합물을 다 제하시는” 그런 시간이 지금의 시간임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귀한 시간을 보내며 “그럼에도” 여전히 상수리나무들과 동산를 기웃거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지금 통과하고 있는 고통의 시간은 메말라 황폐해져서 약하디 약한 바람에도 흩날려 사라져 버릴 심판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이기는 하나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인가?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으로 결말되어 끝날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으로 인해 슬픔과 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임에도 이 시간이 회복을 위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되게 하시려는 슬픔의 시간이어야 한다.
*나의 죄악이 가져온 심판의 불이 면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도 “회복의 소망”을 먼저 버리지 않기 위해 뿜어내는 죄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하나님과 같이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게도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더 좋은 상태로 회복됨을 꿈꾸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와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 심판 중에라도 회개하는 자는 구속을 통해 회복된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면, 공동체가 죄악으로 인해 심판의 자리에 있음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더 좋은 더 신령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어찌하여…(21-23절)
신실하던 성읍… 정의가 충만했던 그 곳… 공의가 가득하던 곳(21절)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불순물이 가득한 은처럼 되었고, 가장 좋다는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21-22절)
지도자들은 반역자, 도둑의 짝이다. 모두 뇌물을 좋아하고 보수를 쫓아 다닌다. 고아와 과부의 송사나 하소연은 귓전으로 흘린다(23절).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할 예루살렘이 다른 이방신을 섬겼다는 거다. 정의의 가치가 무너져 내렸고,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 올바름(공의)이 무너져서 도둑질, 뇌물이 판을 치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사라졌다.
신앙 공동체 안에 정의가 부재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의 결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서지 못하고 또한 지도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2. 슬프다! 하지만…(24-27절)
예루살렘을 보며 분노가 일어난다! 그 분노를 나의 대적들에게… 나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한을 풀겠다(24절). 너(예루살렘)를 때려서라도… 잿물로 찌끼를 씻어내듯 모든 불순물을 없애겠다(25절). 사사들을 다시 세우고, 처음에 그런것 처럼 슬기로운(모사, 지혜로운) 지도자를 보내 주겠다(26절). 시온(예루살렘)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27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원수, 대적으로 표현하신다. 겉모습은 하나님께 열심으로 제사하는 백성들이었지만 실상은 대적이고 원수였다는 것이다. 원수와 대적을 상대하시듯, 가차없이 찌꺼기를 제거하고 창기들을 쫓아내시며 살인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확고한 심판을 통해서야만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다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새번역_26절).” 그런데 확고한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해 하시는 것이 있다.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준 이후에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거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가르치며,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통해 “의로움”, “신실함”을 회복 시키겠다는 것이다. 사사들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슬기롭게 정치하는 지도자들의 핵심 소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열매 맺는 의로움의 삶, 하나님의 뜻이 곧이 곧대로 스며들게 하는 신실한 삶의 향방은 지도자, 사람에게 달려 있다.
신앙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들이 하나님의 대적이다. 이들은 지은 죄에 합당한 보응과 보복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보응을 행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회복과 구속을 누리려면 먼저, 시온 곧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무릴적 귀환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회심을 보여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 나아오지 않고 죄에서 돌이킴이 없다면 회복과 구속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죄인들은(28-31절)
“그러나” 패역한 자(거역한 자)”와 죄인은 모두 패망한다. 또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한다. 삶의 의지와 기쁨으로 삼았던 상수리 나무와 동산(우상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29절). 마치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물 없는 동산이 같을 것이다(30절).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너희는 “삼오라기(삼 부스러기나 오라기_전혀 쓸모 없다는 뜻)”와 같을 것이고, 그가 한 일이 불씨가 되어 부타게 되는데, 꺼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완전한 심판_30-31절)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 날 때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어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대적, 원수가 되어 그들 스스로 심판의 불씨되어 타오르게 하며 꺼줄 이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원수처럼 조악 가운데 길을 가다가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속을 받게 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이들은 돌이키지 않아 결국 있을 곳이 없게 된다. 우상으로 인해 누리는 풍요는 메마를 것이고, 명예는 수치가 되며, 강성함은 불살라 질 것이다. 우상을 섬겼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들이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여기에 있다.
현실적으로 또한 가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을 의지하고 숭배하며 하나님꼐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곧 그분을 버린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택한 것들로 인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많은 제사와 모임과 기도가 있던 나라에 살인자들이 가득하다. 정의와 공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은에 찌꺼기를 넣고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 관료들은 하나님보다 뇌물을 사랑했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보다 도둑과 짝했다(21~22절).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 약탈했고, 재판은 왜곡되었다. 거룩한 주님의 신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음란한 창기와 다름 없었다. 우리도 각성해야 한다. 돈과 권력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곳에서 하나님은 기억되지 않고 말씀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러고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며, 언약적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의와 공의를 실천한느 것이 참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순종해야 함을 곱씹고 곱씹는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신다. 심판의 고난을 거치면서 자녀들이 죄를 벗고 단호하게 청결해지기를 바라셨다.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섞이지 말고 단호하게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예전의 의와 신실함을 회복하는 나라가 되고, 정의와 공의가 넘실거리는 땅이 되기를 바라셨다. 백성들과 지도자 모두 하나님만을 참 통치자로 모시고 말씀을 청종하는 데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셨다(25~27절). 지금 성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한국교회나 국가적으로 시련의 때를 지나고 있다고 판단되거든 재난이 지나가기만을 구하지 말고 지금 내가 벗어나야 할 것, 떠나야 할 것, 회복해야 할 가치를 구하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원수가 되고 말았다. 패역한 자가 되어 여호와를 버렸다.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부끄러운 짓을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악을 보응하고 보복하실 것이다. 패망하고 멸망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불에 탈 것이고 약속의 땅은 물 없는 황막한 광야가 될 것이다(24, 28~31절). 긴장하며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지 못할 만큼 바싹 메마른 신앙은 아닌지, 우상과 하나님을 같이 섬기면서 거짓 안전에 취하여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은 일상속에서 사람들을 향한 태도로 드러난다. 정의와 공의를 향한 노력을 그치며 기득권에 안주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심판이 나를 바꾸시는 마지막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말씀을 통해 들리는 경고를 듣고 죄를 떠나 정결해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의롭고 신실한 고을이 되기를 바라신다. 내가 속한 가정, 직장, 학교, 교회가 그런 곳이 되려면 어떤 역할을 구체적으로 해야할 지 경건한 고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 슬픔이 보복으로 이어지나 놀랍게도 회복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분노의 심판 앞에 멸망만을 남겨두지 않으시고 회복이라는 길도 예비해 주신다. 슬픔, 분노가 회복의 출발이 된다.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의미다. 슬픔과 분노가 없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이며, 죄로 인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가 차마 감사하고 감사하다!
*여전히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니까!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이 땅에 가득한 죄를 기어코 쓸어 버리시겠다는 거니까! 그렇다. 죄에 대하여 둔감하면 슬픔, 분노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지 않으면 주위에 널린 상수리나무, 동산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삶도 황폐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선명하게 들러나되, 하나님의 뜻대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의 신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곳에는 정의가 넘치고 공의로움이 굳게 서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이 사라진 교회는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무수한 신들이 마음을 빼앗으려고 활개친다. 물질이라는 신이, 명예라는 신이 활개치며 마음을 빼앗아간다. 자기 홀로 빠지지 않고 물고 늘어져 함께 죽어가자고 한다. “영적” 살인자들이 무수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순전하게 드러나야 할 곳에 이것 저것 잡다한 불순물들이 섞인 은들과 가장 좋은 포도주라고 여기는 것까지 이미 물이 섞여 버린 참담한 지경이 되어 버렸다. 정의과 공의가 사라지니 삶 속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그런 교회는 아무리 예배(제사)를 무수히 드려도, 드리는 헌금(제물)이 넘쳐나도 역겹다 하시며 “분노와 슬픔”을 쏟아 내실 것이다. 그 분노와 슬픔의 심판을 통해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다시 불릴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유례없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한국 교회들에게 하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 슬픔과 분노의 시간이 우리에게 담금질의 시간이 될 것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우리에게 묻혀진 찌꺼기들을 녹여 청결하게 하시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어 어느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어려운 이 때 하나님의 신비하신 심판이 “혼합물을 다 제하시는” 그런 시간이 지금의 시간임을 소망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귀한 시간을 보내며 “그럼에도” 여전히 상수리나무들과 동산를 기웃거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지금 통과하고 있는 고통의 시간은 메말라 황폐해져서 약하디 약한 바람에도 흩날려 사라져 버릴 심판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이기는 하나 회복의 시간이 될 것인가? 그럼에도 지금의 시간이 심판의 시간으로 결말되어 끝날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으로 인해 슬픔과 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임에도 이 시간이 회복을 위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되게 하시려는 슬픔의 시간이어야 한다.
*나의 죄악이 가져온 심판의 불이 면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도 “회복의 소망”을 먼저 버리지 않기 위해 뿜어내는 죄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하나님과 같이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게도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만, 회개하는 자는 더 좋은 상태로 회복됨을 꿈꾸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와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 심판 중에라도 회개하는 자는 구속을 통해 회복된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면, 공동체가 죄악으로 인해 심판의 자리에 있음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더 좋은 더 신령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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