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자! [이사야 8:1-22]
– 2026년 07월 25일
– 2026년 07월 25일 –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벌벌 떨고있는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 (1-4)
하나님께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단어를 통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2년안에 곧 멸망하게 될것임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이에 친아하스 파인 두 사람에게 공증을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 이시며 이 세상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장치를 심으셨다.
2.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큰 강 (6-8)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큰 강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결국 너희가 선택한 그 큰강이 너희의 목까지 차올라 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임을 말씀하신다.
3. 임마누엘의 하나님 (8)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기혼샘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심에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임을 밝히고 있다.
4. 우리가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시다 (9-15)
열방은 계속해서 계획하고 작전을 짜면서 남유다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남유다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기때문에 10절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끝내 시행되지 못할것임을 말하면서 남유다가 진짜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5. 남은자들이 해야할일 (16-18)
하나님은 이사야의 가족들과 , 제자들을 언급하시면서 대다수의 백성이 타락하여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자들을 위하여 말씀과 율법을 봉함하고 후대에게 전수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사야의 가족을 통하여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징표와 표적이라 말씀하시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갈수있음을 밝힌다.
나는?
남유다를 통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셔서 내가 지금까지 잘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특별히 기혼샘이 인상이 깊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 (1-4)
하나님께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단어를 통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2년안에 곧 멸망하게 될것임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이에 친아하스 파인 두 사람에게 공증을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 이시며 이 세상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장치를 심으셨다.
2.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큰 강 (6-8)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큰 강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결국 너희가 선택한 그 큰강이 너희의 목까지 차올라 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임을 말씀하신다.
3. 임마누엘의 하나님 (8)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기혼샘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심에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임을 밝히고 있다.
4. 우리가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시다 (9-15)
열방은 계속해서 계획하고 작전을 짜면서 남유다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남유다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기때문에 10절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끝내 시행되지 못할것임을 말하면서 남유다가 진짜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5. 남은자들이 해야할일 (16-18)
하나님은 이사야의 가족들과 , 제자들을 언급하시면서 대다수의 백성이 타락하여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자들을 위하여 말씀과 율법을 봉함하고 후대에게 전수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사야의 가족을 통하여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징표와 표적이라 말씀하시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갈수있음을 밝힌다.
나는?
남유다를 통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셔서 내가 지금까지 잘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특별히 기혼샘이 인상이 깊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 기도제목
* 하나님의 시간에 흘러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옵소서.
*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게 하옵소서.
*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옵소서.
*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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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6일
흑암에 비치는 빛
[이사야 9:1-7]
8장까지는 [북이스라엘-아람 연합]에 대응하는 유다의 행동과 하나님의 선포가 주된 내용을 이루었다면, 9장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다. 흑암에 빛이 비취며,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회복의 핵심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남에서 시작된다. 그는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며,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며, 700여년 후에 그리스도의 나심을 통해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본다.
1. 흑암에 비치는 빛 (1~2절)
본문의 배경은 이제 ‘북이스라엘’을 향한다.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 곧 갈릴리 지역을 흑암에 있고 멸시를 받는다는 뜻은 지정학적으로 전쟁에 의한 피해를 많이 받던 북쪽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상황에서도, 앗수르의 침략에 의해 가장 먼저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바로 이 변방, 멸시를 받는 땅에 진정한 구원이 임하게될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은, 마태복음 4:12-17에서 이미 선명하게 나타난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스블론-납달리와 인근 지역)를 향하여 나아가심을 통해 진정한 회복을 이루심을 바라보고 있다.
2.그 나라의 회복(3~5절)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 여기에서의 ‘이 나라’는 1차적으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지역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마4:12-17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본문에는 즐거움이 세 차례 나온다. (4절)
1) 추수의 즐거움 – 기다림 끝에 얻게 되는 풍성한 결실 2)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 전쟁의 패배자에서 다시 승리와 해방의 감격을 누리는 즐거움 3) 주님 앞에서의 즐거움 – 하나님과 함께함 속에 그 분을 기뻐하는 즐거움.
=>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5절)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서는 앗수르 및 이스라엘을 대적한 나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성경 전체의 문맥을 생각할 때,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음을 의미한다.
3.한 아기, 회복의 시작(6~7절)
이 모든 것은, ‘한 아기’로부터 시작된다. 그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며, 기묘자(놀라운 조언자), 모사(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 (6절) 그 왕권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며, 평화는 영원히 이어진다.(7절) 그리하여, 그토록 꿈꿔왔었던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신다.
나는?
-‘흑암에 비춰진 빛’ : 억압과 멸시 속에 살아가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주님은 기억하신다. 변방에 있던 갈릴리, 그 땅에서 온 땅의 주이신 예수께서 사역하신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의 갈릴리에서 시작하셨다..! 오늘도 주님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 아닌, 스불론과 납달리를 돌아보실 것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때로 낙망하는 흑암같은 나의 부족함에도, 도무지 복음을 듣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나의 찾는이에게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같은 이 시대의 상황에도.. 빛은 비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말씀을 다시금 부여잡고, 낙망하지 말아야겠다. 주님은 바로 그 변방을 찾아오신다. 주께서 맡기신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끝까지 견디며 충성할 때에 분명히 보고 계시다. 주목하여 보신다. 나도 그 주님을 다시금 따르겠다.
-’하나님 나라‘ : 700여년의 전 시간에, 이미 하나님 나라는 선포되었다. 이 본문은 그저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회복의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복하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에는 ’진짜 즐거움‘이 있다.
오늘 나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며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돌아본다. 의무와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내 맘 속에 이미 임하였음을 바라봄으로 인한 그 즐거움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오늘 맞이하는 이 귀한 날을, 주님을 바라며 기뻐하기로 다짐한다.
-’여호와의 열심‘ :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 이 말씀은 실제로 성취되었다. 아담의 범죄의 현장 속에 선포하신대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배신과 타락 속에도, 인류의 끝없는 하나님에 대한 무시함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끝까지 이 땅을 향한 그 위대한 계획을 내려놓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열심] 속에 나와 공동체, 전 세계의 상황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 주님의 뜻 앞에 모든 문제, 고민, 앞날을 맡기며 나아가겠다.
1. 흑암에 비치는 빛 (1~2절)
본문의 배경은 이제 ‘북이스라엘’을 향한다.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 곧 갈릴리 지역을 흑암에 있고 멸시를 받는다는 뜻은 지정학적으로 전쟁에 의한 피해를 많이 받던 북쪽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상황에서도, 앗수르의 침략에 의해 가장 먼저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바로 이 변방, 멸시를 받는 땅에 진정한 구원이 임하게될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은, 마태복음 4:12-17에서 이미 선명하게 나타난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스블론-납달리와 인근 지역)를 향하여 나아가심을 통해 진정한 회복을 이루심을 바라보고 있다.
2.그 나라의 회복(3~5절)
주님께서는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신다. 여기에서의 ‘이 나라’는 1차적으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지역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마4:12-17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본문에는 즐거움이 세 차례 나온다. (4절)
1) 추수의 즐거움 – 기다림 끝에 얻게 되는 풍성한 결실 2)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 전쟁의 패배자에서 다시 승리와 해방의 감격을 누리는 즐거움 3) 주님 앞에서의 즐거움 – 하나님과 함께함 속에 그 분을 기뻐하는 즐거움.
=>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5절)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서는 앗수르 및 이스라엘을 대적한 나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성경 전체의 문맥을 생각할 때,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음을 의미한다.
3.한 아기, 회복의 시작(6~7절)
이 모든 것은, ‘한 아기’로부터 시작된다. 그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며, 기묘자(놀라운 조언자), 모사(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 (6절) 그 왕권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며, 평화는 영원히 이어진다.(7절) 그리하여, 그토록 꿈꿔왔었던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이루신다.
나는?
-‘흑암에 비춰진 빛’ : 억압과 멸시 속에 살아가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주님은 기억하신다. 변방에 있던 갈릴리, 그 땅에서 온 땅의 주이신 예수께서 사역하신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의 갈릴리에서 시작하셨다..! 오늘도 주님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 아닌, 스불론과 납달리를 돌아보실 것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때로 낙망하는 흑암같은 나의 부족함에도, 도무지 복음을 듣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나의 찾는이에게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같은 이 시대의 상황에도.. 빛은 비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말씀을 다시금 부여잡고, 낙망하지 말아야겠다. 주님은 바로 그 변방을 찾아오신다. 주께서 맡기신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끝까지 견디며 충성할 때에 분명히 보고 계시다. 주목하여 보신다. 나도 그 주님을 다시금 따르겠다.
-’하나님 나라‘ : 700여년의 전 시간에, 이미 하나님 나라는 선포되었다. 이 본문은 그저 북이스라엘, 남유다의 회복의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복하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미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에는 ’진짜 즐거움‘이 있다.
오늘 나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고백하며 그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돌아본다. 의무와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내 맘 속에 이미 임하였음을 바라봄으로 인한 그 즐거움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오늘 맞이하는 이 귀한 날을, 주님을 바라며 기뻐하기로 다짐한다.
-’여호와의 열심‘ :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 이 말씀은 실제로 성취되었다. 아담의 범죄의 현장 속에 선포하신대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배신과 타락 속에도, 인류의 끝없는 하나님에 대한 무시함 속에도.. 여호와께서는 끝까지 이 땅을 향한 그 위대한 계획을 내려놓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열심] 속에 나와 공동체, 전 세계의 상황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 주님의 뜻 앞에 모든 문제, 고민, 앞날을 맡기며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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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5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자!
[이사야 8:1-22]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벌벌 떨고있는 남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 (1-4)
하나님께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단어를 통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2년안에 곧 멸망하게 될것임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이에 친아하스 파인 두 사람에게 공증을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 이시며 이 세상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장치를 심으셨다.
2.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큰 강 (6-8)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큰 강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결국 너희가 선택한 그 큰강이 너희의 목까지 차올라 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임을 말씀하신다.
3. 임마누엘의 하나님 (8)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기혼샘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심에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임을 밝히고 있다.
4. 우리가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시다 (9-15)
열방은 계속해서 계획하고 작전을 짜면서 남유다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남유다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기때문에 10절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끝내 시행되지 못할것임을 말하면서 남유다가 진짜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5. 남은자들이 해야할일 (16-18)
하나님은 이사야의 가족들과 , 제자들을 언급하시면서 대다수의 백성이 타락하여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자들을 위하여 말씀과 율법을 봉함하고 후대에게 전수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사야의 가족을 통하여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징표와 표적이라 말씀하시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갈수있음을 밝힌다.
나는?
남유다를 통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셔서 내가 지금까지 잘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특별히 기혼샘이 인상이 깊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1. 마헬살랄하스바스 (1-4)
하나님께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단어를 통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2년안에 곧 멸망하게 될것임을 말씀해주고 계신다. 이에 친아하스 파인 두 사람에게 공증을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 이시며 이 세상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게하는 장치를 심으셨다.
2.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과 큰 강 (6-8)
하나님께서는 남유다를 향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큰 강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결국 너희가 선택한 그 큰강이 너희의 목까지 차올라 위기를 맞이하게 될것임을 말씀하신다.
3. 임마누엘의 하나님 (8)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기혼샘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심에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임을 밝히고 있다.
4. 우리가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시다 (9-15)
열방은 계속해서 계획하고 작전을 짜면서 남유다를 집어삼키려 하지만 남유다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기때문에 10절에서는 그들의 계획이 끝내 시행되지 못할것임을 말하면서 남유다가 진짜 두려워해야할분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5. 남은자들이 해야할일 (16-18)
하나님은 이사야의 가족들과 , 제자들을 언급하시면서 대다수의 백성이 타락하여도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자들을 위하여 말씀과 율법을 봉함하고 후대에게 전수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사야의 가족을 통하여 이들의 이름을 가지고 징표와 표적이라 말씀하시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와 함께 하고 계시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살아갈수있음을 밝힌다.
나는?
남유다를 통하여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하셔서 내가 지금까지 잘 살고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특별히 기혼샘이 인상이 깊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고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내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살아가는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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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4일
현실인가 약속인가
[이사야 7:1-25]
B.C. 733년경 남유다 왕 ‘아하스’ 가 제위하였을 때에, 앗수르(앗시리아)는 서진 정책을 펴면서, 주변 국가들은 위기감을 느낀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는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고, 남유다에도 이를 요구한다. 아하스가 이를 거절하면서, 연합군은 도리어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칼날을 향하였고, 이에 아하스와 모든 이들은 흔들린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것을 말씀하시며, 앗수르를 의지하면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다.
1. 첫번째 선포 (1~9절)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 소식을 듣고, 아하스와 백성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린다.(2절) 남유다에 비해,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모든 상황에 있어 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 속에, 이사야를 스알야숩과 함께 보내신다. 아들과 함께 보내셨다는 것에는 이미 그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이사야(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와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의 이름 뜻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을 이미 담고 있다.
곧 이 상황 속에서,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지만, 끝까지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고 인간의 여러 방법을 최우선순위로 고집할 때에, 이들은 패망하고 ‘남은 자만 돌아오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의 근원이, 그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술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7절) 그러나, 만약 유다도 이 말씀을 굳게 믿지 않는다면, 그들도 동일하게 서지 못한다.(9절) 그들 역시도, 북이스라엘과 아람과 다를 바 없이 오직 자신들의 방법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2_ 두번째 선포(10-17절)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한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제안을 하신 상황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적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매우 하나님을 생각하며 세련된 대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에 대한 무시와 교만, 불신앙이다. 이사야는 그의 대답을 듣고, 구하는 것을 ‘작은 일’로 치부함을 경고하며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임을 책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임마누엘의 징조’를 선포하신다. 그는 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징조를 보여주시며 이는 당시의 시점에도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까지 이어진다.
3_ 여호와의 날(18-25절)
이사야는 결국 심판의 날을 선포한다. 그들이 의지했었던 앗수르는 오히려 남유다를 침략할 것이며 그 가운데 황폐하게될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이 없어서 동물들만 남아 있으며, 굳어버린 꿀만 먹게 되는 상황을 예언한다. 앗수르를 끝까지 의지한다면, 남유다는 이와 같은 위기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현실과 약속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너무 쉽게 보이는 현실에 함몰되고 흔들린다. 꼭 아하스와 같고, 숲이 흔들림 같았다는 표현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려움, 낙담, 절망, 혼란.. 인생의 위기나 심리적 어려움 등에 이렇게 반응할 때가 참 많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굳게 믿으면, 굳게 세우신다.’라고 약속하신다. 현실을 크게 보기보다, 주님을 크게 보겠다. 때때로 잘 모르고, 답답한 순간 속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바라보아야겠다. 그저 나중에 그렇게 해야지가 아니라, 오늘 그 믿음의 걸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 ‘믿는 자만 구한다.’ 아하스의 말은 매우 겸손해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번지르르한 말에 속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명확히 보고 계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구함’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더욱 배운다. 오늘 나의 앗수르는 무엇인가..? 불안 시대인마큼, 이를 해소할 온갖 것들을 찾는 것 같다. 동시에 나 역시도, 무언가 해소할 대상을, 의지하고 즐기고 두려워할 대상을 찾는다.
주님은 나의 중심을 오늘도 꿰뚫어 보신다. 더 이상 앗수르 따위를 의지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 모든 순간에 더욱 구해야함을 배운다. 모든 문제의 상황 속에도 이미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로 아뢰야겠다. 진정한 축복은, 심령의 가난함이다.
1. 첫번째 선포 (1~9절)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 소식을 듣고, 아하스와 백성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린다.(2절) 남유다에 비해,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모든 상황에 있어 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 속에, 이사야를 스알야숩과 함께 보내신다. 아들과 함께 보내셨다는 것에는 이미 그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이사야(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와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의 이름 뜻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을 이미 담고 있다.
곧 이 상황 속에서,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구원하실 것’이지만, 끝까지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고 인간의 여러 방법을 최우선순위로 고집할 때에, 이들은 패망하고 ‘남은 자만 돌아오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의 근원이, 그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술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7절) 그러나, 만약 유다도 이 말씀을 굳게 믿지 않는다면, 그들도 동일하게 서지 못한다.(9절) 그들 역시도, 북이스라엘과 아람과 다를 바 없이 오직 자신들의 방법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2_ 두번째 선포(10-17절)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한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제안을 하신 상황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적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매우 하나님을 생각하며 세련된 대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에 대한 무시와 교만, 불신앙이다. 이사야는 그의 대답을 듣고, 구하는 것을 ‘작은 일’로 치부함을 경고하며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임을 책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임마누엘의 징조’를 선포하신다. 그는 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징조를 보여주시며 이는 당시의 시점에도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까지 이어진다.
3_ 여호와의 날(18-25절)
이사야는 결국 심판의 날을 선포한다. 그들이 의지했었던 앗수르는 오히려 남유다를 침략할 것이며 그 가운데 황폐하게될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이 없어서 동물들만 남아 있으며, 굳어버린 꿀만 먹게 되는 상황을 예언한다. 앗수르를 끝까지 의지한다면, 남유다는 이와 같은 위기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현실과 약속 사이에서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너무 쉽게 보이는 현실에 함몰되고 흔들린다. 꼭 아하스와 같고, 숲이 흔들림 같았다는 표현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려움, 낙담, 절망, 혼란.. 인생의 위기나 심리적 어려움 등에 이렇게 반응할 때가 참 많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굳게 믿으면, 굳게 세우신다.’라고 약속하신다. 현실을 크게 보기보다, 주님을 크게 보겠다. 때때로 잘 모르고, 답답한 순간 속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바라보아야겠다. 그저 나중에 그렇게 해야지가 아니라, 오늘 그 믿음의 걸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 ‘믿는 자만 구한다.’ 아하스의 말은 매우 겸손해 보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번지르르한 말에 속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명확히 보고 계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구함’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더욱 배운다. 오늘 나의 앗수르는 무엇인가..? 불안 시대인마큼, 이를 해소할 온갖 것들을 찾는 것 같다. 동시에 나 역시도, 무언가 해소할 대상을, 의지하고 즐기고 두려워할 대상을 찾는다.
주님은 나의 중심을 오늘도 꿰뚫어 보신다. 더 이상 앗수르 따위를 의지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 모든 순간에 더욱 구해야함을 배운다. 모든 문제의 상황 속에도 이미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께로 아뢰야겠다. 진정한 축복은, 심령의 가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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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3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명을 감당한다!
[이사야 6:1-13]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유다는 정치적·영적 불안 가운데 있었다.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번영을 이루었던 웃시야 왕이 죽자 백성들은 미래를 염려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때 이사야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다. 세상의 왕은 죽었지만 하늘의 왕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통치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참된 왕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함과 영광이었다. 스랍들은 얼굴과 발을 가린 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쳤고, 그 소리에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리며 연기가 가득 찼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보다 높아질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숯으로 그의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된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정결케 하심과 사명을 함께 포함한다.
1. 거룩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왕보다 높으신 분이시다(1~4절)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왕이었지만 결국 교만하여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고 나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께서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며 참된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얼굴과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친다. 성전이 흔들리고 연기가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나타낸다.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권력과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신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더욱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정결케 된다(5~7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로 소개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핀 숯을 그의 입술에 대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제단의 숯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사람이 감당한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3. 정결케 된 사람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8~13절)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쉬운 사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완악한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심판을 선언하셨고 그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신 이유는 백성들이 회개할 가능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복음은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문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그루터기”가 남는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듯이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의 권력과 사람인가? 웃시야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자신의 죄를 먼저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만 바라보는 사람인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수록 회개는 깊어진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정결케 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만 바라보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심판의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묵상
*웃시야가 죽던 해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셨다. 세상의 왕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변하지 않는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시선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향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보다 자신의 죄를 먼저 본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시작된다.
*하나님은 죄를 깨닫게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여 사명자로 세우시는 분이시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사람의 반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충성스럽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기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으며,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룩함과 영광이었다. 스랍들은 얼굴과 발을 가린 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쳤고, 그 소리에 성전의 문지방이 흔들리며 연기가 가득 찼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보다 높아질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며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숯으로 그의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된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정결케 하심과 사명을 함께 포함한다.
1. 거룩하신 하나님은 세상의 왕보다 높으신 분이시다(1~4절)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왕이었지만 결국 교만하여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고 나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께서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시며 참된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얼굴과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친다. 성전이 흔들리고 연기가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나타낸다.
우리가 의지하는 세상의 권력과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신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더욱 붙들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정결케 된다(5~7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로 소개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핀 숯을 그의 입술에 대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제단의 숯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실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사람이 감당한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3. 정결케 된 사람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8~13절)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쉬운 사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완악한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심판을 선언하셨고 그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신 이유는 백성들이 회개할 가능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복음은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문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그루터기”가 남는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듯이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보존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의 권력과 사람인가? 웃시야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었다.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자신의 죄를 먼저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죄만 바라보는 사람인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수록 회개는 깊어진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나님은 정결케 된 사람을 사용하신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만 바라보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심판의 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의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묵상
*웃시야가 죽던 해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셨다. 세상의 왕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변하지 않는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시선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향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보다 자신의 죄를 먼저 본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시작된다.
*하나님은 죄를 깨닫게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여 사명자로 세우시는 분이시다. 회개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사람의 반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충성스럽게 말씀을 전해야 한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루터기를 남기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으며,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의 역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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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2일
하나님 앞임을 기억하고 삼가 조심히 살아야 한다!
[이사야 5:18-30]
극상품 포도가 자라나길 바랬지만 결국 들포도가 자라게 되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실패한 포도나무가 되었고 결국엔 예수님께서 참포도나무이심을 밝히시면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붙어있어야 함을 나타내며 돌이켜야 할 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1. 죄를 끌고 가는 삶인가? 끊어내는 삶인가?(18-19)
18절에서는 끈과 줄이란 대조되는 단어로 (하블레이-헤벨, 아봇) 가느다란 노끈(헤벨)과 같은 얕은 죄악이 점점 단단해져 수레를 끌 수 있을 정도의 두꺼운 밧줄(아봇)이 되어 죄를 끊을 수 없고 평생 지고 가는 것을 나타낸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처럼 인간이 죄에 어떤 식으로 오염되는지 말하고 있으며 얕고 가볍다고 생각했던 그 죄가 결국에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죄가 됨을 통하여 이렇게 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고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짓고 있는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2.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20-21)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기준을 은근슬쩍 바꿔버리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며 주변을 오염시키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어둠을 빛이라 부르면서 세상은 다들 이렇게 산다, 시대가 바뀌었다. 너만 손해보는거다 라는 식으로 가치관과 기준을 흔들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21절에 나오게 되는데 그 이유가 스스로를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여기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처럼 지식이 넘치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에 살아가며 배웠던 것들이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삶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깨어있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개인의 방탕이 공동체를 위험하게 한다.(22-23)
22절을 살펴보면 새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온갖 독한 술을 섞어 마시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 자들”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이들은 용맹한 자, 능력 있는 자,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힘과 지혜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백성을 보호하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를 누가 술을 더 잘 마시는지 대결하는데 쓰고 있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23절에는 그들이 방탕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뇌물을 통하여 악인을 의롭다 여기고 의인을 괴롭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을 통하여 개인의 방탕함이 공동체적으로 불의가 됨을 바라보게 된다.
4. 불길 속에 타버리는 마른 짚 (24-30)
결국 이들의 나라는 망해버리고 만다. 이들이 망한 이유는 자신들이 약하여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뿌리가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말라비틀어졌기에 불이나자 쉽게 타버렸음을 말을 하고 있다.
나는?
– 습관으로 짓는 죄의 끈이 단단한 밧줄이 됨을 통하여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끊어야 생각하게 되었다.
– 세상에 익숙하여 내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위해 잘 점검해야 한다.
– 나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잘 살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 되어 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1. 죄를 끌고 가는 삶인가? 끊어내는 삶인가?(18-19)
18절에서는 끈과 줄이란 대조되는 단어로 (하블레이-헤벨, 아봇) 가느다란 노끈(헤벨)과 같은 얕은 죄악이 점점 단단해져 수레를 끌 수 있을 정도의 두꺼운 밧줄(아봇)이 되어 죄를 끊을 수 없고 평생 지고 가는 것을 나타낸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처럼 인간이 죄에 어떤 식으로 오염되는지 말하고 있으며 얕고 가볍다고 생각했던 그 죄가 결국에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죄가 됨을 통하여 이렇게 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고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짓고 있는 이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2.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20-21)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이 있는데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기준을 은근슬쩍 바꿔버리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며 주변을 오염시키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어둠을 빛이라 부르면서 세상은 다들 이렇게 산다, 시대가 바뀌었다. 너만 손해보는거다 라는 식으로 가치관과 기준을 흔들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21절에 나오게 되는데 그 이유가 스스로를 지혜롭고 명철하다고 여기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처럼 지식이 넘치는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해야 한다. 세상에 살아가며 배웠던 것들이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삶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깨어있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개인의 방탕이 공동체를 위험하게 한다.(22-23)
22절을 살펴보면 새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온갖 독한 술을 섞어 마시고도 끄떡도 하지 않는 자들”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이들은 용맹한 자, 능력 있는 자,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서 힘과 지혜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백성을 보호하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를 누가 술을 더 잘 마시는지 대결하는데 쓰고 있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23절에는 그들이 방탕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뇌물을 통하여 악인을 의롭다 여기고 의인을 괴롭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을 통하여 개인의 방탕함이 공동체적으로 불의가 됨을 바라보게 된다.
4. 불길 속에 타버리는 마른 짚 (24-30)
결국 이들의 나라는 망해버리고 만다. 이들이 망한 이유는 자신들이 약하여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뿌리가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말라비틀어졌기에 불이나자 쉽게 타버렸음을 말을 하고 있다.
나는?
– 습관으로 짓는 죄의 끈이 단단한 밧줄이 됨을 통하여 습관적으로 짓는 죄를 끊어야 생각하게 되었다.
– 세상에 익숙하여 내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위해 잘 점검해야 한다.
– 나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잘 살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 되어 마르지 않는 인생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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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1일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이사야 5:1-17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처럼 정성껏 가꾸셨다. 기름진 땅을 선택하고 돌을 제거하며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 포도원을 지킬 망대를 세우고 술틀까지 마련하셨다. 좋은 열매를 맺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좋은 포도 대신 악취 나는 들포도가 맺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공의를 바라셨지만, 그들의 삶에는 포학과 고통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이 가득했다. 부유한 자들은 집과 땅을 계속 늘리며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을 이용했고, 지도자들은 술과 향락에 빠져 하나님의 뜻과 맡겨진 책임을 외면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이유는 단순히 신앙적인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부와 힘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며 이웃을 억압하고 생명을 해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보호하던 울타리를 거두고, 교만한 자들을 낮추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음 안에 심어 주셨다. 말씀과 공동체를 통해 돌보시며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하는 정의와 공의의 삶이다.
재물과 능력과 지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나만을 위해 붙잡으면 들포도가 되지만, 이웃을 섬기고 살리는 데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해 주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나는?
–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푸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이룬 것 마냥 착각하며 살 때가 많다. 그래서 베푸는데 인색하고, 부여잡고, 틀어쥐는데 더 익숙한 모습을 바라본다. 이런 모습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하나님이 바라신 삶의 모습보다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유력한 사람들 처럼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 하나님은 우리를 정의와 공의,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하신다. 이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지만, 한가지 특별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괜히 우리를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에 따라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면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좋은 포도 대신 악취 나는 들포도가 맺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정의와 공의를 바라셨지만, 그들의 삶에는 포학과 고통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이 가득했다. 부유한 자들은 집과 땅을 계속 늘리며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을 이용했고, 지도자들은 술과 향락에 빠져 하나님의 뜻과 맡겨진 책임을 외면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이유는 단순히 신앙적인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부와 힘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며 이웃을 억압하고 생명을 해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보호하던 울타리를 거두고, 교만한 자들을 낮추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
하나님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음 안에 심어 주셨다. 말씀과 공동체를 통해 돌보시며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기대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는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하는 정의와 공의의 삶이다.
재물과 능력과 지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나만을 위해 붙잡으면 들포도가 되지만, 이웃을 섬기고 살리는 데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해 주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나는?
–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푸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내가 이룬 것 마냥 착각하며 살 때가 많다. 그래서 베푸는데 인색하고, 부여잡고, 틀어쥐는데 더 익숙한 모습을 바라본다. 이런 모습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하나님이 바라신 삶의 모습보다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유력한 사람들 처럼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 하나님은 우리를 정의와 공의, 사랑과 진실함으로 대하신다. 이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지만, 한가지 특별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괜히 우리를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성품에 따라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면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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