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여호와의 날, 구원이냐 심판이냐 [이사야 2:1-22]
 – 2026년 07월 18일
– 2026년 07월 18일 –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예루살렘과 시온의 회복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열방을 포함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따라서 이미 시온에 있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여호와의 왕권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성취되는 사건이 아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신적 개입으로 시작하는 초자연적인 전환이다.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계 21:2).



1. 시온 산으로 순례 오는 민족들(1~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말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은 모든 산보다 높아지고(시 48:3; 78:69), 세상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순례를 온다(2절). 시온의 ‘높임받음’은 여호와의 계시 장소로서 갖게 될 압도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민족들이 서로 격려하며 시온으로 올라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가르침)과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3절). 마지막 때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된다. 공정하게 판단하고 재판하시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 살아가기에, 민족들이 다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에 의지하지 않는다(4절). 이들은 칼과 창 같은 쓸모 없게 된 전쟁 무기를 녹여 보습과 낫 같은 농기구로 만든다. 힘과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온 땅을 지배한다. 이렇게 환상중에 민족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 오는 모습을 보는 예언자가 야곱 족속을 향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확실히 깨닫고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권면한다(5절).



2. 우상과 제 힘을 의존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다(6~9절)
그런데 야곱 족속은 이사야의 권면(5절)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족속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고 그들을 불순종에 방치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6~8절). 먼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제의적 풍습에 깊이 물들어 버렸다. 여호와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방 풍습을 따라 점쟁이나 요술쟁이를 찾았다. 율법은 이러한 이교적 관습을 엄격하게 금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는 이 관습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은과 금과 보화와 군마와 병거가 땅에 가득했다. 야곱 족속은 자기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안전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상들이 야곱 족속의 땅에 가득했다. 우상이란 섬기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거짓 존재지만, 이스라엘은 능력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허망한 우상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사야의 시선은 이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서 민족들의 우상 숭배로 옮겨진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우상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을 천하고 낮게 만들었다(9a절). 우상에게 엎드려 자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가 이미 여호와의 심판에 속했다. 이사야는 행위와 그 결과의 내적 관계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정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간구한다(‘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9b절). 자기 신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상응하는 징계를 받는다.



3. 여호와의 날, 심판 선언과 권면(10~22절)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날은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의 교만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주권이 유감없이 과시되는 날로, 여호와만 높임을 받는다.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은 징벌을 받아 산산조각이 난다.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먼저 거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나무들을 언급한다(13절). 레바논의 백향목은 높이 30미터 이상 자라는 나무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건축에 사용되었다. 참고로 스가랴 11:1~2을 통해 레바논 백향목과 더불어 바산의 상수리 나무도 목재로 유명했다. 백향목을 수식하는 “높고 높은”은 12절의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와 히브리어가 동일하다.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만든 것들 위에도 여호와의 진노가 임한다(14~16절). 어떤 지형이든, 견고한 성벽이든 여호와의 날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다시스의 모든 배로 표현된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는 원양선단의 경이로움도 여호와의 진노의 바람 앞에서는 파선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인간의 거만과 교만이 꺾이고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신다. 이와같은 선포들은 여호와의 날에는 누가 진정으로 높은 자인지를 보여주는 날임을 일깨운다.

18절은 8절을 이어받아 우상의 멸망을 다시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때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경배드린 모든 우상이 사라질 것이다.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멸절한다. 여호와께서 왕의 위엄과 영광으로 세상을 심판하려고 일어나실 때 온 세상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19절). 이와같은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나타나심은 그분의 말씀과 의지를 무시하고 악을 행한 자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심판의 시간이 된다.

한편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우상의 헛됨을 참담하게 깨닫는다. 이들이 의존하던 우상은 환난을 피해 도망하는 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도움은 커녕 짐이 되는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버리고 서둘러 숨을 곳을 찾아 바위틈에서 살길을 찾는다(20~21절).

22절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이사야가 권면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멸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코로 호흡하는 동안만 생명이 유지되는 제한적 피조물일 뿐이다,. 이런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다. 그 업적에 의존하는 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생명체가 되게 하신(창 2:7)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왕권이 서는 날이다. 그날에 열방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베우고 그대로 살고자 할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모든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어 평화롭게 살 것이다. 성경은 늘 강조한다. 여호와의 주권 앞에 복종하는 곳에 참된 안식과 샬롬이 임한다.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다.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기 위해 모여들 날이다(슥 14:17). 열방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것이다. 주의 통치가 확립되는 그날에 더는 전쟁이 없고 샬롬이 임할 것이다(1~4절). 바벨탑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만민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그 아래서 하나가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여호와의 날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감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땅끝까지 전함으로 이 약속의 실현에 동참하게 하셨다(마 28:19~20; 행 1:8). 그리고 그 은혜로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더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야곱은 의미없다.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나라들의 풍속을 좇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 이들은 소용없다. 그들이 믿고 따른 그 우상의 운명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언약한 이방 나라들의 결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어떤 것과 조금이라도 나뉠 수 없다.

-여호와의 날은 회복 이전에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열방에게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권면을 들을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은혜를 입었고 말씀을 가졌음에도 그들 안에는 주의 통치와 임재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보화와 병거와 우상이 가득했다. 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보다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고 의지했다.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여긴 선지자가 심판을 간청할 정도였다(5~9절). 야곱의 후손이라는 혈통보다 말씀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주의 날(여호와의 날)”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주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데 거하는 교만한 자를 기어이 굴복시킬 것이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에 철저하게 낮추실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도 함께 멸망하게 하여 그들이 기대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고 있었음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날은 어디로든 숨고 피하고 도망해야 할 날이다. 그들이 무시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능력 앞에서 두려워 떨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기 위하여 임재하실 때 피하여 숨을 곳이 없을 것이다(10~21절). 큰 성읍과 왕궁에서 기세등등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해 바위 틈에 들어가고 진토에 숨을 것이다(계 6:15~17). 그날에는 눈이 높고 교만한 자들은 모두 낮아질 것이다. 세상에 부와 권력과 자부심을 가져다 준 망대, 성벽, 배, 아름다운 조각물들도 하찮게 될 것이다. 여호와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분만 높이고 그분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은 어둠의 자리에서 나와 여호와의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조명해주는 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고 다른 유한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죽어 사라질 것들에 헛된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살길이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경고와 함께 인생(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22절). 인생(인간)은 코 하나 막히면 숨이 끊어지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한순간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체할 것을 만들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위대한 건축과 과학과 예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인생을 더욱 분별하여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 통치의 특징은 “샬롬”이다. 평화가 하나님과 백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임하는 것이다. 그 평화를 만드는 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있기에 샬롬이 깃들고 있는가?

*신앙은 우상과의 싸움을 통해 형성된다. 인생을 의지하느냐, 인생을 지으신 분을 의지하느냐의 싸움이다. 여전히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우상이 있는지 늘 기민하게 살피고 또 살려야 하겠다.

+ 기도제목

*주님, 저의 신앙의 모든 걸음에서 오직 주님만이 홀로 영광과 높임을 받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주님의 날에 임할 주님의 권능과 영광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주님이 나의 주님되심을 이 땅의 일상에서 드러내며 살겠습니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예루살렘과 시온의 회복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열방을 포함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따라서 이미 시온에 있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여호와의 왕권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성취되는 사건이 아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신적 개입으로 시작하는 초자연적인 전환이다.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계 21:2).



1. 시온 산으로 순례 오는 민족들(1~5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말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은 모든 산보다 높아지고(시 48:3; 78:69), 세상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순례를 온다(2절). 시온의 ‘높임받음’은 여호와의 계시 장소로서 갖게 될 압도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민족들이 서로 격려하며 시온으로 올라오는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가르침)과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3절). 마지막 때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된다. 공정하게 판단하고 재판하시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 살아가기에, 민족들이 다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에 의지하지 않는다(4절). 이들은 칼과 창 같은 쓸모 없게 된 전쟁 무기를 녹여 보습과 낫 같은 농기구로 만든다. 힘과 폭력과 전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온 땅을 지배한다. 이렇게 환상중에 민족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순례 오는 모습을 보는 예언자가 야곱 족속을 향해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확실히 깨닫고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고 권면한다(5절).



2. 우상과 제 힘을 의존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다(6~9절)
그런데 야곱 족속은 이사야의 권면(5절)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족속을 더 이상 돌보시지 않고 그들을 불순종에 방치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6~8절). 먼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제의적 풍습에 깊이 물들어 버렸다. 여호와의 백성임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방 풍습을 따라 점쟁이나 요술쟁이를 찾았다. 율법은 이러한 이교적 관습을 엄격하게 금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는 이 관습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은과 금과 보화와 군마와 병거가 땅에 가득했다. 야곱 족속은 자기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자기의 안전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상들이 야곱 족속의 땅에 가득했다. 우상이란 섬기는 자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거짓 존재지만, 이스라엘은 능력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허망한 우상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사야의 시선은 이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서 민족들의 우상 숭배로 옮겨진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우상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을 천하고 낮게 만들었다(9a절). 우상에게 엎드려 자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행위가 이미 여호와의 심판에 속했다. 이사야는 행위와 그 결과의 내적 관계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정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간구한다(‘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9b절). 자기 신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상응하는 징계를 받는다.



3. 여호와의 날, 심판 선언과 권면(10~22절)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날은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의 교만이 땅에 떨어지고 우상의 무능력이 폭로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주권이 유감없이 과시되는 날로, 여호와만 높임을 받는다.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은 징벌을 받아 산산조각이 난다.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으로 먼저 거대 건축물에 사용되는 나무들을 언급한다(13절). 레바논의 백향목은 높이 30미터 이상 자라는 나무로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 건축에 사용되었다. 참고로 스가랴 11:1~2을 통해 레바논 백향목과 더불어 바산의 상수리 나무도 목재로 유명했다. 백향목을 수식하는 “높고 높은”은 12절의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와 히브리어가 동일하다. 여호와의 날에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만든 것들 위에도 여호와의 진노가 임한다(14~16절). 어떤 지형이든, 견고한 성벽이든 여호와의 날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진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다시스의 모든 배로 표현된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는 원양선단의 경이로움도 여호와의 진노의 바람 앞에서는 파선을 피할 수 없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인간의 거만과 교만이 꺾이고 오직 여호와만 높임을 받으신다. 이와같은 선포들은 여호와의 날에는 누가 진정으로 높은 자인지를 보여주는 날임을 일깨운다.

18절은 8절을 이어받아 우상의 멸망을 다시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실 때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경배드린 모든 우상이 사라질 것이다. 우상과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멸절한다. 여호와께서 왕의 위엄과 영광으로 세상을 심판하려고 일어나실 때 온 세상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19절). 이와같은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나타나심은 그분의 말씀과 의지를 무시하고 악을 행한 자들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심판의 시간이 된다.

한편 여호와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우상의 헛됨을 참담하게 깨닫는다. 이들이 의존하던 우상은 환난을 피해 도망하는 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도움은 커녕 짐이 되는 우상을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버리고 서둘러 숨을 곳을 찾아 바위틈에서 살길을 찾는다(20~21절).

22절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교만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이사야가 권면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길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사멸적 존재에 불과한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코로 호흡하는 동안만 생명이 유지되는 제한적 피조물일 뿐이다,. 이런 인간이 이룩한 업적은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다. 그 업적에 의존하는 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생명체가 되게 하신(창 2:7)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나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왕권이 서는 날이다. 그날에 열방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베우고 그대로 살고자 할 것이고, 그분의 뜻대로 모든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어 평화롭게 살 것이다. 성경은 늘 강조한다. 여호와의 주권 앞에 복종하는 곳에 참된 안식과 샬롬이 임한다.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날이다.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기 위해 모여들 날이다(슥 14:17). 열방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것이다. 주의 통치가 확립되는 그날에 더는 전쟁이 없고 샬롬이 임할 것이다(1~4절). 바벨탑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만민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그 아래서 하나가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여호와의 날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감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땅끝까지 전함으로 이 약속의 실현에 동참하게 하셨다(마 28:19~20; 행 1:8). 그리고 그 은혜로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더는 혈통적인 이스라엘 야곱은 의미없다.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나라들의 풍속을 좇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긴 이들은 소용없다. 그들이 믿고 따른 그 우상의 운명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언약한 이방 나라들의 결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은 다른 어떤 것과 조금이라도 나뉠 수 없다.

-여호와의 날은 회복 이전에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열방에게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권면을 들을만큼 어두웠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은혜를 입었고 말씀을 가졌음에도 그들 안에는 주의 통치와 임재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보화와 병거와 우상이 가득했다. 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보다는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고 의지했다.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여긴 선지자가 심판을 간청할 정도였다(5~9절). 야곱의 후손이라는 혈통보다 말씀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 “주의 날(여호와의 날)”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은 주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데 거하는 교만한 자를 기어이 굴복시킬 것이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에 철저하게 낮추실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도 함께 멸망하게 하여 그들이 기대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고 있었음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날은 어디로든 숨고 피하고 도망해야 할 날이다. 그들이 무시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능력 앞에서 두려워 떨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기 위하여 임재하실 때 피하여 숨을 곳이 없을 것이다(10~21절). 큰 성읍과 왕궁에서 기세등등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해 바위 틈에 들어가고 진토에 숨을 것이다(계 6:15~17). 그날에는 눈이 높고 교만한 자들은 모두 낮아질 것이다. 세상에 부와 권력과 자부심을 가져다 준 망대, 성벽, 배, 아름다운 조각물들도 하찮게 될 것이다. 여호와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곳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분만 높이고 그분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이 살길은 어둠의 자리에서 나와 여호와의 빛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조명해주는 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고 다른 유한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죽어 사라질 것들에 헛된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살길이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경고와 함께 인생(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22절). 인생(인간)은 코 하나 막히면 숨이 끊어지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한순간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체할 것을 만들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위대한 건축과 과학과 예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인생을 더욱 분별하여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 통치의 특징은 “샬롬”이다. 평화가 하나님과 백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 임하는 것이다. 그 평화를 만드는 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내가 있기에 샬롬이 깃들고 있는가?

*신앙은 우상과의 싸움을 통해 형성된다. 인생을 의지하느냐, 인생을 지으신 분을 의지하느냐의 싸움이다. 여전히 나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우상이 있는지 늘 기민하게 살피고 또 살려야 하겠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