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의지 대상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사야 3:1-12]
 – 2026년 07월 19일
– 2026년 07월 19일 –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어떤 풍성한 것들도, 특히 인적 자원이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 땅에 은금과 보화가 가득하고 마필과 병거가 무수하여 점쟁이와 우상이 가득할지라도(2:7~8) 여호와의 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이들이 의존하는 풍족한 물적 자원(양식과 물)과 인적 자원이 참된 지팡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신다.



1.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여러 일들(혼란들, 1~7절)
1~5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게 될 극단적 혼란과 공황 상태에 관한 기술이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존하는 것'(지팡이와 막대기)을 모두 제거해버리실 것이다. 제거 방식은 달리 언급하지 않고 제거의 대상에 집중한다. 이사야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불러 당신에게 등 돌린 자들을 치신다(10:6).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신 이스라엘 백성이 의뢰하고 의지한 것들은 무엇인가? ‘모든 빵과 모든 물’, ‘용사와 군인, 재판관과 예언자, 점쟁이와 장로, 오십부장과 귀족, 모사(군 고문관), 능숙한 마술사, 능란한 요술사’ 이다(새번역, 1-3절). 모든 양식과 모든 물은 생존의 필수품이다. 특히 전시에 예루살렘 성의 방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열왕기하 25:13에 의하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양식이 떨어져 바벨론 군대에 함락 당했다. 즉,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의지한(2:7) 예루살렘과 유다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용사’는 최고의 병사로, 왕의 친위부대를 구성하는(삼하 23:8~9) 용병을 가리킨다. ‘전사(군인)’는 징집병(삿 20:17; 민 31:28, 49; 신 2:14~16)이나 군사 훈련을 받은 자(삼상 16:18; 17:33; 삼하 17:8)를 가리킨다. ‘재판관’은 통치 조직의 일원으로, 왕의 관료에 속한다. 함께 언급된 ‘선지자’는 황홀경 가운데 환상을 보는 자를 지칭하는 듯하다. ‘복술자’는 ‘점쟁이’로 이해되며 신탁을 내리는 기술자에 속한다. ‘장로’는 씨족의 우두머리로 사회적 정치적 사법적 영역에서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오십부장’은 군 조직의 핵심에 속하는 장교 집단(삼상 8:12)을 지칭한다. ‘귀인’은 왕과 밀접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9:15에서는 ‘장로’와 욥기 22:8에서는 ‘권세 있는 자’와 함께 언급된다. ‘모사(고문관)’는 왕의 자문관을, ‘마술사(장인)’와 ‘요술자’는 기능상 동의어로 ‘복술자(3절)’와 함께 민간 신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집단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집단은 정치, 사회, 종교의 주요 집단이 거의 모두 열거 되었으나, 특이하게도 오아과 제사장이 빠져있다. 이는 이사야의 고발이 왕보다 그의 배교적 정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약속이 주어진 왕조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모든 분야의 권위를 제거하시자 예루살렘과 유다는 극단적인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다(4절). 어느 정도의 혼란인지를 ‘소년들’과 ‘아이들’이 고관이 되어 통치한다고 묘사할 정도다. 즉, 정치와 사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없는 자들이 무질서와 혼란을 틈타 권력의 자리에 앉았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공동체를 지탱하던 사회적 규범과 전통이 붕괴되고, 개인의 이익이 행동 규범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 권위자가 되어 힘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학대한다(5절). 최소한의 사회 규범도 존중되지 않기에 세대 간의 긴장이 힘 있는 젊은이들의 반역으로 폭발한다. 아이가 노인의 권위와 지위를 존중하지 않고 대들며 괴롭힌다. 당연히 계층 간의 질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대든다.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조금이라도 사정이 나은 듯 보이는 이(폐허 속에서 옷이라도 걸친 이)에게 통치를 부탁할 것이나, 필사적으로 거부할 것이다(6-7절). 권위와 특권을 보장하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극도의 혼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2. 혼란의 신학적 배경(8~12절)
이토록 비참하게 될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은 분명하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는 쓰러진다.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새번역_8절).”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도자들”이다(12절). 지도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저지른 그대로(11절)’ 화가 미치고, 재난이 뒤덮을 것이다. 보복을 받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마치 아이들이 통치하는 것처럼, 여인들이 다스리는 것처럼(이것은 비유다. 사리분별과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당시의 문화적(풍습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을 잘못 들어서게 하고,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12절).

본문을 묵상하면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할 땅, 나라,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오는 점진적인 변화들이 무엇일까? 1)물과 빵(양식, 생존에 필요한 최소 요건)이 부족하게 된다(1절). 2)리더십이 사라질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질서가 붕괴될 것이다. 지도자가 될 만한 각계 각층의 리더십이 사라질 것이다(2-3절). 3)통치자(지도자)가 부재하게 될 것이다. 인물도 없어서 곤란해 질 것이고, 지도력도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누구도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4, 6-7절). 4)인격적인 관계가 파괴 될 것이다(5절). 인격적인 보편관계가 파괴되어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며 고통 가운데 있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가 쓰러진다(8절). 그들의 안색이, 소돔과 같은 자신들의 죄를 드러낸다. 감출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개인적인 양식의 부족함부터 사회를 유지하는 리더십의 부재, 통치자의 공황 상태와 함께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의 파괴를 수반한다.

하지만 이런 온전한 심판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복”과 “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복의 약속이다. ” 의로운 사람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복이 있고, 그들이 한 일에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여라. 악한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재난이 그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그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새번역_10-11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악인은 심판만 기다릴 뿐이다. 심판이 다가올 수록 악을 번창하겠으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신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의 행사는 전적으로 본인 몫이다.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인 거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문제는 지금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복술자와 요술자를 제외하면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본적인 식량이, 각 분야의 책임감 있는 전문지도자들은 마땅히 사회가 의지할 대상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마땅히 의뢰와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두 다 잘못하면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호흡에 불과한 ‘인생(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2:22),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한 양식과 물과 사람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군사,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유약한 사람을 믿었다. 복술자를 불러 길흉을 점쳤다. 번영을 주신 하나님보다 번성 그 자체를 더 신뢰했다(1~3절).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강하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곧 삶의 지혜다.

-이스라엘이 의지한 지도자는 모두 제하시고 그 자리에 무능하고 자격 없는 이들을 세우실 것이다(4~7절). 허술한 통치에 사회는 분열되고, 세대간, 계층간 갈등이 심해질 것이다. 겉옷이라도 가진 이에게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사정할 것이고, 지도자는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된 상황을 맡은 자에 불과할 것이다(4~7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 임했던 샬롬과 선명하게 대조된다(2:4). 인간의 욕망이 낳은 지도자가 인간의 욕망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멸망할 만했다. 말과 삶으로 여호와를 거역했으며, 교만한 눈(2:11)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범했다. 죄를 뉘우치는 기색은 없고 소돔과 같이 자기 죄를 드러내놓고 말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였고 돌같이 완악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8~9절). 말씀을 멀리하면 어느새 우리도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그 손으로 행한 대로 열매를 먹을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지도자들과 남편들을 통해 착취에 가담한 여인들이 권력을 남용하였다(10~12절). 의의 길을 가르쳐야 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유혹하여 마땅히 가야 할 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님이신 이유는 시간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점을 치거나 재물을 쌓는 것은 시간이 주는 불확실성을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다.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그 염려에 붙잡혀 있다고 느껴진다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는 그 불안과 염려를 해결할 수 없음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원리는 모든 판단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는 인자와 사랑으로 행동하시지만, 이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시다. 따라서 결코 이 원칙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내 행위는 어떤 보응을 불러올 것 같은지 찬찬히 내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삶에서 의지해야 할 기본적인 대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제거하실 대상이라니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말과 행동으로(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대항하고 그의 영광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서 말과 행동을 수반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외면하거나 대항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대항자들의 삶의 기반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이다.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대로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순종되는 삶을 회복 시키실 것이다.

*내 삶에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순응되어 삶의 일상의 기반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이때 내가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기에… 나의 일상의 삶을 지키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알려주신대로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응되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날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다.

+ 기도제목

*주님,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여러 지도자들을 붙잡아 삶을 지탱하려하는 어리석음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따라 통치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그 이끄심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어떤 풍성한 것들도, 특히 인적 자원이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 땅에 은금과 보화가 가득하고 마필과 병거가 무수하여 점쟁이와 우상이 가득할지라도(2:7~8) 여호와의 날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이들이 의존하는 풍족한 물적 자원(양식과 물)과 인적 자원이 참된 지팡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신다.



1.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여러 일들(혼란들, 1~7절)
1~5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때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게 될 극단적 혼란과 공황 상태에 관한 기술이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존하는 것'(지팡이와 막대기)을 모두 제거해버리실 것이다. 제거 방식은 달리 언급하지 않고 제거의 대상에 집중한다. 이사야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불러 당신에게 등 돌린 자들을 치신다(10:6).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신 이스라엘 백성이 의뢰하고 의지한 것들은 무엇인가? ‘모든 빵과 모든 물’, ‘용사와 군인, 재판관과 예언자, 점쟁이와 장로, 오십부장과 귀족, 모사(군 고문관), 능숙한 마술사, 능란한 요술사’ 이다(새번역, 1-3절). 모든 양식과 모든 물은 생존의 필수품이다. 특히 전시에 예루살렘 성의 방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열왕기하 25:13에 의하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양식이 떨어져 바벨론 군대에 함락 당했다. 즉,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경제력을 의지한(2:7) 예루살렘과 유다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용사’는 최고의 병사로, 왕의 친위부대를 구성하는(삼하 23:8~9) 용병을 가리킨다. ‘전사(군인)’는 징집병(삿 20:17; 민 31:28, 49; 신 2:14~16)이나 군사 훈련을 받은 자(삼상 16:18; 17:33; 삼하 17:8)를 가리킨다. ‘재판관’은 통치 조직의 일원으로, 왕의 관료에 속한다. 함께 언급된 ‘선지자’는 황홀경 가운데 환상을 보는 자를 지칭하는 듯하다. ‘복술자’는 ‘점쟁이’로 이해되며 신탁을 내리는 기술자에 속한다. ‘장로’는 씨족의 우두머리로 사회적 정치적 사법적 영역에서 상당한 권위와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오십부장’은 군 조직의 핵심에 속하는 장교 집단(삼상 8:12)을 지칭한다. ‘귀인’은 왕과 밀접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9:15에서는 ‘장로’와 욥기 22:8에서는 ‘권세 있는 자’와 함께 언급된다. ‘모사(고문관)’는 왕의 자문관을, ‘마술사(장인)’와 ‘요술자’는 기능상 동의어로 ‘복술자(3절)’와 함께 민간 신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집단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집단은 정치, 사회, 종교의 주요 집단이 거의 모두 열거 되었으나, 특이하게도 오아과 제사장이 빠져있다. 이는 이사야의 고발이 왕보다 그의 배교적 정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사야에게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약속이 주어진 왕조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모든 분야의 권위를 제거하시자 예루살렘과 유다는 극단적인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다(4절). 어느 정도의 혼란인지를 ‘소년들’과 ‘아이들’이 고관이 되어 통치한다고 묘사할 정도다. 즉, 정치와 사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없는 자들이 무질서와 혼란을 틈타 권력의 자리에 앉았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공동체를 지탱하던 사회적 규범과 전통이 붕괴되고, 개인의 이익이 행동 규범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 권위자가 되어 힘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학대한다(5절). 최소한의 사회 규범도 존중되지 않기에 세대 간의 긴장이 힘 있는 젊은이들의 반역으로 폭발한다. 아이가 노인의 권위와 지위를 존중하지 않고 대들며 괴롭힌다. 당연히 계층 간의 질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대든다.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조금이라도 사정이 나은 듯 보이는 이(폐허 속에서 옷이라도 걸친 이)에게 통치를 부탁할 것이나, 필사적으로 거부할 것이다(6-7절). 권위와 특권을 보장하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극도의 혼란기에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2. 혼란의 신학적 배경(8~12절)
이토록 비참하게 될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은 분명하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는 쓰러진다.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새번역_8절).”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도자들”이다(12절). 지도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저지른 그대로(11절)’ 화가 미치고, 재난이 뒤덮을 것이다. 보복을 받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마치 아이들이 통치하는 것처럼, 여인들이 다스리는 것처럼(이것은 비유다. 사리분별과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당시의 문화적(풍습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을 잘못 들어서게 하고,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12절).

본문을 묵상하면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할 땅, 나라,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오는 점진적인 변화들이 무엇일까? 1)물과 빵(양식, 생존에 필요한 최소 요건)이 부족하게 된다(1절). 2)리더십이 사라질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질서가 붕괴될 것이다. 지도자가 될 만한 각계 각층의 리더십이 사라질 것이다(2-3절). 3)통치자(지도자)가 부재하게 될 것이다. 인물도 없어서 곤란해 질 것이고, 지도력도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누구도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4, 6-7절). 4)인격적인 관계가 파괴 될 것이다(5절). 인격적인 보편관계가 파괴되어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며 고통 가운데 있다가 “드디어”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가 쓰러진다(8절). 그들의 안색이, 소돔과 같은 자신들의 죄를 드러낸다. 감출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개인적인 양식의 부족함부터 사회를 유지하는 리더십의 부재, 통치자의 공황 상태와 함께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의 파괴를 수반한다.

하지만 이런 온전한 심판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복”과 “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복의 약속이다. ” 의로운 사람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복이 있고, 그들이 한 일에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여라. 악한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재난이 그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그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새번역_10-11절).” 하나님 나라의 복은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악인은 심판만 기다릴 뿐이다. 심판이 다가올 수록 악을 번창하겠으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신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의 행사는 전적으로 본인 몫이다.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인 거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문제는 지금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복술자와 요술자를 제외하면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본적인 식량이, 각 분야의 책임감 있는 전문지도자들은 마땅히 사회가 의지할 대상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이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마땅히 의뢰와 의지의 대상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두 다 잘못하면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호흡에 불과한 ‘인생(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2:22),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한 양식과 물과 사람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군사, 정치, 경제, 종교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유약한 사람을 믿었다. 복술자를 불러 길흉을 점쳤다. 번영을 주신 하나님보다 번성 그 자체를 더 신뢰했다(1~3절).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강하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곧 삶의 지혜다.

-이스라엘이 의지한 지도자는 모두 제하시고 그 자리에 무능하고 자격 없는 이들을 세우실 것이다(4~7절). 허술한 통치에 사회는 분열되고, 세대간, 계층간 갈등이 심해질 것이다. 겉옷이라도 가진 이에게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사정할 것이고, 지도자는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된 상황을 맡은 자에 불과할 것이다(4~7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 임했던 샬롬과 선명하게 대조된다(2:4). 인간의 욕망이 낳은 지도자가 인간의 욕망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멸망할 만했다. 말과 삶으로 여호와를 거역했으며, 교만한 눈(2:11)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범했다. 죄를 뉘우치는 기색은 없고 소돔과 같이 자기 죄를 드러내놓고 말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였고 돌같이 완악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8~9절). 말씀을 멀리하면 어느새 우리도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그 손으로 행한 대로 열매를 먹을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지도자들과 남편들을 통해 착취에 가담한 여인들이 권력을 남용하였다(10~12절). 의의 길을 가르쳐야 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유혹하여 마땅히 가야 할 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님이신 이유는 시간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다. 점을 치거나 재물을 쌓는 것은 시간이 주는 불확실성을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다.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그 염려에 붙잡혀 있다고 느껴진다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는 그 불안과 염려를 해결할 수 없음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원리는 모든 판단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는 인자와 사랑으로 행동하시지만, 이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시다. 따라서 결코 이 원칙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내 행위는 어떤 보응을 불러올 것 같은지 찬찬히 내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삶에서 의지해야 할 기본적인 대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제거하실 대상이라니 어떻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말과 행동으로(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대항하고 그의 영광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서 말과 행동을 수반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외면하거나 대항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대항자들의 삶의 기반을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이다. 이 심판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대로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순종되는 삶을 회복 시키실 것이다.

*내 삶에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순응되어 삶의 일상의 기반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이때 내가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다.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기에… 나의 일상의 삶을 지키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알려주신대로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응되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없는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날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다.
창 41:1-24 가장 극적인 때, 요셉이 드러나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의 미래를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된 뒤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바로가 두 꿈을 꾼다. 그는 애굽의 모든 술객과 지혜자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한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를 추천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선다. 그는 바로의 꿈 얘기를 듣기 전에 이번에는 하나님이 평안으로 바로에게 답하실 것을 선언한다.
 
 
 
1. 바로의 두 꿈(1~7절)
하나님이 요셉이나 두 관원장에게 꿈을 통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듯이(37; 40장), 이번에는 바로에게 꿈으로 그의 뜻을 펼치신다. “만 이년 후(요셉의 꿈 해석대로 술 관원장이 복직된 이후)” 바로는 두 꿈을 꾼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다(41:46).
 
첫 꿈은 바로가 나일강 가에 서서 목격한 장면이다(2~4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물을 먹는 모습에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와 좋은 암소들을 삼켜 버리는 모습이다. 이때 바로가 꿈에서 깬다. 바로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는 다시 잠들어, 두 번째 꿈을 꾼다(5~7절).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이어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돋아나 앞서 좋은 돋아나 앞서 좋은 이삭들을 삼키는 장면이다. 그가 깨어보니 꿈이었다(7절).
 
바로의 꿈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각각 일곱씩 등장하고, 뒤에 나온 나쁜 것이 앞의 좋은 것을 삼켜버린다는 동일한 전개가 반복된다. 바로의 두 꿈은 특히 요셉의 두 꿈(37:7, 9)과 대비된다. 첫째, 요셉의 꿈에 곡식 단과 해,달,별이 등장하여 가족 관계 및 요셉 개인의 지위와 관련된 상징을 나타낸다면, 바로의 꿈은 암소와 이삭이 나타나 국가 경제와 생존을 좌우하는 상징을 묘사한다. 특히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과 풍요의 근원이며, 암소와 이삭은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지는 목축과 농경을 대표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둘째, 요셉의 꿈에는 12(곡식 단, 별)라는 가족 관련한 숫자가 등장하고 바로의 꿈에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숫자 7이 반복된다. 셋째, 요셉과 바로의 꿈은 같은 내용이 다른 두 상징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준다. 넷째, 두 사람의 꿈은 해석의 확실성에서 차이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에서 곡식 단과 해,달,별은 각각 형제와 가족을 가리키며, 요셉이 경배받는 장면은 그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분명한 해석을 드러냈다(37:8, 10).
 
 
 
2. 술 관원장의 요셉 추천(8~13절)
바로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자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요셉의 이름이 언급된다. 바로는 뒤숭숭한 마음에 애굽의 점술가와 지혜자(현인)를 모두 불러 모은다(8절). 애굽을 포함한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신의 계시로, 왕을 신의 아들로 여겼다. 이런 차원에서 꿈의 의미를 구하는 것은 곧 통치 행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일반인이 시도하는 일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이 감당하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점술가와 술객(현인, 지혜자)은 신들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해 꿈 해석, 길흉 판단, 질병 치유 등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어떤 해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꿈을 아예 해석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가 만족하고 납득할만한 해석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들은 이 두 꿈을 각각 별개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12, 26절).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한다(9~13절).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는 ‘내가 오늘 내 죄들을 기억하나이다(자카르)’라고 입을 연다. ‘내 죄들’은 바로에게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요셉이 ‘나를 기억해 달라(자카르)’라는 부탁(14절)을 잊은 잘못(19절)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는 바로가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친위대장의 집에 가둔 일을 상기시킨다. 이어 감옥에서 겪은 일을 왕에게 진술하며 요셉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그와 빵 관원장은 같은 밤 해석이 필요한 꿈을 각자 꾸었다. 그때 그곳에서 자기들을 시중들던 친위대장의 종 히브리 청년이 꿈을 해석해 준 것을 고한다. 그가 해석해 준 대로 자신은 복직되고 빵 관원장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요셉을 죄수가 아닌 “친위대장의 종”이자 “히브리 청년”으로 소개한다(12절). 이는 요셉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줄이고 신뢰할 만한 자임을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자. 그가 요셉의 억울함의 호소(40:15)를 기억했고, 정직한 증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히브리 청년”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이방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후 애굽의 지혜자들이 풀지 못한 것을 풀어내는 요셉의 모습을 대비 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서 “히브리 사람, 히브리 종(39:14, 17)”에 이어 “히브리 청년”으로 거듭 언급됨으로써, 요셉의 민족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한다. 이는 장차 이어질 야곱 가족의 이주를 통한 히브리인의 정착과 먼 훗날 이어질 출애굽 서사의 출발을 예고한다.
 
 
 
3. 바로 앞에 선 요셉(14~24절)
요셉은 즉시 바로에게 소환된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히브리 종임을 알고서도 소환했다는 것은 바로에게 꿈 해석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급히 요셉을 옥에서 내보냈다(14절). “급히 내보냈다”는 원래 “뛰게 했다”는 뜻으로, 상황의 긴박감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 있다.
 
요셉은 왕 앞에 서기 위해, 머리와 수염을 밀고 죄수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 장면도 요셉의 극적 변화를 암시하는 충분한 복선이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두 관원장이 했던 동일한 말로(40:8), 요셉의 해석 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바로는 “내가 너에 대해 들으니, 너는 꿈을 들으면 해석한다고 하더라”라고 언급한다. 이는 애굽의 최고 지혜자들이 모두 풀지 못한 꿈을 일개 이방인 종이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의구심이다. 이에 요셉은 담담하게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샬롬)으로 답하실 것”이라며, 그의 말을 바로잡는다. 요셉의 이 말은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40:8)을 재선언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까지 하나님께 달렸음을 선포하는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17~24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1~7절과 내용이 비슷하다. 그러나 불길함을 증폭시키는 과장된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흉한 암소에 대한 묘사가 “흉하고 파리한(3절)”에서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19절)”이라는 표현으로 악화했다. 여기에 그 몰골이 애굽 온 땅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흉하더라는 내용을 부연했다(19절). 또 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삼킨 뒤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처음처럼 흉했다는 묘사도 추가되었다(21절). 그리고 둘째 꿈에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라는 표현이 ‘마르고(개역 개정 번역에서는 빠져 있음, 23절)’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황폐함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표현의 변화는 바로가 그만큼 그가 꾼 꿈에 대한 충격이 잠에서 깬 후에 더 커졌고, 이를 매우 위중한 사태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나는?
-바로는 대제국 애굽의 왕이다. 그의 말은 곧 창조가 되고 사건이 된다. 그는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 자기의 말 한마디로 타인과 타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오는 시간이다. 아무도 그의 나라를 넘볼 수 없다. 그런데 꿈이 그를 습격했다. 새로운 역사가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낮의 사람일 뿐 밤의 사람이 아니었다. 밤과 잠과 꿈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만든다. 권력이 거세된 보통 사람이 되게 한다. 속수무책의 평범한 사람이 되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더 큰 운명과 역사의 주관자 앞에 서게 만든다. 그것이 꿈이다. 바로에게 꿈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바로미터였다.
 
-그 자체가 신이자, 법이며, 늘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하고 명령만 내리는 존재이던 왕이 두 번의 꿈 때문에 자신의 모든 권력도 감당하지 못한 근심에 빠진다. 그 나라에서 제일 지혜롭고 탁월하다던 술객들과 박사들도 이 꿈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다. 그는 현재를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자원으로 내일도 안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고 늘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어리석은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나라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애굽의 분명한 한계였다. 동시에 바로의 분명한 한계였다.
 
-술 맡은 관원은 2년 전 일을 기억하고 바로에게 요셉을 천거한다. 2년은 망각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최적기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순간에 요셉은 왕이 히브리 소년의 꿈 해몽 능력을 자기 나라의 술객이나 박사들 수준으로 미덥지 않게 생각하자, 꿈 해석 능력이 왕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한다. 자신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해석하는 ‘수단(통로)’에 불과하다고 고백한 것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기 전에 그 해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두 번이나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주목하게 하며, 자신은 물론이고 애굽의 운명과 바로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꿈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은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셉은 혹시나 하고 술 맡은 관원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식 없이 두 해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시 105:19).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할렐루야를 외칠 때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알 수 없고, 까닭도 알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애굽 왕에게 알리시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수들이 해석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는 요셉으로 그 꿈을 해석케 하여 요셉을 온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은 온 애굽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가족들까지 애굽으로 불러,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역사를 언약하신 대로 주관하시며 큰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했고,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해졌다(8절). 그 다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요셉이라는 무명의 인물을 나라의 최고 책임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음을 깨닫게 한다.
 
*아무도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숱 맡은 관원은 비로소 요셉이 생각났다. 그의 망각 덕분에 요셉은 가장 극적인 순간에 왕 앞에 설 수 있었고 금세 신뢰를 얻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망각과 회상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놀랍고 놀라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주님, 기다림이 망각 되었을 그 때, 하나님이 바로의 꿈과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이끄셔서 요셉을 극적으로 등장시켜주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어둠만 보였던 동방의 감춰진 나라 조선에서 그런 시간을 보냈을 선교사들의 기다림이 이와 같았으리라 상상해봅니다. 그들의 기다림의 열매가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요. 늘 겸손히 이 때를 인내하며 살겠습니다.
*주님, 조금의 실수나 낭비 없이 가장 적절한 때 멋지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창 41:37~57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드러낸) 요셉
 
본문은 요셉의 꿈 해몽 이후 바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요셉의 활동을 보여준다. 바로는 요셉의 해몽에 감동하여 그를 바로 다음의 최고 지위에 오르게 한다.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활동하며 결혼하여 두 아들까지 얻는다. 요셉의 꿈 해석대로 애굽에 7년의 풍년이 있은 후, 7년 흉년이 찾아왔을 때, 요셉은 애굽의 두 번째 통치자로서 애굽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온 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1. 요셉이 높아지다(37~45절)
37~39절은 요셉의 해몽과 대안에 매료된 바로와 신하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요셉의 해석에서 ‘신적 지혜와 영감’을 인식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다(38절). 그리고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39절).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영’에 대해 언급하다니 충격적인 모습이다. 바로는 요셉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인정을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지혜와 영감을 주신 하나님의 역할과 능력은 인정한 것이다. 한편,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38~3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실감하게 한다(잠 1:7, 23).
 
40~44절은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는 장면이다. 바로는 이제 요셉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그곳은 (바로의) ‘내 집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앞서 보디발(39:4~6)이나 간수장(39:22~23)이 그랬듯이 바로도 애굽을 요셉의 손에 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는 요셉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위치에 있는 요셉에게 애굽의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고 말한다(40절). 바로는 요셉에게 한 자신의 말대로 즉시 실행한다. “총리”라는 개역개정 번역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문은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위에 세운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애굽의 온 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41절). 그리고 난 후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반지를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혔으며 목에 금 사슬을 걸어주고, 자신의 버금 수레에 타게 하였다(42~43절). 이때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고 외쳤다. 요셉에게 존경과 예의를 표하라는 의미다.
 
이렇게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후 바로는 애굽 최고 통치자로서 요셉의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한다(44절).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직역하면 ‘네가 없이는 아무도 애굽 온 땅에서 자기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의미다. 애굽 온 땅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셉의 결정에 달렸다는 의미다. 요셉은 바로는 아니었지만 바로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왕은 아니었지만, 통치자가 되었다.”
 
45절은 요셉의 변화된 삶을 소개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새 이름을 주고 아내를 얻게한다. 요셉의 새 이름은 ‘사브낫바네아’라는 애굽식의 이름이었다. 또한 ‘온(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요셉은 애굽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구약에서 30세는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나이였다. 참고로 레위인의 직무 개시 나이가 30세였고(민 4:2 이하), 다윗이 왕직을 수행한 나이가 30세였다(삼하 5:4).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시기도 30세였다(눅 3:23).
 
요셉은 애굽 통치자로 임명된 후 애굽 전역을 순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2. 요셉이 애굽을 돌보다(46~57절)
46~49절은 일곱 해 풍년 때에 곡물을 저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요셉의 해몽대로 일곱 해 풍년이 들었다. 토지 소출이 매우 많았다(47절). 요셉은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게 하였다(48절). 백성들은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서 그것을 세기를 그쳤다(49절).
 
50~52절은 흉년이 시작되기 전에 두 아들이 태어나는 것(50절)을 보여 준다.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낳아준 아들들이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 부른다. 첫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는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고난과 자신의 아버지 집의 모든 일을 ‘잊게(나샤)’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절). 둘째 아들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고 짓는다. 하나님이 자신을 ‘궁핍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52절).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의 최고 전성기에 태어났다. 요셉의 생애 주기만이 아니라 애굽의 풍요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요셉의 아들들의 이름에는 요셉의 경험과 현재 삶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므낫세의 출생을 통해 요셉 그가 경험했던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 특히 추측하기로는 자신을 이토록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던 형제들에 대한 나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번성함’을 고백한다. 7년의 풍년은 이러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실제적 모습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의도하지 않았을테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베푸신 복과 은혜를 찬양하는 셈이 되었다. 무엇보다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지었다. 그의 아들들을 애굽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53~57절은 7년 흉년 때 창고를 열고 곡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신대로 일곱 해 풍년이 지나고 일곱 해 흉년이 찾아온다. 이때 모든 나라에 기근이 있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양식이 있었다(54절). 7년 풍년을 통해 쌓아놓은 곡식을 흉년 때문에 바로에게 부르짖는 백성을 향해 요셉에게 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55절). 요셉은 모든 창고를 개방하고 저장해 둔 곡물을 백성들에게 판다(56절).
 
그런데 ‘온 땅에’ 기근이 심하자 ‘온 땅에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의 요셉에게로 왔다(57절). 그들 가운데 요셉의 형제들도 있었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은 독자의 시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돌리게 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환되는 셈이다.
 
모든 일이 요셉의 해석대로 되었다. 바로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꿈의 성취와 실현은 요셉의 꿈의 성취이기도 했다. 요셉은 ‘다스리는 자’로서 자기 가족뿐 아니라 온 세계 앞에 서게 되었다(37:8, 10).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샬롬의 응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41:16). 이 ‘샬롬’은 단순히 바로와 애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요셉을 비롯한 야곱 일가와 온 땅에 주시는 ‘샬롬’이었다.
 
 
 
나는?
-바로는 요셉의 해몽을 듣고 이 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요셉은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자만이 이 꿈이 가리키는 애굽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요셉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셉은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충실하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만큼만 하면 된다.
 
-놀랍게도 바로는 모든 애굽의 관리들과 지혜자들을 제치고 요셉을 애굽에서 자기 다음 가는 권력의 자리에 앉힌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일순간 일개 죄수이자, 노예가 애굽의 2인자가 되었다. 이는 바로가 요셉을 인정하였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였으며, 그가 마련한 대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전이고 반전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요셉에게 주신 자신의 꿈을 이루고 계신다.
 
-요셉이 총리에 오른다. 야곱의 채색 옷이 총리의 ‘세마포 옷'(42절)으로 바뀐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에 총리에 오를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은 그와 동행하시면서 친히 이 계획을 이루셨다. 형제들의 시기심과 보디발 아내의 빗나간 욕정과 술 맡은 관원의 망각마저 모두 선하게 사용하셨다. 요셉은 애굽뿐 아니라 온 지면에 닥친 기근 때문에 각국에서 곡식을 구하러 온 백성을 구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으리라던 약속(창 12:3)이 성취되고 있었다.
 
-애굽 왕 바로는 꿈 앞에서 쩔쩔매고 근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한다(“모든”이라는 표현이 무려 11회 사용된다). 요셉의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완전한 통치자시다.
 
 
*요셉이 이처럼 애굽 온 나라를 책임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정직하며, 거룩하게 살았다. 또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 애굽 왕도 요셉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형편,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가?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여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영화를 얻는다. 하지만 권력도, 돈도 명예도 그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맡기신 것일 뿐 요셉의 영달이나 누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전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한 것처럼 총리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최선을 다해 이룰 뿐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영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곱 해 풍년 동안 많은 양식을 저장한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하는 일관된 믿음을 배워햐 알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믿음(신앙고백)을 담은 듯하다. 므낫세는 ‘잊는다’는 뜻으로 지난 모든 아픔을 그 아픔의 시발점인 아버지 집의 일과 함께 다 잊기로 했다. 에브라임은 ‘두 배의 과일’이라는 뜻이다. 고난보다 큰 복을 주셨음을 고백한 것이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고난을 잘 이겨낸 것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뿐 아니라 나중에 형들의 잘못을 용서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믿음 더욱 내 안에서 굳세라.
 
 
 
*주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과 지혜로 맡은 일들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한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임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겸손과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