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 [이사야 11장 1-16절]
– 2026년 07월 30일
– 2026년 07월 30일 –
오늘의 본문은 앞선 10장에 앗수르의 심판 속에서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와 대조되면서 멸망한 것만 같았던 다윗 왕조 속에서 소망의 새싹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조명하고 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 기도제목
* 주님 오늘도 주님께 다 맡기는 삶이 되게 하소서.
*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하소서.
* 내 판단과 내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소서.
*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게 하소서.
* 내 판단과 내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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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1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 13:1-22]
이사야 13장부터는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다. 아마도 이 심판의 내용들은, 당시 그 나라들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보여지며, 나아가 온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가 의지해야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며, 강대국 의존정치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다. 13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14:1-23에서는 바벨론 왕에 대한 애가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군대의 소집 (1-5)
1절에 ‘경고’는 곧 이제부터 나올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의미한다. 2-3절은 하나님이, 4-5절은 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군대가 점차 다가오는 모습과 소환되는 과정을 묘사한다.(2절) 여호와의 전쟁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하나님의 용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할 것이다.(3절) 예언자는 화자로 등장하여, 도착한 수많은 군대의 소리를 묘사한다.(4절) 하나님의 징집 명령에 응답하여, ‘진노의 병기’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하는 도구이다.
2.놀람과 애곡 (6-8)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탄식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곧 그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였음을 의미한다.(6절)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은 힘이 풀리고, 놀라며, 해산이 임박한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된다.(7-8절)
3.여호와의 날 선포(9-16) 여호와의 날이 선포됨에 따라, 그 땅이 황폐해진다.(9절)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10절) 세상의 악과 교만한 자의 오만,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신다.(11절)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극히 일부가 살아남을 묘사한다. (12절) 13-16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더욱 상세히 묘사한다. 그 분의 진노 속에 하늘은 진동하며, 심판의 대상은 본향으로 도망하지만, 만나는 자마다 창과 칼에 엎드려진다. 아이들, 집, 아내까지 모두가 진멸됨을 말한다. (16절)
4.심판의 도구, 메대 사람들(17-22)
하나님께서는 메대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 페르시아의 고레스2세는 원래 메대 제국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메대의 수도를 정복한다. 이후 메대, 페르시아의 연합군은, B.C.539년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며, 그 죄악의 심각함을 말하고 있다. 화려했던 모든 자리들은, 야생동물의 거처로 전락하며, 이처럼 단기간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나는?
-당시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강대국을 향하여 이같은 예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바벨론 입장에서는 우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크고, 강력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오늘의 삶속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본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진정 믿는 사람에게는 오늘을 살아갈 소망과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1. 하나님의 군대의 소집 (1-5)
1절에 ‘경고’는 곧 이제부터 나올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의미한다. 2-3절은 하나님이, 4-5절은 예언자가 화자로 등장한다. 군대가 점차 다가오는 모습과 소환되는 과정을 묘사한다.(2절) 여호와의 전쟁에서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하나님의 용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할 것이다.(3절) 예언자는 화자로 등장하여, 도착한 수많은 군대의 소리를 묘사한다.(4절) 하나님의 징집 명령에 응답하여, ‘진노의 병기’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전하는 도구이다.
2.놀람과 애곡 (6-8)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탄식을 말한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곧 그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였음을 의미한다.(6절)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은 힘이 풀리고, 놀라며, 해산이 임박한 것처럼 고통을 느끼게 된다.(7-8절)
3.여호와의 날 선포(9-16) 여호와의 날이 선포됨에 따라, 그 땅이 황폐해진다.(9절) 별과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며(10절) 세상의 악과 교만한 자의 오만,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신다.(11절)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극히 일부가 살아남을 묘사한다. (12절) 13-16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더욱 상세히 묘사한다. 그 분의 진노 속에 하늘은 진동하며, 심판의 대상은 본향으로 도망하지만, 만나는 자마다 창과 칼에 엎드려진다. 아이들, 집, 아내까지 모두가 진멸됨을 말한다. (16절)
4.심판의 도구, 메대 사람들(17-22)
하나님께서는 메대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신다. 페르시아의 고레스2세는 원래 메대 제국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었으나, 반란을 일으켜 메대의 수도를 정복한다. 이후 메대, 페르시아의 연합군은, B.C.539년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바벨론은,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며, 그 죄악의 심각함을 말하고 있다. 화려했던 모든 자리들은, 야생동물의 거처로 전락하며, 이처럼 단기간에 멸망하게될 것이다.
나는?
-당시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강대국을 향하여 이같은 예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바벨론 입장에서는 우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아무리 크고, 강력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오늘의 삶속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본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진정 믿는 사람에게는 오늘을 살아갈 소망과 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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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31일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한다!
[이사야 12:1-6]
이사야 1~10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사야 11장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시며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감격이 이사야 12장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터져 나온다.
본문은 “그 날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 “그 날”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날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고 회복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심판받던 백성이 이제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된다.
1절에서는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개인의 감사가 나타나고, 4절에서는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공동체의 찬양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은혜이며, 나아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다.
1.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1~3절)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백성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 징계하시지만 사랑으로 다시 품으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위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의 감사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2~3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을 고백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노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또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누리는 생명의 은혜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된다.
2. 구원받은 성도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높인다(4절)
4절부터는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선포해야 하는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이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한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한다(5~6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온 땅에 알리라고 선포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는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으며,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가 넘치고, 감사하는 사람은 찬양하게 되며, 찬양하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가?
어려움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나의 힘과 구원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족과 이웃,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끝까지 품으셨다. 성도의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신다.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영혼의 새 힘을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높이는 공동체이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감사에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그 날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 “그 날”은 메시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날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고 회복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심판받던 백성이 이제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게 된다.
1절에서는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개인의 감사가 나타나고, 4절에서는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이라고 하며 공동체의 찬양으로 확대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함께 누리는 은혜이며, 나아가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복음이다.
1.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1~3절)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백성들을 징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 징계하시지만 사랑으로 다시 품으시는 분이시다.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고 위로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위로는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의 감사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2~3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믿음을 고백한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우리의 노래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신다. 또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누리는 생명의 은혜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새 힘을 얻게 된다.
2. 구원받은 성도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높인다(4절)
4절부터는 개인의 찬양이 공동체의 찬양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선포해야 하는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리이며, 교회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한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한다(5~6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온 땅에 알리라고 선포한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가장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는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으며,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가 넘치고, 감사하는 사람은 찬양하게 되며, 찬양하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나는 환경이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아니면 변하지 않는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가?
어려움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나의 힘과 구원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족과 이웃,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끝까지 품으셨다. 성도의 감사는 환경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 되신다.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영혼의 새 힘을 얻는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높이는 공동체이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감사에서 멈추지 않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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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30일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
[이사야 11장 1-16절]
오늘의 본문은 앞선 10장에 앗수르의 심판 속에서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와 대조되면서 멸망한 것만 같았던 다윗 왕조 속에서 소망의 새싹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조명하고 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함 (1절)
여기에서 등장하는 줄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자라는 단어로 나무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다윗 왕조는 이미 다 썰린 나무처럼 멸망해버린 것만 같았지만 그 그루터기에서 한 생명이 시작됨을 보여준다.
2. 생명이신 예수님(2-5절)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한 싹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며 초기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구절이기도 한다 (삼하 7:1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가지 영이 강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여 이 세상을 완전하고 온전히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3. 온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는 예수님 (6-9절)
6절부터 9절까지는 파괴되어 있던 온 피조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살 수 있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상함도 없음을 나타내며 완전하신 예수님의 통치로 인하여 자연피조만물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말하고 있다.
4. 열방에도 전파되는 복음 (10-16절)
10절에서 12절까지 이방 민족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15-16절을 통하여 출애굽시대에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들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모이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나는?
–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과 연합된 삶임을 기억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날로 더해지길 소망하며
물이 바다 덮음같이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길 소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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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9일
진노 가운데서 보이시는 사랑, 남은 자
[이사야 10:20-34]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BC8세기 후반-7세기 초)는 중동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강력한 제국이었던 앗수르가 팽창하던 때였다. 유대땅은 앗수르와 아람, 애굽 등의 눈치를 보며 어느 쪽으로 붙어야 살 수 있을지 정치적으로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며 작금의 상황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임을 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 가운데 10장은 앗수르가 팽창하고 있는 사실, 그로 인해 교만한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신다. 모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했던 앗수르, 이후 바벨론과 페르시아 역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는 나라와 왕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맛봐야 했다.
20-23절은 남은 자에 대한 것을, 24-27절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멸하실 것을 예언하며 28-34절은 침략할 앗수르와 그 앗수르를 꺾으실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20-23절은 ‘남은 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남은 자는 수많은 백성이 줄어 소수만 남을 것을 예고하는 심판의 언어이자 아무리 죄많은 백성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가진 자들을 보호하시고 남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언어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친히 남겨두신 백성을 의미한다.
[사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인간의 의로움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는 것을 말씀한다. 이 남은 자는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 ‘스알야숩(7:3)’이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의미인 것처럼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을 행하실 것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 새순이 돋듯 나라가 망하는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맥을 끊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어서 나타나는 11장 1절의 말씀에서도 이 그루터기와 남은 자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아와 그분 안에 거하는 구원받은 백성,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와 전혀 상관 없을 거 같던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신실하게 이루셨다.
구약에서 남은 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여호와 신앙을 지킨 소수의 무리, 그들도 이후 다시 타락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던 극소수의 무리로 이어지며 이후 신약에서는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인용하며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롬 11:5)가 참 이스라엘이고 교회임을 말한다.
우리가 그 ‘남은 자’인 것이다.
24-27절은 앗수를 두려워하지 말 것에 대해, 28-34절은 앗수의 예루살렘 침공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한다.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정치적 상황이나 다른 수많은 조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하나님은 역사 속의 승리를 떠올리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과 동시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삶에서도 믿음과 경험중 믿음이 먼저지만, 당연히 우리의 믿음은 경험으로 증명이 된다. 우리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험이 믿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도 그것이다.
33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결국 앗수르를 꺾으실 것이다. 꺾기 전에 앗수르는 예루살렘 바로 앞 놉까지 밀고 들어와 위협할 것이다.
이상하게 하나님은 위협을 먼저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까지 함께 살펴보면 주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뺏기고 다른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고 엎드렸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 백성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신다. 남은 자를 만드신다. 그루터기를 만드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결국 열매를 맺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이 가운데 10장은 앗수르가 팽창하고 있는 사실, 그로 인해 교만한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신다. 모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했던 앗수르, 이후 바벨론과 페르시아 역사 안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는 나라와 왕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맛봐야 했다.
20-23절은 남은 자에 대한 것을, 24-27절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멸하실 것을 예언하며 28-34절은 침략할 앗수르와 그 앗수르를 꺾으실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20-23절은 ‘남은 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남은 자는 수많은 백성이 줄어 소수만 남을 것을 예고하는 심판의 언어이자 아무리 죄많은 백성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가진 자들을 보호하시고 남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언어다.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친히 남겨두신 백성을 의미한다.
[사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인간의 의로움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는 것을 말씀한다. 이 남은 자는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 ‘스알야숩(7:3)’이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의미인 것처럼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과 회복을 행하실 것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 새순이 돋듯 나라가 망하는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맥을 끊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어서 나타나는 11장 1절의 말씀에서도 이 그루터기와 남은 자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아와 그분 안에 거하는 구원받은 백성,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와 전혀 상관 없을 거 같던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신실하게 이루셨다.
구약에서 남은 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여호와 신앙을 지킨 소수의 무리, 그들도 이후 다시 타락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던 극소수의 무리로 이어지며 이후 신약에서는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인용하며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롬 11:5)가 참 이스라엘이고 교회임을 말한다.
우리가 그 ‘남은 자’인 것이다.
24-27절은 앗수를 두려워하지 말 것에 대해, 28-34절은 앗수의 예루살렘 침공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 한다.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정치적 상황이나 다른 수많은 조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하나님은 역사 속의 승리를 떠올리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과 동시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삶에서도 믿음과 경험중 믿음이 먼저지만, 당연히 우리의 믿음은 경험으로 증명이 된다. 우리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경험이 믿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도 그것이다.
33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하나님은 결국 앗수르를 꺾으실 것이다. 꺾기 전에 앗수르는 예루살렘 바로 앞 놉까지 밀고 들어와 위협할 것이다.
이상하게 하나님은 위협을 먼저 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까지 함께 살펴보면 주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마음을 뺏기고 다른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고 엎드렸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 백성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신다. 남은 자를 만드신다. 그루터기를 만드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결국 열매를 맺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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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8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는 교만할 수 없다!
[이사야 10:5-19]
이사야 10장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향해 심판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당시 앗수르는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최강의 제국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와 불순종에 빠진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앗수르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군사력과 지혜로 모든 나라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였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 “내 분노의 몽둥이”라고 부르신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손에 들려 쓰이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돌이킴이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사랑의 징계였다.
그러나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신의 야망을 따라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키려 했고, 모든 승리를 자신의 힘과 지혜의 결과라고 자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마치신 후 오히려 교만한 앗수르를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도구를 사용하시지만, 도구가 주인이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직분과 은사, 재물과 건강, 사역의 열매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앗수르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끝까지 사용하신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신다(5~7절)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와 “내 분노의 몽둥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징계의 목적은 백성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6절에서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을 탈취하고 노략하며 짓밟게 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7절을 보면 앗수르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더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멸망시키려는 욕심만 가득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면 교만에 빠진다(8~15절)
앗수르 왕은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고 말하며 자신의 권세를 자랑한다. 또한 자신이 정복한 여러 도시를 나열하며 모든 나라가 자신의 힘 앞에서는 동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자신의 군사력과 지혜의 결과라고 여겼다.
특히 13~14절에서는 “내 손”, “내 지혜”, “내가”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린다. 그는 열국의 재물을 빼앗은 것도, 국경을 옮긴 것도, 아무도 자신을 막지 못한 것도 모두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강력한 비유를 사용하신다.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랑하겠느냐? 톱이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보다 앞설 수 없다. 도끼가 나무를 베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끼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사역도, 건강도, 재물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다. “내가 했다”는 고백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남게 된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세우신다(16~19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마치신 후 교만한 앗수르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화를 불태우시고, 살진 자를 쇠약하게 하시며, 숲과 기름진 밭을 모두 소멸시키신다. 한때 세상을 두렵게 만들었던 강대국도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19절은 심판의 결과를 보여준다. 숲에 남은 나무가 너무 적어서 어린아이도 셀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것은 앗수르의 철저한 몰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높아진 자를 낮추시고 자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를 결코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남은 것을 허락하신다. 완전한 진멸이 아니라 남은 자를 통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도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이며, 동시에 회복을 위한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시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나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는가, 아니면 내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아니면 내 계획과 욕심을 앞세우는가?
내 입술에는 “내가 했다”는 말이 많은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감사가 많은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손에 들린 도구임을 기억하며 늘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은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 강대국까지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앗수르는 사용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했다.
*”내가 했다”는 고백이 많아질수록 교만은 시작된다. 모든 은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시다.
*도끼가 찍는 자를 자랑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기뻐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 “내 분노의 몽둥이”라고 부르신다. 막대기와 몽둥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손에 들려 쓰이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돌이킴이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사랑의 징계였다.
그러나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신의 야망을 따라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키려 했고, 모든 승리를 자신의 힘과 지혜의 결과라고 자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마치신 후 오히려 교만한 앗수르를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도구를 사용하시지만, 도구가 주인이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직분과 은사, 재물과 건강, 사역의 열매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앗수르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끝까지 사용하신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신다(5~7절)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와 “내 분노의 몽둥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시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징계의 목적은 백성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른 길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6절에서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을 탈취하고 노략하며 짓밟게 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7절을 보면 앗수르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더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멸망시키려는 욕심만 가득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면 교만에 빠진다(8~15절)
앗수르 왕은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고 말하며 자신의 권세를 자랑한다. 또한 자신이 정복한 여러 도시를 나열하며 모든 나라가 자신의 힘 앞에서는 동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자신의 군사력과 지혜의 결과라고 여겼다.
특히 13~14절에서는 “내 손”, “내 지혜”, “내가”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린다. 그는 열국의 재물을 빼앗은 것도, 국경을 옮긴 것도, 아무도 자신을 막지 못한 것도 모두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강력한 비유를 사용하신다.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랑하겠느냐? 톱이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보다 앞설 수 없다. 도끼가 나무를 베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끼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사역도, 건강도, 재물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다. “내가 했다”는 고백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남게 된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세우신다(16~19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마치신 후 교만한 앗수르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영화를 불태우시고, 살진 자를 쇠약하게 하시며, 숲과 기름진 밭을 모두 소멸시키신다. 한때 세상을 두렵게 만들었던 강대국도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19절은 심판의 결과를 보여준다. 숲에 남은 나무가 너무 적어서 어린아이도 셀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것은 앗수르의 철저한 몰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높아진 자를 낮추시고 자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를 결코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남은 것을 허락하신다. 완전한 진멸이 아니라 남은 자를 통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도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이며, 동시에 회복을 위한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시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나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는가, 아니면 내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아니면 내 계획과 욕심을 앞세우는가?
내 입술에는 “내가 했다”는 말이 많은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감사가 많은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손에 들린 도구임을 기억하며 늘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
*하나님은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과 강대국까지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앗수르는 사용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알지 못했다.
*”내가 했다”는 고백이 많아질수록 교만은 시작된다. 모든 은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시다.
*도끼가 찍는 자를 자랑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을 기뻐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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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27일
교만과 심판
[이사야 9:8-10:4]
이사야 9:1-7까지는 흑암에 비치는 빛과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8절부터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함을 잃고, 교만하고 완악함 가운데 있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며 결국 공동체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본문은 ‘그럴지라도 ~ 펴져 있으리라’(12, 17, 21, 10:4) 의 반복을 통해 점점 심각해지는 심판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1. 교만함과 완악함 (8~12)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말씀을 보내신다. 하나님을 떠나는 교만과 불신앙의 순간 때마다,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변치 않고 말씀하셨다. 교만은, ‘다 알면서도 불순종하며 대체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앎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다.(9절) 벽돌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으로 대신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끝까지 붙잡고 있음을 보여준다.(10절) 르신의 대적들(앗수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짐)과 아람과 블레셋 등 온갖 이방의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삼킨다. 그리고 여호와의 진노는 계속된다.
2.미혹된 가르침 (13~17)
이같은 심각한 심판의 상황 속에서도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임에도, 그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백성을 미혹하기에, 이들은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된다. 백성들 전체가 경건치 않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여, 장정도 고아와 과부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3.내부적 분열 (18-21)
여호와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은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람은 서로 자기의 형제일지라도 아끼지 않고,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음과 같이 므낫세-에브라임을 서로 먹고 먹힌다. 심지어, 그리고 이들이 합세하여 유다를 치는 서로가 함께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서로 하나인 공동체가 먹고 먹히며 더 깊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
4.불의한 법령(10:1-4)
가장 심각한 상태는, 합법화된 악함이다. 이 때 가장 고난을 받는 자들은 약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의 판결, 권리, 과부에게 토색, 고아의 것을 약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악함을 그대로 보실 수가 없으시고, 벌하시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언자는 말한다.(3절) 이제 더 이상의 도움은 없다. 완전히 황폐해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약자를 외면하며 버려지기에,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이 가운데 계속된다.
나는?
-교만, 완악함 : 북이스라엘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말씀 앞에 엎드리지 않는 것. 오늘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그 분 앞에 엎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시 그 분께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에 가난함, 절박함을 회복하고 주 앞에 오늘 순전히 서 있기를 원한다.
-깨어진 세상 : 하나님을 떠나 깨어진 세상의 모습이 이와 같다. 이스라엘의 심판과 파국의 상황 속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심지어 유다까지 치며, 서로가 함께 멸망의 길로 나아간다. 불의한 법령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깨어진 세상의 모습에 대한 분명한 모습이다. 특히, 물질이 전부인 세상이 되며, 서로에 대해 무자비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사회의 모습임을 생각한다. 이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시대를 분별하며 중보해야겠다.
1. 교만함과 완악함 (8~12)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말씀을 보내신다. 하나님을 떠나는 교만과 불신앙의 순간 때마다,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변치 않고 말씀하셨다. 교만은, ‘다 알면서도 불순종하며 대체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앎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다.(9절) 벽돌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으로 대신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끝까지 붙잡고 있음을 보여준다.(10절) 르신의 대적들(앗수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짐)과 아람과 블레셋 등 온갖 이방의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삼킨다. 그리고 여호와의 진노는 계속된다.
2.미혹된 가르침 (13~17)
이같은 심각한 심판의 상황 속에서도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임에도, 그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백성을 미혹하기에, 이들은 모두 멸망을 당하게 된다. 백성들 전체가 경건치 않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여, 장정도 고아와 과부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3.내부적 분열 (18-21)
여호와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은 불에 타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람은 서로 자기의 형제일지라도 아끼지 않고,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음과 같이 므낫세-에브라임을 서로 먹고 먹힌다. 심지어, 그리고 이들이 합세하여 유다를 치는 서로가 함께 멸망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서로 하나인 공동체가 먹고 먹히며 더 깊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
4.불의한 법령(10:1-4)
가장 심각한 상태는, 합법화된 악함이다. 이 때 가장 고난을 받는 자들은 약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의 판결, 권리, 과부에게 토색, 고아의 것을 약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악함을 그대로 보실 수가 없으시고, 벌하시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언자는 말한다.(3절) 이제 더 이상의 도움은 없다. 완전히 황폐해진 이스라엘 공동체는 약자를 외면하며 버려지기에,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이 가운데 계속된다.
나는?
-교만, 완악함 : 북이스라엘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 말씀 앞에 엎드리지 않는 것. 오늘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그 분 앞에 엎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시 그 분께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에 가난함, 절박함을 회복하고 주 앞에 오늘 순전히 서 있기를 원한다.
-깨어진 세상 : 하나님을 떠나 깨어진 세상의 모습이 이와 같다. 이스라엘의 심판과 파국의 상황 속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심지어 유다까지 치며, 서로가 함께 멸망의 길로 나아간다. 불의한 법령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가장 깨어진 세상의 모습에 대한 분명한 모습이다. 특히, 물질이 전부인 세상이 되며, 서로에 대해 무자비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사회의 모습임을 생각한다. 이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시대를 분별하며 중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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